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북스테후데: 전주곡과 푸가 사단조 Bux WV 149 - Feodor Stroganov, Organ

리차드 강 2013. 9. 9. 09:38

Prelude & Fugue in G minor, Bux WV149

북스테후데 전주곡과 푸가 사단조 WV149

Dietrich Buxtehude 1637 ~1707

Prelude & Fugue in G minor, Bux WV149

 

Feodor Stroganov, Organ

1699-1999. An Organ Lost in Lübeck - an Organ Regained in Göteborg

     

Buxtehude, Dieterich(디트리히 북스테후데)

독일 바로크시대 작곡가겸 오르가니스트로 홀슈타인지방 올데슬로 출생. 북독일 오르간악파를 대표하는 거장(巨匠)으로서 J.S. 바흐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헬싱보르크와 헬싱괴르의 오르가니스트를 거쳐, 1668년 뤼벡의 성 마리아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전임자 F. 툰더가 1648년에 시작한 교회 음악회 저녁음악을, 크리스마스전 다섯 번째 일요일에 집중시켜 그 명성을 높였습니다.

오르간곡은, 발 건반을 호쾌하게 사용한 환상곡에 특징이 있으며. 트리오소나타집(함부르크, 1696)등의 실내악곡도 남아 있습니다.

튀링겐 삼림지대의 북쪽에 위치한 아른슈타트에서 바흐는 특히 오르간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뤼네부르크에 있는 동안 그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가장 중요한 오르간 연주자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연주와 작품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1705년 10월 한 달 동안의 휴가를 얻어 뤼베크까지 300㎞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 마침내 그의 연주와 음악을 듣게 되지요,

1706년 1월 중순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체재가 그에게 유익했던 듯하나 그는 그동안의 부재와 그밖의 일들로 문책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1. 뤼벡의 오르간의 거장

흠... 작년에는 모짜르트와 쇼스타코비치와 슈만을 기념하는 한해였지요. 상대적으로 소홀이 다루어지는 슈만에 대한 관심이 안타까워서 장기간 슈만의 작품번호들을 따라가보는 엉뚱한 작업을 했었는데요. 올해는 국민주의 작곡가들인 시벨리우스와 그리그와 엘가와 관련된 한해이고 그에 따른 여러가지 행사라던가 신문기사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그런데 역시나 또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분들이 있군요. 자그만치 서거 300주기와 250주기를 맞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분은 서거 300주기를 맞이하는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와 서거 250주기를 맞는 도메니코 스카르랄티와 요한 슈타미츠가 있습니다. 별로 비중있게 다뤄지지는 않지만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중요한 음악가들이죠. 몇달 전에 라디오에서 특집 할 때 녹취 해 둔 것도 있고 하니 또 역시 공부할 겸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 1637-1707),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도 바로크 음악에 특별히 관심이 없다면 굉장히 낯선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건반에 뛰어난 후대 음악가들에게 그의 이름은 거의 전설입니다. 베토벤이 이야기하기를 '자기 분야에 최고 권위자였던 오르가니스트 북스테후데를 나는 모든 거장들 중에 가장 높은 곳에 둘 것이다' 라고 할 정도였죠. 바흐는 그의 연주를 듣겠다는 열정 하나로 십대 초반의 나이에 수십킬로나되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걸어갔고, 헨델도 북스테후데 연주를 최고로 꼽으면서 존경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그는 동시대뿐 아니라 후대의 음악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음악가이지만 물론 오늘날 그의 음악은 바흐나 헨델 만큼 대중적이지는 못합니다. 서거 300주기를 맞이한 올해는 그래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특히 낙소스 같은 레이블에서는 그의 전집을 완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음악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북스테후데는 1637년경에 덴마크에서 태어나서 1707년 독일의 뤼벡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로 파헬벨이나 텔레만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구요. 청년 시절 거장의 꿈을 키우던 바흐나 헨델에겐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죠. 북스테후데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작곡가로서보다 오르가니스트로서 명성을 얻었는데요. 독일 바로크 오르간 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남독일 오르간 악파와 북독일 오르간 악파 중에서 북독일 오르간 악파를 성립한 수장으로 알려져 있죠.

《 Toccata d단조 BuxWV 155 》 (7'16")
Walter Kraft, organ

오늘날 북스테후데에 대해서 전해지는 사실들 중에서 몇가지 흥미로운 것들이 있는데요.
우선 서른 이후로 그는 독일의 뤼벡이라는 도시에 정착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만 머물렀다는 점입니다. 성모 마리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음악감독이었던 그는 평생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뤼벡의 음악을 이끌었는데요. 그가 가진 실력이나 명성으로 미루어 볼 때 다른 큰 도시에서 초청하려는 제의가 많았음에도 그는 뤼벡의 음악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뤼벡에서 그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바로 '저녁 음악회'를 기획한 것이었는데요. 북스테후데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5주동안 매 일요일마다 미사가 끝난 뒤에 음악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Abend Musik(저녁 음악회)' 라고 이름붙인 이 음악회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북스테후데는 직접 오르간을 연주했는데요.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성당을 찾은 사람들로 음악회는 늘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북스테후데는 이 음악회에서 종교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쟝르의 음악들도 선보였는데요. 작은 편성의 실내악이나 독주 기악곡 등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소개하는 등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냈습니다. 실제로도 북스테후데는 지인들과 실내악을 연주하는 일을 즐겼다고 하는데요. 오늘날 남아 있는 부르하우트의 그림에는 북스테후데가 친구인 라인켄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기도 합니다.

《 Trio sonata G장조 op 1-2 BuxWV 253 》 (7'36")
바이올린) John Holloway,
비올라 다 감바) Jaap ter Linden,
하프시코드) Lars Ulrik Mortensen

     

Johannes Voorhout, Gemälde Häusliche Musikszene (Allegory on friendship)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것이 Reincekn, 왼쪽의 비올을 연주하는 것이 Johann Theile 그리고 오른쪽에 턱을 괴고 있는 사람이 Buxtehude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미스테리한 출생과 어린 시절

출생에 있어서 북스테후데만큼 미스테리한 음악가도 드물 것 같은데요. 그가 태어난 날짜와 장소, 심지어는 태어난 나라에 대해서도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다만 몇가지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서 그의 출생 시기와 장소를 추측하고 있을 뿐인데요. 태어난 해는 1637년경으로 태어난 장소는 어머니의 나라인 덴마크의 헬싱베르와 헬싱보리 그리고 오데슬로에 라는 세 도시 중의 하나가 유력합니다. 최근에 많은 학자들은 북스테후데의 고향이 헬싱베르 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이 곳에 있는 성 올라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다는 기록이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 요하네스 북스테후데(Johannes Buxtehude)는 독일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면서 줄곧 덴마크 도시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아버지를 따라 성당을 드나들던 북스테후데는 유난히 소리에 민감한 아이였다고 하죠. 특히나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나 오르간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소리였는데요. 한번은 12살의 북스테후데가 성당의 오르간을 수리하고 조율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 아버지는 그를 본격적인 음악가로 키울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첫번째 음악 선생님은 아버지 요하네스였구요. 음악 외의 정규교육을 받기 위해서 라틴어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이곳에서 어린 북스테후데는 논리학과 수사학, 기하학등 다양한 학문의 기초를 배웠는데요. 이러한 학문적인 지식들은 훗날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제선율을 만들고 그에 대한 응답 선율을 작곡할 때는 수사적인 지식을 응용하기도 했구요. 라틴어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라틴어 역시 그가 훗날 라틴어로 된 교회 음악을 작곡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습니다. 라틴어 외에도 북스테후데는 고향인 덴마크어는 물론이고 독일어도 유창했는데요. 독일계였던 아버지로부터 익힌 독일어 실력이 훗날 그가 독일에 정착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되었죠.

《 Dietrich Buxtehude 'o froehliche stunden (오 기쁜 날)' BuxWV 84 》 (6'05")
소프라노) Emma kirkby
쳄발로) Lars ulrik mortensen
바이올린) John holloway, manfred kraemer (르 콩세르 드 나시옹 악장으로 내한연주)
비올라 다 감바) Jaap ter linden

북스테후데에게 맨 처음 오르간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버지 요하네스였지만 아버지에게 얼마 동안 음악을 배웠고 그 이후에 어떤 음악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코펜하겐으로 건너가서 음악을 공부했을 거라고 이야기하죠. 고향 헬싱베르에서 남쪽으로 약 46Km 떨어진 코펜하겐은 덴마크 음악의 중심지였는데요. 이곳에서 그는 로렌츠2세라는 오르가니스트에게 음악을 배웠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건 로렌츠 2세의 아버지가 이 북스테후데 가문과 친분이 깊었던 데다가 로렌츠 2세와 당시 코펜하겐에 머물던 음악가들의 양식을 훗날 북스테후데의 작품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코펜하겐에는 스벨링크와 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활동 하고 있었는데요. 네덜란드와 덴마크 지역에서 유행한 플랑드르 오르간 음악의 거장이었던 스벨링크는 이탈리아나 독일과는 또다른 양식을 정립했습니다. 북스테후데는 로렌츠2세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이러한 스벨링크의 음악을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그의 음악에 이용하게 되었다는게 학자들 사이에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또 이 북스테후데가 독일의 함부르크에서도 공부했을 거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이것은 북스테후데의 아버지가 당시 함부르크에 머물던 라인켄과도 친분이 두터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등장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공부했던 곳으로 자식을 유학을 보내는 것이 음악가들 사이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관습이었던 것이죠. 10대 소년 북스테후데의 삶은 코펜하겐과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펼쳐졌을 텐데요. 글쎄요. 어느 곳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오르간 수업과 음악에 대한 공부를 계속 이어나갔다는 것이겠죠.

다음의 칸타타는 뤼벡 시절의 음악입니다.

《 Buxtehude, Cantata 'Ich habe Lust abzuscheiden', BuxWV 47 》
소프라노) Suzie LeBlanc,
소프라노) Emma Kirkby,
베이스) Peter Harvey,
연주) Purcell Quartet

1) [Sonata]
2) Ich habe Lust abzuscheiden
3) Spann aus, spann aus, ach frommer Gott
4) Dann was ist doch die schnode Welt
5) Wie einer, welcher auf dem Meer
6) So spann doch aus, ach frommer Gott

출처 : Kindred Spirits -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시나요?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