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12번 & 20번 - Rudolf Serkin-Claudio Abbado

리차드 강 2014. 10. 28. 20:34

Mozart Piano Concerto No.12 & No.20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12번 & 20번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No.20 : Romance & No.12 : Andante

 

Rudolf Serkin - Claudio Abbado - London Symphony Orchestra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라단조 K.466

작품 개요 및 구성

수 많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곡을 추천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없이 20번을 추천할 것이다. 이 곡의 내면적 열정과 비장미, 모차르트 특유의 눈물 머금은 미소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이 그만큼 현대인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곡은 그 이전까지의 피아노 협주곡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가장 큰 특징은 단조로 쓰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피아노 협주곡이 귀족들의 여흥을 즐기는 정도의 목적으로 쓰여졌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단조의 채용과 과격한 열정적 표현은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곡에서는 그 이전까지의 협주곡들과는 달리 관현악 파트의 중요성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어서 과거에는 반주부로서의 기능만을 담당하던 관현악 파트가 피아노와 거의 대등할 정도의 입장을 차지하여 마치 피아노와 관현악의 대화를 연상케 할 정도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목관파트의 선율 담당기능이 강화된 점은 이후의 협주곡들에서도 계속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 알프레드 아인슈타인(모차르트 연구가) 은 "피아노 협주곡에서 모차르트는 협주곡적인 것과 교향곡적인 것의 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이와 같은 면들을 통해서 결국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분야를 완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모차르트라고 평가되며, 베토벤은 모차르트에 의해 완성된 피아노 협주곡을 한 차원 더 발전시켰다고 여겨진다. 여담이지만, 베토벤은 이 곡을 매우 좋아했다고 알려지며 그 자신이 1악장의 카덴짜 (독주자가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관현악은 반주를 자제하고 현란한 기교로 솔 로를 연주하는 부분)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제1악장 : 알레그로 Allegro

으르렁거리는 듯한 저음의 현으로 시작하여 터질 듯 말듯 계속 긴장감이 쌓여가다가 한꺼번에 터뜨린 뒤 불안한 고요 속에서 피아노가 낭랑히 1주제를 노래하며 이어서 곧 2주제가 제시된다. 이어지는 전개부에서는 1, 2 주제가 변조되고 서로 얽히면서 전율을 느낄 정도로 긴박하게 곡이 진행된 후 격렬한 카덴짜를 끝으로 마치게 된다.

알레그로 D단조 4/4박자. 소나타 형식으로 간주되지만, 형식적인 것으로는 제1제시부에서 제2부제의 앞부분만 제시되는 일, 그리고 독주 피아노에만 나타나는 독주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선율이 삽입된 것이다. 이것은 이 악장의 특징이기도 하다. 제 1주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싱코페이션을 타고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나타난다. 이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연상하게 하는 드라마틱한 셋잇단음표인데, 이 악장을 통하여 중요한 것이다. F장조로 바뀌어 제2주제의 전반이 연주되고 밝게 진행된 다음에 독주 피아노가 독주 주제를 연주하면 등장한다. 잇따라서 제1주제, 제2주제를 다시 제시하며 기교적으로 발전시켜 전개부로 들어간다. 전개부에서는 독주 주제와 제1주제를 조바꿈 시키면서 나가고, 재현부에서는 각 주제를 화려하게 발전 시킨다. 카덴자를 거쳐 관연악의 투티에 의한 코다가 되며, 첫머리의 셋 잇단음을 재현하고 고요하게 끝을 맺는다.

 

제2악장 : 로만쩨 Romanze

참으로 평온하면서 따뜻하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우수어린 비애가 담겨있는 악장이다. 모든 슬픔을 체념하고 달관한 듯한 느낌마저 주는 이 아름다운 테마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부분에 배경음악으로 나옴으로써 매우 인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었다. 곡 중간부에서는 갑자기 지금까지의 평온이 깨어지고 폭풍우처럼 악상이 급변하다가 다시 처음과 같은 평온한 상태로 돌아온다.

로망스 B플랫장조 4/4박자. 세 도막 형식이다. 제1악장의 D단조에서 원격조인 B플랫장조로 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담한 시도였다. 독주 피아노에 의하여 연주되는 가락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최고의 하나로 꼽히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를 관현악이 받은 후에 독주 피아노가 별도의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한다. 다소 한가롭게 들리는 우아한 제1부에서 중간부는 독주 피아노가 잘게 움직이면서 돌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목관 악기가 깊은 맛을 낸다. 다시 제1부의 고요 속으로 되돌아가 제2악장을 마친다.

 

제3악장 : 론도-알레그로 앗사이 Rondo : Allegro assai

어두운 정열이 곡 전체를 지배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D 장조로 바뀌면서 화려한 분위기로 곡을 끝맺는다. 로망스 B플랫장조 4/4박자.알레그로 아사이 D단조 2/2박자.

변칙적인 론도 형식의 악장이다. 첫머리의 론도 주제와 3개의 부주제가 A-B-C-D-AB-A'-B'-C-D-A-D와 같이 어지러울 정도로 전개된다. 독주 피아노의 경쾌한 주제(A)로 시작하여 관현악이 이를 이어받는다. 독주 피아노가 짧은 부주제(B)를 연주한 다음 곧바로 론도 주제로 되돌아가고 제2부제(C)로 들어가는데, F단조로 쓰여진 이 선율은 거세며 힘차다. 목관 악기가 제3의 부주제(D)를 내고 독주 피아노로 인계하면 예고를 거쳐서 A와 B를 변형시키며 발전한다. 목관 악기와 독주 피아노가 서로 주고 받은 다음, C와 D를 재현하고 카덴자로 들어간다. 여기서 한 번 더 론도 주제를 재현 하고서 D장조로 조바꿈한 제3주제(D)를 화려하게 연주하는 가운데 전곡을 끝낸다.

18세기의 변화 중 피아노포르테의 탄생은 음악의 힘찬 표현을 중심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모차르트에 있어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결합은<고전협주곡>의 형식을 확립시켰다고 할수 있다. 그는 27곡의 피아노협주곡을 남기고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1783년 이후의 작품, 작곡가 또는 연주가 자신이 주최한 예약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작품들이 이러한 고전협주곡의 양식을 결정짓는데 큰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작품중 1785년에 쓰여진 3곡 K466,467,482도 오늘날 널리 연주되고 있는 곡으로 모짜르트의 창작력이 절정을 향한 시기의 작품이다.

이 곡은 빈의 시립집회소인 멜구르베(Mehlgrube)의 예약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최초의 단조곡이다. 이 당시 모짜르트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출판업자 '호프마이스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급히 필요하니 약간의 돈을 빌려주었으면 합니다. 아무쪼록 빠른 시일 안에 도착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폐를 당신은 너그러이 용서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저도 당신의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디 저를 위해 편의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시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위에서 밝힌 바있는 3곡이 포함된다. 그 3곡 중 1곡인 이 곡의 초연은 2월 11일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드가 빈에 도착, 아들의 음악활동중 가장 빛나는 이 날의 연주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협주곡 중 가장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카덴짜를 남기고 있다.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중에서 한 곡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20번 D 단조, 아니면 24번 C 단조가 될 것이다. 이 두 곡은 전 피아노 협주곡 중 아주 드문 단조이며 그런 뜻에서도 다른 작품에 비해 돋보이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D 단조 피아노협주곡은 1785년 2월 빈에서 완성하여 이듬해인 1786년 2월 모차르트 자신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했다.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중 첫 단조의 작품이며 D 단조라는 조성으로 알 수 있듯이 모짜르트에게서는 보기 드문 어두운 哀愁가 짙게 깔려있다. 20번 협주곡은 D 단조라는 어둡고 우울한 조성으로 작곡했기 때문에 다른 장조의 곡들이 밝고 화려한 데에 비해 비극적인 색깔이 짙다. 이 곡으로부터는 모짜르트의 슬픔과 눈물과 한숨을 듣는 것만 같다.

깊은 슬픔을 간직한 제 1 악장은 모짜르트의 일상생활의 괴로움이 극적일 정도의 심각함을 지닌채 다가든다. 제2악장 "로만쩨"는 분위기가 확 바뀌어 밝고 아름답다. 아내 콘스탄체와의 사랑의 밀어처럼 아늑하고 달콤한 분위기다. 제3악장은 다시 비장한 느낌 속에 발랄하게 끝난다.

구성적으로도 아주 견고하여 심포닉한 극적 성격은 베토벤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듯하다.실제로 훗날 베토벤이 어느 귀족집 앞을 지나가다가 이 협주곡을 듣고

"이처럼 아름다운 곡이 있다니 ! 나는 도저히 저런 음악은 쓸 수 없다"

고 뇌까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모짜르트 작품 가운데서도 남달리 이 곡을 좋아하여 카덴짜를 작곡했을 정도이다.

- 이 한장의 명반 클래식/ 안동림/현암사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V 466

모차르트는 36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일생동안 총 27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중 17곡이 생의 마지막 10년동안, 즉 그의 음악적 기량이 가장 완숙한 시기에 쓰여져서 모차르트가 여러 악기들 중 특히 피아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차르트는 본래 아버지와 함께 잘쯔부르크의 대주교 소속의 음악가로 일하고 있었으나 보다 자유로운 음악적 환경을 찾아 22세(1778년)에 고향을 떠났다. 파리로 가는 도중 만하임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그는 알로이지아라는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가 파리에 가있는 동안 마음이 변해버렸고, 실연당한 모차르트는 슬픔에 잠겨있다가 곧 그녀의 여동생인 콘스탄쩨에게 마음이 기울게 되어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이 여인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잘쯔부르크로 당장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26세(1782년)에 이 결혼을 강행하였다. 이 결혼을 기념하여 유명한 c단조 미사곡(K.427)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소속된 직장없이 살림까지 차리게 된 모차르트로서는 당연히 잘쯔부르크 시절보다 재정적인 형편이 많이 힘들어졌기에 그는 부지런히 음악레슨과 자작곡 연주회 등을 하여야 했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던 모차르트 부부에 대해서 어느 추운 겨울밤에 땔감을 살 돈이 없어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밤새 춤을 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재정적 압박 가운데 생활하기는 했지만 대주교 밑에서 일하던 시절보다는 음악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상당히 많이 배출될 수 있었다.이 협주곡 20번도 이 시기에 쓰여진 주옥같은 명작들 중 하나이다.

수 많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곡을 추천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없이 20번을 추천할 것이다. 이 곡의 내면적 열정과 비장미, 모차르트 특유의 눈물 머금은 미소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이 그만큼 현대인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곡은 그 이전까지의 피아노 협주곡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가장 큰 특징은 단조로 쓰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피아노 협주곡이 귀족들의 여흥을 즐기는 정도의 목적으로 쓰여졌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단조의 채용과 과격한 열정적 표현은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곡에서는 그 이전까지의 협주곡들과는 달리 관현악 파트의 중요성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어서 과거에는 반주부로서의 기능만을 담당하던 관현악 파트가 피아노와 거의 대등할 정도의 입장을 차지하여 마치 피아노와 관현악의 대화를 연상케 할 정도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목관파트의 선율 담당기능이 강화된 점은 이후의 협주곡들에서도 계속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 알프레드 아인슈타인(모차르트 연구가) 은 "피아노 협주곡에서 모차르트는 협주곡적인 것과 교향곡적인 것의 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이와 같은 면들을 통해서 결국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분야를 완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모차르트라고 평가되며, 베토벤은 모차르트에 의해 완성된 피아노 협주곡을 한 차원 더 발전시켰다고 여겨진다. 여담이지만, 베토벤은 이 곡을 매우 좋아했다고 알려지며 그 자신이 1악장의 카덴짜 (독주자가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관현악은 반주를 자제하고 현란한 기교로 솔로를 연주하는 부분)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12번 가장조 K.414

잘츠부르크 대주교(大主敎)에 전속된 음악가라는 신분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의논 끝에 다른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1777년에 구직(求職)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만하임과 빠리였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뿐 아니라 객지에서 어머니마저 사별(死別)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음악가의 직무에 복귀한다.

모차르트의 기질은 타고난 자유분방함인데 깐깐하기 짝이 없는 대주교 밑에서 얽메인 직무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역 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뮌헨 궁정으로 부터 사육제에서 상연할 새로운 오페라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게된다. 1780년 11월, 모차르트는 오페라 [이도메네오]를 들고 뮌헨을 향했다. 이 일에 대해서 대주교는 모차르트가 업무를 태만히 한다는 심한 질책을 내리게 되는데, 이 질책이 그를 크게 자극해 끝내 귀향하지 않고 뷘(Wien)에서 자립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리하여 모차르트는 서양 음악 사상 최초의 독립된 직업 음악가가 됐다. 회원을 모집해서 연주회를 열거나 악보를 출판사에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각오하는 과감한 결단 이었던 것이다. 상전이 내려 주는 은급(恩給)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상품화 시켜야 하는, 게다가 전례(前例)가 없는 독립된 직업 음악가의 길은 예상보다도 험난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요절한 것은 그가 독립 음악가로 전신(轉身)했을 때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이 협주곡은 이러한 격동의 세월 속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1782년에 3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썼는데 11. 12, 13번이 그것이다. 뷘에 막 정착한 모차르트로서는 무엇보다도 그곳 청중들의 마음에 드는 작곡가가 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이 3개의 협주곡은 철저하게 뷘 청중의 기호를 고려한 흔적이 강하다. 그들의 기호는 '우아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귀족적 취향이었던 것이다. 이 협주곡 전반에 흐르고 있는 세련되고 우아한 품위가 이를 증거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무렵의 모차르트가 추구하고 있었던 음악적 개성의 단서도 이 작품은 제공한다. 밝고 경쾌한 곡취(曲趣)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협주곡을 통해서 모차르트의 가장 선명한 기질을 만나게되는 것이다.

 

곡해설

<.... 이 협주곡들은 지나치게 쉽지도, 어렵지도 않고 중간 정도입니다. 매우 화려하며 듣기에 기분 좋은 울림을 지니고, 공허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편지에서)

여기서 말하는 이 협주곡들이란 K. 413, 414, 415 의 세곡, 즉 빈 시대의 피아노 협주곡 첫 시리즈, 다시 말해 1782년의 세트를 말한다. 빈 시대의 걸작들과 비교하면 이 세곡은 모두 매우 온건한 전총의 틀 안에 머무르고 있으며, 빈 청중의 보수적인 기호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 <협주곡 A장조>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F장조에서, 악상의 스케일과 생기발랄한 면에서는 C장조에 한 발 뒤지지만, 이 세트의 공통된 한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다른 두 곡에서는 모차르트적인 표정이 어딘가 감추어진 듯한 경향이 있지만, 반면에 이 <협주곡 A장조>에서는 제한된 면이기는 하지만 가장 순수한 모차르트가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식적인 창의성이나 악상 규모도 이 곡에서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오히려 우아하고 밝고 편안한 선율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A장조 의 모차르트> 라고 해야 할 그의 일면은 항상 사랑 받을 수 있는 점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곡은 세트 가운데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다. 다른 두 곡과 마찬가지로 1783년 초 예약 연주회를 위해 씌어졌다. 쾨헬 번호에 의하면 이 A장조는  F장조에 이어 배치된 바 있지만, 아이뉴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세 곡 가운데 가장 처음 완성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한다.

즉,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1782년 12월 28일자 편지에는 예약 연주회용 협주곡 가운데 아직 두 곡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완성된 남은 한 곡이 어떤 곡인지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그 곡이 <협주곡 A장조>라고 추정하고 있다. 즉 첫째로 이들 세 곡이 초판 인쇄되었을 때 A장조, F장조, C장조 순서로 배열되어 있었다는 점, 두번째로 K.386의 론도(A장조)- 이것은 K.414의 피날레를 이루는 론도 주제와 주제가 매우 비슷하며 대신 연주할 수 있는 쌍 등이 곡이다-에 1782년 10월 19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두 번째 이유는 매우 유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쨋든 마지막 확증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즉 론도 K.386의 마지막 한장은 1799년 이후 행방 불명 상태였으나 1980년 앨런 타이슨에 의해 발견되었다. 타이슨은 이 론도가 K.414의 마지막 악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초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1782년 11월 3일 아우에른함머 자택에서 열린 음악회로 여겨지고 있다.

편성 - 독주피아노, 오보에2, 호른2, 바이올린2부, 비올라, 베이스

     

제 1악장 Allegro

관현악이 매우 세련된 주제를 가볍게 노래하면 이를 독주 피아노가 받아서 기품있는 모습으로 노래한다. 여기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첼로, 더블 베이스, 비올라가 피치카토를 새기는 위에서 바이얼린군(群)이 들려 주는 즐거운 대화이다. 후반에서 들려 오는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도 일품이다.

알레그로 A장조 4/4박자. 협주풍 소나타형식

관현악에 의한 주제 제시, 독주 피아노가 가세한 주제 제시, 발전과 재현, 코다라는 극히 일반적인 협주풍 소나타 형식을 택하며 형식상의 특별한 아이디어는 보여주지 않는다. 주제 자체의 아름다움이 악장 전체를 지배하며, 제1주제와 제2주제를 비교해보면 공통된 우아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공통적인 우아함은, 제1주제에서는 두 마디째의 섬세한 리듬에 의한, 제2주제에서는 부풀어 오른 반음 진행에 의해 각각 독특한 표정을 머금고 있다. 이들은 동일한 주제 내용을 리듬과 음정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표현하는 연속적인 경과이며 대비적 요소는 강조되지 않는다. 이후에 바이올린 2부에 의한 활발한 주고 받음이 나타나며, 카논풍으로 계속 진행하여 코데타를 향하면서 생기를 붇돋운다. 이 과정은 악장 전체를 마무리하는 코다 부분에서 다시 사용된다. 분절감이 좋은 코데타가 화음을 강하게 치면서 끝나면, 피아노 솔로가 제1주제를 그대로 매끄럽게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덮어버리듯 코다 주제가 투티로 이어지고 피아노는 즉시 그것을 받아 이 주제의 동기에서 나온 부주제로 들어간다. 이 부주제는 E장조로 향하려는 조성적 의도를 내포하며 얼마 후 E장조의 딸림화음을 강조하는 경과부로 들어간다. 결국 E장조가 확보되면 제2주제가 등장한다. 피아노에 의한 변주가 화려함을 더하며 이후는 오로지 독주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질주 악구로 들어간다. 조금 규모가 큰 코데타가 제시부를 마무리한다 여기서는 반음계적으로 가라않는 베이스의 하강 진행이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유유히 하강하는 베이스의 음형이 조옮김의 중심을 이루며, 으뜸조(A장조)의 딸림화음 위에서 진행을 멈춘다. 페르마타 후에 홀연히 나타나는 것은 솔로에 의한 제1주제이다. 이 주제의 등장은 매우 산뜻하며 선명한 빛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재현부는 극히 일반적인 형을 따른다. 제2주제는 으뜸조로 나타나기 때문에 조옮김의 부주제가 단축되는 동시에 이어지는 조옮김 악구는 변화되고 다시 제2주제의 그것은 조금 확대된다. 코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새로운 경과구가 독주 피아노에서 나타나며 독주로 최종적인 화려함을 더해준다. 코다의 소재는 이미 언급한 대로 독주 피아노의 시작을 준비했던 코데타에서 따오고 있다. 이것은 F장조,K.413의 경우와 같은데,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간결한 수법이다.

 

제 2악장 Andante

Rudolf Serkin - Claudio Abbado - London Symphony Orchestra

간절한 기도와 탄식과 같은 이 악장의 주제는 크리스티안 바하의 작품에서 빌려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는 크리스티안 바하로 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곡을 쓸 무렵에 그의 별세 소식을 들었고, 그리해서 스승에 대한 추억을 스승의 선율을 차용한 것으로 대신 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2악장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곡이다.

Andante 안단테. D장조, 3/4박자.

깊고 조용히 숨쉬는 듯한 선율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모차르트는 크리스티안 바흐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업 시간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바흐의 선율에 의한 이 안단테는 종교적 깊이를 지니고 흐르며, 바흐가 세상을 떠난 1782년에 만들어진 3곡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도 느린 악장이다. 바흐에 의한 예의 주제가 8마디에 걸쳐 노래된 후, 제1악장의 제1주제가 모습을 바꿔 나타난다. 이어 간결한 코다로 노래가 약하게 변한다. 솔로가 주제를 받아 주부로 들어가면 부드럽게 조옮김이 이루어져 A장조로 연주된다. 코다는 크게 확대되며 후반의 흔들거리는 듯한 출렁임이 길게 꼬리를 끌며 사라진다. 제2부는 D장조로 돌아와 거의 변화없이 관현악의 서주를 되풀이 한다.

 

제 3악장 Rondeau Allegretto

가볍고 사랑스러운 제 1주제와 보다 침착한 제 2주제의 대비가 돋보이는 악곡이다. 독주 피아노는 느긋하고도 나른한 기쁨을 노래한다.

알레그레토 A장조, 2/4박자. 론도형식

관현악에 의한 서주부는 론도 주요 주제 2개를 제시한다. 제1주제는 가볍고 사랑스러운, 이것을 주제A라고 부른다면 이에 대해 제2주제는 훨씬 차분한 느낌을 지니며 주제A와 대조된다. 여기에 5마디의 코다가 붙어 서주부를 마치면 피아노가 새로운 주제를 연주하며 등장한다. 이 주제는 주제B의 특징을 낳는 점음표 리듬의 동기를 후반부에 포함하며 그에 따라 A, B 두 주제의 대비를 연관시킨다. 아울러 이것은 피아노에서 주제A 대신 사용되는데 이를 임시로 주제a라고 이름 붙이기로 한다. 이 주제a가 론도 제1부를 시작한다. 주제B에 이어 관현악과 독주가 교대로 나타나는데, 다시 주제B는 피아노의 왼손이 연주하는 셋잇단음의 화려한 움직임에 실려 활약하며, 역시 꼬리를 늘어뜨리듯 반주 사이에서 번갈아 노래한다. 주베B의 전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주제A의 동기를 이용하여 경쾌하면서 교묘하게 일단락하며, 여기서 주제A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주제A는 피아노와 관현악으로 크게 강조되어 론도의 제2부를 시작하지만, 이 제2부는 새로운 부주제를 삽입하여 확대된 것 외에는 제1부의 반복일 뿐이다. 즉 주제B가 시작되면 곧 조옮김하며 D장조의 새로운 주제를 불러오고, 그에 이어 원조로 되돌아간 후 제1부에서처럼 셋잇단음에 실린 주제B의 전개로 들어간다. 이 특징있는 점음표의 동기는 호른의 지속음 위에서 9차례나 이어지고 페르마타 위에서 종지하여 카덴차로 들어간다. 카덴차를 마치면 코다가 된다. 피아노는 주제a 를 연주하고 후반의 점음표 리듬이 피아노와 관현악에서 교대로 반복하며 나타난다. 이 동기가 이처럼 충분히 강조된 이상 주제B 를 다시 보여주는 것은 불필요하며, 대신 갑자기 Bb장조의 아르페지오로 조옮김하여 환상적인 장면을 덧붙인다. 피아노의 솔로가 주제A를 원형대로 떠올리면서 간결한 코다를 마무리한다. 주제 자체는 모차르트로서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슬며시 이루어지는 대조를 미묘하게 용해시켜 연속적인 통일성을 만들어나갈 때의 자연스러움은, 표면적인 새로움은 없다고 해도 그야말로 모차르트 특유의 것이라 하겠다.

   

     

루돌프 제르킨, Rudolf Serkin(1903-1991)

보헤미아(현재의 체코)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은 1903년 보헤미아의 에게르(Eger)에서 유태계의 러시아인 가정에 태어났다. 4세 때부터 성악가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으며,9세 때 빈으로 나와 리햐르트 로베르트(Richard Robert)에게 피아노를,요셉 마르크스(Joseph Marx)에게 작곡을 배웠다(이 때 조지 셀도 동문이 되었으며,미국에서 협연한 레코드가 많다). 12세 때 빈 필하모닉과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협연할 정도로 재능이 알려졌는데,본격적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한 것은 1920년부터다. 루돌프 제르킨이 부쉬(Adolph Busch,1891-1952) 가문과 인연이 맺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제르킨이 어느 곳에서 연주했는데,그 때 객석에 아돌프 부시(Adolf Busch)가 앉아 있었다. 그 곳의 반응에 실망한 제르킨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려고 역으로 갔는데,제르킨의 재능에 놀란 부시는 자신의 반주를 부탁하려고 제르킨이 출발하기 직전에 간신히 역에서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의 우연하게 만난 두 사람은 그 후 32년간 같이 연주한다. 1920년,베를린에서 부쉬가 이끄는 실내악단과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5번을 협연했는데,이 곡이 끝나고 청중들의 열화 같은 앙코르에 응해서 연주한 곡이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연주 시간이 적어도 36분 이상 소요되는 이 작품의 전곡(全曲)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것이다. 이 사건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에 관한 전설적인 일화(逸話)로 남아 있다. 기막힌 앙코르였으며 청중들에게 전연 뜻밖의 보너스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후 제르킨은 바이얼리니스트로 아버지 아돌프 부쉬의 실내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했던 이레네(Irene)와 1935년 결혼하였다. 이렇게 하여,아돌프 부쉬와 그의 형인 지휘자 프리츠 부쉬(Fritz Busch,1890-1951),동생인 첼리스트 헤르만 부쉬(Hermann Busch,1899-1972),딸 이레네와 제르킨,그들의 아들 숀(호르니스트)과 유명한 피아니스트 피터 제르킨(Peter Serkin,1947- )과 함께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음악 가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품위 있는 귀족적인 단정한 연주로 높이 평가받던 아돌프 부쉬의 명성이 높아짐과 함께,거의 그의 전속 반주자로 일하며 헤르만 부쉬를 포함한 트리오,부쉬 현악 4중주단과 협연,그리고 부쉬 실내 관현악단의 협연자로 제르킨의 명성도 전 유럽에 퍼졌으며,30년대 초부터 아돌프 부쉬와 함께 HMV에서 브람스 실내악곡의 상당수,베토벤과 슈베르트,슈만 등을 녹음했다. 이 중 많은 수가 지금까지도 명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9년 나치에 의해서 추방이 되자,결국 부시 일가와 제르킨은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1939년 커티스(Curtis) 음악원 교수로 취임했고,북동부 버몬트(Vermont) 주의 길포드(Guilford)에 거주하며 1950년 근교 말보로(Marlboro) 음악 축제를 열어 부쉬와 공동으로 주재하다가 부쉬가 세상을 떠나자 음악제를 자신의 말년까지 이끌어 나간다. 이 음악제는 미국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음악 축제 중 하나이며,제르킨의 초청으로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지휘 매스터 클래스를 맡은 파블로 카잘스 등 저명한 음악인들이 참여했다. 음악가들은 이 음악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독주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2년 아돌프 부쉬가 세상을 떠난 후 부터이다.

40년대 말부터 미국 콜럼비아(Columbia)에서 협주곡 녹음을 시작했으나,1953년 카잘스와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집을 완성한 이후는 거의 독주곡과 협주곡 연주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부터는 실내악 녹음은 말버러 실황을 제외하면 매우 드물며,실내악의 스튜디오 녹음은 1963년 부다페스트 4중주단과 녹음한 브람스와 슈만의 5중주곡,1982년 로스트로포비치와 협연한 브람스 첼로 소나타 2곡 뿐이다. 이렇게 독주곡에 집중한 그는 미국 뿐 아니라 다시 유럽으로도 연주 여행했으며,우리 나라와 일본을 포함하여 전세계를 다니면서 평론가들에게 절찬받았다. 그는 1988년에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및 시카고 심포니와 베토벤 '황제'를 협연했는데, 이것이 공개 연주로는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제르킨은 "내가 피아니스트긴 하지만, 피아노는 항상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커티스 음악원에 재직할 때도 바흐의 칸타타를 연구하기 위해 1년 휴직하기도 하는 등,피아노라는 악기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과는 그의 태도는 좀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그가 만들어내는 피아노의 음향은 보통의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거의 최만년의 녹음에서도 놀랄 만큼 기교에 문제가 없었는데,재미있는 점은 그의 손은 보통 피아니스트들의 '솜씨 있어 보이는' 손하고는 거리가 멀고,투박하고 마치 막일에 익숙한 노동자의 손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레코드로 듣는 한,부시의 반주자였던 시기의 것들은 투명하면서 상식적인 음을 들려 주는데,카잘스와 같이 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에서는 벌써 분명히 변화가 나타나며,스테레오 시절의 뭔가 찌르는 듯한 그 특유의 음향이 들린다.

   

     

사실 이 레코드의 대부분이 부쉬가 죽은 다음 해(1953년)에 녹음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하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에는 벌써 이 변화가 다 끝난 상태였다. 물론 녹음 회사의 차이도 있겠지만,그의 명연 중 하나인 브람스 피아노 5중주곡은 부시 4중주단과 녹음한 1938년의 레코드(EMI)와 1963년 부다페스트 4중주단과 녹음한 것(Sony)을 비교하면 피아노의 음향이 놀랄 만큼 차이가 많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최만년의 DG 녹음에서는 다시 초기를 연상시키는 둥글며 모가 나지 않은 음향이 들리는데,한 사람의 녹음임을 감안하면 이런 음향의 변화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초기의 실내악적인 투명하고 잘 어울리던 음향이,중기에서는 다소 날카롭고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은 소리로 바뀌었다가,만년에는 부드러움이 더해져서 둥글고 따스한 소리로 정착한 것 같다.

어느 일본 평론가가 쓴 책에는,..."제르킨은 실황을 듣지 않고 레코드로만 평가하면 오해를 부를 소지가 크다"...고 했다. 그의 말은 제르킨이 녹음에 극히 신중하고 성실하며,스튜디오 녹음은 특히 조형을 갖추려 하기 때문에 실황과 레코드가 많이 달라진다는 얘기였다. 그는 실황에서 '이상야릇하게 몸을 움직이며,그에 따라 음악이 크게 기복을 그린다'는 평을 받았으며, 흥얼거리는 버릇은 레코드에서도 가끔 알아들을 수 있다. 지금은 어차피 그의 실황을 보기는 불가능하니 레코드로만 판단해야 할 텐데,레코드에서는 단정하고 꼼꼼한 점이 많으면서도 어딘가 음악이 그 균형을 박차고 나올 것 같은 느낌이 간혹 든다. Sony의 베토벤 '비창'의 스튜디오 녹음을 들어 보면,3악장에서 특히 무언가 맥동하는 힘,조형의 밑에 감추어진 통제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진다. 확실한 것은,실황이건 스튜디오건 제르킨은 음악을 듣기 좋게 의식적으로 다듬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제르킨의 본성은 자유 분방한 음악에 있지만,그가 음악인으로서 매우 존경했다는 장인 부쉬에게서 배운 통제력이 실황에는 최소한의,레코드에서는 매우 단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아마도,실황에서는 좀 더 자신을 주장하려는 본능과 몸에 익은 조형 감각이 충돌하는데 비해 레코드에서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연주를 남기려는 그의 성실함이 의식적으로 조형을 갖추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외면적으로 '듣기 좋게' 들리는 연주를 포기한 대신 그가 얻은 것은 강인한 조형력,그리고 두드러지는 열띤 긴장감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에서는 이는 분명히 장점이며,그의 정력적이고 열띤 긴장감 있는 연주는 두 작곡가에서 그를 거장으로 손꼽는 중요한 이유이다. 셀 지휘 브람스의 협주곡 2곡을 잘 들어 보면 어딘가 약간 끈적거리는 맛 속에서 끈질기게 한 면으로 파고드는 점이 잘 드러난다. 다른 작곡가들도 물론 독특하지만 이 두 작곡가만큼 매력적으로 들리진 않는데,특히 잘 맞는 것으로는 슈베르트를 추천하고 싶다. 그의 음반은 제르킨 전성기인 50~70년대의 실황 녹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좋건 싫건 스튜디오 레코딩을 들 수밖에 없다. 먼저 귀한 실황 음반으로,1977년 카네기 홀에서 녹음한 '75세 기념 연주회'(Sony)는 꼭 들어 봐야 할 것이다.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를 연주한 프로그램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제르킨다운 힘 있는 음악이 잘 살아 있는 매우 좋은 연주인데도,굳이 아쉬운 점을 들자면 이미 실황과 레코드의 차이가 별로 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들이 누누이 말하는 것처럼, '실황에서 흥얼거리면서 크게 음악을 넘실거리게 만들어 때로는 거칠다는 느낌까지 주던' 제르킨은 이미 아니다.

루돌프 제르킨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똑같은 스타일을 고집하며 바흐,모차르트,베토벤과 같은 고전 음악 레퍼토리와 슈베르트,멘델스존,슈만,브람스 같은 낭만주의 레퍼토리,후기낭만주의 음악(막스 레거)과 바르토크,스트라빈스키,프로코피예프,마르티누 드의 현대 레퍼토리를 두루 연주했다. 음악적 정수를 목표로 삼은 올곧은 연주는 흔히 간결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 나타난 심오한 선율들을 더 잘 펼쳐놓기 위해 명확한 터치와 뚜렷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다듬어 조금씩 조금씩 유혹의 옷을 벗어 던진다. 그리고 그는 라흐마니노프,요제프 호프만 혹은 호로비츠와 같이 타고난 테크닉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피아노와 씨름을 했고,그의 연주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엿보인다. 하지만 일단 연주에 몰입하면 제르킨은 마치 속세를 초월한 사람 같아 보였다.

슈나벨과 마찬가지로 제르킨은 일생동안 실내악을 연주했으며 연주하지 않을 때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 연주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을 무렵,제르킨은 폭넓은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슈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낭만주의 곡들을 주로 연주했지만 그 당시에 바흐,모차르트, 베토벤,슈베르트,브람스에게 특히 더 애정을 느꼈다. 그의 협주곡 레퍼토리는 모차르트에서부터 베토벤,브람스,바르토크,프로코피예프까지 아우른다. 또한 그는 막스 레거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뷔를레스트’와 같은 작품도 빼놓지 않고 연주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제르킨의 레퍼토리는 축소되었고,그의 연주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5개의 마지막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세 개의 마지막 소나타로 한정짓게 된다.

제르킨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부분에서 새로운 빛을 전해주기 위해 나날이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텍스트를 다시 시작한다. 정상의 순간에 있었을 때 제르킨의 연주는 안정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는 대담하고 심지어,좀 야윈 소리이긴 해도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의 연주에는 숭고함과 결코 ‘고상한 척’하려 들지 않는 고귀함이 서려 있다. 연주할 때 그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려했는데,한가지는 작곡자가 의도한 메시지와는 다른 한 가지 는 연주자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뚜렷한 작품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이 세사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적인 연주를 선사하는 것이다.

제르킨은 하이든의 짧은 소나타,모차르트의 론도,베토벤의 바가텔 그리고 슈베르트의 즉흥곡에서 정열적이고 완벽한 연주를 들려준다. 강한 테치,거친 프레이징,빈틈없는 악센트를 보여주는 제르킨은 두 손의 간격을 지나치게 두지 않고 연주한다. 완벽한 연주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고 분출하는 피아노를 사용해 초췌한 소리를 미화시키는 것이다.

1966년 슈베르트 소나타 D.959를 녹음한 제르킨은 텍스트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에너지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느린 악장에서 들려주는 연주는 형용할 수 없는 한편의 시라 할 수 있다. 1975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최후의 작품 소나타 D.960은 1978년에 카네기홀의 실황녹음보다 아마도 조금은 덜 진지하지만 명확함에서는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제르킨은 작품을 움켜쥐고 스튜디오 녹음에서처럼 관중들로 하여금 탐색하게 만든다.

그가 녹음한 가장 최고의 작품들인 베토벤의 소나타 <템페스트>,<발트슈타인>,<함머클라비어>,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제 4번과 제5번(하이팅크와 콜린 데이비스와 협연),<슈베르트의 즉흥곡,Op.90>과 최후에 작곡된 세 개의 소나타, 쇼팽의 <야상곡>,슈만의 <사육제>와 <숲의 정경>,리스트의 <오베르망의 골짜기>,<단테를 읽고>,<장송곡>,브람스의 <제3번 소나타 F단조>,<발라드,Op.10>,헨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협주곡(줄리니와 하이팅크와 협연),드뷔시의<판화>,<영상집>그리고 프렐류드 등에서 결코 과시하는 듯한 연주를 들려주지는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마치 한판 승부하듯 음 하나하나에 가능한 모든 의미들과 과감히 맞서 싸우고자 한 것 같다.

제르킨은 1964년 음악적 공헌을 인정받아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를 수상하였고,1972년 3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뉴욕 필과 그의 미국무대100번째 연주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스트라빈스키,힌덴미트등이 포함되어 있던 Philharmonic's Symphony Society of New York의 명예회원으로 등록되었다. 1989년 암이 발병하여 더 이상 활동하기 힘들때까지 전 세계로 연주여행과 음반 녹음을 활발히 하였으며,그 후 암과 투병하다가,마침내 1991년 5월 길포드 자택에서 생애를 마쳤다. 

루돌프 제르킨은 완벽주의자로 설명된다. 어떠한 연주도 탄탄한 기교를 바탕 삼아야 한다는 이상을 지닌 연주자 였다. 그러한 완벽주의는 그의 레코드에서 생생하게 발견된다. 그런가하면 그의 감수성도 못지 않게 풍부해서 매우 열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완벽한 기교와 뜨거운 감성의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연주",이것이 제르킨 음악의 생명인 것이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