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코르둠 아폴리니스
Hexachordum Apollinis: The Six Strings of Apollo (1699)
파헬벨은 17세기 후반에 걸쳐 중남부 독일의 오르간 음악을 대표하는 오르가니스트였습니다. 그의 변주곡의 작곡가로서 위대한 업적이 보이는 작품은 1699년경에 작곡된 것으로 보이는 '헥사코르둠 아폴리니스'입니다. Hexachordum Apollinis는 아폴로 신의 하프 6줄을 뜻합니다.
타이틀 페이지에 따르면 오르간 또는 하프시코드로 연주된답니다. 파헬벨은 이 작품을 분명히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당시 북독일의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북스테우데에게 이 작품을 헌정합니다.
'헥사코르둠 아폴로니스 변주'세트는 6개의 아리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각각의 아리아는 또한 6개의 변주곡을 지니고 있는데, 두번째 아리아만 예외로 다섯개, 마지막 곡은 여덟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래하는 듯한 주선율의 테마와 적절하게 조화된 기교가 있는 오르간 음악입니다.
마지막곡은 특별한 부제를 달고 있는데, '아리아 제발디나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이는 파헬벨이 오르가니스트로서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재직했던 '뉘른베르크의 성 제발두스 교회 (Nürnberg - St.Sebaldus Kirche)'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글 출처: 캐논, 그 영원한 아름다운 선율
Johann Pachelbel is the dominating personality of the organ and keyboard in Central Germany during the late 17th century, whereas his contemporary Buxtehude took over the leadership in Northern Germany. Both masters are the main sources of Bach's intrumental art, which reconciles their stylistic and formal features on a higher plane.
Pachelbel asserted himself above all as the master of "severe" forms, such as the figured Chorale, the chorale Variation, and the Suite and the Variation. He was born at Nuremberg on September 1st, 1653, in a family from Eger, Bohemia. Little is known about his youth and training.
Although he wrote Cantatas and Motets, as well as chamber music, his main creative activity concerned keyboard music (for Organ and Harpsichord). only three collections were published in print during his lifetime. Hexachordum Apollinis, his only collection of secular music, was published in 1699.
These are six sets of Variations for harpsichord on six Arias in various keys (mostly minor). These Arias are brief and simple song-like melodies in binary form.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6 (Aria Sebaldina), which may have been related to the tradition of the St. Sebaldus Church, they seem to be of Pachelbel's free invention. Thus, alonside with Pasquini, he seems to have been one of the first composers to vary original instead of preexistant tunes. The beauty of the melodic invention, the variety of rhythmic metamorphoses, the noble elegiac mood of this piece add up to one of the most exquisite masterpieces of the kind.
Track 7. Chaconne f-minor
Johann Pachelbel 1653 -1706
Johann Pachelbel 은 1653년 뉘렘베르그의 한 중간계층의 가정 안에서 주류판매 업자였던 아버지 Johann (Hans) Pachelbel 과 그의 두번 째 부인이던 Anna (Anne) Maria Mair 사이에서 태어났다.
Pachelbel 은 어린시절 , 훗날 St. Sebaldus Church (Sebalduskirche)의 칸토르가 되었던 음악가이자 선생이었던 Heinrich Schwemmer 1621-1696 로부터 초기 음악적인 트레이닝을 받았다. 몇몇 자료에서는 파헬벨이 동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으며, 뉘렘베르그 악파의 중요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Georg Caspar Wecker 1632-1695 에게 배웠다고 언급되어있으나 근래에 이러한 사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있다. 어쨌던 간에 Wecker 와 Schwemmer 모두 Hans Leo Hassler 1564-1612로부터 Johann Erasmus Kindermann 1616-1655, 그리고 한참 뒤의 Johann Philipp Krieger 1649-1725 로 이어지는 Nuremberg 악파의 음악적인 전통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Johann Erasmus Kindermann 1616-1655 로 부터 배웠다. Johann Erasmus Kindermann 는 한 때 Johann Staden1581-1634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Johann Mattheson 1681-1764의 저술인 Grundlage einer Ehrenpforte (Hamburg, 1740) 는 Pachelbel 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마테존의 저술에 의하면 젊은 파헬벨은 예외적인 음악적, 학문적인 능력을 갖고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있으며, Pachelbel은 St. Lorenz Hauptschule 에서 최초의 교육을 받았으며, 뉘렘베르그의 Auditorio Aegediano에서 공부했고, 이후 1669년 까지 University of Altdorf에서 배웠던 것으로 기록하고있다. 동년 Altdorf의 St. Lorenz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지명되었다..재정적인 문제로 압박을 받은 그는 학교에 입학한지 채 1년도 안되어 대학을 그만두어야만 했다. 공부를 마치기위해 그는 1670년에 Regensburg에 있던 Gymnasium Poeticum 의 장학생이 되어 공부했다. 그의 학문적인 정성고 능력에 큰 인상을 받았던 학교 관계자는 그의 정규적인 교육을 허락하였다. Pachelbel 은 또한 Gymnasium의 밖에서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Pachelbel의 스승은 한 때 Johann Kaspar Kerll의 제자였으며, 후에 이태리 작곡가인 Giacomo Carissimi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Kaspar (Caspar) Prentz 였다. 그러한 스승 Kaspar (Caspar) Prentz를 통해 파헬벨은 동시대의 이태리 음악과 일반적인 카톨릭 음악 전반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672년 스승이던 Prentz 가 Eichstatt로 떠났다..이 시기는 파헬벨의 삶 가운데 그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가 가장 적은 부분이기도 하다. 1673년 까지 Regensburg 에 남아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스승 처럼 동년에 그곳을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673년으로부터 그는 비인에 살고있었다. 비인에서 그는 저명한 Saint Stephen 성당의 부 오르가니스트직을 맡았다. 당시 비인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중심이었으며, 중요한 문화적인 요충지였다. 당시 비인의 음악적인 취향과 대세는 이태리 스타일이 지배적이었다. 몇몇 저명한 국제적인 작곡가들이 비인을 근거로 활동하고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유럽 음악의 전통을 바꾸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Johann Jakob Froberger 1616-1667는 비인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서 1658년 까지 봉직했으며, 이후 Alessandro Poglietti에 의해 이 직위가 계승되었다. Georg Muffat 1653-1704는 비인에 부정기적으로 거주했다.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Johann Kaspar Kerll 1627-1693 이 1673년 비인으로 이주하였으며, 파헬벨의 음악에서 Kaspar Kerll 의 음악적인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Kaspar Kerll 이 파헬벨을 일정기간동안 가르쳤을 가능성을 시사하고있다. Pachelbel은 비인에서 5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이 기간동안 이태리와 남부 독일 출신의 독일 작곡가들로부터 종교음악에 대한 영향을 흡수했으며, 이와 같은 스타일은 이미 그가 익숙해 있던 루터교 전통과 보다 엄격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훗날의 하이든과 유사한 것으로, 하이든 또한 Saint Stephen 성당의 음악가로 젊은 시절 한 때 봉직했으며, 당시의 주도적인 작곡가의 대열에 있었다는 점이다.
1677년 파헬벨은 Saxe-Eisenach의 공작이던 Johann Georg I가 지배하던 Eisenach로 옮겼으며, 역시 뉘렘 베르그 출신으로 그곳의 궁정 악장이던 Daniel Eberlin 아래서 오르가니스트 직을 맡았다. 그곳에서 파헬벨은 대바흐의 아버지였던 Ambrosius Bach를 비롯한 바흐의 가문의 일원들과 만났으며, (Eisenach 는 대바흐의 아버지였던 Ambrosius Bach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만큼 매우 긴밀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파헬벨은 아이제나흐에 1년 밖에 머무르지 않았는데, 1678년 Johann Georg와 형제이던 Saxe-Jena의 공작 Bernhard II의 사망에 따른 추모 기간동안 궁정 음악가들의 급료가 크게 삭감되었으며, 경제적인 고통으로 압박을 받던 그는 Eberlin으로부터 'perfect and rare virtuoso' - einen perfecten und raren Virtuosen라는 내용의 추천서 받았고, 이에 고무되어 직위를 그만두고 아이제나흐를 떠났다.
1678년 파헬벨은 Johann Effler (c1640–1711: Effler는 훗날 바흐가 바이마르 궁정의 악장직을 맡게될 때 바흐의 선임자였다)의 후임으로 Erfurt의 Predigerkirche의 오르가니스가 되었다. 바흐 가문은 Erfurt 에서 잘 알려져있었으며, 훗날 Erfurt 의 오르가나스트직은 거의 바흐 가문의 일원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이미 아이제나흐로부터 쌓아왔던 바흐 가문과의 친분은 이 곳 Erfurt 에서도 지속되었다. 파헬벨은 대 바흐의 아버지인 Johann Ambrosius의 딸이던 Johanna Juditha의 대부가 되었으며, 대 바흐의 큰형이던 Johann Christoph Bach (1671–1721)의 스승이되어 가르치기도 하였다. 한 때 Johann Christian Bach (1640–1682)의 집에 살기도하였다. 파헬벨은 Erfurt 에 12년 동안 머물렀으며,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당 시대의 주도적인 독일 오르간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의 명성을 확고하게 세웠다. chorale prelude 는 그가 Erfurt 에 머무는 동안 작곡한 작품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이곡을 작곡한 이후 그는 특별히 교회의 전례를 위한 preludes 의 작곡을 요구를 내용으로하는 계약을 하기도하였다. 그의 업무중 하나는 오르간을 유지 보수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매해 대규모의 작품을 작곡함으로써 전년에 비하여 작곡가와 오르가니스트로서 자신의 발전을 증명하여야했다.
파헬벨이 거주했던 Erfurt의 집주인이었던 Johann Christian Bach (1640–1682)가 1682년 사망함에 따라 Pachelbel 은 미망인으로부터 자신이 거주하던 집을 매입하였다. 1686년 Sondershausen의 St. Trinitatis 의 오르가니스트직을 제안받았으며, 제안을 즉시 수락하였다. 그러나 남아 전하는 파헬벨의 친필로 쓴 서간에서는 교회측과의 몇 차례 교섭끝에 이 직위를 거절 했다고 쓰고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구체적으로 그에게 제안된 다른 곳의 직위를 받아 들이기 전에 Erfurt의 선배들과 교회 관계자들과 자신의 진로에 관계된 문제를 협의했을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면한 문제가 그의 명성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결되었으며, 아마도 그가 Erfurt에서 4년이란 시간을 더 머물게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파헬벨은 Erfurt에 머무는 동안 두번 결혼했는데, 1681년 Erfurt의 Stadt-Major 의 딸인 Barbara Gabler는 그의 첫 부인이되었는데, 결혼식은 신부의 아버지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불행하게도 부인과 그의 아들은 1683년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첫 출판된 작품인 Musicalische Sterbens-Gedancken ("Musical Thoughts on Death", Erfurt, 1683)라 불리는 chorale variations 은 이러한 그의 불행이 반영된 작품이다. 10개월 이후 그는 구리 세공업자의 딸이던 Judith Drommer (Trummert)와 결혼했으며,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두 아들인 Wilhelm Hieronymus Pachelbel 과 Charles Theodore Pachelbel은 오르간 작곡가가 되었는데, 특히 Charles Theodore Pachelbel은 1734년 식민지 미국에 이주하였다. 또 다른 아들인 Johann Michael은 뉘렘베르그에서 악기 제작자가 되었으며, 멀리 런던과 자마이카 등에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딸들 가운데 한사람인 Amalia Pachelbel은 화가와 조각가로 명성을 얻었다.
비록 그가 Erfurt에서 탁월하게 성공적인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였으며,교사였지만, Erfurt를 떠나 더 나은 조건의 직위를 찾고자 했을 때 허락을 받아야했으며, 1690년 그의 근면성과 성실함을 내용으로한 추천서를 손에 쥐고 정식으로 Erfurt를 떠날 수 있었다.
Stuttgart 의 Wurttemberg 궁정에서 공작부인이던 Magdalena Sibylla 후원 아래 업무를 시작했으나 Grand Alliance 전쟁(혹은 9년 전쟁이라고도 함)이 발발하여 프랑스군이 침략함으로써 채 2년정도 밖에 되지 않아 피난 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후 그는 Gotha 에서 오르가니스트 직을 맡았으며, 이 직위를 1692년으로부터 다음 2년동안 유지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전례음악 작품집 Acht Chorale zum Praeambulieren in 1693 (Erster Theil etlicher Chorale)을 출판하였다. 1694년 이전 제자로 두었던 대바흐의 맏형이던 Johann Christoph Bach 의 결혼이 Ohrdruf에서 있었으며, 파헬벨을 비롯한 음악가들이 초청되었다. 아마도 그 역시 이 초청에 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그가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면, 당시 9살이던 대바흐를 만났을 것이다. Gotha에서 3년 째 되던 해에 그는 Stuttgart와 Oxford University로 부터 직위의 제안을 받았는데, 이들 두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다. 그 사이에 고향인 Nuremberg의 St. Sebaldus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던 Georg Caspar Wecker (파헬벨의 초기 교육을 맡았던 스승 중 하나로 추정됨)가 1695년 사망함에 따라 시 당국에서는 Pachelbel을 오르가니스트로 지명하고자 열망했다. 당시 뉘렘베르그 시는 오르가니스트 직위를 위해 여타의 교회로 부터 도전해온 다른 작곡가들과의 경합과 같은 관례를 깬 파격적인 제안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했으며, 1695년 여름으로부터 자신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Johann Pachelbel은 자신의 남은 삶을 뉘렘베르그에서 보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자신의 실내악 작품집인 Musikalische Ergötzung을 출판했으며, 아울러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는 변주곡을 수반한 6개의 키보드 아리아 세트인 Hexachordum Apollinis (Nuremberg, 1699)를 출판하였다. 그가 자신의 본 출판물을 Dieterich Buxtehude에게 헌정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비록 이탈리아와 남부독일 출신의 작곡가들에 대한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하지만 북독일 악파 작곡가들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삶의 마지막 몇년동안 이태리 작곡가들의 영향을 반영한 concertato Vespers 와 90개 이상의 Magnificat fugues로 된 세트를 작곡하였다. 1706년 Johann Pachelbel 은 52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글 출처: (하람이네 음악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