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K.331 Alla turca. Allegretto : Ivo Pogorelich

리차드 강 2013. 3. 22. 03:43

Piano Sonata No.11 in A major K.331 - Turkish march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K.331, 3악장 터키 행진곡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3. Rondo - Alla Turca. Allegretto - 1 - 2 순으로

Ivo Pogorelich, piano

     

터키행진곡은 피아노 소나타 제11번 가장조 K.331의 별칭이다. 이 곡은 제3악장이 터키 스타일로 쓰여져 있으며, 원곡에는 알라 투르카 (터기풍)라고 쓰여져 있는데 당시 터키풍의 음악이 애호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시된 것 같다.

     
     

Turkish March KV 331

K 331의 제 3악장의 별명. 이 곡은 제 3악장이 터키스타일로 쓰여졌기 때문에 <터키행진곡 딸림>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원곡은 알라·투르카(터키 풍으로)라고 쓰여져 있는데 당시 터키풍의 음악이 애호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시한 것 같다.

론도 알라 투르카 알레그레토 A단조 4분의 2박자의 이 3악장은 경쾌한 테마가 2개 부분으로 나뉘어 반복된다. 그 하나가 이국적인 정서의 터키 행진곡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적인 선율을 연주한다. 소나타로서는 특이하게 어느 악장도 소나타 형식을 취하지 않고 제 1 악장 변주곡, 제 2 악장 메뉴엣, 제 3 악장 론도로 되어있다.

제 3 악장은 가단조 4/4박자, 경쾌한 주제가 나타나 되풀이 된후 주제와 대조적인 부주제로 들어간다. 계속하여 정상적인 16분음표의 패시지가 되고 다시 주제와 부주제를 거쳐 화려한 코다로 끝난다. 이를 데 없이 밝고 아름다운 곡이 모짜르트의 단편을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비통한 감정이 순간 참을 수 없이 드러나기도 한다.

원래 ‘터키 행진곡’은 터키 군악대 메헤테르하네의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음악이다.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으로 18세기경부터 각지에 터키 군악대가 등장하였다. 음악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18~19세기에는 터키풍을 도입한 작품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볼프강 A. 모차르트의 이 곡이며,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 피날레에도 이 어법을 도입하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피아노를 위한 6개의 변주곡(op.76)〉(1809),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의 부수음악 〈피에타스〉(1767)·〈자일〉(1777)에도 터키 행진곡이 쓰이고 있다.

     

터키행진곡 ( -行進曲 Turkish march )

1) W.A. 모차르트가 작곡한 피아노소나타 제11번 가장조(K331) 제 3 악장의 속칭. 알레그레토 가단조, 4분의 2박자로 씌어진 이 악장은 당시 유행한 이국취미를 모방하여 <터키식의 론도(Rondo alla turca)>라는 표제를 붙였다. 독특한 선율과 리듬으로 오늘날에도 단독으로 연주될 만큼 사랑받고 있다.

2) L. 베토벤 작곡의 관현악곡(작품 113, 1811). 코체부 극본의 《아테네의 페허》를 위한 부수음악으로 서곡과 극중음악 중 제 4 곡이다.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된 것이 유명하다.

     

모짜르트는 잘쯔부르크 대사교의 궁정 음악가 레오폴트 모짜르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레오폴트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로, 작곡도 하고 바이올린 주법에 관한 저작도 남겨 놓았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모짜르트는 일찍부터 신동의 재능을 발휘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의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알차챈 것은 3세 경이었는데, 얼마 안 있어 레오폴트는 초보적인 음악 교육을 시작했고, 5세 때의 생일을 전후해서는 최초의 작품을 작곡했다.

겨우 6세가 될 무렵인 1762년 초부터 10년 남짓 동안은, 소년 모짜르트가 유럽 각지로 여행을 다니며 보낸 시절이었다. 첫 여행지는 뭔헨이었는데, 여기서는 겨우 3주간을 머물렀다. 같은 해 가을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서는 빈을 방문하여, 쇤브룬궁전에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클라비어 연주를 했다. 다시 1763년 6월부터는 부모와 누나 마리아 안나(보통 나네를이라 부름)까지 합친 일가 4명이 대여행을 시작했다. 뭔헨, 아우그스부르크 등지를 거쳐 시베찡겐에서 처음으로 만하임 궁전악단의 연주를 들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4세의 괴테도 모짜르트의 연주를 들었다.

그 후 본, 쾰른 등지를 방문한 모짜르트는, 벨기에를 거쳐 11월에 파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초청되어 루이13세 앞에서 연주하고, 공개 연주의 기회까지 얻었으며, 쇼베르트 등 작곡가를 알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런던으로 건너갔는데, 거기서 크리스티안 바하의 음악에 접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국에 1년쯤 머문 모자르는 이어 네덜란드를 거쳐 다시 파리로 갔다. 그리하여 스위스나 독일을 거쳐 잘쯔부르크에 돌아온 것은, 떠난 지 3년쯤 되는 1766년 11월이었다. 이렇게 하여 신동 모짜르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는데, 그보다 더 큰 수확은 널리 각지의 음악에 접하고 그것들을 흡수한 일이었다. 여행 중에도 작곡을 활발히 하여, <클라비어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KV6-15, KV26-31(1762-1766), <제1번 E플랫 장도>KV16(1764)으로 시작되는 초기의 교향곡 등이 작곡되었다.

그 후 약 3년 동안, 모자르트는 잘쯔부르크에서 비교적 안정돈 나날을 보냈다. 그는 다시 음악 이론을 배우기도 하고, 밀려들기 시작한 작곡 의뢰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1767년 가을부터 다음해 초에 걸쳐 빈을 방문했는데, 누나 난네를과 함께 마마에 걸리는 등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글룩 등의 음악에 자극을 받았다. 또한 가극 <바스티안과 바스티엔느>KV50이 작곡되고 초연되는 등 수확은 적지 않았다.

1769년 11월, 13세의 모짜르트는 대사교 지기스문트폰 슈라텐바하에 의하여 콘서트 마스터(무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또 다시 아들의 여행을 계획하여, 12월에 첫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1771년 봄까지 계속된 이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짜르트는 핏치니 등 많은 작곡가를 알게 되고, 볼로냐의 마르티니 신부 밑에서 대위법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이 무렵에는 <제12번 장조>KV110(1771)을 비롯한 많은 교향곡과 가극 <폰토와 왕 미트리다테>KV87(1770) 등을 작곡하고, 각지에서 신작 오페라의 주문도 받았다.

모짜르트는 다시 1771년 8월에 이탈리아로 가서, 극장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KV111을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시 잘쯔부르크로 돌아온 12월에 지기스문트가 사망하고, 이듬해 1772년 3월에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가 대사교로 취임했다. 그 무렵에 유명한 3곡의 디베르티멘토(KV136-138)를 작곡했다. 그 해 여름, 모짜르트는 심임 대사교에 의하여 유급의 콘서트 마스터로 승격되었으나, 그 직후에 3번째 마지막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밀라노에서 가극 <루치오 시라>KV135(1772)를 쓰고, 다시 몇 개의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을 쓴 다음, 이듬해 1773년 3월에 잘쯔부르크로 돌아왔다. 이 해 여름에는 빈으로 가서 하이든의 음악을 직접 접했다. 그 곳에서 쓴 <현악 4중주곡 제8-13번>KV168-173과 교향곡에는 하이든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여행 중심의 시대는 일단 여기서 끝나고, 그 후의 4년 동안 모짜르트는 대개 잘쯔부르크에 머물러 있었다. <제29번 A장조>KV201(1774)로 대표되는 작품들을 끝으로 그 무렵부터 교향곡의 작곡이 한때 중단되고, 화려한 작풍을 보여 주는 디베르티멘토와 협주곡을 많이 작곡하게 되었다. 5곡의 바이올린 협주곡(1775)과 <하프너 세레나데>KV250(1776), 가극 <가짜 여자 정원사)KV196(1775) 등이 작곡되었다.

1777년 9월, 모짜르트는 보다 좋은 취직 자리를 물색하기 위하여 긴 여행을 떠났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동행하여, 두 사람은 만하임을 거쳐 파리까지 갔으나, 신동으로 인기가 있던 옛날과는 달리, 만족할 만한 일자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파리에서는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데다가, 만하임에서 알게 된 알로이지아 베버(작곡가 베버의 사촌누나)에 실연을 당하는 등, 모짜르트에게 있어서 이번 여행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창작면에서의 성과는 매우 커셔, 교향곡 제31번 <파리>KV297(1778), 피아노 소나타 <터키 행진곡>KV331(1778)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작이 이 여행 중에 탄생했다.

1779년 1월에 귀향한 모짜르트는 곧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지만, 일찍부터 그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던 궁정음악가라는 처지에 대한 불만은 점점 더 높아져 갈 뿐이었다. 동시에 아버지와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하여 1780년 말 뮌헨에서 가극 <이도메네오>KV366을 상연한 후, 이듬해 봄 빈에서 끝내 히에로니무스와 충돌하고 말았다. 레오폴트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임할 것을 결심하고, 그대로 잘쯔부르크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25세의 모짜르트는 ,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독립된 음악가로서 빈 생활을 시작했다. 예약 연주회와 음악 교사, 그리고 작품을 출판사에 파는 것 등에서 얻는 수입은 미미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듬해 1782년 8월에 알로이지아의 누이동생 콘스탄째와 결혼까지 하여, 생활은 점점 더 쪼들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하이든 등과의 교우에도 자극을 받아, 창작은 더욱 활발해졌다. 예약 연주회를 위해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것 외에, 교향곡 제35번 <하프너>KV385(1782), 교향곡 제36번 <린쯔>KV425(1783)의 두 교향곡, 하이든에게 바쳐진 <현악 4중주곡 제14-19번>(1782-1785), 그리고 가극 <피가로의 결혼>KV492(1786) 등 불후의 걸작이 속속 태어났다.  그런데 모짜르트의 예술이 고고의 경지로 들어감에 따라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은 그의 음악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약 연주회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게 되고, 이렇다 할 작곡 의뢰도 없었다. 더우기 부부가 다 같이 경제관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집안의 경제 사정은 나빠지기만 하여, 친구에게 종종 돈을 꾸러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모짜르트는 말년에 있었던 좋은 일이라고 하면, 1787년에 2번이나 프라하를 방문하여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하여 대성공을 거둔 일고, 새로 가극 <돈 조반니>KV527의 작곡을 의뢰받아 상영한 것 정도였다. 1789과 1790년의 베를린 여행과 프랑크푸르트 여행도 기대한 만큼의 수확은 없었다. 그런 비참함 생활 속에서도 작곡은 더욱 더 충실해져, 이른바 3대 교향곡인 제39번(K543), 제40번 <주피터>(K551)를 1788년에 작곡했고, 가극 <코시 판 투테>KV588(1790), <현악 5중주곡 D장조>KV593(1790) 등이 작곡되었다.

1791년에 들어와서는 모짜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B장조>KV595를 필두로 하여, <현악 5중주곡 E플랫 장조>KV614, 가극 <마적>KV620, 가극 <황제 티투스의 자비>KV621 등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병마가 급속히 그이 몸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1월 20일, 그는 <레퀴엠>KV626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몸져누워 그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인에 대해서는 살리에리에 의한 독살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성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되긴 했으나, 유해가 묻힌 정확한 장소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또한 미작으로 남긴 레퀴엠은 그의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 했으며, 사후 그의 아내 콘스탄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재혼을 하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 1791) 오스트리아

음악사상 최대의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모차르트는 세살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네살 때 이미 들은 곡을 칠 수 있었다고 하며 다섯살 때는 아버지에게 조기 교육을 받아 글자를 쓰기 전에 먼저 작곡을 한 천재였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츠부르크 대사교의 궁정 음악가였는데 1762년에 그는 모차르트를 데리고 뮌헨과 빈 등지로 연주 여행을 하여 절찬을 받았다. 다시 1763년부터 3년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지를 돌았으며 1767년부터 2년간은 빈으로, 1769년부터 3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3회나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그는 여행지에 따라 새 지식을 배웠고 작고 기법 등을 함께 습득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탈리아적인 명항한 면과 독일적인 건강한 화성에 고전파 시대의 중심이 될 만한 기량을 겸해 배웠던 것이다.

1777년에 그는 만하임을 거쳐 파리에서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한 때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와 궁정 악단의 악장으로 있었는데 1781년 25세 때 빈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10년간 가난과 싸워가면서 활약하였다.

그의 음악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단정하고 아름다워 동심에 찬 유희와 색채,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는 창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을 궁정 음악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단정한 스타일, 맑은 하모니, 간결한 수법을 겸해서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멜로디는 음악의 에센스라고 할 정도로 그의 선율은 아름답고 풍부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의 음악의 밑바닥에는 한 줄기의 애수가 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하이든과 강한 대조를 보인다고 하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의 작품은 1000여곡 가까운데 모두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며 인류에게 귀중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는 작고의 중점을 오페라에 두었으나 교향곡, 협주곡,실내악, 미사곡 등을 매우 광범한 작곡 활동을 하였다.

     

이보 포고렐리치 Ivo Pogorelich (October 20, 1958 - )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 출신인 '이보 포고렐리치 (Ivo Pogorelich)' 는 안정된 테크닉의 토대 위에, 논란의 소지가 많은 자의적인 해석과 웬만해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서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격렬한 찬반양론을 이끌어낸 천재아닌 천재 피아니스트다.

이보 포고렐리치의 이름뒤에 항상 따라 다니는 '건반위의 이단아' 라는 별명은 그의 쇼팽 연주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주류가 되어버린 기존 연주방식에 대해 도전을 했으며,그의 도전은 천재적인 그의 음악성위에 더해진 그만의 논리에 기인한다. 그것은 자신의 음악적 허영심으로 작곡가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악보에만 의존하지 않고 본래의 작품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최대한 정제된 피아노 선율을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그의 연주를 작위적이고 과장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릴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음악에는 의외성뿐 아니라 드라마틱한 피아니즘이 묻어있다. 음악에의 실험정신,그리고 멈추지 않는 일탈에 대한 꿈이 이보 포고렐리치 음악의 탁월성의 원천이다.

1980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 제10회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에서의 그 유명한 일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보 포고렐리치의 결선진출 좌절에 불만을 품고 심사위원석을 박차고 나간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에 대한 얘기나 특별상에 그친 그가 우승한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Dang Thai Son)보다 더 유명해진 사실들을 말이다.

이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가 Final에 진출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심사위원을 사퇴하고 3살짜리 딸을 호텔 방에 남겨두고 그녀만 홀로 떠난것도 유명한 일화다.(마르타 아르헤리치는 2000년 부조니 콩쿠르에서도 임동혁이 5위에 그치자 심사위원직을 그만두고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이보 포고렐리치는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버린 바르샤바 사건 이후 그에 대한 분분한 의견과 화려한 수식어들을 잠재우고 강렬한 개성과 그만의 탁월한 해석으로 음반을 통해,그리고 맹렬한 연주활동으로 명실공히 특별한 대우을 받는 비루투오조의 위치를 확고히 굳혀왔다.

이보 포고렐리치는 1958년 10월 20일 유고슬라비아 연방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Belgrade, Serbia) 에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세르비아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크로아티아에서 보냈고, 7세때 Belgrade (베오그라드) 에서 처음 피아노 교육을 받았다. 5년후인 12세 때에 모스크바의 초청으로 중앙음악하교 (Central Music School) 에서 예프게니 티마스킨 (Evgeny Timakin) 에게 사사하였고, 후에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1976년 여류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였던 알리자 케제랏제(Aliza Kezeradze)에게 집중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녀는 전통적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 알렉산더 실로티(Alexander Siloti) 학파의 전통을 포고렐리치에게 가르쳤다. 이 스승과 제자는 1980년에 결혼하였고(케제랏제는 포고렐리치보다 12살 연상이었다), 1996년 그녀가 사망한 후 포고넬리치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며 한동안 연주를 중단하기도 하였다.

이보 포고렐리치는 스스로 "알리사만큼 나의 음악 세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생전에 그녀와 음악적으로도 완벽한 결합을 이루었다. 이보 포고렐리치는 1978년 이탈리아 Terni (테르티)에서 열린 카사그란데 국제 콩쿠르 (Casagrande Competition), 1980년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Montreal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에서 각각 우승하였다. 그러나 그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1980년 International Frederick Chopin Piano Competition에서 그는 두 차례 예선을 치루면서 특별상과 비평가상을 수상했지만 워낙 그의 연주 개성이 뚜렷하여 찬반논란 끝에 3라운드(본선)에서 탈락하는 이변을 낳았고,심사위원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포고렐리치는 "천재"라며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에 대한 이의을 제기하며 급기야 퇴장하는 소동이 벌어진후 더욱 더 유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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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포고렐리치는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고 같은 해 영국에서도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 이후 그는 수많은 독주회와 유명 오케스트라의 협연(보스턴,런던,시카고 교향악단과 빈필,베를린필,Orchestra de Paris)을 가졌다.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레코딩을 시작했으며 1982년 독점계약을 맺었다. 1981년 도이치 그라마폰과 녹음한 그의 데뷔앨범인 <쇼팽 리사이틀>은 발매된 지 얼마 되지않아 10만장이 팔려나갔다. 그는 이 데뷔앨범을 시작으로 쇼팽,리스트,슈만,브람스,차이코프스키등 낭만파 음악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베토벤,하이든,스카를라티같은 고전파 작곡가들까지 섭렵하면서 그만의 열정과 개성이 탁월하게 표현된 명반들을 발표하여 왔다. 이후 1982년부터 도이치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을 맺고 총 15종의 음반을 발표하였다. 최근 2002년에 출시된 음반에는 <Chopin - Piano Sonata No.2, Ravel - Gaspard de la Nuit, Prokofiev - Piano Sonata No.6>이 수록되어 있다.

이단아적인 성향이 강한 이보 포고렐리치의 또다른 면모는 명성이나 물질대신 젊은 음악도들을 후원하거나 전쟁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더 큰 열성을 쏟고 있는 그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1986년 유고슬라비아의 젊은 음악가발굴과 지원을 위해 크로와티아에 '영 뮤지션 펠로우쉽'이라는 음악재단을 설립하였고,나아가 1989년 '이보 포고렐리치 페스티발'을 독일 뮌헨 인근의 바트 뵈리스호펜(Bad Worishofen)에서 개최하여 신인 연주자 들이 유명 기성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1993년 12월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Pasadena)에서 'The Ambassador Foundation'과 함께 연주자들의 등용문인 '이보 포고렐리치 국제 콩쿠르'(International Solo Piano Competition)를 창립하였다. 이 콩쿠르는 1등 수상자에게 상금 미화(USD) 10만 달러를 수여하여 보다 연주자로서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994년,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할 병원을 사라예보에 세우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으며 유네스코의 후원을 얻어 이 재단을 위한 수차례의 콘서트를 갖고 있다. 이밖에도 적십자를 돕는 자선연주회,사라예보 재건을 위한 자선연주회,암이나 복합성 경화증과 같은 불치병 퇴치를 위한 자선 콘서트 등 남들을 돕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유네스코에서 1988년에 '친선대사(Ambassador of Goodwill)'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많은 열성팬들을 몰고 다니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가 오랜 침묵을 깨고 2002년부터 연주활동을 재개하였다. 원래부터 다소 조울증이 있던 포고렐리치는 1996년 12살 연상인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데 이어 2000년 말에는 아버지마저 타계하자 심리적 불안과 우울증이 악화돼 지난해 3월 이후 일체의 연주활동을 중단했었다. 하지만 1년여의 휴식과 안정,심리치료를 통해 원기를 회복한 포고렐리치는 독일 뮌스터에서 독주회를 시작으로 독일 주요 도시와 그리스 아테네,오스트리아 빈 등지에서 잇따라 독주회를 가졌다.

'초현실주의'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극단적인 낭만성과 극에서 극을 오가는 템포 설정,독창적인 악보해석이 특징인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전세계에 수많은 열성팬을 만들어냈으며 지금은 80년 당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베트남 출신 피아니스트 당타이 손보다 훨씬 더 각광받고 있다.

음악을 통애 인류애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이보 포고렐리치도 어느덧 50대 초반의 나이에 이르렀다. 1980년 쇼팽콩쿨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본선에서 탈락하고도 우승자보도 더 유명세를 치뤘던 이보 포고렐리치!! 많은 인생역경과 더불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고집해 오면서 수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던 이보 포고렐리치의 더욱 농익은 연주와 그 안에 스며있는 따뜻한 감성을 전해준 2005년 내한공연은 그를 기다려온 수많은 팬들에게 더없이 귀한 감동의 시간을 선사하였다.

또한 명성이나 돈 대신 젊은 음악도들을 후원하거나 전쟁의 화를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더 큰 열성을 쏟고,힘없고 지친 사람들,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보 포고렐리치의 음악적 열정이 인류애적 사랑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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