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라 캄파넬라
피아노 음악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곡가이자 연주자가 쇼팽과 리스트이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낭만적이고 섬세한 피아니즘을 선보였고, 리스트는 스케일이 크고 강렬한 테크닉을 지닌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19세기에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전 유럽을 호령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리스트의 연주는 악마적이고 뛰어난 기교의 폭풍이었다. 리스트는 지그문트 탈베르크(Siegmund Talberg)나 알렉산더 드레이쇼크(Alexander Dreyschock)와 같은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과 경쟁하며 연주 난제들을 해결하고, 모든 기교를 완전히 마스터해 대피아니스트의 지위에 올라섰다. 또한 잘생긴 외모와 실력으로 그의 연주장에는 언제나 여인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피아노 이외에도 리스트는 바그너와 함께 신독일음악(Neudeutsche Schule)을 주장하며 고전주의에 반기를 든 낭만주의의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는데 일조했다. 교향시라는 장르를 만들어냈고 독일 고전음악을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리스트의 새로운 음악은 20세기 현대음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어야 하겠다
프란츠 리스트는 헝가리 라이딩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빈으로 유학가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고, 베토벤의 제자였던 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사사했으며 12살에 첫 공식적인 무대에 데뷔했다. 1823년 파리로 옮겨간 리스트는 그 다음해부터 대위법을 비롯한 본격적인 작곡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실의에 빠지게 된다. 당시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보다도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꿈도 갖게 되었다(이 꿈은 말년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리스트는 음악인생에 있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파리에서 어머니와 함께 피아노 레슨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을 때, 그는 우연히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보게 된다. 1832년 4월20일 파가니니는 콜레라로 죽은 파리시민들을 추모하는 콘서트를 열었다. 전 유럽에 바이올린 연주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귀재 파가니니는 광기에 찬 귀신 같은 연주를 들려주었고, 그 연주에 완전히 홀린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려고 마음 먹는다. 이후 리스트는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피나는 피아노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때를 전후로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도 크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정확한 템포와 스타일을 중요시하는 훔멜, 체르니의 영향을 받은 비엔나 스타일의 피아니즘을 선보였지만, 비르투오조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로는 스케일이 크고 위풍당당한, 연주 효과가 큰 스타일로 변모했다. 위대한 비르투오조의 탄생의 서막이다.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은 모두 6곡으로 이루어져있으며, [24개의 무반주 카프리스](24 Capricci per violino solo op. 1)를 피아노로 새롭게 편곡한 작품이다. 1 번 c단조 트레몰로는 '카프리치오 제6번', 제2번 E♭장조 안단테 카프리치오소는 '카프리치오 제17번', 제3번 캄파넬라는 'b단조 제7번 바이올린 협주곡', 제4번 E장조 아르페지오는 '카프리치오 제1번', 제5번 E장조 사냥은 '카프리치오 제9번', 제6번 a단조 주제와 변주는 '카프리치오 제24번'을 기본으로 삼아 작곡한 곡이다. 이 6개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라 캄파넬라'이다. 지금도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초인적인 기교를 자랑하기 위해 연주회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하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라 캄파넬라'는 종을 뜻하는 말이다. 피아노의 고음부가 종소리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들려오는 종소리와 그 울림, 분위기를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를 통해 탁월하게 묘사한다. 클라이막스의 웅장한 피아노 음향과 과감한 공격성, 고음부의 섬세하면서도 가냘픈 종소리 묘사가 서로 효과적으로 어우러지며 매력적인 감흥을 만들어낸다.
출처:네이버 오늘의 클래식
리스트는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같이 파가니니에게 심취했던 그는 그의 기교적인 바이올린 곡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 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6곡으로 된 파가니니 대연습곡이다. 이는 1838년에 작곡하였으며 1851년에 다시 부분적으로 개정하였다. 리스트의 여타 기악작품의 피아노 편곡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무게를 차지하고 있는 곡집은 단연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이다.<파가니니 대연습곡>을 이루고 있는 곡들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지막 악장에서 따온 제3곡 라 캄파넬라를 제외하면 파가니니의 무반주 카프리스에서부터 창출된 곡들이다.
종의 맑은 울림이 바이올린 현 속에 녹아 드는 곡
음악사에서 파가니니란 이름은 초절적인 기교가, 비르투오소의 대명사요 원조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인간의 대양을 뒤엎는 엄청난 폭풍우의 전령사'니 '혜성과 같이 불타는 모습으로 예술의 천상 속에 예기치 않게 나타났다가 엄청난 놀라움과 일종의 공포심까지 유발시키는 흥분을 던져주고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존재'로 보았다. '작은 이교도'라는 의미를 지닌 파가니니(Paganini)라는 이름에서부터 메부리코의 기묘한 용모, 화려한 곡예적 연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동이나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어, 하이네는 " 그의 인상엔 고뇌와 천재와 지옥의 징조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라고 하여 그의 운명까지도 갈파했다고 한다.
천재적인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파가니니의 일생은 누구나 따라가고 싶어했던 기교의 혁신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법으로 베일에 싸인 듯, 악마적일 정도의 매우 화려한 연주로 낭만파 음악시대의 황금시기를 누린 예술가로서의 명성만큼, 여자와 돈, 도박으로 얼룩진 생활로 그 악명 또한 높았다. 이러한 파가니니의 파행적 행동은 그가 4살도 되기 전에 앓았던 홍역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홍역 중에 파가니니는 '강직경련'의 증상이 나타나 이틀 동안 송장처럼 뻣뻣하게 누워 있어 그의 어머니는 시체를 쌀 수의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같은 상태에서 '홍역병원체에 의한 만기성 뇌염'이 유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가들은 이때 앓은 치명적인 질병으로서 그의 비사회적 태도, 자극과잉, 언어동작의 경직성, 성적 탈선, 그 외의 파행적인 사생활 등을 설명하고 있다.
대개의 낭만파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작곡가의 주변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나 동시대의 명수들을 염두에 두고서 만든 데 반해 그는 오로지 자기자신이 연주하기 위하여 곡을 만들었는데, 말하자면 자기자신이 개발한 바이올린 연주의 초인적인 기교를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곡을 만든 것이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였던 파가니니가 남긴 바이올린 협주곡은 모두 10 여곡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1번과 2번, 2곡만이 전해져 오다가, 전쟁 후에 3번부터 6번까지 4곡이 발견되어 현재 6번까지 확인되어 있다. 이 협주곡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은 제1번과 2번인데, 2번의 b단조 작품7은 파가니니의 첫 번째 빈 연주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28년 이전에 작곡된 것으로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