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카우프먼 감독의 '프라하의 봄'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8)
원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 데 DVD에는 ‘프라하의 봄’으로 돼 있고 몇 가지 특색이 있다. 템포가 빠르지 않고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동작을 천천히 음미하라는 듯 완만히 진행되는 장면이 많다. 비속어나 욕설도 드문데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다. 또 서정적 영상미가 아주 빼어나다. 무대가 프라하나 제네바인 탓도 있지만 예스러운 건물이 주로 나오고 현대식 빌딩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의 건물은 ‘세계의 추악화’라고 작중인물이 말하는데 그런 심미의식이 반영돼 있다. 차창의 풍경, 호수의 백조, 체코의 농촌, 늦가을의 벤치, 수확기의 전원과 트랙터, 여성의 누드 등 영상미가 모두 일품이다.
주인공인 외과의 토마스는 이골이 난 바람둥이다. 쿤데라는 소설에서 바람둥이에는 서정형과 서사형의 두 종류가 있다고 적고 있다. 서정형은 이상적 여성을 상대 여성에게서 찾고, 서사형은 여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의 고전적 구분과 일치한다. 즉 서정시는 자기 계시적인 주관성의 표현이고, 서사시는 세계의 객관성을 포착하려는 충동에서 나온다는 헤겔의 구분과 비슷하다. 토마스는 서사형 바람둥이로서 여성 편력을 통해 다양성을 음미하려 든다.
영화의 주요 무대이자 도시의 상징인 카를 다리와 프라하 성
영화는 토마스가 도통한 바람둥이임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온천 요양지에서 만난 테레사를 유혹하는 장면도 그렇다. 일자리를 찾아 프라하로 올라온 그녀는 토마스의 아파트를 찾는다. 그녀가 기침을 하자 진찰을 한답시고 성적 접근을 하고 경계의 내색을 보이자 자기는 의사라고 안심시킨다. 그리고 쉽게 그녀와 몸을 나누는데 그 과정이 사뭇 유려하게 진행된다. 테레사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사비나와의 정사를 계속한다. 화가인 그녀는 독립 생활을 하며 성적으로도 자유로운 삶을 실천한다.
때마침 두브체크가 등장해 지식인 사이에 자유화 열망이 팽배한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라친의 연주가 계속되는 무도장이 딸린 레스토랑에서 공산당 간부들이 소련인들과 식사를 한다. 토마스는 자기 죄 때문에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왕과 대비하면서 그들의 후안무치를 규탄한다. 동료가 발표하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그의 의견이 매스컴에 발표된다. 테레사의 요청으로 결혼한 후에도 토마스의 여성 편력은 계속된다. 사진작가로 일하는 테레사는 집을 나가고 때마침 소련군 탱크가 프라하에 진입한다. 테레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토마스는 그녀를 찾아 거리로 나선다. 테레사는 탱크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마침 사비나가 국외로 나가는 것을 본 토마스 부부도 교섭이 있었던 제네바의 병원을 목표 삼아 체코를 떠난다.
한발 먼저 도착한 사비나는 어느 모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자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며 항쟁을 역설하는 망명자에게 쏘아붙인다. “그런 당신은 왜 돌아가 싸우지 않느냐.”
그녀가 자리를 뜨자 한 교수가 따라와 대화를 나눈다. 이를 계기로 사비나는 프란츠와 뜨거운 사이가 된다. 사비나는 지금껏 만난 남자 중 최고의 남자라고 토마스에게 말한다. 하지만 프란츠가 막상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오자 구속이 싫은 그녀는 행방을 감춰 버린다.
주위에서 누드 사진을 권고해 테레사는 이를 시도하기도 한다. 바람둥이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토마스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다는 자각은 허약한 존재라는 자의식에 이르게 한다. 그녀는 쪽지만 남기고 귀국해 버린다. 토마스도 뒤따라 귀국하지만 자유화 시절에 발표한 견해를 철회하라는 조건을 거부함으로써 병원 근무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유리창 청소부로 일하고 테레사는 술집 접대원으로 일한다.
테레사는 사랑과 성은 별개이며 성은 오락일 뿐이라는 토마스에 대한 시위로 혼외정사를 갖는다. 그러나 불안감을 느낀 테레사는 토마스를 부추겨 농촌으로 내려가고 애완견이 암에 걸리자 안락사시킨다. 동물에 대한 한없는 연민은 두 사람의 따뜻한 일면과 함께 타인과 인간적 유대를 갖지 못하는 일면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토마스는 농촌에서 테레사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모두 숨을 거둔다. 사비나는 그 소식을 우편으로 접하게 되는데 이들의 죽음은 마지막 장면으로 처리돼 시간이 전도돼 있다.
여주인공 테레사가 블타바 강에서 노니는 백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자리
쿤데라의 소설은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와 프란츠라는 두 축의 사랑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사비나와 프란츠의 관계가 축소되어 있어 마치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다룬 듯한 인상을 준다. 또 원작의 사색적 요소가 사상(捨象)돼 ‘존재의 가벼움’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전경화 되어 있는 것은 관능과 성애가 기본적인 삶의 동력이라는 전언이 담긴 기탄없는 성의 묘사다. 영상미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갖는 한계성은 문학의 강점과 덕목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해준다.
감독 필립 카우프먼은 유태계 미국인이고 주연인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영국인이다. 그의 부친은 ‘오든 그룹’이라고 알려진 1930년대 좌파 시인 중의 한 사람 C 데이 루이스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
슬라브 선율이 빚어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행간
개인에게 있어 이념 혹은 정치란 무엇이며 또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협약이 개인을 파괴하고 철저히 짓이겨 놓고 있는 것을 얼마 전 발발한 이라크 전을 통해 목도하면서, 우리들 생에 밀착된 그러한 의미들에 대해 다시금 묻고 싶어졌다. 독재 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민중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그 민중에게 더 큰 시련과 비극을 안겨 주었던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역습은 역사와 대의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실존적 의미를 희석시키고, 종잇장처럼 가벼운 것으로 이지러뜨렸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렇게 중대한 실존적 위기조차도 상황이 종료되고 나면, 다소 시차는 있겠지만 그 전쟁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나 관망한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적으로 잊혀질 것이다. 인간의 미경험을 축으로 한, 단 한 번뿐인 우발적 사건들의 연속과 망각. 그러한 것이 우리가 버거워하고 있는 생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존재의 가벼움에 젖어 있는 인생들을 반추한 소설이 20세기의 빛나는 지성으로 군림하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네 청춘 남녀의 금방이라도 휘발할 것만 같은 무중력의 삶은 바로 가냘픈 손으로 스케치한 우리네 인생의 초상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카뮈의 ‘부조리’가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쿤데라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연의 부조리를 조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토대로 만든 영화 「프라하의 봄」은 아슬아슬하게 위험 수위를 넘나들며 자유와 일탈을 꿈꾸는 반역의 젊음들에 도착증을 가진 듯한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이력을 공고히 해준 필모그래피다.
매력적인 외과 의사 토마스(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는 억압적인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켜 주변의 여자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며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있다. 오랜 연인이자 친구인 화가 사비나(레나 올린 분)와도 속박 없는 사랑을 나누며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출장차 내려간 작은 마을에서 아름다운 카페 웨이트리스인 테레사(줄리에트 비노쉬 분)를 보게 된다. 며칠 후 예고도 없이 그를 찾아 프라하에 온 테레사를 흔쾌히 받아들인 토마스는 어떤 여자와도 함께 하룻밤 이상을 지내지 않는다는 그의 규칙을 깨트리고 그녀와 밤을 지샌다. 토마스와 사비나의 도움으로 사진 기자가 된 테레사의 사진집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 찾은 댄스 클럽에서 그들은 건배하고 있는 소련 장교와 체코 관리들을 본다. 스탈린 시대에 민중을 상대로 잔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지도부들이 권좌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토마스는 의혹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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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와 토마스는 머지않아 결혼을 하게 되지만, 토마스의 방탕한 생활이 여전히 계속되자 테레사는 집을 나오고 그 순간 소련군의 탱크가 프라하로 밀려온다―이것이 이른바 체코의 민주 자유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기 위한 소련의 강제 침공이 빚어 낸 체코 사태다. 이 사건은 자유주의자였던 토마스와 테레사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둘은 스위스로 이주하게 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그곳에서도 역시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현기증을 느낀 채 고국으로 되돌아온다. 프라하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구토 증세를 느낀 테레사는 토마스와 동반한 짧은 전원 생활에서 꿈과 같은 행복을 맛본다. 영화는 곧 사고로 즉사할 운명임을 알지 못하는 토마스와 테레사의 트럭 안 대화로 끝맺는다. ‘무슨 생각하죠?’라는 테레사의 질문에 미소를 머금으며 ‘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라고 토마스가 대답하는 순간 숲길을 달리던 그들의 차는 전복된다. 사고의 모습은 생략된 채 좁은 숲길이 환하게 빛나는 것으로 매듭짓는 엔딩 장면은 슬프고 아름답다. 가벼움을 벗어나 진지함과 무거움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지상에서 사라진 이들의 최후는 인간은 영원히 가벼울 수밖에 없다는 한계성에 질식하게 만든다.
영화의 세 주인공―원작에서는 사비나의 연인으로 프란츠를 등장시키고 있으나, 영화에서 그의 비중은 상당 부분 축소되어 있으므로 그를 제외한 세 주인공이라고 했다―은 직업의 다양성만큼이나 다른 각도의 삶을 거느리고 있다. 화가 사비나는 마치 채털리 부인의 사랑법을 답습하고 있는 듯 자유롭고 본능적인 연애 행위를 일삼으며 깃털 같은 존재의 가벼움을 증거하고 있다. 그녀에게 체코의 정치적 상황은 자유 연애를 구속하는 걸림돌일 뿐이다. 의사인 토마스는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 속에서 가벼운 삶에 도취되지만 테레사를 만나면서부터 진지한 사랑의 덫에 걸려들고, 조국의 정치적 현실에 눈뜨면서 조금씩 무거움으로 진입한다. 카페의 웨이트리스에서 사진 작가로 분한 테레사에게는 사랑도 삶도 무거운 것이며, 그로 인해 여러 여자와 사랑을 공유하는 토마스와 갈등을 겪는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문명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과 고삐를 상실한 채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서구 현대 사회를 고발한 지적인 통찰이라면,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는 그러한 니힐리즘의 세태 속에서 한없이 가벼워지려 하는 인간들의 내부에 괴어 있는 끈적끈적한 욕망과 체념을 시추하는 음험한 엿보기에 가깝다.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를, 밝음보다는 어두움을 배태하고 있는 그의 영화는 에로티시즘을 근간으로, 쿤데라의 소설에 울긋불긋한 원색 도료를 덧입혀 놓았다. 그 덕에 자신의 소설을 포르노로 둔갑시켰다며 쿤데라가 대노했다는 후문도 있지만, 어쨌든 외설 논란을 제외한다면 세 시간 가까운 분량의 영화 속에 나름대로 텍스트를 충실히 재현시켜 놓은 감독의 공로는 인정해주어야 할 듯싶다.
사실 상당 부분의 왜곡이나 수정 없이 쿤데라의 텍스트를 다른 미디어로 승화시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쿤데라의 사유는 카뮈의 부조리 철학이나 카프카가 제시한 인간 조건 등과 균형을 이룬 실존주의적 접근에 깊이 맞닿아 있으며, 에세이적인 날카로운 필치로 인물의 내면과 사물을 그려내는 솜씨 또한 범접할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영화화시키려 했던 감독의 의도 자체가 매우 가상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립 카우프만의 필모그래피에는 역시 외설 논란의 핵심에 놓여 있었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과 사디즘의 어원이 된 실존 인물인 마르키스 드 사드의 생애를 그린 「퀼스」도 추가되어 있는데, 그 작품들 또한 모두 땀에 절은 에로티시즘의 바탕 위에서 자유와 이상, 그리고 욕망이라는 키워드를 품고 있다. 「프라하의 봄」은 비평가들과 관객에게서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아 왔으며, 필립 카우프만의 존재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역시 원작의 깊이를 속 시원히 후벼파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텍스트를 배반하지 않고 있다는 농후한 느낌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전반에 흐르는 레오 야나첵의 클래식 선율과 무관하지 않다. 체코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드보르작, 스메타나와 함께 슬라브족의 민족적, 서정적 색채를 대외에 전염시킨 야나첵의 작품들은 영화 전체를 간파하며, 가벼움과 무거움의 대비를 선명하게 인지시키고 있다. 그것은 감독의 프로포즈보다도 훨씬 긴밀하고 절실하게 와 닿는 스크린 속의 보물이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소도구가 아니라 시야에 정면으로 포착되는 에너지이자 독자성을 갖는 캐릭터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적 욕망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복선이 되고, 야나첵의 음악은 인물들의 내면적 변이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선율 속에 심어 놓았다. 이 영화의 성공을 직접적으로 이끈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슬라브적 선율은 아마 관객들 상당수를 사운드트랙의 골수 분자로 영입시켰으리라. 시연할 수 없는, 모든 것과 단 한 번의 조우로 맺어지는 삶이 경도시키는 무가치성에 항거하듯, 그 또한 인생의 대부분이 전체주의의 굴레에 예속되어 있었을 야나첵의 음악은 자유의 바이러스를 한껏 발산하고 있으며, 힘차게 활을 내리긋는 듯한 명쾌함과 수줍은 듯한 홍조, 깊게 간직된 슬픔 등의 다변적 감정들이 골고루 재현되고 있다.
특별히 음미되는 곡이 있다기보다는 모든 곡들이 귀에 착착 감길 만큼 호불호의 등급을 매기기 어렵다. 피아노 조곡인 <숲이 우거진 길>, 스메타나 쿼텟이 연주하는 현악 사중주곡들, 남성 이중창으로 불려지는 등 대부분의 수록곡들은 보수적인 체제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자유자재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촉촉이 감성을 적셔 준다. 영화를 보면서 텍스트와 비교하는 것도, 그리고 텍스트에서는 만끽할 수 없는 음악에 매료되는 것도 ‘견딜 수 없는’ 무언가에 감금당한 당신에게 소중한 내면 순례의 시간이 될 것이다.
<김연경>
Leos Janacek - In the mist - 2. Molto adagio
사비나가 토마스를 보내고 숨겨둔 양말을 꺼내는 장면에 처음 등장, 불안한 듯한 제 2주제가 주로 사용된다 (사진 상).
바로 이어서 테레사를 사비나의 집에 초대한 장면, 뒤에 사비나의 유리 작업 장면에도 쓰인다. 한편 제네바에서 토마스와 사비나가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아름다운 제 1주제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진 하)
프라하의 봄 - 음악제
은은하게 향기를 내는 듯한 말이 있다 - 프라하의 봄. 이곳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에겐 친숙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웬지 이 말 뒤엔 아직 파악되지 않는 비밀스러움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말이다. 프라하가 어디에 붙어있는 도시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이 말은 한번쯤 그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으리라 여겨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1968년 8월에 일어났던 체코인들의 민주화 투쟁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보도되었고 현대사에서 그 사건이 갖는 의미가 컸던 만큼 또한 자주 언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지만 이 자리에선 또 하나의 `프라하의 봄' 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매년 5월 12일부터 6월 초까지의 약 3주 간 프라하는 웅장하고 부드러운 음악의 선율 속에 휩싸인다. 북쪽의 로마라고 불리우는 고도(古都) 프라하에서 이같은 음악제가 열린다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봄이라는 계절이 갖는 화사함과 생동감, 그리고 냉정하게 판단해도 아름답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이곳 프라하에서 그 봄의 분위기는 음악제라는 모습으로 절정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1946년 처음 시작된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올해로 벌써 55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내려온 이 음악제가 힘겹고 우울했던, 그리고 때로는 환희와 영광으로 점철되었던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종전과 해방의 기쁨 속에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창단 50주년을 맞이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의 음악제가 준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의 시작이었다. 음악제가 처음 열리던 그 해 동서유럽과 구미음악인들은 화합을 상징하듯 각국에서 모여들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체코의 음악은 그 작품성을 세계인들에게 과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음악제가 시작되는 날은 체코인들이 가장 아끼는 민족음악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서거 62주년이기도 했다. 5월 11일 포스터(Foester)의 [축제의 서곡 - Festive Overture], 오스트르칠(Ostrcil)의 [십자가의 길 - Krizova cesta], 드보르작(Dvorak) [교향곡 제 7번 - 7th Symphony]으로 축제 전야의 콘서트가 꾸며졌고 다음날인 12일엔 스메타나(Smetana)의 교향시 [나의조국 Ma Vlast]이 체코 지휘자인 `라파엘 꾸벨릭' 에 의해 오전 11시 루돌피눔에서 연주되면서 본격적인 축제의 막이 올랐다(이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개막일인 5월 12일(스메타나의 서거일)에 스메타나의 ‘나의조국’이 연주되는 것은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음악제는 6월 4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안에는 3일 간의 `슬로바키아 음악의 밤'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체코 현대 음악가들의 작품 34편이 연주되었다. 당시 초청되었던 음악인들의 이름만 살펴 보아도 우리는 그 음악제가 얼마나 폭넓은 호응과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친선의 장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Leonard Burnstein과 Eugene List (미국), Charles Munch, Ginette Neveu, Calvet Quartet(프랑스), Adrian Boult, Moura Lympany (영국), Yevgeny Mravinsky, Lev Oborin, David Oistrakh (소련) 그리고 체코의 음악인들인 Jaroslav Krombholic, Rafael Kubelik, Jan Panenka, Frantisek Smetana...
이들 중 Maura Lympany 와 Jan Panenka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24일 간의 음악제는 새로운 음악과 젊은 음악인들로 넘쳐났으며 6월 4일 꾸벨릭의 지휘로 연주된 Janacek의 Sinfonietta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제의 구상은 당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론인이며 작가였던 얀 네루다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와 같은 형식의 음악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1880년대에 프라하에 있는 독일극장의 지휘자 겸 감독이었던 안젤로 뉴만 역시 네루다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로 혼란스러웠던 1940년 바츨라프 탈리흐는 프라하 5월 음악제를 준비하기도 했는데 바로 이와 같은 노력들이 결국 전쟁이 끝난 1946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47년 개최된 제2회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첫회 때와 같은 탄탄한 준비 위에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적절한 주제가 제시되지 못했고 음악인들의 초대도 인맥을 통해 이루어졌다(첫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2차세계대전 종전이라는 뜻 깊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이외에도 47년 처음 개최된 영국 에딘버러 축제[Edinburgh festival]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 두 도시의 축제들은 1회 행사로 기획되었다가 성공적인 결과에 고무되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가 음악으로만 구성되는 축제라면 에딘버러축제는 여러 분야의 예술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1948년 프라하의 봄 재단이 정부 주도하에 설립되어 음악제를 주관하게 되었다. 재정지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정부의 이념을 대변하는 관 주도 행사로 타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봄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리워져 갔다. 1950년 5월 9일 끼릴 꼰드라신[Kiril Kondrashin]의 지휘로 체코 필하모니는 도비야스[Dobias]의 칸타타{스탈린의 명령 작품번호 368 Stalinuv rozkaz c.368}을 연주했고 이듬해인 1951년엔 역시 도비야스의 작품인{조국을 건설하고 평화를 지키자 Buduj vlast, posilis mir}가 까렐 안체를[Karel Ancerl]의 지휘로 연주되었다(`나의 조국'은 연주되지 않았다). 이 작품 뒤엔 쇼스타꼬비치[Shostakovich]의 <숲의 노래 Pisen o lesich>가 이어졌는데 모두 소련의 음악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뒤죽박죽' 프로그램들이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같은 해 6월 12일에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연주된 후 `프요도로브 시스터즈 sestry Fjodorovy'가 무대에 올라와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기묘한 현상도 벌어졌다. 음악제의 절정을 피요도로브 시스터즈가 장식한 것이다. 1953년의 축제는 7월 5일에 막을 내렸는데 소련인들에 의해 진행된 마지막 공연은 모짜르트에서 씬카즈[Cincadze]의 작품에 이르는 12곡의 주제가 메들리로 연주되기도 했다.
1949년에서 1987년까지의 축제는 적절히 배치된 정부와 당의 대표들 아래 공포와 복종의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그 중에는 바츨라프 도비야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39년 동안 총 37번의 공연에서 그의 작품 27개가 연주되었는데 실제로 매년 한 작품씩은 연주된 셈이었다.
1950년대에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루마니아 - 1950년)과 중국(51년, 55년) 몽고(52년)의 예술단이 많이 초청되었고 그들은 군대음악과 민속음악을 합창했는데 실제로는 대중적인 선전가요나 민속음악풍의 이념적 색채가 짙은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의 죽음과 소련지도부의 변화 이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좀더 국제적이고 객관적인 면모를 갖춘 음악제로 거듭나기 위한 시도를 하였으나 회복은 더디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50년대의 열악했던 상태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솜씨없게 짜맞추어진 냉전 이념의 구호들은 때로 코믹한 효과를 연출해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1년엔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걸고 축제를 기념했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50주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설립 50주년, 그리고 뽈지체와 베즈두르지쩨의 크리스토프 하란트의 서거 350주년 기념.”
냉전시대의 논리가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사유의 흐름들을 막아왔던 것이 비단 체코의 상황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 우리는 또한 얼마나 철저히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차압당해 왔으며 정상적 사고 능력을 상실한 정부와 속물적인 자본주의 이념 아래서 빛나는 전통을 상실해 왔던가 - 이러한 행사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쉽게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50여 년 간 이어져 내려오는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의 역사에는 따뜻한 미덕의 순간들도 수없이 많았다. 1968년 소련의 침공이후 소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가운데서도 축제에는 대중들의 진정한 사랑을 받았던 소련 최고의 음악인들이 여전히 초청되었는데 그들 역시 소련의 침공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하며 참석을 망설였다. Svjatoslav Richter, David Oistrach, Emil Gilels와 같은 음악인들은 언제나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갈채를 받아왔다. 전율과 감동으로 사로잡히는 순간은 다른 많은 축제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여기서도 하나의 예를 통해 예술과 인간의 아름다운 만남이 사람들에게 어떤 기쁨을 던져주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체코가 낳은 유명한 지휘자 바츨라프 딸리흐[Vaclav Talich] 는 전후 질병으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일체의 다른 공식적인 음악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어렵게 음반녹음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기술했지만 그는 프라하에서의 음악제 개최를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해 온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첫 두 해(46, 47년) 동안의 행사 이후 54년 무대에 다시 설 때까지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병든 몸으로 그가 다시 개막 연주회에서 체코 필하모닉과 함께 `나의조국'을 연주할 때 연주회장 안은 청중들의 열기로 가득했으며 체코 필의 단원들도 혼신을 다해 그들의 음악을 연주했다. 비셰흐라드[Vysehrad] 블라닉[Blanik]의 마지막 부분을 연주할 때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기록영화 제작을 위해 설치한 라이트가 그의 모습을 강하게 비추었는데 그것은 마치 먹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치는 것과도 같은, 그리고 어쩌면 위대한 예술가의 머리 위로 찬란한 왕관이 씌워지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청중들은 또 한편으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질병의 고통으로 그는 더 이상의 지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거장에게 보내는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은 그토록 진심어린 것이었다.
올해에도 이러한 멋진 장면들이 연출될 수 있을까.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또 음악과 예술뿐만 아닌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이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승화시키는 사람들은 늘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던져주었다. 물론 음악 자체로도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겠지만.
올해의 축제로 눈을 돌리자. 클래식 음악 이외에도 발레 오페라 어린이합창 재즈 등 풍성한 프로그램이 우리들의 봄을 장식하기 위해 이미 준비를 마친 듯 보인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솔리스트, 연주자들이 금년에도 예외없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고 축제의 한 부분인 국제경쟁부분에서는 또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기량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축제에 공식 초청되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애석해 할 필요는 없다. 프라하의 봄도 봄이지만 서울의 봄이 먼저 가꾸어져야 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욱 절실한 과제이고 - 남북화합을 위해 세계적인 우리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이루려 했던 음악제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 기형적이고 실속 없이 커져버린 서양음악에 대한 짝사랑과 선입견부터 바로잡아 전통음악과 더불어 올바른 음악풍토를 가꾸어 내는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결코 싸지 않은 입장료 때문에 연주회장을 찾을 수 없는 다수의 서민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자신들의 축제를 즐긴다. 급속히 개방 되어가고 있는 오늘 체코의 상황에서 반전과 화합이라는 숭고한 정신을 추구했던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가 다시금 시장경쟁 체제 아래에서의 천박한 선전성 행사로 타락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겐 서양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 지식을 얻을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번쯤은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우아하고 품위 있게' 콘서트 홀을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하릴없이 시장골목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들른 조용한 찻집에서 자신의 이상형인 어떤 이와 마주친 후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글 : http://kr.blog.yahoo.com/racek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