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먹일 듯 너울거리는 첫사랑의 추억
쇼팽 [이별의 왈츠]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영혼, 피아노의 마음이라고 불려지는 영원한 로맨티스트 프레데릭 쇼팽에게는 젊은 날 고향에서 사귄 첫사랑의 연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보진스카(Maria Bszinska), 지체 높은 브진스카 백작의 딸이었다.
이 첫사랑의 연인 보진스카 양을 위해서(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해서) 작곡한 것이 유명한 내림A장조 왈츠(작품 69의 1)이다. 우리가 흔히 [이별의 왈츠]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곡이다. 이별의 왈츠를 알기 위해서는 젊은 날 쇼팽의 흔적을 쫓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의 행적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는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왈츠의 참 맛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쇼팽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프랑스인 아버지(니콜라스 쇼팽)와 폴란드인 어머니(유스티나 크르자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따라서 쇼팽에게는 폴란드적인 슬라브 혈통과 프랑스적인 서유럽 혈통이 뒤섞여 그의 음악을 형성하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요소 때문에 쇼팽은 폴란드 음악과 프랑스 음악의 장점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쇼팽의 39년의 생애도 정확히 양분되어 그 절반은 어머니의 나라 폴란드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파리에서 죽었다. 죽은 뒤 성 마들렌느 대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심장만 따로 채취되어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보내졌고 나머지 시신은 파리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살아서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나누어 살더니 죽어서도 결국 폴란드와 프랑스로 나누어 묻히게 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쇼팽 음악의 비밀이 있다. 39년의 전 생애를 통해서 무수히 쓰여진 피아노곡들은 모두가 이 두 나라의 토속성과 살롱 취향적인 성격들을 잘 반영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20세 이전까지의 음악이 폴란드적이라면, 그 이후의 음악은 프랑스적이라고 나누어 말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의 살롱가로 진출한 것이 그의 나이 20세 때인 1830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별의 왈츠]라는 피아노 곡이 쓰여진 1835년은 그가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의 작품이다. 쇼팽의 나이 25세 때에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쇼팽으로 하여금 이 멜랑콜릭한 피아노 음악을 쓰게 했던 마리아 보진스카는 어떤 여성인가.
그녀는 쇼팽이 피아노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인 10대 후반의 소년기에 같이 음악공부를 했던 소꼽친구이자 여자친구였다. 쇼팽이 망명 프랑스인의 아들이었던 데 비하여 보진스카는 전형적인 귀족 신분의 딸이었다. 그러나 꿈같은 10대 청소년기에 이러한 신분상의 차이가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들은 바르샤바에서 상큼한 우정과 연정을 뒤섞어 주고받으며 친구이면서도 연인이, 연인이면서도 친구인 묘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중 보진스카는 쇼팽이 아직 폴란드를 떠나지 않고 있을 때에 아버지를 따라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이주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훌쩍 떠나버리고 난 뒤에 쇼팽은 보진스카의 존재를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오직 마음일 뿐 다시 만날 길이 묘연했다.
보진스카가 폴란드를 떠난 뒤에 쇼팽도 1830년 11월 1일 고국을 떠나 그리고 파리에서 1832년 2월 20일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 날의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어 파리 사교계는 폴란드에서 온 청년 피아니스트 쇼팽의 이야기로 화제가 분분했다.
1835년 5월에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병세가 악화되어 독일의 온천지로 유명한 칼스바트로 요양을 떠났다. 효성이 지극했던 쇼팽은 칼스바트로 아버지를 찾아가 문병하고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이 도시에는 고향 바르샤바에서 첫 연정을 나누었던 마리아 보진스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쇼팽과 보진스카는 헤어진지 6년만에 드레스덴에서 다시 만났다. 보진스카는 19살의 성숙한 처녀로 변하여 쇼팽을 맞이했다. 크고 검은 눈을 가진 마리아 보진스카는 피아노 연주도 잘하여 쇼팽을 즐겁게 해주었다.
쇼팽은 드레스덴에서 한달 정도를 머무르면서 보진스카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이 소년 소녀였을 때는 아직 서로가 사랑이란 말을 주고받을 수 없었으나, 25세 청년과 19세 처녀로 성숙한 지금에 와서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쇼팽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진스카란 여성과 결혼이란 문제를 생각했고, 실제로 그녀에게 결혼하고 싶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보진스카도 쇼팽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보진스카의 부모였다. 그녀의 부모는 한사코 반대였다. 부모의 반대가 너무나도 완강하여 쇼팽은 드레스덴에 머무른 지 1개월만에 이 실연의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드레스덴을 떠나기 직전에 쇼팽은 내림A장조로 된 왈츠 한 곡을 작곡하여 보진스카에게 바쳤다. 이것이 쇼팽 스스로 제목을 붙인 [이별의 왈츠]이다. 처음으로 맛본 사랑의 좌절, 거기에 뒤따른 씁쓸한 이별, 이런 감정들이 아련한 비애가 되어 스물 다섯 청년 작곡가 쇼팽의 심금을 울려 주고만 것이다.
쇼팽은 이 아름답고도 슬픈 첫사랑의 추억을 고이 간직하기 위하여 악보 말미에다가 <1835년 9월 24일, 드레스덴에서>라고 써놓았다. 그리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서랍 깊숙히 파묻어 두고 출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죽고난 뒤에야 이 왈츠곡은 출판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혼할 마음을 품었던 자신의 연정을 남몰래 고이 숨겨두고 싶어서였을까?
이렇게 하여 쇼팽은 드레스덴에서 소중한 사랑을 잃어버린 대신 아름답고도 우울한 정서로 가득 찬 [이별의 왈츠] 한 곡을 얻었다. 그리고 곧 파리로 돌아와 피아노 연주와 작곡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보진스카와의 이별은 그에게 전혀 뜻밖의 새 출발을 안겨 주었다. 저 유명한 조르쥬 상드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쇼팽이 리스트의 소개로 상드를 만나게 된 것은 드레스덴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836년이다. 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상드와의 사이에 남겨진 러브 스토리는 새삼스럽게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겠으나, 확실한 것은 쇼팽이 상드를 결혼의 대상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쇼팽하면 조르쥬 상드라는 여인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상드 이전에 마리아 보진스카란 첫사랑의 상대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그녀를 위해서는 [이별의 왈츠] 한 곡밖에 쓰지 않았지만, 쇼팽의 청춘기에 강렬한 사랑을 일깨워준 이 왈츠곡의 분위기는 두고두고 우리의 심금을 울려준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추억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쇼팽에게 있어서의 첫사랑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지막 사랑이었다는 데에 보다 큰 아픔이 있다. 4분 정도의 짧은 피아노곡 [이별의 왈츠]를 들으면, 거기에 쇼팽이 바쳤던 첫사랑의 연가가 흐른다.
그 사랑의 주인공은 마리아 보진스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