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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호(號)의 뗏목 The Raft of the Medusa - Gericault│누군가의 추천으로

리차드 강 2009. 4. 10. 01:52
Le Radeau de la Méduse
국제 ˚가톨릭노동청년회(CIJOC) 회장에 피선되어 영국으로 건너간 분이 프랑스에 갔다가 루브르 방물관에서 화가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땟목"을 보고 대단한 감탄의 글을 미니홈피에 사진과 함께 올렸다. 나도 그림을 잘 모르는 터라 공부도 할겸 인터넷을 서핑하며 차곡히 찾아서 올려본다. 좀 공부가 되가나? 뒤로 돌아서면 까먹는 세대이니...쩝
파리의 첫째 주 월요일은 박물관이 무료란다. 그래서 언능 구경하러 갔다는데 제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제리코의 메뒤즈(불어 발음인가보다)호의 뗏목...이 그림이 멜랑꼴리하지는 않은데, 헉,,,150명중 15명만 살아서 구조된 그동안의 살육전에 대해서는 책으로 읽으라고 하면서 책 한권 추천해 줬다. 누가 사주면 읽을까...절대로 안살거다. 그래도 검색은 해봐야쥐~ ㅋㅋ     "춤추는 죽음" 허~컥 죽음...ㅠ.ㅠ
이 그림과 화가, 그리고 책을 소개시켜주신 분의 미니홈피 메인에 올라와 있는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의 노래 한곡 올린다. 그러고 보니 그 노래도 참 오래 됐다. 듣기 좋다. 뭔내용인지 모르지만...
˚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는 현재 두개의 조직으로 분열되어있다. JOCI(족기)와 CIJOC(씨족). 원래는 벨기에의 벨지움에 본부를 두고 있는 JOCI 하나 였으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족기에서 가톨릭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의 성명서, 강령, 그리고 공문서와 여러 대외관계에서 그리스도교 정신을 나타낼 만한 상징성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로마 교황청 신앙성성에서 여러번 권고와 제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족기에서는 교황청 신앙성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회주의적 이념체계로 모든 문서, 발언, 계획들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를 보다 못한 몇몇 대륙의 지도자들과 지도신부, 각 나라의 회장들이 총회에서 결정을 하여 교황청에서 권고하는 신앙에의 길로 들어가는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원한다는 깊은 뜻을 각 대륙과 지역 가톨릭교회에서 선택하게 하였다. 한국에서는 로마에 적을 둔 씨족으로 들어가기로 1990년대 이후에 결정하였다. 많은 갈등과 기다림과 협력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후대에 들어온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까르딘 청년회로 명칭 변경) 회원들은 그냥 로마에 속해 있는 줄 알 것이다. 나도 그랬었으니까...ㅋ
우리는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되며, 행동으로 보인다고 생각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족기와 씨족의 이념 문제에서도 잘 들어나 있다고 보는 것이 내 견해다. 신앙을 선택했다면 말로 표현해야 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좀더 강한 신앙의 증거를 위한 표현력이 필요하며 문서화하고 각대륙과 각 국가에 협력과 협조를 요청할 때도 복음에 기반한 활동이 될 수 있는 충분한 토론과 깊은 신앙의 안배로 세계의 모든 가톨릭노동청년회원들이 이 지구상에 하느님나라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마음을 내면 깊숙이 심어줄 수 있는 증거를 보여야 하는 것이 대표자들과 최고 대표의 책무이며 책임이기도 하고 또한 지도신부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단지 "인간"만을 위한 길임을 로마에서는 재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여기서 줄일란다. 너무 시끄럽다고 할까봐서...
그래도 우리는 늘 증거자가 되어야 하고 하루하루를 충격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왕국을 이땅에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명심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나부터 겠지만..ㅋㅋㅋ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여 그냥 신경쓰지 말고 일상에서 복음을 전하시길...
2008년 7월 21일 9시 뉴스 시작할때...
백수재에서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Gericault, Theodore The Raft of the Medusa 1819 Oil on canvas
491 x 716 cm Musée du Louvre, Paris
     
Gericault, Theodore The Raft of the Medusa DETAIL 1819
Oil on canvas 491 x 716 cm Musée du Louvre, Paris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1816년 여름 400명의 승객을 태우고 프랑스 식민지인 아프리카 세네갈로 가던 메두사호가 암초에 좌초됐다. 선장과 귀족, 장교들은 안전한 구호선을 탔고 하급선원과 승객 150명 정도가 배에서 뜯어낸 목재로 만든 뗏목에 올랐다. 구호선과 연결된 밧줄마저 잘리고 12일을 바다에서 표류하다 15명만 구조됐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죽고 죽이는 처절한 생존경쟁을 해야 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바다에 던지는가 하면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은 죽은 자의 시신을 먹는 일도 있었다.
생존자중 일부가 150명을 죽음으로 내몬 무책임한 선장과 고위층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아 1817년 ‘메두사호의 난파’라는 책을 출간했다. 파리시민은 경악하였고 선장과 귀족층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끊었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8~1919)’은 반이성과 주체의 내면과 감정을 강조했던 낭만주의 미술의 결정적 신호탄이 됐다. 화가는 생존자들이 지나는 선박을 발견하고 흥분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작품의 구도를 피라미드로 보았을 때 정점에 있는 인물이 붉은 천을 수평선 너머 아득히 보이는 구조선을 향해 흔들고 있다. 갖가지 포즈와 표정의 인물묘사는 작품의 극적 분위기에 깊이를 더한다. 구조선의 존재를 흥분해서 알리는 이가 있고, 하단엔 생과 사를 가늠할 수 없는 이들이 쓰러져 있다. 우측 가장자리에선 한 남자가 파도에 쓸려 내려가고 있으며, 이 극적인 순간에 정신을 놓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이와 생존을 위해 절규하는 사람 등 실로 다양하다.
리얼리티를 위해 화가는 죽은 시신을 찾아 다녔고, 심지어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뗏목의 모형을 만들어 상황을 연출해가며 작업했다고 한다. 제리코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적 고통, 잔혹성, 구조에 대한 희망 등을 모두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필사의 절규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생의 갈림길에 놓인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서사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캔버스에 유화,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제리코 (Jean Louis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프랑스 화가. 루앙 출생. C. 베르네와 B.P.N. 게랭의 화실(여기서 F.V.E. 들라크루아도 수학)에서 다비드풍의 고전주의 규범을 배웠다. 또 당시 로마의 보르게세궁에서 받은 소장품 등을 통해 티치아노 베셀리오와 P.P. 루벤스의 묘사법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성과로 1812년 미술전람회에 보낸 데뷔작 《경기병 사관(輕騎兵士官, 루브르미술관)》이 금상을 받았다. 1816∼1817년 로마 피렌체에 유학하여 미켈란젤로와 바로크양식, 그리고 라파엘로를 배웠다. 귀국한 뒤에는 문학적 주제가 아닌, 그 시대의 사건을 주제로 바로크적이고 낭만적인 정열과 격조를 가미하는 기법을 추구했는데, 그 성과인 《메뒤즈호의 뗏목》을 1819년 미술전람회에 출품함으로써 낭만파 회화의 봉화를 올렸다. 그는 현실의 비극, 대각선 구도, 명암의 대조, 사체(死體)의 소묘로 뒷받침된 현실성 등을 통해 근대회화의 한 시대를 열었다.
아래 글은 좀더 자세히...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또 P.P.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6년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후 대작 《메두사호(號)의 뗏목》(1819)을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등 실감을 살린 이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등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그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20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또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그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노예제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22년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밖에 주요작품에 《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 등이 있으며 약간의 조각작품도 남겼다.
     
제리코의 그림을 더 보시라고......보너스...
 
Gericault, Theodore An Officer of the Imperial Horse Guards Charging 1814 Oil on canvas 349 x 266 cm Musée du Louvre, Paris
     
Gericault, Theodore The Woman with Gambling Mania c. 1822
Oil on canvas 30 1/4 x 25 1/2 in. (77 x 65 cm) Musée du Louvre, Paris
     
Gericault, Theodore Portrait of a Woman Suffering from Obsessive Envy c. 1822 Oil on canvas 28 3/8 x 22 7/8 in. (72 x 58 cm)
Musee des Beaux-Arts, Lyons, France
     
Monument at Gericault's tomb, by sculptor Antoine Étex
     
Théodore Géricault's Portrait of a Kleptomaniac.
Théodore Géricault (September 26, 1791 – January 26, 1824) was an important French painter and lithographer, known for The Raft of the Medusa and other paintings. He was one of the pioneers of the Romantic movement.
     
Theodore Gericault (1791-1824)
A number of painters in the Romantic period, and some before it, believed imagery should present situations, states of suffering, and outrage in forms that were extreme and compelling in themselves. These images, they thought, would stimulate the sympathy and satisfaction that were regarded as salutary and sublime - indeed they envisaged a situation in which agony as such would create a demand for experience that would in other contexts be intolerable. Among these uncommon spirits the painter Géricault was quite exceptional. He generated images of physical grandeur, brushing light into dark with an impulsive bluntness, which was a direct manifestation of natural force. He portrayed, for example, triumphant heroism, valiant defeat, splendid savagery, and animal magnificence, all of them with irresistible nobility and pathos.
In the last years of Napoleon's rule Géricault painted the military myth on a grand scale and interested David. With the Restoration, he was painting subjects of barbaric violence and accumulating studies of injuries and executions when history provided him with the shipwreck of an ill fated expedition and the desperate suffering of the survivors. Within a year he had painted The Raft of the Medusa, a picture of pathos and protest outstanding in the history of art. It equipped romantic realism with a terrific commitment to humanity and an equally terrific style, in which the ruthlessness of the square brushed modeling and the livid light were unforgettably compelling. Five years later, after extending his repertory of extreme situations to the pathos of the insane, he died in a fall from a horse. once he was dead, the regime which his great picture had arraigned found no difficulty in buying it. The most sincere protests have a way of turning into sensational aesthetic entertainments. It is apparently the nobility and insight in themselves that fulfill the deeper needs. The loss of Géricault depleted the French reserves of seriousness through the half century to come, sadly but not fatally.
- By Sir Lawrence Gowing, Paintings in the Louvre
     
 Perhaps Love - Placido Domingo & John Denver
Perhaps Love(Netherlands CBS 1981)
Placido Domingo & John Denver
A 면   Perhaps Love (2:56)
 
     
A면   Perhaps Love (2:56) 싱글
          Guitar - John Denver 
           Vocals [Duet] - John Denver , Placido Domingo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