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avorite Pop

No, woman, no cry - Bob Marley│My Favorite Song

리차드 강 2009. 4. 8. 14:57

No Woman No Cry - Bob Marley

No Woman No Cry [Live]

Robert "Bob" Nesta Marley OM (1945–1981)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Said - said - said
I remember when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Oba - obaserving the Hypocrites as they would mingle with the good people we meet. Good friends we have, oh, good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In this great future, you can't forget your past. So dry your tears, I seh.

No, woman, no cry. 'Ere, little darlin', don't shed no tears. No, woman, no cry.

Said - said - said
I remember when-a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And then Georgie would make the fire lights, as it was logwood burnin' through the nights. Then we would cook cornmeal porridge of which I'll share with you.

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
But while I'm gone, I mean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Said - said - said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 우리는 선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위선자들을 가려내고 있었죠.
긴 투쟁 동안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얻었고, 또 많은 벗들을 잃었죠.

위대한 미래, 당신은 지난 날들을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 눈물을 닦으세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여인이여 울음을 그쳐요, 어여쁜 소녀여, 눈물을 거두어요.

Said - said - said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그때 조지는 밤새도록 통나무를 태워 불을 지폈지요. 우리는 옥수수죽을 끓여 함께 나눠먹었구요.

두 발은 나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예요.
그래서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해요.
내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잘 될 꺼예요.

     

     

     

흑인 인권운동 지지해준 아내 리타에게 바친 사랑노래

이 노래는 밥 말리(Bob Marley, 월간[인권연대] 2004년 3월호에 소개)가 아내 리타에게 바친 사랑의 노래다.

밥 말리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죽을 때까지 레게음악을 전 세계에 알린 레게의 전도사로, 또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위해 노래하고, 제국주의를 비판한 투사로 살았다. 그 투사를 가장 가까이서 사랑하고 보살펴 준 사람은 바로 아내였고, 그래서 그 투사는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아내에게 이제 눈물을 거두라고 사랑과 위안의 노래를 지어 바쳤다. 바로 'No Woman No Cry'다.

인간해방의 꿈을 노래하는 '레게'

그 때문에 이 노래는 레게풍의 연가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연가와는 품격이 다르다. 동지이자 연인에게 바치는 ‘진정한’ 연가다. 동지에 대한 애정과 연인에 대한 애정이 별 다르지 않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진정성이 드러나는 연가다. 그래서 이 노래는 전 세계적으로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자주 불리며, 존 바에즈도 각종 집회와 콘서트에서 자주 부르고 있는 노래다.

레게음악은 1960년 자메이카에서 시작된 음악형식이다. 자메이카 흑인들의 토속음악에 미국의 흑인음악 ‘리듬앤블루스’가 혼합되어, 여기에 관악기 연주가 첨가된 경쾌한 대중음악이다. 그러나 음악형식 보다 레게를 레게답게 하는 것은 그 음악에 담긴 정신이다.

원래의 고향이 아프리카인 모든 흑인들의 꿈을 대변하지 못하면 레게음악이라 할 수 없다. 자신들의 선조가 노예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신대륙 아메리카로, 카리브해로 팔려와 수세기 동안 고난의 삶을 살아왔고, 그 후손인 자신들도 차별과 빈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이 현실은 너무도 부조리하다. 그래서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실한 꿈을 꾼다. 그 참다운 인간해방의 꿈을 레게는 노래한다.

저항성은 사라지고 돈버는 음악이라...

우리나라에는 1993년 영화 "슬리버"가 상영되고 레게 그룹 ‘UB40’가 그 주제가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부르면서부터, 또 자칭 국민가수라는 김건모가 '핑계'로 돈방석에 앉으면서부터 선풍적으로 레게음악이 유행했었다. 하지만 인간해방의 꿈과 저항의 노래인 레게를 ‘돈버는’ 레게로 만들어 거액을 거머쥔 김건모가 ‘국민가수’답게 어느 고아원, 어느 양로원에 돈 한 푼 희사했다는 기사 한 줄 읽어본 적이 없다.

레게음악은 귀로 듣기에는 그저 신나고 경쾌한 춤곡이지만, 그 특징은 저항성이다. 소외받고 꿈을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노래다. 우리나라에 레게음악을 처음으로 선사한 레게그룹 ‘UB40’가 ‘실업자 구호카드 40번’(Unemployed Benefit 40)을 뜻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 인터넷 저널

     

Bob Marley

레게 음악의 포교자이자 자메이카의 민간대사 역할을 했던 밥 말리(Bob Marley)가 이 세상을 떠난 지도 20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의 불꽃같은 인생과 레게에 대한 열정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가 발표한 수많은 명반들과 현재까지 공개되고 있는 미 공개 및 베스트 음반, 비디오 자료, 그리고 생생한 사진은 밥 말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했고 그를 존경하는 추종자들은 그 유품들을 성경처럼 소중히 간직하며 이 위대한 아티스트가 꿈꾸었던 이상(理想)을 따르고 있다. 이제 밥 말리는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다. 심오한 철학가이면서 단호한 행동주의자인 동시에 우리가 기대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작은 도시 세인트 앤. 로버트 네스타 말리(Robert Nesta Marley)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밥 말리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 해군 장교인 중년의 백인이었고, 어머니는 10대의 자메이카 여성이었다. 원조교제 성 풋사랑으로 태어난 밥 말리의 어린 시절은 유복하지도, 행복하지도, 또한 건전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한번도 본 적이 없다) 때문에 형성된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적인 성격, 그리고 주먹이 법인 어두운 세계에 몸담으면서 점차 반골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투사 뮤지션으로 변신했다.

자메이카에서 흑인이 건설한 최초의 스튜디오이자 레게의 씨앗을 전 세계에 뿌리는데 진원지 역할을 한 전설적인 녹음실 '스튜디오 원'에서 밥 말리는 피터 토시(Peter Tosh), 버니 리빙스톤(Bunny Livingstone) 등과 함께 웨일러스(Wailers)를 결성해 1963년에 첫 음반을 녹음했다. 본국에서의 열렬한 지지와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한 이들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은 1969년도 앨범 이었고 1973년도 음반 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에릭 클랩튼이 에 수록된 'I shot the sheriff'를 커버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자 밥 말리에 대한 관심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뮤지션들 사이에서 레게는 당시 대중 음악에 새로운 방법론으로 각광받았다. 이후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수많은 아티스트는 2박과 4박이면서 박자의 강세가 뒷부분에 있는 독특한 레게 리듬을 앞다투어 자신들의 음악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한 에릭 클랩튼 외에도 폴 사이먼(Paul Simon), 쓰리 도그 나잇(Three Dog Night), 클래시(Clash), 이글스(Eagles), 폴리스(Police), 보니 엠(Boney M),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 멘 앳 워크(Men at Work), 섀기(Shaggy), 스노우(Snow), 어레스티드 디벨로프먼트(Arrested Development) 등은 그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레게 특유의 '오리궁둥이 리듬'을 이용해 자신들의 음악 영역을 확장했다.

밥 말리는 'Slave drive'나 'Get up, Stand up'처럼 서방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노래만 부르지 않았다. 'Kinky reggae', 'Funky reggae party', 'Lively up yourself', 'Roots, Rock, Reggae'처럼 레게가 전하는 흥겨움과 자긍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1996년 힙합 트리오 퓨지스(Fugees)가 리메이크 했던 'No woman, no cry'는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자메이카 사람들의 한(恨)을 승화시킨 명곡이다. 자메이카의 아리랑이라고나 할까? 또한 짐바브웨의 독립을 촉구하는 'Zimbabwe'와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의 흑인 병사들을 비유한 'Buffalo soldier' 등 현대사의 정치와 과거의 역사를 노래에 적극적으로 담아냈다. 이렇듯 깊은 통찰력을 통해 밥 말리는 국제적인 인사로 떠올랐다.

밥 말리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 입적시킨 유일한 히트곡 'Roots, Rock, Reggae(51위)'가 수록된 을 1976년에 공개한 이후 세계의 평화를 갈구하는 송가 'one love'가 들어있는 , 아프리카의 단결을 희망하는 'Africa unite'가 자리한 1979년의 , 1980년의 마지막 정규 앨범 등 1981년에 암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밥 말리는 오랜 시간 디스켓에 축적해둔 능력을 압축파일로 풀어내듯 수많은 걸작 앨범들을 발표했다. 그는 끝까지 불평등한 세계에 대한 저항의 고삐를 늦추지도 않았으며 평화에 대한 믿음도 저버리지 않았다.

이 음악 성인이 열반에 오른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와 관련된 음반과 출판물이 끊임없이 공개되면서 말리에 대한 칭송은 계속되고 있다. 그의 아들 지기 말리(Ziggy Marley)는 자신의 밴드 멜로디 메이커스(Melody Makers)를 조직해 1988년에 'Tomorrow people(39위)'을 랭크시키는 등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갔고, 미국의 그래미 위원들도 그의 업적을 간과할 수 없었는지 2001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밥 말리에게 수여했다. 자메이카 정부는 1990년에 그의 생일인 2월 6일을 국경일로 선포해 국가차원에서도 매년 이 거룩한 아티스트를 기리고 있다.

세상은 아직까지도 반목과 질시,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다. 밥 말리가 그토록 원했던 차별 없고 평안한 세상은 다가갈수록 잡히지 않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노래를 듣는 순간 평등과 평화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했다.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002/09 소승근 (gicsucks@hanmail.net)

출처 : http://www.izm.co.kr

 

살아 생전 Cannabis를 즐겨 피웠던 Bob Marley는 결국 Lung Cancer(폐암)로 죽었단다. 죽은 후에는 심지어 생전에 즐겨 차던 축구공, 성경책과 더불어 Cannabis bud와 함께 무덤에 묻혔다하니 그가 얼마나 그것들을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 맛나게 피우는 듯하다. 저 세상에서도 저러고 있지 않을까?(결코 비꼬는 말이 아니다)라고 프루스트的 삶 님이 그러던데 나도 보니 그런거 같네...정말 좋고 유명한 가수였나보다. 내가 고작 아는 것이라고는 요곡 하나니..참,

No Woman, No Cry 요 말이 "여자 없다고 울지 말라"는 말인줄 알았다는...ㅋㅋㅋ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