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聖음악

라미레즈: 크레올료 미사 & 우리들의 성탄절 - Mercedes Sosa

리차드 강 2010. 3. 17. 18:29

Misa Criolla

라미레즈: 크레올료 미사

Ariel Ramirez (1921 – 2010)

Misa Criolla - Mercedes Sosa (전곡 연주)

     

Album Title: Misa Criolla

Composer: Ariel Ramirez (1921 – 2010)
Latin American folklore singer: Mercedes Sosa (1935 – 2009)

Original Year: 1999
Mono/Stereo: Stereo
Label: Polaris

     

     

Misa Criolla:

1. Kyrie (Vidala-Baguala)                  4:59
2. Gloria (Carnavalito Yaraví)             8:21
3. Credo (Chacarera Trunca)              3:24
4. Sanctus (Carnaval Cochabambino)   3:06
5. Agnus Dei (Estilo Pampeano)          3:19

 

     

아르헨티나의 국민 가수 Mercedes Sosa가 부르는 Misa Criolla와 Navidad Nuestra. 영혼을 울리는 대륙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깊은 감동을 주는 11곡.

작곡자는 Argentina의 Ariel Ramirez 다. 1964년 대단한 평판과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었던 "MISA CRIOLLA"에 이어 발표하였던 "NAVIDAD NUESTRA"(우리들의 성탄절)과 함께 발표된 메르세데스 소사의 앨범. Navidad Nuestra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하는 6개의 곡으로 구성되어있는데, Misa Criolla 와 마찬가지로 남미의 민속음악을 접목시킨 종교음악이다. orchestra, chorus, tenor soloist 그리고 타악기가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다.

Love

Peace

Freedom

 

 

Ramirez

남미의 역사를 노래하는 ‘미사 크리올라(Misa Criolla)’

“남미 토속적 정서가 물씬 밴 미사곡”

남미의 민속 음악을 소재로 아리엘 라미네즈가 작곡
40명 이상 합창단, 오르간, 전통 타악기 등으로 연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제 119항은 이렇게 가르친다 : “어떤 지방 특히 포교 지방의 국민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이나 또는 사회 생활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유한 음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해서나, 그들의 특성을 전례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음악에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자리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에게 음악적 교양을 습득케 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 국민의 전통적 음악을 학교에서나 거룩한 행사에서 장려할 수 있게 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0세기,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미사 전례를 라틴어 뿐 아니라 각 나라의 언어로 거행하게 됨에 따라 그레고리오 성가, 다성 성가, 종교적 대중 가곡과 함께 각 국민의 전통적 음악이 가톨릭 전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허용, 장려되었다.

그 결과로 다양한 전통적 미사곡이 작곡, 사용되고 있다 : 아프리카의 정서를 담고 있는 ‘미사 루바’, 스페인의 플라멩코 음악을 담고 있는 ‘미사 플라멩카’, 남아메리카의 전통 음악을 주제로 삼은 ‘미사 크리올라’, 그리고 ‘미사 안디나’, ‘미사 탱고’ 등 각 민족의 정서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은 고유한 미사들이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국악 미사’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사 크리올라(Misa Criolla)는 아리엘 라미레즈(Ariel Ramirez)가 작곡한 곡으로서, 남아메리카의 민속음악을 음악적 소재로 삼고 있다. 여기서 미사 제목의 기원인 ‘크리올’ 혹은 ‘크리올료’는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로 다스리던 곳에서 태어난 백인 혹은 정복자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을 의미한다.

이 미사곡은 1963년에 카스틸리아어(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중북부 스페인)로 작곡되어 곧 라틴 아메리카의 가톨릭 교회의 승인을 얻어 미사곡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40명 이상의 합창단, 솔로 성악가, 오르간이나 피아노, 차랑고, 구에나, 시쿠,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 타악기 등으로 연주되는 이 곡은 자비송(Kyrie), 대영광송(Gloria), 신경(Credo), 거룩하시도다(Sanctus),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로 구성된다.

자비송(Kyrie)은 ‘비달라-바구알라’(Vidala-baguala)라는 안덱스 산지의 민속 음악을 소재로 하여 황량하고 적막한 고원지대를 묘사한다. 그 안에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노래하고 있다.

대영광송(Gloria)은 ‘카르나발리토-야라비’(Carnavalito-yaravi)라는 4분의 2박자의 단조 음계를 사용하면서, 볼리비아, 페루의 고원에 사는 인디오들의 춤곡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신경(Credo)은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인 ‘차카레라 트룬카’(Chacarera trunca)의 리듬을 사용하고 있고, 특히 곡의 마지막 부분에 반복되는 ‘아멘’이 매우 인상적이다.

거룩하시도다(Sanctus)는 ‘카르나발 코카밤비노’(Carnaval cochabambino) 양식으로 다시금 대영광송의 축제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에서는 아르헨티나의 팜파 특유의 양식인 ‘에스틸로 팜페아노’(Estilo pampeano)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절실한 의탁과 평화에 대한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미사 크리올라가 갖는 남아메리카의 토속적인 정서와 음악적 소재, 그리고 민속 음악이 갖는 심오한 단순함은 이 미사곡이 단숨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데 충분하였다. 여기에는 이 미사곡을 노래한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에디뜨 피아프 이후 대중 음악계의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녀의 명성 역시 한 몫을 하였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부 독재시대에 벌어진 ‘더러운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독특한 목소리, 충만한 감정, 창조적 영혼으로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을 노래함으로써 희망과 위로를 선사하였던 가수이다.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이라는 별명을 얻는 그녀는 군부 독재에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 하였고, 결국 스페인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가 종식된 후 다신 돌아온 그녀에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눈물과 함께 끝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러한 미사 크리올라는 ‘미사곡’이라는 음악적 장르를 넘어서, 아르헨티나의 음악적, 정서적 소재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역사에 배어있는 아픔과 희망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 기도일 것이다.

최호영 신부 (가톨릭대 성심교정 음악과 교수)

     

     

Tip : 미사 크리올라의 감상을 돕기 위해 먼저 영화 ‘미션(The Mission)’을 떠올려본다.

남아메리카 밀림 속,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알리러 들어갔던 가브리엘 신부는 선교에 우선해 원주민들과 친밀감을 갖는 방법의 하나로 음악을 시도했다. 특히 영화 안에서 가브리엘 신부가 원주민들과 함께 그네들의 토속악기와 고유한 노래로, 북치고 피리 불며 미사를 봉헌하던 모습은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미사 크리올라의 면면 또한 영화 속 미사 장면과 크게 다르진 않다.

미사 크리올라는 세계적인 테너 호세 카레라스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울려퍼지면서 대중에게 더욱 강하게 각인됐다.

이 미사곡의 화음은 성악가 솔리스트 외에도 40여 명 이상의 합창단의 목소리로 만들어진다. 아마존 밀림 속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육중한 북소리가 귀를 열면 피아노와 어코이언을 비롯해 볼리비아 팬플루트, 다섯 개의 이중 현을 가진 기타의 일종인 차링고와 통나무로 만든 플롯인 쿠에나, 각종 라틴아메리카의 전통 타악기들이 절묘한 앙상블을 이뤄낸다.

미사 크리올라가 공식적으로 녹음된 첫 음반이자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1987년 녹음된 호세 카레라스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Phillips)이다. 카레라스는 당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지를 받으며 세계적인 무대를 휩쓸며 활동하던 시기였지만, 갑작스레 백혈병 선고를 받는다. 이 음반은 백혈병으로 쓰러지기 직전 녹음한 것으로 더욱 큰 의미가 부연돼왔다. 또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아리엘 라미레즈는 이 음반 녹음에서 피아노 등을 연주하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음반으로는 메르세데스 소사의 목소리, 리카르도 해그먼의 지휘로 1999년 발매된 음반(Decca)을 꼽는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 가톨릭신문

Navidad Nuestra

라미레즈: 우리들의 성탄절

Ariel Ramirez (1921 – 2010)

Navidad Nuestra - Mercedes Sosa (전곡 연주)

     

Navidad Nuestra:

06.  1. La Anunciación (chamamé)

de Mercedes Sosa / "Chango" Farias Gomez / Asociacion Coral Lagun onak / Nicolas "Colacho" Brizuela / Jaime Torres / Ruben Lobo / Oscar Giunta / Popi Spatocco / Chango Spasiuk   2:09

07.  2. La Peregrinación (huella pampeana)

de Mercedes Sosa / Nicolas "Colacho" Brizuela / Oscar Giunta / "Chango" Farias Gomez / Estudio Coral De Buenos Aires (Dir. Carlos Lopez Puccio) / Marcelo Chiodi / Carlos López Puccio   3:52

08.  3. El Nacimiento (vidala catamarqueña)

de Mercedes Sosa / "Chango" Farias Gomez / Asociacion Coral Lagun onak / Nicolas "Colacho" Brizuela / Jaime Torres / Ruben Lobo / Oscar Giunta / Popi Spatocco / Chango Spasiuk   3:15

09.  4. Los Pastores (chaya riojana)

de Mercedes Sosa / "Chango" Farias Gomez / Asociacion Coral Lagun onak / Nicolas "Colacho" Brizuela / Jaime Torres / Ruben Lobo / Oscar Giunta / Popi Spatocco / Chango Spasiuk   3:05

10.  5. Los Reyes Magos (takirari)

de Mercedes Sosa / "Chango" Farias Gomez / Asociacion Coral Lagun onak / Nicolas "Colacho" Brizuela / Jaime Torres / Ruben Lobo / Oscar Giunta / Popi Spatocco / Chango Spasiuk   2:17

11.  6. La Huida (vidala tucumana)

de Mercedes Sosa / "Chango" Farias Gomez / Estudio Coral De Buenos Aires (Dir. Carlos Lopez Puccio) / Nicolas "Colacho" Brizuela / Oscar Giunta / Marcelo Chiodi / Leo Carabajal

     

     

Mercedes Sosa (1935 – 2009) 메르세데스 소사

15세의 나이로 라디오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소사는 59년 최초의 레코딩을 했으나 가수의 길을 걷지 않았다. 하지만 60년대 초반 "새로운 노래" 운동, 즉 "누에바 칸시오네로" 대열에 참여했으며 65년에는 한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면서 필립스와 음반 계약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때가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67년에 최초로 유럽/북미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며, 69년에는 아리엘 라미레즈와 "아르헨티나의 여인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군사 독재 때문에 이 무렵 소사의 곡은 라디오 방송이 금지되었으나 그녀는 꾸준히 자신의 앨범을 발표했고, 몇몇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71년에 발표된 비올레타 파라에 대한 헌정 앨범 "Homenaje a Violeta Parra" 은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라는 유명한 레코딩을 남겼다. 76년, 아르헨티나 최고의 암흑기라 할 수 있는 군사독재가 다시 시작되면서 (83년 군정이 종식되기까지 무려 3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소사는 감시는 물론 목숨까지 위협 받는 처지가 되었으나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1979년. 처참한 현실을 노래한 이유로 관...15세의 나이로 라디오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소사는 59년 최초의 레코딩을 했으나 가수의 길을 걷지 않았다. 하지만 60년대 초반 "새로운 노래" 운동, 즉 "누에바 칸시오네로" 대열에 참여했으며 65년에는 한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면서 필립스와 음반 계약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때가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67년에 최초로 유럽/북미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며, 69년에는 아리엘 라미레즈와 "아르헨티나의 여인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군사 독재 때문에 이 무렵 소사의 곡은 라디오 방송이 금지되었으나 그녀는 꾸준히 자신의 앨범을 발표했고, 몇몇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71년에 발표된 비올레타 파라에 대한 헌정 앨범 "Homenaje a Violeta Parra" 은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라는 유명한 레코딩을 남겼다. 76년, 아르헨티나 최고의 암흑기라 할 수 있는 군사독재가 다시 시작되면서 (83년 군정이 종식되기까지 무려 3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소사는 감시는 물론 목숨까지 위협 받는 처지가 되었으나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1979년. 처참한 현실을 노래한 이유로 관객 300여명과 함께 공연장에서 체포. 결국 조국을 떠나 파리를 거쳐 80년 마드리드로 망명을 떠난다. 이 무렵 소사는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남편을 잃었을 뿐더러 지병인 심장병을 얻었다. 군정이 종식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1982년 아르헨티나로 컴백한 그녀는 끊이지 않던 기립박수로 유명한 82년 오페라 극장 공연을 가지며 아르헨티나 민중의 희망이 되었다.

"나는 전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대 위에서 국민들에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건 국민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왜냐구요?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게 투쟁이거든요. 아니, 라틴 아메리카에 산다는 게 그렇지요. 나는 국민들에게 무슨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80년대에는 유럽과 북미/남미를 끊임 없이 순회하는 공연을 펼치며, 전세계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렸고, 밀톤 나시멘투, 레온 히에코 등 남미를 대표하는 가수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했다. 89년에는 프랑스 문화부에서 그녀에게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 카네기 홀, 이태리 콜로세움 등 유명 공연장에서 매진 공연을 펼쳤고, 밥 딜런, 해리 벨라폰테, 스팅, 파바로티, 존 바에즈, 루치오 달라, 안드레아 보첼리 등 그녀를 극찬하고 함께 교류한 가수들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더욱 많은 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유니세프 인권 대사, 문화 사절 등으로 사회적 활동을 펼쳤으며, 유럽 망명 시절에 얻은 지병과 과로 등으로 인해 97년에는 병상에서 생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98년에 다시 재기. 컴백 공연과 앨범을 발표했고, 2000년에 신설된 라틴 그래미에서 수차례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다시 보여줬지만 여전히 좋지 않은 건강 상태는 간혹 휴지기를 요구 했다. 일례로, 2003년 엘지아트센터에서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내한 공연이 예정 되어 있었으나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공연이 취소되었고 소사가 타계한 오늘날까지도 많은 팬들에겐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소사는 2009년 앨범"Cantora"가 발매되고 난 직후인 9월 18일, 신장과 폐 질환으로 인해 다시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미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그녀는 결국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국회로 옮겨져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고 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아르헨티나 음악계의 아이콘"이라는 말로 그녀를 기린 아르헨티나 정부와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3일간의 국가적 애도 기간을 선포함과 동시에 모든 빌딩이 조기를 게양하도록 조치했다. 남미의 각국 정부는 물론, 프랑스 정부에서도 그녀를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전세계 수많은 뮤지션들과 그녀의 팬들이 메르세데스 소사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