클래식

베토벤 교향곡 7번 Op.92 - Bernard Haitink - London Symphony Orchestra

리차드 강 2015. 4. 1. 04:59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베토벤 교향곡 7번 Op.92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1. Poco sostenuto vivace ~ 2. 3. 4 전악장

 

Bernard Haitink - London Symphony Orchestra - Live

     

작품 구성 및 해설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작곡 : 1806~13년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13년 4월20일에 루돌프 대공의 사택에서 이루어짐. 공개 초연은 1813년 12월 8일 비엔나 대학 강당에서 열린 전쟁 부상병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16년 / 헌정 : 프리스 백작 / 연주시간 : 약 40분

작품 개설

이 곡의 단편적인 스케치는 1806년경의 노트에서 발견된다. 바로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나 {교향곡 4번}과 같은 시기이다. 그러나 베토벤이 그 주제의 단편을 과연 교향곡에 사용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1811년 가을부터이며 이듬해 5월13일 완성되었다. 앞의 {교향곡 6번} 이후 3년 이상 교향곡으로부터 멀어진 셈이 된다.

이 3년 사이에 베토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먼저 가장 커다란 타격은 전쟁에 의한 난리였다.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전쟁 상태에 들어가며 5월12일 나폴레옹 군대가 비엔나를 침입한다.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비엔나에서 도피하며, 베토벤은 재정적인 후원도 받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창작도 생각만큼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앓고 있던 귀를 포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하실에서 귀에 베개를 대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1809년 10월 전쟁이 끝나고, 11월에 프랑스군은 퇴각한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된다. 게다가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귀족들이 비엔나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얼마 후 이 시기의 심경을 반영한 피아노 소나타 {고별}이 작곡되었다.

이 피아노 소나타 작곡을 계기로, 아울러 전쟁이 끝나면서 베토벤의 창작력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공백 기간을 메워 나갔다. 그리고 기분도 차분해지고 건강 상태도 얼마간 좋아지며,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1809년 무렵부터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과 알게 된다. {고별} 직전에 쓰여진 작품 78의 소나타를 헌정한 브룬스비크 백작의 딸 테레제와는 다른 이 테레제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베토벤으로서는 테레제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현악 4중주곡 내림 마 장조 작품 74 {하프}에 나타나는 밝은 악상은 테레제라는 여인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1810년 4월에 테레제를 위해 썼다는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가 작곡되며, 5월에 테레제를 위한 작품 83의 두 가곡, 즉 첫 곡 {슬픔과 기쁨}과 둘째곡 {그리움}이 작곡된다. 그 외에 군악대용 음악을 쓴 것을 보면 베토벤은 한편으로는 사회정서를 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테레제에 대한 기분을 어떻게든 음악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6월의 {에그몬트}를 위한 음악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을 연결하는 음악으로 볼 수 있다. 여름의 현악 4중주곡 작품 95 {세리오소}는 18살의 여인과 40살 가까운 남자의 결혼이 실현 불가능해지고 그에 따라 극히 내면적이며 심각한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이 사랑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1811년에는 나폴레옹은 절정을 과시하고 있었으나 베토벤은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로부터 그녀의 상반신 초상화를 선물받고 실연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보물처럼 여겨 방에 걸어놓고 평생 소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는 건강도 좋지 않아 테레제와 그의 남동생이자 베토벤과도 친했던 프란츠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1811년 여름, 베토벤은 휴양을 위해 경치가 좋은 온천지 테플리츠에 간다. 그 곳에서 아말리에 제바르트라는 가수와 재회하여 친절한 대접을 받게 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곳이 마음에 들어 이듬해에도 다시 방문하여 제바르트의 신세를 지게 된다.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의 기분은 테플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전의 스케치를 다시 끄집어내 작곡을 시작한다. {교향곡 7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1811~12년에는 거의 밝은 장조 곡만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곡은 또한 당연히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향곡 7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1811~12년에는 거의 밝은 장조 곡만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곡은 또한 당연히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향곡 7번}은 디오니소스적인 즐거움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리듬도 명쾌하며, 이 리듬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 때문에 바그너는 이 곡을 {춤의 성화(聖化)}라고 불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에 의한 주장의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이것은 3번, 5번 교향곡의 특징과 함께 이 무렵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귓병 때문에 생긴 절망감을 떨치고 {교향곡 3번}을 쓰고, 바깥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교향곡 5번}을 썼던 것과 비슷하다. 즉 전쟁과 실연으로부터의 정신적인 극복과 큰 관계가 있다. 이런 역할을 한 것이 주제의 수평적인 진행인데, 1악장의 1주제, 2악장의 주요 주제들, 혹은 4악장의 1주제 등에 이것이 사용되고 있으며, 리듬 효과도 지극히 추진적인 느낌을 지닌다. 그리고 이런 진행이 전곡을 통일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공개 초연 때에는 {전쟁 교향곡(art : 웰링턴의 승리, 작품 91)}도 함께 연주되었다. 애국적인 분위기도 고양되어 있을 때였기에 이 두 곡은 대성공을 거두며 {교향곡 7번}은 2악장이 앙코르로 연주되었다.

     

     

작품개요 및 배경

이 곡은 1811년 가을부터 작곡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5월 완성되었다. 그 전 교향곡인 6번(1808년 완성) 작곡 이후 3년 이상 교향곡 작곡에서 멀어져 있던 셈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변화를 겪게 된다. 먼저 1809년 5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이 빈을 피해 도망을 가 베토벤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창작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해 11월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가 다시금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1809년 무렵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을 알게 된다. 1810년 베토벤은 테레제를 위해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 하였는데, 이 둘의 관계는 20살이 넘는 나이차이 등으로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811년에 접어들어 베토벤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위해 온천이 있는 테프리츠로 간다. 이 곳에서 안정을 되찾은 베토벤은 다음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은 테프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교향곡 7번 작곡에 반영되었다. 사실 1811-1812년의 작품은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밝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작곡과 초연

베토벤 교향곡 제7번 in A major Op.92

리스트는 이 작품을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 바그너는 "무용의 성화"라고 했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리듬에 상당한 비중을 둔 작품이며, 디오니시스적인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작품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스케치 북에 의하면 제 7번 교향곡은 늦어도 1811년에 착수된 듯하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12년에 들어와서 부터라고 전해진다. 제 2악장의 스케치는 이보다 앞선 1806년 현악사중주 작품 59-3의 작곡 중에 발견된다는데 아마도 처음엔 이 현악사중주에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 곡의 완성은 1812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이 라고 적혀있는데 몇 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리된다. 베토벤은 1813년 2월에 공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비공개의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8번 교향곡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메트로놈을 발명한 멜첼이 주최한 <하나우 전쟁 상이 용사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공개초연되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위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빅토리아 회전과 웰링턴의 승리> op. 91과 교향곡 8번 op. 93도 같이 초연 되었다.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교향곡 7번보다 <전쟁 교향곡>이 더 큰 인기를 받긴 했지만 7번도 대호평이었으며 선율이 아름다운 제 2악장은 앙콜을 받기까지 했다.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7이 너무 인기가 높아서 결국 4일 뒤인 12월 12일에 재연되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으며 그 때마다 제 2악장은 앙콜되었다고 한다. 초연부터 대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곡의 대중성을 그대로 들어 내보이는 것으로 한번만 들어도 귀에 곧 익숙해지는 악상 (2악장)과 함께 베토벤 특유의 넘치는 위트 (3악장)와 무엇보다도 광란에 넘치는 1악장과 4악장의 매력이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자극적이고 광란에 넘치며 흥분시키는 베토벤 교향곡 7번..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 하겠지만 교향곡 7번은 베토벤 교향곡을 하나만 꼽으라는 설문조사에서 높은 득표를 보일 만큼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베토벤은 일찌기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술의 신)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해준다"라 고 했다 하는데 그의 수많은 걸작 중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그의 7번 교향곡이다. 정말로 곡을 듣고 있노라면 예외 없이 사람을 흥분 시키고 또한 술에 취했을 때마냥 용기에 넘치는 힘을 느끼게 해주는 불가사의한 곡이다. 이 곡의 1, 4악장을 가리켜 베토벤이 술에 취해서 작곡된 것이 아닌가 하고 훗날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비꼬았다고 하는 데 이는 '술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이 틀리듯이 어리석은 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을 돌리면 건강한 취기를 용납할 수 없는 앞뒤로 꽉 막힌 분이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예측은 가능하다.

리스트가 이 곡을 가리켜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 교향곡 7번에 대해 바그너는 [춤의 성화(聖化)]라고 하면서 밝고 명쾌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의 주장에 대한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교향곡 3번이 귓병에 대한 절망을 떨치고, 5번이 바깥 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작곡하였다면, 7번은 전쟁과 실연을 극복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구성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소나타 형식. 포코 소스테누토의 서주는 주요부의 주제로 발전시키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주요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충실하고 당당하게 곡의 성격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어지는 주요부는 물론 소나타 형식이다. 기본 리듬에 이어 분명한 리듬의 1주제가 나온 후, 경쾌한 2주제가 나타난다. 발전부는 매우 대위법적이다. 재현부에 이어지는 코다는 바소 오스티나토를 동반하며 마찬가지로 전개풍이다.

전곡 중 가장 훌륭한 악장은 1악장이다. 현대악기를 쓴 음반으로는 단연 최고의 연주라 하겠다. 도입부의 첫 f들은 베를린 필 특유의 고급스런 울림의 팀파니를 바탕으로 트럼펫이 또렷히 들린다. 뒤이은 호른의 부드러운 울림도 잘 살아나서 시작부터 최고의 품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첫 ff에선 트럼펫의 강인하게 길게 내지르는 소리가 전체 관현악을 압도한다. 이런 흥분된 트럼펫을 이렇게 일찍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녹음의 묘미다. 이와 함께 분주히 움직이는 화려한 현, 또렷한 플룻, 알맞은 크기의 단단한 팀파니는 곡의 분위기를 일찌감치 한껏 흥분된 것으로 만든다. 뒤이은 34번째마디 이후의 sf들은 악보대로 트럼펫이 뚜렷이 감지되는데 그 화려한 음색과 절묘한 음량은 다른 음반들과 확실한 비교우위에 있다. 이후 제시부까지 템포를 조금 서두르는 감이 있는 게 유일한 단점인데 이를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제시부의 89번째 마디 역시 호른과 트럼펫이 좌우로 분리되서 힘차게 나아가고 있으며 뒤이은 작은 리듬들도 트럼펫이 놓치지 않고 절묘한 밸런스로 살려낸다. 제 2주제의 겹8분음표의 리듬은 현과 호른으로 처리되는 것이 옥의 티라고 하겠는데 뒤이은 종결부의 극히 화려한 투티는 모든 불만을 잊게 한다.

전개부가 되면 베를린 필의 장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호른과 트럼펫이 ff로 주고 받는 부분은 두 악기가 대등하게 처리되어 있고 뒤이은 팀파니의 울림은 단단하면서도 밝은 회색빛으로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베를린 필만의 고급스러움을 한껏 품고 있다. 호른의 무시무시한 크리센도 후에 맞게 되는 전개부의 클라이막스는 비교 음반들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특히 트럼펫의 자신만만한 내지름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제 2악장 Allegretto

자유로운 3부 형식. 리드미컬하지만 그 안에 끊임없는 서정성이 흐르고 있다. 1부의 대위선율을 수반한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은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 든다. 2부(가 장조 2/4)는 밝아지며, 행복감을 안겨준다. 3부는 1부를 변주시키는 듯하며 푸가토도 두고 있다. 이 악장은 구성의 윤곽면에서 {교향곡 3번}의 "장송 행진곡"과 비슷하다.

2악장 처음의 목관과 호른에 의해 f후 급격히 p로 잦아드는 부분은 f에서의 울림이 이상하리만큼 약하다는 것은 큰 단점으로 생각된다. 뒤이은 비올라와 첼로, 베이스가 처음 등장하는 곳의 어색함은 여전히 이 음반에서도 남아있다. 현의 스타카토가 뚜렷하지 않아서 흔히 2악장에서 기대하는 분위기가 잘 살아나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곧이은 주제선율을 바이올린이 노래하면서부터는 베를린 필의 바이올린을 음색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해서 조금씩 크리센도 되어 ff가 될 때까지 청자를 잡아 끄는 집중력이 대단하다. 뒤이은 ff에서는 호른의 장쾌한 울림과 함께 팀파니와 트럼펫의 반주가 호른사이사이로 또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흔히 만나보기 힘든 장점이다. 제 2주제부의 호른의 소리도 극히 고급스러운 것이다. 이런 류의 울림은 북 독일 오케스트라들의 공통된 호른소리로 장대하고 강인한 맛이 빈의 오케스트라보다 더 강하다. 제 2주제를 마무리 짓는 ff도 화려한 저현과 또렷한 금관으로 깔끔하게 처리되어서 이부분 역시 매우 훌륭하다. 제 1주제의 재현부는 특히 현에 의한 푸가토 부분을 듣는 재미가 좋다. 베를린 필의 바이올린 파트는 이 음반에서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지 않고 부드럽지만 화려한 음색을 맘껏 뽐내는 스타일이다. 제 2주제의 재현부의 끝에 등장하는 목관 및 호른의 ff와 이를 받는 트럼펫-팀파니의 f는 트럼펫보다는 팀파니가 강조되어 있긴 하다.

 

제 3악장 Presto

스케르초에 해당하는데, 이렇게 가 장조 곡에서 바 장조 스케르초가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또한 트리오(라 장조인 것도 이례적이다. 아사이 메노 프레스토)가 두 번 나온다({교향곡 4번}의 스케르초와 같다). 이 트리오에서는 밝고 따스하며 민요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선율은 오스트리아 지방의 순례의 노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스케르초에서는 강약 대비나 쉼표, 또는 스타카토를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91번째 마디에서는 트럼펫의 존재가 또렷이 감지되고 이 장점은 재현부인 351번째 마디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이미 지적한 템포 때문에 그 반가움은 반감된다. 많은 음반들이 다른 악장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트리오에서 음량을 지나치게 키웠던 것과는 달리 - 아마도 이 부분이 금관의 테크닉이 쉬운 모양이다 - 트리오의 클라이막스는 상대적으로 조금 절제되어 있다.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소나타 형식. 힘찬 화음에 이어 1주제가 연주되는데, 러시아 민요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베토벤은 {라주모프스키 현악 4중주}를 작곡하기 이전에 러시아 민요집을 갖고 있었다. 2주제는 약동적이며 유머러스하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의 전개로 이루어지고, 재현부는 내림 나 장조로 1주제가 재현되고 곧 바 장조로 바뀌어 2주제가 첼로로 재현된다. 이어지는 코다는 전개풍으로 장대하다.

카라얀의 4악장은 베토벤 7번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꼭 들어봐야 할 연주라고 생각한다. 특히 클라이버의 음반을 좋아하시는 분께는 베토벤이 악보에서 의도했던 바는 바로 이런 4악장입니다라고 제일 먼저 들려주고 싶은 연주이기도 하다. 마치 콩쿨대회에서 1등은 틀리지 않고 해낸 사람이 2등은 조금 틀렸지만 해석이 훌륭한 사람이 차지하듯이 테크닉면에서 번스타인/빈 필보다 간발의 차이로 쳐져서 비록 베스트에 꼽히지 못했지만 4악장 자체의 해석은 가장 훌륭하다. 카라얀의 4악장은 비교음반 중 가장 흥분되어 있고 가장 파워풀하다.

자신의 음악적인 적들에게 여기 내가 간다!라고 분노에 찬 외침과 욕설을 퍼붓듯이 제시부 직전의 두 번의 걸친 ff의 울림은 비교음반 중 최고의 음량을 가진 트럼펫의 또렷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무시무시하리 만큼 강조되어있다. 뒤이은 sf들에서도 트럼펫은 또렷하게 팀파니와 같이 진행하고 첫번째 4악장의 주제 리듬은 아쉽게도 호른이 주가 되지만 도돌이표에 의한 두번째 울림부터는 트럼펫이 처리하고 있고 이어지는 그 리듬의 반복에선 트럼펫이 완벽하게 불러낸다. 제 2주제도 f부분이 강조되면서 앞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결부로 넘어가면 예의 그 트럼펫은 기가 한풀 꺽여서 강렬함이 많이 수그러들어 버린다.

전개부의 시작도 조금 약하지만 곧이어 sf에서는 트럼펫과 팀파니가 화려한 울림을 유감없이 들려주고 카라얀이 택한 쑤셔 박는 듯한 빠른 템포가 이런 화려함에 보태지면서 질주하는 듯한 스피드감을 한껏 살려낸다. 재현부의 시작은 다시 제시부처럼 완벽해지고 계속해서 밀어 부치는 템포는 270번째 마디에 이르러 마치 말을 타고 광야를 누비는 듯한 질주하는 쾌감을 활기찬 현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코다시작 부분에 트럼펫의 아티큘레이션이 한번 흐려져버리는 부분이 발견되는 것은 정말 안타깝다.

곧 트럼펫은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아서 또렷한 아티큘레이션으로 코다의 클라이막스를 준비해간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번스타인의 녹음들처럼 fff전에 미리 트럼펫의 음량을 충분히 살려 놓지 않고 fff에 이르러서야 맘껏 음량을 키우게 하는 방법은 스케일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데 카라얀이 후자를 택하고 있는 것은 아쉽다. 이 부분에서 아무리 크리센도를 미리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4악장 코다의 충분한 다이나믹은 조금 아쉽다. 여기엔 팀파니가 크리센도에서 충분히 흥분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작용한다. 엔딩은 트럼펫이 줄기차게 최강음을 내뿜으면서 짜릿하게 마무리되어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Johan Herman Haitink (March 4, 1929 - )

네덜란드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콘서트헤보우와의 레코딩에서는 음악적 깊이나 밸런스 등에서 어느 정도는 개선의 요지가 있어 보였다. 그 때문에 콘서트헤보우는 노련한 오이겐 요훔(Eugen Jochum)과 하이팅크와의 쌍두제를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로 들어서며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빠르게 예술적인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지휘에 과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유의 소박하고 성실한 그의 접근방식은 특히 독일 낭만파 작곡가의 작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예리하고 뛰어난 음악분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특히 관현악곡 분야에서는 완벽한 작품연구로 깊은 감동을 준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지휘한 말러(Gustav Mahler)와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의 교향곡 전집은 최고의 명연주로 꼽힌다. 그리고 브람스의 교향곡 시리즈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등은 현재까지도 빛나는 명연으로 남아 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1929년 3월 4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9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악히기 시작한 그는 고교 졸업후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 음악원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전공했고,펠릭스 후프카를 사사하여 지휘법을 배웠다. 음악원을 졸업후에는 힐베르쉼(Hilversum)의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Netherlands Radio Philharmonic)의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이후 네델란드 방송연맹이 주최하는 '하기 지휘법 강좌'를 수강하였고,1954년과 1955년에 걸쳐 페르디난트 라이트너(Ferdinand Leitner)에게 지휘법을 사사했다. 1955년에는 네덜란드 방송 연합의 부지휘자가 되어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고,보다 탄탄해진 위치에서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956 년에 객원지휘자로 초청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가 급병으로 출연을 못하게 되자,그 대역으로 네델란드의 명문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케루비니(Luigi Cherubini)의 <레퀴엠>을 지휘한 것이 대성공을 거두었고,그때부터 자주 콘서트헤보우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지휘자로서 또 다른 길을 가게 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하이팅크는 줄리니의 공석을 훌륭하게 소화해 네덜란드에서 하이팅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1957년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였던 파울 반 켐펜(Paul van Kempen)이 죽자 하이팅크가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여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또 다른 위치를 구축하였다. 한편 같은 해 하이팅크는 콘서트헤보우의 수석 지휘자였던 반 베이눔(Eduard van Beinum)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LA 필하모니에 초청되어,미국에서도 지휘를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이어서 1960년에는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져 베를린,파리,브뤼셀,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객원지휘하여 각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에는 반 베이눔이 급서하자 그의 후계자로서 드디어 컨서트헤보우의 지휘봉을 잡는 행운을 잡았다. 그는 대 지휘자 오이겐 요훔의 보좌역으로 하여 2인제의 상임 지휘자 체제를 갖추며 1963년까지 콘서트헤보우를 이끌었다. 그리고 취임하던 해에 콘서트헤보우를 이끌고 미국 순회연주를 했다. 약관 30대의 나이에 지휘자로 화려하게 등장한 하이팅크는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음악적 유산의 바탕위에 현대정신을 가미, 고전과 현대를 폭넓게 연주할 수 있는 악단으로 이끌었다는 평을 들었다.

1963년 하이팅크는 콘서트헤보우를 이끌고 에든버러 음악제에 참가하여 영국 음악계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1964년 3월 오이겐 요훔이 사망하자 하이팅크는 콘서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예술감독 겸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어 드디어 지휘자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후 하이팅크는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콘서트헤보우를 세계 각지를 순회연주 하였다.

1967년 하이팅크는 존 프리처드(John Pritchard)의 후임으로 런던 필하모니의 수석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는데,이것은 향후 12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그는 1979년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에게 지휘봉을 넘겨 줄 때까지 이 악단을 이끌었다) 1972 년 가을에는 글라인드본 음악제에서 모짜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주(Die Entfuehrung aus dem Serail)>를 지휘했고,동 9월에는 루체른 음악제에 콘서트헤보우를 이끌고 참가하여 연주했다. 이외에도 1973년에는 빈 필하모닉 객원지휘자로 활동했고,레코딩까지 하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하이팅크는 1988년까지 콘서트헤보우의 상임지휘자로 있었고,1999년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명예지휘자의 칭호를 받았다. 이 외에도 하이팅크는 1978년부터 1988년까지 글라인드본 페스티발 오페라(Glyndebourne Opera)와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의 음악감독으로 일하였다. 또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하이팅크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의 계약기간이 2006년까지 였으나 동 오케스타라의 후임지휘자 선택문제로 음악감독이었던 게르트 위커(Gerd Uecker)에 이의를 제기하며 사임했다. 한편 하이팅크는 1995년부터 2004년까지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지휘자로서 이 오케스트라를 객연하였고,명예지휘자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프랑스 국립관현악단(l'Orchestre National de France)과 런던 심포니(London Symphony Orchestra)도 객연하였다. 특히 런던 심포니와는 실황녹음으로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을 전곡 녹음하여 "LSO Live" 레이블로 출시하여 대단한 반향을 불러 오기도 하였고,특히 베토벤의 교향곡 앨범은 주요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이팅크는 2006년 4월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시카고 심포니는 현재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는 공석인 상태이며 피에르 블레즈가 명에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또 한 하이팅크는 빈 필하모닉(Vienna Philharmonic)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과도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Berlin Philharmonic)의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1969년 네델란드의 유리아나 여왕으로부터 '오랑지 낫소' 훈장을 받았으며,1977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음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Order of the British Empire)이라는 귀족작위를 받았다. 하이팅크는 1977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에 와서 이대 강당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독일의 일반적인 지휘자들과는 달리 심포니 콘서트의 지휘자로서 그 경력을 쌓았다. 이후 오페라에도 진출하였지만,이렇게 오페라와 소원햇던 것은 종교적인 관계로 오페라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네덜란드의 국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하이팅크는 말러,브루크너,베토벤,브람스 등의 교향곡 전집 등을 완성했는데,하나같이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수작들이다. 이외에 슈베르트,멘델스존,차이코프스키,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집에서도 그 역량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일부 작품만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도전하면 전집을 모두 연주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브람스 교향곡에서의 중후하고 당당한 스케일,슈베르트에서의 소박한 아름다움,베토벤에서의 시적인 서정의 흐름좋은 연출력과 노래하는 듯한 미적인 감성,그리고 쇼스타코비치에서의 세련되고 명쾌한 추진력 등은 지휘자로서의 하이팅크의 높은 감성을 잘 증명해 준다.
그리고 드뷔시나 라벨 등과 같은 근대 프랑스 레퍼토리에서도 또 다른 좋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 는 결코 센세이션널한 지휘자는 아니며 소박하고 착실한 정공법으로 음악을 재현하는 유형의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맛은 그슬린 은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빛깔을 가진 콘서트헤보우의 사운드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특히 독일 낭만파의 작품에서는 위력을 발휘한다.

하이팅크는 많은 앨범들을 남기고 있는데,<브루크너 교향곡 전집>과 <말러 교향곡 전집>을 혼자서 최초로 녹음한 지휘자로 유명하다. 이 앨범들은 모두 걸출하지만 분매도 되고 있으며,그중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2번>,<제8번>,말러의 <교향곡 제1번>,<제2번>,<제3번>,<제9번>,<대지의 노래> 등은 대단한 걸작들이다. 그 밖에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와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과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제4번>,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바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등도 명연반이다. 그리고 런던 필하모닉을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도 손꼽힐 만하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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