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영국 모음곡 6번 BWV 811 - Sviatoslav Richter│바로크 음악
1. Prelude - 2. Allemande - 3. Courante - 4. Sarabande - 5. Double - 6. Gavotte I - 7. Gavotte II - 8. Gavotte da capo - 9. Gigue
I. Prelude II. Allemande III. Courante IV. Sarabande & Double V. Gavotte I & II Ⅵ. Gigue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Richter, Sviatoslav(20th Mar. 1915~1st Aug. 1997) [The holy devil, or satanic angel?] 1. Curriculum Vitae
20세기의 피아니스트 중에 음악의 완성도, 레파토리의 넓이, 개성, 설득력과 매력 등을 합쳐 평가할 때 리히테르를 능가할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위의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Best 3 안에 꼽힐 사람은 아르투르 루빈슈타인과 그 뿐이라는 데는 별로 이의가 없을 줄 믿는다(아라우의 경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취향에 그리 맞지 않아 보이며, 호로비츠는 레파토리를 편식한다는 문제가 항상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스비아토슬라프 테오필로비치 리히테르(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는 1915년 우크라이나 지토미르(Zhitomir)에서 태어났다. 조부 때부터 러시아에 살았으며, 부친은 빈 음악원에서 배운 후 러시아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부친의 제자였다. 부친은 '슬라바'의 어린 시절 초보만 가르쳐 줬을 뿐, 대부분의 초기 실력은 그가 독학으로 쌓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나중에 스승이 된 하인리히 노이하우스(Heinrich Neuhaus)가 말하듯이, 상당수의 피아노 교사들이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바빠 자식들에게 시간을 쏟기 힘들다는 데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가 독학을 하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우리는 그의 말만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16세 때 이미 리스트의 난곡들을 어렵지 않게 연주하고 오케스트라 악보를 단번에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엄청난 초견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신에게 받은 재능'이라는 찬사를 보내더라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19세 때 리히테르는 쇼팽 프로그램으로 공개 연주를 열어 성공하고, 오데사 오페라에서 그 엄청난 초견 능력을 살려 코레페티퇴르(korrepetiteur; 연습에서 오케스트라 악보를 피아노로 연주해 주는 반주자)를 맡았다. 이 때 지휘자로 있었다는 얘기는 명백히 잘못이다(참고; '레코드 에러' 페이지). 리히테르의 가족 얘기는 항상 부수적으로 등장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독일계라는 이유 때문에 1941년 독일의 침공을 받자 소련 비밀경찰에게 암살당했으며, 어머니는 알고 지내던 독일계 사람과 함께 독일군을 따라 서독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 있던 리히테르와는 연락도 끊어졌으며, 리히테르는 부모가 모두 사망했다는 연락만을 받았다. 이후 1960년 리히테르가 첫 서방 연주회를 미국으로 와서 열고, 카네기 홀에서 연주한 후에야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리고 리히테르는 1945년 소프라노 니나 도를리악(Nina Dorliak)과 결혼(?)했는데, 실제 공식적으로 결혼 선언은 한 적이 없었으나 그 이후 니나는 항상 리히테르와 같이 다니면서 그의 뒷받침을 해 주었으며, 리히테르는 물론 니나의 고정 반주자로 출연했다고 한다. (둘은 물론 같은 집에서 살았다)
리히테르의 모스크바 공식 데뷔는 1940년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6번이었는데, 작곡자가 직접 그의 연주를 듣고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내 작품을 전혀 새롭게 들리게 만든다'고 프로코피에프는 그를 격찬했으며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를 중단시킬 정도로 깐깐한 사람이었음을 감안하자 - 리히테르는 후에 같은 작곡가의 7번과 9번도 초연했다(참고로, 8번은 길렐스가 초연). 9번은 아예 리히테르에게 헌정되었다. 리히테르가 Melodiya와 EMI, DG등에 남긴 많은 프로코피에프의 레코드는 리히테르 최상의 상태를 들려 줌과 동시에, 아직 교과서로 대접받고 있다. 1945년 리히테르는 전 소련 연주가 콩쿨에서 우승하고, '프라하의 봄' 등에도 출연하여 동구에서는 이미 30대에 '현대의 리스트'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서방 연주 여행이 늦었기 때문에, 서방의 애호가는 그를 귓소문 또는 드문 Melodiya 음반으로만 들을 수밖에 없었으며, 1955년 미국과 유럽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길렐스 등 소련 최고의 예술가들이 여행했을 때도 리히테르는 거기 빠져 있었다. 물론 길렐스가 파리에서 "리히테르를 기다리시죠"라고 선언하기는 했어도, 리히테르의 이름을 서방에 확실히 알린 두 사람은 글렌 굴드와 반 클라이번이다. 글렌 굴드는 1957년 모스크바 연주 여행을 왔다가 리히테르의 연주회에 참석했다. 첫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의 소나타 D.960이었는데, 리히테르의 Melodiya 음반을 들으신 분이라면 그의 1악장 템포가 얼마나 느린지 잊기 힘드실 것이다. 굴드 왈, "그 순간 나는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음악 전달자를 보고 있었다." 반 클라이번은 그 유명한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했다가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었다. 그는 흥분된 얼굴로 단언했다. "내가 들은 중 가장 강력한 연주다." 사족이지만, 반 클라이번이 연주할 때 심사위원석에는 리히테르가 있었는데, 10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대부분의 경쟁자들에게 0점을 주었다. 그 이후 리히테르에게는 콩쿠르 심사위원 위촉이 간 적이 없다고 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흥행사 솔 휴로크(Sol Hurok)는 그 이후 리히테르를 초청하려고 노력했으나, 이 계획은 1960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시카고 심퍼니와 라인스도르프의 지휘로 브람스의 협주곡 2번을 연주했고, 이 연주의 인상이 어땠는지는 연주회 직후의 녹음(RCA)으로 추측할 수 있다. 카네기 홀에서 그 후 열린 전설적인 연주로 그의 명성은 완전히 확립됐다. 다음 해부터 서유럽을 연주 여행하면서 그는 명실공히 호로비츠, 제르킨, 루빈슈타인 등에 비견할 수 있는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올라섰다. 일본 및 최만년(1994년)에 찾아온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를 여행했는데, 1968년인가 소련의 체코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미국에서 만난 이후 "왜 예술에 정치를 관계시키는가"며 미국은 두 번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1994년 4월 20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만 79세의 나이로 프로코피에프, 스크리아빈, 라벨의 곡으로 리사이틀을 열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공산주의 시대에도 소련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는데, 만년에는 주로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1997년 모스크바에서 영면했다.
2. The art of Richter
리히테르의 예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전의 거장들은 전혀 다른 곡을 연주하더라도 어딘가 닮은 모습을 찾을 수가 있었는데, 리히테르는 그렇지 않다. 그는 문자 그대로 카멜레온이며, 곡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적응력은 거장들 사이에서도 유례가 거의 없는데, 오직 루빈슈타인만이 이와 견줄 수 있을 뿐이다(루빈슈타인도 바흐에는 거의 도전하지 못했다). 가끔 나오는 말인데, Melodiya에 있는 녹음 중 바흐 WTC(평균율)와 차이코프스키의 소나타를 들으면서 같은 사람이 연주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흐의 온화한 해석과 차이코프스키 혹은 베토벤의 강력하고 밀어붙이는 박력 사이에 외관적인 공통점을 거의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만들어내는 소리 자체도 연주환경 또는 피아노에 따라 천차만별로 들린다. 비슷한 시기의 녹음들을 골라도, 1961년의 EMI 녹음인 슈만 '환상곡'과 베토벤 '템페스트'의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둥글고 모나지 않은 음과, 같은 해의 리스트 협주곡 2곡(Philips)의 화려하고 밝은 음, 바로 다음 해의 실황 녹음인 바흐 평균율 발췌(DG)의 따스하고 퍼져나가는 듯한 부드러운 소리 등 놀랄 만큼 그의 음향은 다양하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라인스도르프 지휘의 브람스 협주곡 2번(RCA)의 단단한 소리, 1971년의 슈만 '교향적 연습곡'(Melodiya)의 놀랄 만큼 여물고 선명하며 강력한 인상을 주는 음향을 들어 보시라. 박하우스, 켐프, 호로비츠, 루빈슈타인 등과 비교하면 리히테르의 어떤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가가 명백해질 것이다. [ 나중에 안 일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기제킹과 마찬가지로 전혀 피아노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피아노가 바뀌어도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제킹과는 달리,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아주 상태가 나쁜 피아노에서 훌륭하게 연주한 적도 있었다... 내가 상태가 좋으면 자신의 소리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이러니 소리가 연주회마다 그렇게 달랐던 점이 이해가 간다.] 위에 인용한 사람들처럼 '개성적인 음색'이 매력이 아니라면, 무엇이 리히테르의 연주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는가? 물론 어떤 곡에서도 막히지 않는 초절적인 기술이나(그는 여행 중에도 하루 7시간은 꼭 연습했다고 한다), 거의 광란적인 1958년의 소피아 연주 실황의 마력적인 분위기 등도 해답이 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예외가 많기 때문에 한 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곡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과 '일관된 자기 주장과 그것을 관철하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노이하우스는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곡 전체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그는 수평적인, 곡 전체를 길게 조망하는 시각을 지녔다"고 말한다. 곡 전체를 궤뚤어보는 그의 능력으로, 비교 대상이 많은 베토벤 '열정' 소나타의 1960년 RCA 녹음을 예로 들도록 하자. 1악장은 느리지만 긴장이 가득하며, 3악장은 놀랄 만큼 빨리 흘러가다가 코다에서는 거의 광폭할 지경이다. 노이하우스는 "'열정'의 1악장은 대부분 지나치게 빨리 연주되고 있다"고 말한 일이 있는데, 동문인 길렐스의 1972년 DG 녹음과 비교하면 템포 설정은 뚜렷하게 유사하다(물론, 길렐스 쪽이 음악이 약간 얌전하게 들리는 편이다). 리히테르의 템포 운용이 주는 인상은 '단지 과격하다'로 끝나지 않는다. 단지 빠르기가 문제라면, 굴다의 1967년 녹음(Amadeo)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내 취향으로 리히테르의 이 음반이 굴다의 것보다 매력이 있는 이유는, 숨막히는 흥분과 절정감이 너무 생생하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3악장으로 가면서 점점 빠르게 취하는 템포는 곡 전체에 운동감과 추진력을 부여하는데, 특히 코다에서는 정말 거의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굴다만 빼고) 엄청나다. 전설적인 1960년 미국 데뷔 때의 카네기 홀 실황(CBS)의 같은 곡 연주는 이보다 더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음악이 압박감을 줄까? 그의 다른 측면을 보기 위해서는 1961~63년 로스트로포비치와 연주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집(Philips)으로 얘기하는 편이 좋다. 오히려 이 녹음에서는 로스트로포비치보다 리히테르가 더 돋보인다. 뛰어난 기술은 기본이며, 로스트로포비치의 큰 스케일에 결코 밀리지 않는 집중력 넘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리히테르에게는 드문 전집 녹음인데(다른 전집은 바흐 WTC 뿐이다), 거의 만 2년에 걸쳐 녹음되었으나 전 5곡이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피아노만으로는 어느 다른 피아니스트와 비교하더라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 연주임에 틀림없다.
독주곡에서는 바흐 WTC가 내용이 매우 충실하지만, 그의 개성을 알기 위해서는 슈만 '교향적 연습곡'(Melodiya)의 강렬한 폭발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슈베르트는 곡에 따라 다소 논란이 있으나 슈만은 거의 만장 일치 수준으로 칭찬을 받는데, 나도 거기에 동감한다. 이 열혈파 피아니스트는 슈만의 변덕스러운 여러 기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그의 장기인 강력하고 스케일 큰 표현력을 십분 발휘한다. 슈만의 다른 음반으로는 협주곡(EMI/마타치치 지휘), 환상곡(EMI), 소나타 2번, 나비, 빈 축제의 어릿광대(EMI), 후모레스케와 환상 소곡집 발췌(Melodiya), 아베그 변주곡과 노벨레텐, 토카타 외(DG), 갖가지 작품(Melodiya) 등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다음으로 들 것은 베토벤 초기~중기 소나타들로, RCA, Philips, EMI, Melodiya 등의 여러 레이블에 녹음을 남겼다. 최만년의 녹음들을 빼고는, 어느 것이나 모두 강렬한 개성과 긴박감이 잘 드러난 연주들이다. 슈베르트 소나타들도 극히 개성적이다. 방랑자 환상곡과 13번 D.664(EMI)는 거의 이 곡의 한 기준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며, 9,11,13~17,19,21번(Melodiya), 18번(Philips)등 많은 소나타 녹음은 그를 슈베르트의 달인으로 추천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개성적인 것으로 17번과 21번을 추천하는데, 특히 21번의 템포 설정에는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베토벤의 변주곡집(Melodiya)과 디아벨리 변주곡(Philips, 실황) 등도 좋다. 협주곡으로 들어야 할 것은 위의 브람스 2번(RCA)외에 라흐마니노프 2번(DG), 베토벤 3중 협주곡(EMI), 리스트 1,2번(Philips), 그리그(EMI), 브람스 2번, 바르토크 2번, 프로코피에프 5번(EMI/모두 마젤 지휘), 드보르작(EMI)등인데, 모두 개성과 품격 넘치는 명연주로 협주곡에서 리히테르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카라얀의 협연인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1번(DG)도 있는데, 이 곡을 나는 이런 방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지만 아뭏든 너무 유명하기에 언급한다. 그 외에는 바흐 1번(Melodiya), 베토벤 1번(뮌시, 에셴바흐; RCA), 3번(잔덜링/DG, 무티/EMI), 글라주노프, 프로코피에프 1번, 생상 5번(Melodiya), 슈만, 프로코피에프 5번, 모차르트 20번(DG), 22번(EMI)등이 있다.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은 리히테르의 실황 녹음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리히테르처럼 경우에 따라 들끓어오르는 기질을 보여 주는 사람에게는 실황 녹음이 아주 적합한데, 전설적인 미국 데뷔 때의 카네기 홀 실황(CBS)을 구하고 싶으나 CD로는 신뢰가 좀 덜 가는 Doremi의 발매로밖에 구할 수 없으므로 다른 것을 선택하자면 아무래도 1958년 소피아 실황(Philips)이 우선이다. 이렇게 불타오르는 리히테르의 모습은 정말 다른 레코드에서는 보기 어렵다. 독주는 아니지만, 1968~72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공연한 일련의 모스크바 음악원 실황녹음(Melodiya)은 정말 훌륭하다. 특히 1968년 오이스트라흐의 60세 기념 연주회의 프랑크 소나타는 두 사람의 대등한 융합, 실황의 열기와 터질 듯한 긴장감, 압도하는 스케일에서 어떤 음반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과장이 아니다!). 실황의 열기 속에서도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하는 리히테르의 자제력이 이 음반들을 성공작으로 만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마 이 정도로 음악에 과감히 도전하기는 힘들리라 본다. 리히테르의 이런 도전 정신(반드시 레파토리 측면만에서가 아니라)은 요즘의 피아니스트들이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다른 실내악 실황이라면 보로딘 4중주단과 연주한 브람스 4중주곡 2번, 드보르작 1,2번(Philips)등을 권하고 싶다. 다른 레코드들에 대해서는 내가 오디오와 레코드에 기고했던 리히테르 추모 기사를 보시기 바란다. 만년의 리히테르는 대규모의 연주회장보다는 오히려 작은 연주회장과 박물관 같은 곳에서 연주회를 자주 가졌다. 건강과 변덕스러운 기분 때문에 연주회 취소도 잦았으며, 관객은 연주회장에 와 봐야 프로그램을 알 수 있었다. 항상 자신의 연주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고, 불만에 차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를 '거룩한 악마'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약간 생각이 다르다. 때에 따라 가끔 음악의 다른 측면을 - 거의 광란적인 - 보여 주다가 폭풍을 잠재우고 어느 새 놀랄 만큼 아름다운 평화로운 안식을 선보이던 젊은 시절의 리히테르를 보면, 오히려 그를 '악마 같은 천사'라고 부르고 싶다. 출처 : 이영록의 음악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