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에 그는 다 합하여 144개의 가곡을 작곡하였으니, 그 속에는 <나그네의 밤노래>, <어부>, <최초의 상실> 및 <마왕>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왕>이 라이프찌히의 브라이트코프-헤르텔 출판사에 보내졌을 때, 출판사측에서는 이 작품에 사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1768년에 탄생하였던 드레스덴의 왕실악단의 악장 프란쯔 슈베르트의 명의를 남용한 것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해명을 위하여 <마왕>은 드레스덴의 슈베르트에게 보내졌으며, 또 돌아온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마왕>이라는 칸타타를 작곡한 일은 결코 없으나, 그러나 나로서는 어떠한 자가 그와 같은 졸렬한 작품을 써 보냈으며, 또 나의 이름을 악용하였는지를 알아내야 할 것 같소."
프란쯔 슈베르트의 연주는 언제나 악보 전체에 능통한 훌륭한 솜씨였으며, 또 연탄연주(連彈演奏)에 있어서도 탁월한 공연자였다. 비록 사람을 현혹시키는 찬란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의 짧고 굵은 손가락으로 가장 힘든 소나타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 낼 수 있었다. 그의 손은 마치 "쥐가 움직이 듯" 건반 위를 뛰어다녔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거의 오전 중에만 일을 하였고, 점심 후에는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혹은 다방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두서너 시간을 보내고, 작은 잔의 검은 커피나 홍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는 것이 상습이었다. 그는 그를 따르는 주변 사람들의 활기를 돋구어 주는 비상한 인품을 지니고 있던 탓으로 교우관계가 넓었다. "그의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성품은 이루 다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는 질투라든가 악의 같은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의 연주를 완벽하게 해냈을 때에는 항상 기뻐하였으며, 그러한 때에는 으례 "슈베르트는 두 손을 모아 입에다 대고 황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떠들어대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고, 그의 웃음은 언제나 억제하는 듯한 참는 웃음이었다.
무도회의 연주에도 자주 나갔으나 그 자신이 춤추는 일은 결코 없었다. 슈베르트의 체격은 보통의 크기이기는 하였으며, 곱슬머리였다. 수수한 모습에 둥뚱한 편이며, 외관적인 것에 무관심하였던 그는 여자들의 눈에 띌만한 인상은 거의 없었다. 고도의 근시였던 슈베르트는 잘 때에 안경을 벗는 것을 잊을 때가 가끔 있었으나 "그의 빛나는 눈에서는 첫눈에 불타는 듯한 열기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작곡하고 있을 때의 슈베르트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여겨졌으며, 그의 눈은 유리알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휘텐브레너). 그는 아무 고생도 없이 작품이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것같이 작곡하였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나는 마치 신(神)처럼 살며 작곡하고 있소"라고 그는 1818년에 친구에게 편지 쓰고 있다. "그의 성격에는 강렬한 긴장감과 대치하는 속에서 작품을 완수함으로써 심원한 경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철저한 자기 고백의 표백을 위하여서는 그의 작곡의 폭이 넓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슈베르트의 <하늘(天空)의 시경(時經)>은 초시간적 감정, 즉 시갼과 현실을 초월한 마음의 부유상태(浮遊狀態)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암스).
슈베르트는 언제나 모짜르트와 베토벤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베토벤을 슈타이너 출판사에서 가끔 보게 되었으나 말을 걸어 볼 용기는 없었다. 8개의 변주곡(작품 10)은 "베토벤의 존경자이며 찬미자였던 프란쯔 슈베르트로부터 베토벤에게 바쳐진 작품"이며, 슈베르트는 수개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베토벤의 조카인 칼과 함께 노름을 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임종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슈베르트의 가곡을 읽고, 그 작품의 위대함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해가 갈수록 슈베르트의 몸은 더욱 둥뚱해졌고, 술도 점점 과음하게 되었다. 그의 전기 작가인 하인리히 폰 헬보른 박사는 여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여 슈베르트가 포도주의 찬미자였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간혹 자신이 천진난만하게 과음한 때도 있었던 탓이겠지만, 그를 본격적인 술꾼으로 낙인찍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테이블 위에 좋은 포도주가 많이 놓여 있을 때에는, 프란쯔를 잘 살펴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는 최초의 질병은 그의 유명한 교향곡 <미완성>이 완성된 1822년 12월에 발병하였던 것이다. 이미 1907년에 O. E. 도이취는, 당시 심한 성병 때문에 병원에 누워있던 슈베르트가 거기서 처음의 <물레방앗간 노래>를 작곡한 것이라고 확증하고 있다. M. 폰 슈빈트에게 쓴 편지 내용으로부터 알수 있듯이, 그는 두부(頭部)의 발진 때문에 머리털을 베어내야만 하였다. 그 때문에 슈베르트는 머리털이 다시 자랄 때까지는 가발을 쓰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1824년 2월 22일에 슈빈트는 쇼오버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 주고 있다. "슈베르트는 아주 좋아졌소. 그는 그의 가발을 벗었소." 그리고 얼마 후, 3월 6일에는 "슈베르트는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소. 그는 새로운 치료를 며칠 동안 받는 사이에 병세가 풀리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하고 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침울감이 뒤따르게 되었다. 1823년 8월 14일에 슈베르트는 쇼오버에게, "내가 또 다시 완전히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지가 아주 의심스럽소" 라고 쓰고 있다. 이미 같은 해의 11월에는 재발증(再發症)이 나타났다. 그는 1824년 3월 31일에 로마의 쿠펠비이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한 마디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련한 인간으로 느껴집니다. 건강은 전혀 회복될 가망이 없이 자포자기가 되어 항상 모든 사정을 비관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가장 빛나는 희망이 모두 허무로 뒤바뀐, 그리고 사랑과 우정의 기쁨을 가장 큰 고통으로 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인간을 상상해 보세요."
학교를 그만두고 난 이후의 슈베르트의 생활은 너무나 궁핍하였다. 피아노의 임대료 때문에 애쓴 일도 한 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대개 그는 친구들 집에 동거하였으며, 또 식당의 식비도 친구들이 지불해 주었다. 1818년의 겨울에 안젤름 휘텐브레너가 이 작곡가를 처음으로 방문하였을 때, 그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그리고 난방도 없는 작은 방에서 낡고 해진 잠옷을 걸치고 얼어 떨면서 - 그리고 작곡하고 있는 슈베르트"를 보았다. 1820년경에는 창작력이 크게 저하되었으나, 1823년에는 다시 예술가로서의 활력이 소생되었다. 1821년에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출판해 주려는 회사조차도 없었다. 슈베르트의 악보는 그 반주가 너무 힘들다는 것과 작곡가가 너무나 무명(無名)이라는 이유 때문에 출판되지 않고 보수도 없이 그대로 반환되어 왔다. 결국은 그의 친구가 인쇄비를 자진 부담하기에 이르러 <마왕>은 첫 번째 작품으로 인쇄되었던 것이다. 1825년 11월에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연봉 500굴덴의 제2궁정 오르간 주자의 지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모로 판단에 고심한 슈베르트는 결국 거절하였다.
그는 1825년 말까지는 훨씬 좋은 상태였으나 곧 또다시 앓기 시작하였다. 1826년의 여름에는 심한 두통(頭痛)이 나타나, 1827년 초에 슈베르트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늘 나타나던 그 두통이 다시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연주회가 개최되었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병이 재발된 후 여러 가지 병세가 더욱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항상 그전과 다름없는 불안에 찬 창작열에 사로잡혀 있었다. 1828년의 주요작품에는 저 유명한 3개의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와 다장조 교향곡 외에 <겨울나그네>가 있다. 이 가곡집을 완성하고 나서 슈베르트는 현저하게 쇠약된 상태였으나 아주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J. 폰 슈파운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얼마 동안 침울한 기분에 잠겨 있었고 몸도 쇠약해진 것같이 보였다. 무슨 이상이 있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이제 당신들도 곧 듣고 알게 될 거야"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말하였다. "오늘 쇼오버 있는 데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소름이 끼칠 만한 가곡집을 들려 드리려고 하오. 다른 가곡의 경우보다도 이번의 이 작품들을 작곡하느라고 훨씬 나의 몸이 쇠약해졌소." 그는 우리들에게 감격한 음성으로 <겨울나그네> 전곡을 불러 주었다. 우리들은 이 가곡의 침울한 가락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고, 쇼오버는 그 중의 한 곡 <보리수>만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였다. 슈베르트는 거기에 대하여 다만 다음과 같이 덧붙였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작곡한 어떤 작품보다도 이 가곡집을 사랑하고 있소. 당신들도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오."
1828년 9월에 슈베르트는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현기증과 [충혈증세]가 나타났다. 10초에 그는 헝가리의 아이젠슈타트로 3일간의 소풍을 떠났으며, 그곳에 있는 하이든의 묘소에서 서성거렸다. 그의 최후의 작품은 1828년 10월에 작곡된 <타우벤포스트(비둘기 우편)>이다.
10월 31일 그는 형제들과 함께 식당에서 생선요리를 먹으려고 했다. 그는 처음에 한입 먹고 나서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음식을 보기만 하여도 메스꺼워지니 중독된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후부터 슈베르트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11월 3일에 그는 헤르날스구(區)의 성당에서 동생 페르디난트의 <레퀴엠>을 듣고, 이어서 3시간 정도의 산책을 하였다. 11월 4일에 그는 지몬 제히터의 문하생으로 등록하였다. 이 스승을 통하여 둔주곡(遁走曲)의 주제에 대한 그의 예술적 지식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사정을 말하지 않은 채 드러누었으며, 식당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미 이전부터 식욕을 잃고 있는 상태를 표시하여 왔던 터이므로 그의 상황에 대하여 눈치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슈베르트는 우선 <겨울나그네>의 교정을 마치기 위하여 매일 두서너 시간만이라도 일어나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너무나 지쳐 버려 이러한 일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11일부터 슈베르트는 완전히 드러눕게 되었고 상태는 쇠퇴일로였다. 그는 단지 심한 권태와 피로감, 그리고 불면증에 대하여만 호소하였을 뿐이며, 통증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 같다. 11월 12일에 그는 쇼오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쓰고 있다.
"친애하는 쇼오버에게! 나는 앓고 있소. 벌써 11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아무 것도 마시지 않고 있소. 그리고 안락의자와 침대 사이만을 휘청거리며 왔다갔다하고 있을 따름이오. 리나가 나를 치료해 주고 있소. 내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나 자신이 그것을 직접 구할 수밖에는 없소.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나에게 읽을 거리라도 마련해 주려는 성의가 아주 고맙소. 나는 쿠우퍼의 것은 읽었소. 모히카너의 끝부분, 루우첸 및 안지이들러 등. 혹시 쿠우퍼의 책으로 또 다른 것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그것을 커피점에 있는 폰 보그너 부인에게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소......"
슈베르트는 약을 복용할 때 아주 정확을 기하였으며, 그는 그러한 목적으로 자기의 침대 옆에 회중시계를 걸어 놓았다. 치료에 임한 의사는 궁정의(宮廷醫)인 에른스트 리나 폰 자렌바하였으나 그 의사 자신도 신병을 앓게 되어, 이때부터는 군의관 대위인 요제프 폰 훼링이 치료를 맡게 되었다. 그는 11월 16일에 요한 바프티스트 비스그릴과 함께 슈베르트의 병상에서 합동진찰을 실시하였다. 그 진찰 결과는 슈베르트의 병이 신경열(神經熱)로 전화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게 되어, 이 두 명의 의사는 차(茶) 사혈(瀉血) 발포성고약(發泡性膏藥) 및 겨자포대 등의 요법에 의하여 치료하기로 하였다. 이때의 프란쯔 슈베르트의 치료비를 부담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동생의 청산서가 있다.
11월 17일에 슈베르트는 머리의 열기와 무력감에 대하여 표명하고 있다. 친구인 바우에른펠트와 라하너가 슈베르트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수 시간 동안 방문자들과 담화하였고 또한 새로운 오페라 대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지쳐 있었으며, 또 의기소침의 상태였다. 슈베르트는 고통 속에 누워 있었으며, 머리의 열기와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었으나, 아직도 오후 사이에는 정신이 온전하여 헛소리할 징조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때가 되자 갑자기 헛소리를 시작하면서 의식장애가 나타나 이 상태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11월 18일, 하루종일, 환자는 자기 침대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썼으나, 이것은 자기 자신이 낯선 방에 누워 있다는 착각 때문인 것이다. 슈베르트는 위치감각을 상실하였고, [아냐, 틀렸어. 여기에는 베토벤이 누워 있지 않아!]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의사 쪽을 응시하며 벽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나의 끝판이군"
슈베르트의 부친이 기재한 가족목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프란쯔 페터......1828년 11월 19일 수요일 오후 3시 신경열(神經熱) 사망(+), 1828년 11월 22일 토요일 매장.]
슈베르트는 죽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잠자고 있는 사람처럼 죽음의 침대 위에 누어 있었다. 그의 골격은 베토벤의 골격을 발굴하였던 1863년과 1888년에 같이 발굴되었다. 그의 골격은 상세하게 사진으로 수록되었으나 여기에는 매독성 골변화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1888년에 슈베르트의 유해는 비인의 신중앙묘지의 베토벤의 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묻히게 되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에 대한 진단으로는 주로 장티푸스설이 주장되어 왔다. 1921년에 의사인 w. 슈바이스하이머도 역시 [슈베르트의 병이 장티푸스의 경우와 같이 3주일간 계속되었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에서는 슈베르트가 1828년 가을에 이미 현기증가 두통 때문에 작곡에도 큰 지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사경(死境)체 처한 환자였다는 사실이 묵인되어 있다(맨 끝에서부터 둘 째 번의 피아노소나타 가장조의 안단티노의 전개과정을 참조하기 바람!). 1828년 10월 중순에 A. 쉰들러는 슈베르트에게 개인연주회를 열게 하기 위하여 그를 부다페스트로 초대하였으나 당시의 슈베르트는 이미 회답편지를 쓸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관례적인 [티푸스]의 진단설에 부합되지 않는 증상으로서는 최후까지 의식이 보존되었던 사실, 발열이 없었던 사실(마지막에 가서야 발열이 있었음), 설사가 없었던 사실, 그리고 크라이슬레폰 헬보른에 의하여 보고된 바 있는 불면증 등이 열거될 수 있다. 사망하기 7일 전까지만 해도 슈베르트는 독서할 책을 찾았고, 또 사망하기 2일 전에는 새로운 오페라 대본을 요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남겨져 있는 자료가 너무도 적은 탓으로 두통이라든가 구토, 식욕감퇴 및 극도의 피로감 같은 증상만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후에 이르러 의식장애와 위치감각의 마비 및 발열이 나타났던 사실이 추가된다. 당시의 불분명한 진단결과인 [신경열(神經熱)]이라는 것은 장티푸스뿐만 아니라 헛소리 불면증 사망 전의 의식장애 등, 현저한 뇌증상(腦症狀)을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열성(熱性)질병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슈베르트의 사병(死病)은 특이한 원인으로 유발된 뇌동맥의 폐색(閉塞) - 뇌저부(腦低部) 또는 실비 와(窩)의 영역 - 에 기인한 임상증상과 너무나도 유사한 데가 많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전에 전염되었던 성병의 후발증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의 파움가르터너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추리보다도 훨씬 진실에 접근된 견해임이 분명하다. [1823년 초에 슈베르트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 그 병이 설사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몸에서 그 병을 제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1949년에 피부병학자로 저명한 에리히 호프만 박사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질병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슈베르트의 질환은 음악역사가인 L. 쉬이더마이어에 의하여 보존된 처방전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확인되었다. 의사들의 비밀엄수의 의무도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매독의 은폐를 위하여 모든 수단이 강구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인 증명을 큰 난관에 처하게 한 것이다. 편지 처방전 및 그 외의 증거자료를 제거한 것이 오히려 전문가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토벤의 넓은 그림자 속에서, 순박하고 겸허한 슈베르트는 소리도 없이 사려져 갔다(다암스). 베토벤은 친구들의 모든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말년에는 유명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사망하였을 당시에 다소나마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가곡 작곡가로서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뜻할 뿐이었다. 슈베르트는 연극배우인 안쉬쯔에게 [나에게는,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간처럼 여겨질 때가 가끔 있소]라고 말한 일이 있지만, 그는 소박한 자기상실 속에서 생전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슈베르트의 그와 같은 면모는 슈파운이 슈베르트를 평한 말 속에도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무시당하는 일에는 완전히 익숙되어 있는 사람같이 느껴진다. 그로서는 차라리 그렇게 하는 편이 속박감이 덜한 것이므로, 그것이 그의 마음에는 오히려 편안하였을런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가 어린이처럼 소박하였고 한 명의 후원자도 갖지 않았으며, 또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8년의 파가니니의 아다지오곡 속에서 [천사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고 한 영원의 몽상가이며 낭만의 탐닉자였던 슈베르트 - , 그는 너무나 일찍이 병에 쓰러져 간 음악의 천재이었다.
베토벤의 경우와 같이, 당시의 신문은 슈베르트의 서거에 관하여 취재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10년이 경과된 후에, 로베르트 슈만은 페르디난트 슈베르트의 집에서 다장조 교향곡의 총보를 발견하여, 그는 이 사실을 불타는 듯한 문장으로 <음악신보(音樂新報)>에 소개하였으며, 1839년에는 드디어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첫 연주회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슈만은 슈베르트를 따를 제2인자가 없다는 것으로 그의 진가를 평가하여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기고 있다. [시간, 그것은 그리도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것을 낳아 주었으나, 슈베르트와 같은 악성(樂聖)을 다시 세상에 내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