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e And Sebastian / 벨 앤 세바스천
데뷔/결성 : 1996년 활동 시기 : 1990, 2000년대 멤 버 : 스튜어트 머독(Stuart Murdoch-보컬, 어쿠스틱 기타), 스튜어트 데이비드(Stuart David-베이스, 아코디언)
그들은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음악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음악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서 홍보와 마케팅을 거부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비즈니스로서 자살행위? 그런데도 그들은 경이롭게 주목을 포획하는데 성공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그들의 음악, 그들의 순수한 음악언어 때문이다.
음악에는 예술로서의 음악(music as art)과 비즈니스로서의 음악(music as business)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음반이 팔리려면 음악을 잘 만들어야 하고 동시에 판매촉진 기술에도 의존해야 한다. 양자는 적당한 긴장과 균형을 이뤄야 바람직할 테지만 그러나 지금의 음악은 후자에 의해 지배되어 때로 예술의 측면은 철저히 억눌리고 있다.
도대체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세상은 쓰레기 같은 음악이 그럴듯한 선전술로 포장되어 '다수의 수동적 소비자'를 유혹하는 사례가 범람하고 있다. 그들은 앨범의 질이 어떤지도 모르고 산다. 벨 앤 세바스찬의 그룹 설립이념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홍보와 마케팅에 포박된 음악을 구하자! 음악의 예술성을 수렁에서 건져내자!'
장사의 수렁에서 건져낸 음악
먼저 그룹명이 벨 앤 세바스천(Belle & Sebastian)이라고 이들이 2인조 즉 듀오는 아니다. 단지 마담 세실 오브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소년과 개의 이름 그리고 70년대에 인기를 누린 프랑스 TV 어린이 프로 명을 따서 붙였을 뿐이다(그래서 늘 이름을 쓰게 해준 소설가 오브리에게 고개 숙여 감사한다). 그들은 처음 7인조, 지금은 8인조인 대형 콤보 밴드다. 악기도 기타 베이스 드럼의 재래식 록 라인업에서 벗어나 아코디언, 첼로, 트럼펫 그리고 바이얼린 주자가 포진한 작은 오케스트라 편성을 취하고 있다.
그룹 결성은 정부 교육기관에서 만난 스튜어트 머독(Stuart Murdoch-보컬, 어쿠스틱 기타)과 스튜어트 데이비드(Stuart David-베이스, 아코디언)가 1996년 1월 영국 글래스고의 한 카페에서 밴드결성에 동의하면서 이뤄졌다. 곧 리드 기타의 스티브 잭슨, 첼로를 연주하는 여성 이조벨 캠벨, 드럼 리처드 콜번, 트럼펫 믹 쿡, 건반 크리스 세디즈, 바이얼린 사라 마틴이 가세해 대가족 진용이 갖춰지지만 두 명의 스튜어트는 현재도 그룹의 음악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같은 해 카우 대학 뮤직 비즈니스과정을 수료한 인디 음반회사 집스터(Jeepster)의 앨런 랭키에 의해 가능성이 확인된 벨 앤 세바스찬은 앨런의 제안에 따라 그의 과정수료 과제물로 카우 대학내 레이블인 일렉트릭 허니에서 앨범 <Tigermilk>를 녹음하게 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외국에는 대학에 뮤직 비즈니스이 정식 전공으로 되어있고 더욱이 학교 내에서도 음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발아 중이지만 영국에선 인디의 망이 폭넓게 걸쳐있다는 점 그리고 벨 앤 세바스천이 인디의 성공담이라는 점도 아울러 포착해낼 수 있다.
3일 동안 녹음해 완성한 데뷔작 <Tigermilk>는 1000장 한정판으로 그것도 LP로만 발표되었다. 이제 정식으로 집스터와 계약을 체결한 벨 앤 세바스천은 곧바로 2집 앨범 <If You're Feeling Sinister>을 제작해 출시했다. 해를 넘겨 잇따라 세 장의 EP를 내고 수 차례 공연을 가지면서 그들은 드디어 추종자들이 따르기 시작했고 이어서 앨범은 메이저 버진 레코드사에서 발매되기에 이른다.
벨 앤 세바스찬은 언더그라운드 팬들을 증식시킨 이 과정에서 기묘한 그룹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해 신비를 축적해갔다. 앨범이나 EP의 재킷은 다른 사람 사진이 실렸고 그 흔한 홍보사진 하나 찍지 않았다. 언론 메커니즘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듯 인터뷰도 사양했다. 음악잡지들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음악으로, 그것도 메이저와 언론에 의해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은 음악으로 그들의 예술을 이해하는 팬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결코 '거꾸로 방식'으로 소비자호응을 획책하려는 전술이 아니었다. 그들 방식의 자본주의 음반시장 접근법이었고 음악산업에 대한 음악예술의 도전이었다.
그들은 어쩜 사회주의자들 아닐까?
2집 앨범에는 '스튜어트 머독의 것으로 보이는' 이런 글이 써있다. '벨 앤 세바스찬은 망가진 자본주의가 낳은 부산물이다. 그들을 사회주의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게 좋겠지만 그건 아니다. 느슨한 변화가 예정될 때 그들은 함께 굴렀다.'
그들의 이데올로기 지향성을 떠나 과연 벨 앤 세바스찬 음악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형편성에도 불구하고 언뜻 듣기에는 어쿠스틱 기타가 지배하는 포크라는 첫인상을 받기 쉽다. 영국 출신이니까 마니아들은 먼저 영국 포크를 상징하는 닉 드레이크(Nick Drake)나 도노반(Donovan)을 떠올릴 것이다. 앨범 수록곡 가운데 <Like Dylan in the movies>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포크라는 단순규정이 꼭 빗나갔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리듬의 실험성을 들어 벨벳 언더그라운드로, 탁월한 멜로디 감각에 준거하여 스미스(The Smiths)로 빗대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나 맑은 벨 앤 세바스찬의 음악은 엄연히 그들과 종이 다르다.
심지어 '당신 기분이 험악할 때는 나가서 신부를 만나 보라'는 대목이 있는 <If you 're feeling sinister> 때문인지 아니면 복음을 전도하는 듯한 정제된 사운드가 주는 이미지에 의해서 인지 그들을 '크리스천 록'으로 일컬은 사람도 있다. 머독은 '개의치 않는다. 훨씬 더 악화되어 불리는 수도 있으니까'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용어개발이 빠른 평자들은 그들을 1960년대 감성적인 팝 작곡의 대가이며 영화 <오스틴 파워>에서 엘비스 코스텔로와 <I'll never fall in love again>를 함께 한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나 스코트 워커(Scott Walker)의 음악을 재현하려는 '챔버팝' 무브먼트 군(群)의 하나로 분류한다. 98년 초에 내놓은 앨범 <The Boy With The Arab Strap>에 실린 곡 <Is it wicked not to care>가 충분히 그런 감성을 입증해준다. 평론가의 정의에 신경 쓸 건 없지만 당시 영국 음악이 브릿팝과 테크노 일색일 때 그런 덩치 큰 록 사운드에 대한 얼터너티브의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음악은 어른을 위한 동화
가사도 핵심이다. 이들은 일상과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문맥을 찾는다. 상기한 곡들의 제목만 챙겨도 일단을 감지할 수 있다. 감정의 궤적은 섬세하지만 한편으로 리얼하다. 절대로 공허한 언어를 남발하지 않는다. 순수하다. 어른을 위한 동화?
'자전거를 탄 소년아. 동네를 돌고있는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아니? 다리가 그렇게 멍들 정도인데. 이젠 그만 쉬려무나. 다리가 그렇게 무리가 왔을 땐 휴식이 필요하다는 뜻이야' -<Fox in the snow> 중에서
그들은 다수대중을 꼬드기는 보편적인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평범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상처받고 때로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상상 아닌 삶으로서 존재하는 음악이다. 그것은 장삿속 집단에 속하기를 거절하고 '개체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휴머니티 복원에 대한 꿈일 것이다.
각별함과 진실은 아는 사람은 안다. 집스터의 사장 마크 존스는 음악을 접하자마자 자신했다. '그들의 음악이 너무 좋아 난 언젠가 그것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낼 것임을 알았다. 녹음된 사운드의 우수성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시기가 지나면 앨범도 팔리게 될 것이다.'
인터뷰와 사진의 도움 없이도 정말 앨범은 인디로선 대박이라 할 15000장 이상이 팔렸다. 비로소 전설이 시작되었다. 3집 <The Boy With Arab Strap>이 나왔을 때 <스핀> <셀렉트> 등 영미 록 잡지들은 일제히 이 음반을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했다.
99년 브릿 어워드에서 신인상 수상하며 포효
음악 하는 사람들은 일찍이 벨 앤 세바스찬의 음악성을 알아봤다.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에 의해 98년 베스트 밴드로 뽑힌 임브레이스(Embrace)의 대니 맥나마라는 '벨 앤 세바스찬이 내년에는 최우수 신인 밴드 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대로 벨 앤 세바스찬은 99년 초 영국의 그래미 브릿 어워드에서 신인 아티스트 부문을 수상했다. 그들은 주목받기 시작한 98년에 이르러선 변화를 내비쳐 익명성을 떨쳐내고 멤버 모두가 찍힌 사진을 내놓고 공식 인터뷰도 가졌다. 이 부분도 해석이 잘 되어야 한다. 직업 뮤지션으로서의 행보를 개시했다고 정신의 상실로 볼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들을 환대해준 소수의 적극적 수용자들에 대한 공중활동가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인정해준 팬들은 예우 받아야 한다.
우리는 벨 앤 세바스찬을 통해 비즈니스로 무장한 음반자본에 짓눌린 '음악예술'의 회복 가능성을 본다. 그들은 음악산업의 폭압에 맞서 위태로운 음악의 순수성을 구하고자 하는 '음악구세군'이다. 어리석고 무망한 것 같지만 이 혼탁한 세상에는 때로 바보 같은 존재들이 필요하다. 바보는 순수하며 행동할 줄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