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앨범: 사코와 반제티 [Original Soundtrack] - Ennio Morricone & Joan Baez (1970 RCA Victor)

리차드 강 2012. 9. 20. 17:53

Sacco & Vanzetti

사코와 반제티 [Original Soundtrack]

Ennio Morricone & Joan Baez

1. Hopes of Freedom - Track 전곡 연주

 

Album Title: Sacco and Vanzetti [Original Soundtrack].

Composer: Ennio Morricone
Artist: Joan Baez (Vocal)
Performer: Al Sinket (synthesizer)
                  Gaston Chiarini (oboe)
                  Walter Bianchi (synthesizer)
Conductor: Ennio Morricone
Orchestra: Ennio Morricone And His Orchestra
Audio LP (1971)
Number of Discs: 1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Label: RCA Victor
Copyright: (c) 1970 RCA Victor
Genre: Folk-Rock, Psychedelic, Soundtracks, Film Music, Contemporary Folk
Recording Time: 33 minutes.

 

 

A1. Hopes of Freedom
A2. Ballad of Sacco and Vanzetti, Pt. 1
A3. In Prison
A4. Ballad of Sacco and Vanzetti, Pt. 2
A5. Sacco and His Son

B1. Ballad of Sacco and Vanzetti, Pt. 3
B2. Freedom in Hope
B3. To Die Is a Duty
B4. Electric Chair
B5. Here's to You

Oboe – Gastone Chiarini
Joan Baez
Keyboards – Walter Bianchi
Joan Baez


Joan Baez
Oboe – Gastone Chiarini
Sinket – Walter Bianchi
Sinket – Walter Bianchi
Joan Baez

2:26
5:00
2:04
5:20
1:45

6:21
2:00
3:00
2:00
3:06

Credits
Conductor – Ennio Morricone
Lyrics By – Joan Baez (tracks: 12)
Oboe – Gastone Chiarni (tracks: 4, 9, 10)
Synthesizer – Al Sinket, Walter Bianchi
Vocals – I Cantori Moderni Of Alessandroni* (tracks: A1, B3), Joan Baez (tracks: A2, A4, B1, B5)

 

 

두 이탈리아인과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사코와 반제티 이야기

사코와 반제티는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이탈리아에서 건너와 고된 노동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니콜라 사코는 1908년 미국으로 건너와 공사장과 철공소에서 일하다 구두 공장에서 제화공으로 일했다.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도 같은 해 뉴욕으로 와 식당에서 접시를 딱고 공장에서 일하다 해고되어 생선 행상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Bartolomeo Vanzetti and Nicola Sacco as seen in SACCO AND VANZETTI, a film by Peter Miller. A First Run Features release

 

두 청년은 휴일 오후가 되면 루이지 갈레아니를 따르는 무정부주의 조직 ‘그루포 아우토노모’ 모임에 나갔고, 무정부주의 신문《크로나카 소베르시바》를 구독하고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체포될 당시 반제티는 대중 집회에서 발언할 연설문을 소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심문 과정에서 무정부주의 동료들의 활동을 은폐했다.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도시 브레인트리의 제화공장에서 경리와 급여 수송원 두 사람을 살해하고 현금 가방을 빼앗아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곧 두 사람은 강도 살인자로 지목되어 체포되고 재판이 시작된다. “내 자유는 모든 이의 자유 속에 있고, 내 행복은 모든 이의 행복 속에 있다”는 신념을 가졌고, 감옥에서도 ‘일하지 않는 두 손’을 부끄러워했던 두 사람은 노동자의 급여를 강탈한 강도 살인자로 둔갑한다.

재판장 웹스터 세이어는 ‘무정부주의 놈들’이라는 말을 내뱉고, 선정된 배심원들에게 ‘미국인이라는 애국심을 갖고 나라의 부름에 샀한 진정한 군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공공연히 강조했다. 미국 사회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이탈리아인이자 무정부주의자에게 법은 공정하지 않았다.

공정하지 않은 재판정 분위기에서 증인들의 모호한 진 술과 피고에 대한 유도 심문으로 일관한 심리 속에 명백한 증거가 없음에도 유죄 평결이 나왔고, 두 사람의 무죄를 입증하는 알리바이와 결정적인 증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피고측 변호인의 이의제기도 모두 기각되었다. 공정하지 않은 재판이라는 여론이 들끓게 되자 최종적으로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하버드대 총장 로렌스 로웰, MIT 총장 새뮤얼 스트래턴, 로버트 그랜트 판사로 구성된 3인위원회를 구성해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매사추세츠는 미국 탄생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던 뉴잉글랜드의 중심이었다. 위원회는 유죄를 다시 한 번 확정했고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법정의 권위는 지켜졌다. 감옥 안에서 사코는 단식투쟁을 했고 반제티는 자서전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쓰며 자신들이 무죄임을 항변했다.

반제티는 《뉴욕 월드》와 감옥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길거리에서 무시당하면서 내 삶을 살다 마쳤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고 이름 없는 실패자로 죽었을 것이다. 평생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어 가면서 하고 있는 일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 마지막 순간은 우리 것이다. 그 고통은 우리의 승리이다!”

사코는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울지 말거라, 단테야! 네 어머니가 일곱 해 동안 고생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아들아, 울지 말고 씩씩하게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소중한 이들을 사랑하고 곁에서 보살펴 드려라. 네 어머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피어 있는 들꽃을 꺾고 나무 그늘에서 쉬렴. 항상 기억해라.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 네 용감한 마음과 선량함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리라 믿는다. 인생에서 너는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거야.”

출처: 도서 사코와 반제티 - 세계를 뒤흔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 중에서

글 출처: ANUNNAKI's Media World (아누나키의 미디어 세상)

 

싸코 와 반제띠 / Sacco e (and) Vanzetti
1971년/ 각본+감독: Giuliano Montaldo / 주연: Ricardo Cucciola +
Gian Maria Volonta / 음악: Ennio Moricone /120분

 

 

2000년에 개봉이 된 우리나라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던 ‘아나키스트‘(애너키스트- Anarchist)라고 하면 무정부주의자, 폭력 혁명가, 또는 테러 분자까지도 (백과사전에서는) 의미를 하고 있는데, 이 영화 제목 속의 두 실제 인물, 훼르디난도 니꼴라 싸코(Ferdinando Niccola Sacco. 1891-1927)와 바르토로메오 반제띠(Bartolomeo Vanzetti. 1888-1927)도 오늘날의 역사에는 일반적으로 ‘아나키스트’로 분류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역사의 순교자’로까지 묘사되고 있는 이 두 사람이 과연 ‘아나키스트’ 였었나 하는 점과 또 그들이 사형을 당한지 반세기가 지난 1977년에 미국, 메사추세츠 사법부가 그들의 무죄를 공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싸코 와 반제띠의 관한 논쟁은 사상과 이념적으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요란하고 또 유명한 반공 운동으로 알려 진 1950년의 ‘매카시즘(Mccarthyism) 선풍’ 훨씬 전인 1920년대부터 미국은 이미 반공 정신이 싹텄다고 하는데, 이는 물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시작이 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그 두려움(The Red Scare)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앨러지(Allergy)현상이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던 1920년 5월의 어느 화창한 날, 이태리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노동 계층, 싸코 와 반제띠가 체포 되는데, 같은 해, 4월에 있었던 어느 살인사건에서부터 이들에 관한 기구한 사연은 시작이 된다. 그리고 1927년 8월23일, 수많은 여론의 논쟁 속에서 7년 이상을 끌어오면서 말도 많았던 오랜 재판의 결과에 의해 이들은 함께 사형 집행을 당하였는데, 이 사형집행은 이후, 뉴욕, 런던, 빠리, 암스텔담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대도시와 또 남미의 수많은 도시들에서 무고한 이민자들을 사법 살인하였다는 대규모 항의 집회와 폭동을 유발하였다. 물론 이 재판이 정당하지 못한 점에 관한 논쟁은 21세기, 아직까지도 이곳저곳에서 여전하며, 이들에 관한 서적들만 해도 현재 약 50여종 이상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Protesters as seen in SACCO AND VANZETTI, a film by Peter Miller. A First Run Features release

 

매사추세츠, 사우스 브레인트리(South Braintree), 1920년 4월15일 오후, 슬래터-모릴(Slater-Morrill) 구두 제조회사의 경리 직원인 후레데릭 파맨터(Frederick Parmenter)와 그가 수송 중이던 약 만 오천 달러의 급여 경비를 맡았던 보안요원, 알레산드로 베라르델리(Alessandro Berardelli), 두 명이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을 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5일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는 뉴욕 주, 버팔로(Buffalo)에서 이들 두 명의 살인과 무장 강도혐의로 바로 싸코 와 반제띠가 체포되었는데, 체포 될 당시에 권총을 휴대하였다는 것 외에 따로 특별한 물적 증거가 있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훼르디난도 니꼴라 싸코는 17살 때(1908년) 이민을 온 구두제조 기술자였고, 바르토로메오 반제띠는 20살 때(1908년) 이민을 온 생선 장수였는데, 둘 다 이태리 출신의 유명한 공산주의 아나키스트, 루이기 갈레아니(Luigi Galleani. 1861-1931)의 열렬한 추종 무리 (갈레아니스트-무정부주의 전사들)의 일원이었고, 또 그들과 함께 많은 저항 운동에 관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의 물적 증거보다는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이태리 출신이란 ‘사상과 출신 배경’이 체포 정황의 우선이었다는 이 사건은 결국 7년 이상을 끈 기나긴 불공정 논쟁속의 재판으로 이어지고, 결국 싸코 와 반제띠는 1927년에 전기의자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성직자들의 입회를 거부한 싸코의 마지막 말은 “아나키아 만세!”(Viva L'anachia!)였고, 반제띠는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싶다.“ 였었다고 한다. 2007년에도 ‘Sacco And Vanzetti ’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이 되었었지만, 1971년에 개봉이 된 이 작품이야말로 사건발생 반세기만에 다시 이들, 싸코 와 반제띠를 당시의 신세대들에게 유명인사로 부각시키는데 조금의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1960년의 영화계 데뷔 때부터 빨치산(Partisan)저항 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부터 만들었다는 줄리아노 몬탈도(Giuliano Montaldo. 1930. 이태리)감독의 연출도 연출이었지만,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1929-1989)감독과 줄곧 협력을 해오면서, 영화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던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icone. 1928. 이태리)의 오리지널 스코어(OS)와 주제곡이야말로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동창 친구 사이였던 세르지오 레오네 와 엔니오 모리꼬네, 둘 다 젊은 시절에는 좌익 이념사상에 흠뻑 빠져있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지만,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 주는 의미 이상의 (이념적)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1960년대에 그가 들려주었던 서부영화들의 특이한 주제곡들과도 차원이 아주 다른, 완전히 새로운(현실적인) 스타일의 모리꼬네 음악을 또 다시 선보였는데, 전체적으로 비장하면서도 때론 공포영화의 음악같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한 오리지널 스코어(OS)의 기본 컨셉은 바로 ‘전기의자의 공포’였었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형대의 멜로디‘라는 부제도 붙였었다.) 한편, 멕시칸 이민 2세이면서 자유 민권운동가로 큰 활동을 하던 싱어 송 라이터, 조앤 바에즈(Joan Baez. 1941. 뉴욕)가 영화 내용에 걸맞게 OST 제작에도 참여를 하여, ‘The Ballad Of Sacco And Vanzetti’ 와 ‘Here's To You’ 를 모리꼬네와 함께 만들고, 또 직접 불러 주면서 이 영화음악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특히 제1 주제곡인 ‘The Ballad Of Sacco And Vanzetti(La Ballata Di Sacco E Vanzetti)‘는 ‘Introduction‘을 포함해 총 4부작으로 만들 정도로 긴 가사가 특징 인데, 이 가사들은 모두 싸코 와 반제띠의 실제 옥중서신(기도문 포함)에서 인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여, 저는 (죄인 아닌) 죄인의 몸입니다. 두려운 건 나의 죄가 소문나는 게 아니라 잊혀지는 것이고, 단지 침묵만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The Ballad Of Sacco And Vanzetti: Part 2’의 가사 첫 구절인데, 바로 이 ‘Part 2’가 바에즈가 부른 주제곡으로는 가장 널리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Father, yes I'm a prisoner
Fear not to relay my crime
The crime is loving the forsaken
Only silence is shame
And now I'll tell you what's against us
An art that's lived for centuries
Go through the years and you'll find
What's blackened all of history
Against us is the law
With its immensity of strength and power
Against us is the law
Police know how to make a man
A guilty or an innocent
Against us is the power of police
The shameless lies that men have told
Will ever more be paid in gold
Against us is the power of gold
Against us is racial hatred
And the simple fact that we are poor
My father dear, I'm a prisoner
Don't be a shamed to tell my crime
The crime of love and brotherhood
And only silence is shame
With me I have my love my innocence
The workers and the poor
For all of this I'm safe and B
And hope is mine
Rebellion, revolution don't need dollars
They need this instead
Imagination, suffering, light and love
And care for every human being
You never steal, you never kill
You are a part of hope and life
The revolution goes from man to man
And heart to heart
And I sense when I look at the stars
That we are children of life, Death is small.

‘영광은 그대들, 니꼴라와 바트에게’ 라는 의미의 제2의 주제곡, ‘그대들에게 바칩니다(Here's To You)'는 싸코 와 반제띠가 형장에서 운명을 달리한 후, 이들을 역사의 순교자로 찬양하면서 영화의 마지막을 경건한 분위기로 장식 하였는데, "고통의 마지막 순간은 그대들의 승리가 되었고, 영원히 우리들 마음속에서 안식을 누리세요.“ 라는 의미심장한 가사를 계속 반복하면서 마치 종교 음악과도 같은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Here's to you, Nichola and Bart.
Rest forever here in our hearts.
The last and final moment is yours.
That agony is your triumph.

 

이 영화와는 상관이 없지만, 폭 싱어,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는 ‘The Ballads Of Sacco And Vanzetti’라는 타이틀의 LP 앨범을 1960년에 이미 출반했었는데, 싸코 와 반제띠에 관한 11곡의 자작곡들과 또 다른 폭 싱어, 피트 시거(Pete Seeger)의 노래도 한곡 더 수록을 하였었고, 1977년에도 찰리 킹(Charlie King)이란 폭 싱어도 싸코 와 반제띠에 관한 곡, ‘Two Good Arms’를 발표 했었다. 그만큼 전 세계 문화계에서도 이들에 관한 관심은 지대하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한편, 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삼촌이자, '대부 lll (The Godfather Part lll)‘의 오리지널 스코어(OS)도 작곡한 바 있는 뮤지션, 안톤 코폴라(Anton Coppola)는 이 싸코 와 반제띠를 주제로 오페라를 직접 만들어 2001년에 초연을 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내내 상영 금지 영화 리스트에 오르면서 주제곡까지도 물론 방송을 할 수가 없었던 이 영화가 만들어진지도 벌써 40년이 지나갔지만, 이렇게 세월이 흐른 후에 지나간 역사를 뒤돌아보면,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점철이 된 역사도 있게 마련이어서,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하던 우리나라의 현대사에도 이 ‘싸코 와 반제띠 사건’ 같은 일들은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1975년 4월9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가칭) 인혁 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확정 선고하였고, 매우 이례적으로 그날 밤과 다음 날 새벽 사이에 전원이 일괄 사형집행 되었다고 하는데, 스위스에 본부가 있던 국제 법학자 협회는 이날을 ‘대한민국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 했었다고 한다.

2007년 1월23일, 서울 중앙 지법은 8명에 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2007년 8월21일, 서울 지법은 국가가 이들 유족들에게 총 637억여 원을 손해 배상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글 출처: 영화음악이야기@김제건

 

왓슨의 '사코와 반제티'

1927년 늦여름,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세상에 메아리쳤다. 그 종소리는 유럽에서부터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파라과이에서 일본까지 울려 퍼졌다. 팔월의 어느 슬픈 월요일, 내일에 관한 이야기는 멈추고 모든 관심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감옥에 집중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교도소에 수감된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자정에 사형될 예정이었다.

‘착한 제화공과 가난한 생선 장수’로 알려진 두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다. 물론 두 사람을 괴수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제도를’ 뒤흔들려는 살인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이자 이민자들이라고.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을 ‘반짝이는 빛’으로 여겼다. 다만 그들은 비정한 판사와 냉혹한 검사에 의해 사건이 조작된 온화한 징병 기피자였을 뿐이다. 그들을 인간적으로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 사람은 헌신적인 아버지였고, 또 한 사람은 시인의 영혼을 지닌 방랑자였으며, 둘 다 투사였음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게 될 사형 집행을 코앞에 두고, 수많은 이들은 그걸 지켜볼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파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 밖에는 탱크가 성난 군중을 막아섰다. 런던의 하이드파크에는 시위자들이 군집했다. 남아메리카 곳곳에서는 동맹파업이 벌어져서 공장이 문을 닫고 수송이 중단되었다. 시드니, 부쿠레슈티, 베를린, 암스테르담, 로마,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 요하네스버그, 마라케시의 거리에 흥분한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미국은 플래퍼(flapper, 1920년대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재즈 음악을 들으며 사회 관습을 경멸하던 신여성을 가리키던 말)와 럼블시트(rumble seat,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구형 자동차에서 덮개가 없이 뒷부분에 놓인 접좌석), 베이브 루스와 찰스 린드버그가 화제의 중심이던 ‘재즈 시대(1920년대 향락적이고 사치스러웠던 재즈의 전성기.)’였다. 그런 미국에서, 두 이탈리아인의 이야기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무죄를 주장하는 두 사람의 유창한 언변과 평결을 둘러싼 의혹들과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들까지. 그들을 석방시키려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자정에 결판난다. 사형이 또다시 유예될 것인가? 최후의 순간에 사면이 이루어질 것인가? 맨해튼 지하철이나 또 다른 배심원의 집에 다시 폭탄 테러가 벌어질 것인가? 밤이 깊어지면서 변호사들은 사형 집행을 막을 수 있는 판사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했다. 라디오 방송사들은 밤이 늦도록 중계방송을 하겠다고 했다. 굳게 잠긴 감옥 밖의 시위자들은 전기의자 스위치가 켜지면 희미해질 감시탑의 불빛을 응시했다.

드라마는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1920년 폭력배들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긴장으로 치달은 사코와 반제티의 전설은 다이너마이트가 숨겨진 소포를 개봉하듯 폭발로 시작된다.

7월 10일로 예정된 사형일이 다가오면서 수많은 저항의 불꽃이 피어올라 ‘사코와 반제티 재판’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판이 되었다.

│ 프롤로그 │

사람들이 가진 정의로움을 왜 끈질기게 믿지 않습니까?
세상에 그만한 희망이 어디 또 있습니까?
― 에이브러햄 링컨


1919년 4월 말, 똑같은 폭탄 서른 개가 깔끔하게 포장되어 우표까지 붙여진 채 맨해튼에서 우편으로 발송되었다. 존 록펠러, J. P. 모건, 올리버 웬델 홈스(Oliver Wendell Holmes,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 같은 저명한 미국인들에게 발송된 우편물들은 음흉한 의도를 숨긴 작품들이었다. 길쭉하고 납작한 소포를 싼 갈색 종이에는 ‘뉴욕 김벨스 백화점, 샘플’이라는 글씨와 함께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노동절 시위 때 한꺼번에 터져 경종을 울릴 수 있도록, 목적지에 따라서 폭탄 일부는 다른 폭탄보다 일찍 발송되었다.

우편물 수령인 가운데에는 급진주의자를 탄압한 이유로 선택된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법무장관 미첼 파머, 양당의 의원들, 케네서 마운틴 랜디스 판사가 그들이었다. 랜디스는 이후에 야구 커미셔너가 되는데, 판사 재직 당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워블리스(Wobblies, 1905년 미국 시카고에서 창설된 급진적인 노동운동 조직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활동가를 가리키는 말)’에게 선동죄로 유죄 선고를 내렸다. 그 겨울에 총파업을 저지했던 시애틀 시장이 처음으로 폭탄을 받았다.

시장에게 온 우편물 가운데 갈색 소포를 집어든 직원이 소포를 거꾸로 들고 포장을 풀었다. 화학 용액이 든 작은 약병이 바닥에 떨어졌고, 금속 알갱이들 가운데에 다이너마이트 한 자루가 나타났다. 소포는 폭발물 전담반으로 보내졌다. 전담반도 놀랄 만큼 정교한 폭발물이었다. 이튿날 조지아 주에서는 전 상원의원 한 사람이 김벨스 소포를 받았다. 포장을 뜯던 아내는 연필이나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정부를 시켜 소포 내용물을 캐비닛에 넣어 두라고 했다. 가정부는 포장을 뜯고 안에 들어 있는 튜브 마개를 돌려 열었다. 나사 두 개가 유리병에 구멍을 내더니 산성 용액이 솜에 쏟아졌다. 화학 용액이 솜에 스며들었다. 폭탄이 터지며 가정부의 두 손이 날아갔다. 그날 오후, 김벨스 소포 여남은 개가 미국 전역의 우체국에 도착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암살 계획은 한 우체국 직원에 의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4월 30일 새벽 2시, 찰스 카플란은 전차를 타고 할렘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야간 근무에 지친 몸으로 앉아서 신문을 읽었다. 폭탄이 터져서 가정부가 두 손을 잃었다는 애틀랜타 발 기사에 눈이 갔다. 전차가 덜컹거리며 그를 집으로 싣고 가는 동안, 카플란은 ‘극악무도한 폭파장치’와 거의 죽을 뻔한 ‘흑인 가정부’ 얘기를 읽었다. 소포에 대한 설명을 읽었는데 그가 이미 본 적이 있는 소포였다. 전차에서 황급히 내린 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도심의 우체국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잡아탔다. 그와 그의 상사는 소포 보관실에서 똑같은 소포 열여섯 개를 찾아냈다. 모두 ‘뉴욕 김벨스 백화점, 샘플’이라고 씌어 있었다. 소포들이 그때까지 발송되지 않은 이유는 신중함 때문도 부주의 때문도 아니었다. 제1종 우편물임을 표시하는 빨간 딱지가 붙은 폭탄 소포들은 우표를 모자라게 붙인 탓에 발송이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정오 무렵, 극악한 폭파장치를 수색하기 위해 연방수사관들이 전국의 우체국에 파견되어 나갔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디시, 시카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폭파장치들이 수거되었다. “미국 역사에서 이 음모보다 더 악랄한 건 없었다”고 체신장관 앨버트 벌슨은 말했다. 그는 암살 음모의 표적이기도 했다. 연방 요원들은 신속하게 용의자 리스트를 작성했지만 검거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는.

1919년 5월 1일에 폭탄은 하나도 터지지 않았다. 노동절에 관공서와 중역실에서는 아무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일종의 정치적 충돌이 심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같은 미국인들에게 날카롭게 맞섰다. 보스턴에서는 군인들과 해병들이 길거리를 행진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뭇매질했다. 이 일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맨해튼에서 한 무리의 폭도가 사회주의 일간지 사무실에 난입하여 집기를 부수고 책과 팸플릿들을 압수했다. 클리블랜드 곳곳에서 자경단이 노동절 시위자들과 맞붙었다.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에서 사소한 분쟁들이 벌어졌다. 그동안 폭탄을 보낸 용의자를 두고 여러 추측이 떠돌았다. 독일 쪽의 음모라는 소문들이 돌았다. 워블리스는 ‘자본가의 하수인들’이 IWW에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폭발물 소포를 받은 조지아 주의 상원의원은 ‘불만세력인 무정부주의자[와] 볼셰비키 분자들’을 비난했다. 며칠이 흐르는 동안 마지막 폭탄 세 개도 발견되었고―하원의원 한 명이 소포를 열려고 했지만 뚜껑이 꽉 닫혀 열리지 않았다― ‘흑인 가정부’만이 암살 계획의 유일한 희생자로 남았다. 하지만 천천히 엄습해 오는 공포감은 그 음모가 거둔 결실이었다.

5월 4일, 《뉴욕 타임스》는 ‘볼셰비키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기소’를 촉구했다. 이틀 뒤 워싱턴 디시에서 야외극이 열렸는데, ‘미국 국가’가 울리자 관객들이 일어섰다. 마지막 선율이 잦아들 무렵 총성 세 발이 울렸다. 일어서지 않고 있던 남자를 해병 한 명이 쏘아 죽인 것이었다. 관객들은 박수를 터뜨렸다. 시애틀 시장 올 핸슨이 선동한 보복 계획이 그 5월 내내 퍼져 나갔다. “나는 정부 당국이 정신을 차리고 미국의 모든 무정부주의자들을 소탕하여 사형시키거나 종신형에 처할 것임을 믿는다. 정부가 그들을 소탕하지 않는다면 내가 할 것이다.” 핸슨은 이렇게 공표했다. 그는 곧 사임하고 전국을 돌며 공산주의 위협을 설파했다. 청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1919년은 기쁨과 애도 속에서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천만 명이 사망했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참호 속에서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인의 책임은 인간에서 미생물로 넘어갔다. 치명적인 스페인 독감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독감이 잦아들기 전에 전 세계에서 5,000만 명에서 1억 명이 사망함으로써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중세 시대 흑사병보다 훨씬 심각했다. 독감은 군대가 침략하듯 미국의 도시와 마을들을 휩쓸고 지나가 67만 5,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는 남북전쟁 때의 사망자 수보다 많다. 비극적인 이야기들―건강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죽고,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중대 전체가 종전 뒤 독감으로 몰살당했다는―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나갔다. 오싹하도록 푸르스름해진 시체들이 장작더미처럼 쌓여 갔다. 성직자들은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며 사람들에게 시체를 밖으로 내오라고 외쳤다. 그해 봄, 독감은 약화되어 갔지만 풀 먹인 흰 텐트로 지은 임시 병원들과 ‘모델 T(Model T, 포드에서 제작한 자동차 이름)’ 앰뷸런스들은 여전히 미국 곳곳의 풍경이었다. 의사들은 다가오는 겨울에 독감이 다시 유행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이 시작된 뒤로 미국인들이 바라왔던 종전이었건만 전쟁과 질병이라는 쌍둥이 재앙이 1919년을 아로새겼다. 평화의 시기로 기대되었던 1919년에 본토의 전선에서는 총력전이 벌어졌다. 12만 6,000명의 병사들이 희생된 뒤로 미국은 전시 태세를 유지했다. 전쟁은 경제를 과열로 몰아갔고, 물가는 전쟁 전의 두 배로 치솟았다. 모든 분야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재봉사 파업, 철도 파업, 여송연 생산노동자 파업, 광부 파업들이 일어났다. 경찰까지 파업에 이르게 되자 보스턴은 흥분한 술꾼들과 절도범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해 여름 시카고, 워싱턴 디시 그리고 스무 군데가 넘는 다른 도시에서 백인 폭도가 촉발시킨 야만스런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전쟁은 빅토리아 시대(영국 역사상 가장 번영을 구가한 시대에 빗대어 표현한 말)를 종식시켜 왔지만 어떤 새로운 사조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롭고 낯선 세상을 마주했다. 비틀거리는 제국들의 잔재 속에서 발음도 쉽지 않은 신생국가―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들이 생겨났다. 과학의 법칙들조차 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5월 말, 아인슈타인에 의해 우주에 대한 구체적인 증명이 최초로 이루어짐으로써 뉴턴 물리학이 무너졌다. 몇 주 뒤, 의회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함으로써 또 다른 탑이 무너졌다. 가을에는 도박사의 매수(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도박사에게 돈을 받고 일부러 경기에 진 사건) 소문이 돌면서 야구 월드시리즈가 끝났다. 그해가 다 가기 전에 담배를 쥐고 있는 여성이 광고에 등장함으로써 미국인들은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1920년 여명기에, 평범한 미국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나라를 마주했다. 금주법 하에서는 맥주 한 잔을 주문해 놓고 웃으며 사회 변화를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불안한 정세에서는 희생양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 혼란스런 노동절에 시작된 희생양 찾기는 한 달 뒤 폭발물들이 미국 곳곳에 배달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우표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이번에 폭파범들은 직접 소포를 배달했다.

6월 2일 저녁 11시 직후, 가는 세로줄 무늬 양복을 입고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를 매고 중산모를 쓴 키 큰 남자가 워싱턴 디시의 호화 주택가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남자나 그가 들고 있던 납작한 여행 가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방에는 전단지 한 묶음, 리볼버 두 자루, 이탈리아어사전(Italian-English dictionary), 다이너마이트 9킬로그램이 들어 있었다. 사내가 거리를 걸어갈 때, 당시 해군차관보였고 그때까지는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주차를 하고 아내 엘리너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길 건너편에는 법무장관 미첼 파머가 서재의 전등을 끄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옷을 벗자마자 현관문에 뭔가 세게 부딛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귀가 멎을 만큼 큰 폭발음이 났다. 주택가의 모든 창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세상이 무너지나!” 루스벨트 집 요리사가 외쳤다. 저택이 흔들거리는 통에 잠을 자던 이들이 놀라서 뛰쳐나왔다.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가니 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고, 나무 꼭대기 여기저기에 살점들이 걸려 있었다. 루스벨트가 파머의 집에 달려가 보니 파머는 무사했다. 폭발의 위력은 대단했지만 유일한 희생자는 계단을 헛디딘 폭파범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시작을 알리는 경고음에 지나지 않았다.

1919년 6월 2일, 한밤중에 동부 해안 여덟 개 도시의 여러 주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다. 미국 법무장관 마첼 파머의 집도 그 하나였다. 사코와 반제티 친구들이 포함된 무정부주의 투사들이 그 주범이었다. 이로써 적색공포와 급진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90분 동안, 폭발음이 몇몇 도시의 고요를 뒤흔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폭탄 두 개가 터져 가톨릭교회 입구에 구멍이 났다. 클리블랜드에서는 파이프폭탄이 시장 저택의 정면을 날려 버렸다. 피츠버그, 보스턴, 뉴욕, 뉴저지에서 자정에 폭탄이 터져 집들이 무너졌다. 암살 표적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모두 급진주의자, 특히 무정부주의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폭파범에 대해 의문스러워하지 않게끔, 똑같은 분홍색 전단지들이 잔해 속에 흩어져 있었다. 〈우리의 주장〉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전단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 권력은 혁명의 세계적 확산을 여기 미국에서 차단하려는 의지를 노골화하고 있다. 현 권력은 그들이 촉발시킨 투쟁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독재 공화국의 ‘민주적’ 군주들이여, 너희들은 늘 우리에게 도전해 왔다. 우리는 자유를 꿈꾸었다. 우리는 해방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열망했다. 그러자 너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두었다. 우리를 곤봉으로 두들겨 팼다. 우리를 추방했다. 너희는 우리를 살해했다.

이제 피를 흘릴 때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살인이 벌어질 것이다. 살인하는 것은 우리이다. 살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괴가 벌어질 것이다. 너희 압제적 제도를 타도하기 위해 우리가 파괴할 것이다.

열세 단락이 넘는 이 글은, 유럽에서 ‘자본가’들이 벌이는 전쟁과 미국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추방 그리고 대중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소수의 번영을 비판했다. ‘독재 타도!’라는 외침으로 글을 맺은 팸플릿은 ‘무정부주의 투사들’이라고 밝혀 놓았다.

그 뒤 몇 주 동안 경찰은 전단지와 파편들, 법무장관 집 계단에 흩어져 있는 살점들에서 실마리를 찾아 갔다. 사망자의 왼쪽 다리가 가까운 이웃의 현관 계단에서 발견되었고, 몸통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찾아냈다. 사내아이 두 명이 한쪽 발을 주워서 냉장고에 숨겨 둔 걸 아이들의 엄마가 발견했다. 과학수사대는 사망자의 두피를 지붕에서 조심조심 집어 들었고, 미용사 한 사람이 그 굵고 검은 머리털을 관찰하고 나서 폭파범이 20대 후반의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감정했다. 수사가 이어지는 동안 언론은 ‘전기의자로 몇 명을 임의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복음전도사 빌리 선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 식대로 한다면, 나는 감옥이 터져 나간다 해도 싹 쓸어다가 모조리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그들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고? 그렇다면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암살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 뒤,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맨해튼 경찰은 러시아 볼셰비키 지부를 급습하여 몇 명을 체포하고 미국에서 노동자들의 소비에트를 요구하는 팸플릿을 압수했다. 며칠 뒤 경찰이 사회주의 연구소 한 곳을 수색했지만 몇 사람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국에서 워블리스가 탄압을 받았다. 7월 4일이 다가오면서 미국인들은 암살 사건이 더 일어날까 봐 긴장했다. 경찰은 연방청사와 유명인들의 집을 경호했다. “공포 시대 예정”(《시카고 트리뷴》), “광범위한 폭력과 살인 계획”(《신시내티 인콰이어러》), “도시마다 빨갱이 경계 강화”(《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같은 주요 기사 제목들은 공포감을 자극했다. 4일이 왔다가 지나가는 동안 폭발이라고는 불꽃놀이뿐이었고, 유일한 싸움은 잭 뎀프시가 제스 윌러드를 때려눕히고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일뿐이었다. 그러나 여름이 이어지면서 경고음은 지속되었다. “내가 아는 존경할 만한 시민들은 미국에서 곧 무력 충돌이 일어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한 시민이 법무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으로 상처 입고, 전염병에 무너지고, 폭탄으로 위협당한 미국은 새로운 희생양에게 덤벼들었다. 그 희생양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 떠오른 존재였다. 빨갱이들이 ‘흑인들’을 선동하면서 당시의 모든 파업을 일으킨 것이었다. 빨갱이들은 학교, 정부, 영화계에 침투해 있었다. 미국에서 첫 번째 ‘적색공포’(Red Scare)는 이후 매카시 시대보다 짧았지만 훨씬 강도가 높았다. 볼셰비즘을 입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들이 파면을 당했다. 코네티컷의 한 남자는 레닌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 중부 워싱턴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피고인(워블리와 참전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 감옥에서 끌려 나와 면도칼로 거세를 당한 뒤 다리[橋]에 매달린 채 총탄 세례를 받았다. 그러자 연방 정부가 시체를 거두어 갔다.

그 가을, 파괴 분자들에게 유연하다고 비판받던 법무장관 파머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문득 사방에서 빨갱이를 보았다. “혁명 분자들의 혓바닥이 교회 제단을 핥고, 학교 종탑에 뛰어들고, 신성한 미국 가정 구석구석에 침입하여 결혼 서약을 방탕한 율법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선거의 해가 다가오자 여론을 끌어모으기 위해 파머는 자기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공격을 명령했다. 11월에는 연방수사관들이 노동회합들을 급습하여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백 명을 체포하고 죄를 뒤집어씌웠다. 수많은 이들이 폭행을 당했고 재판 없이 몇 달 동안 억류되었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소비에트 방주’(Soviet Ark)라는 별칭의 배 한 척이 급진주의자 249명을 태우고 뉴욕을 출항해 러시아로 향했다. 언론과 대중은 환호했다. 그리고 1920년 1월 2일, 최대의 ‘파머 일제 검거’가 이루어졌다. 그 지휘자는 파머의 보좌관이자 훗날 FBI 국장이 된 에드가 후버였다. 회의 도중에 급습하여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체포한 결과, 수사관들은 서른세 군데 도시에서 4,000명의 이방인들을 소탕했다. 소탕 작전은 특히 매사추세츠 주 산업도시인 브록턴, 브리지워터, 로렌스와 로웰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광란이 수그러들 무렵, 보스턴 주변에서는 두 이탈리아 이민자의 이야기가 그 잿더미에서 불씨를 되살리고 있었다. 어느 캄캄한 밤 집에서 먼 곳에서 두 사람은 체포되었고, 그들의 친구들인 무정부주의 투사들을 은폐하려고 했다.

1923년의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수갑이 채워져 있고 손에 모자를 들고 있다.  오른쪽의 사코는 단식투쟁 중이어서 무감각하고 멍한 눈동자에 매우 야위었다. ⓒ Bettmann/Corbis

l 제1장 l

착한 제화공과 가난한 생선 장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개의 ‘나’,
다시 말해 실제의 나와 이상적인 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이민 온 나라에서 자유롭게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이중생활을 했다. 한 주에 엿새는 친절하고 근면한 시민으로 생활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일요일 오후면 동료 무정부주의자들을 만나서 당시 암살과 관련된 그룹의 소행을 은폐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1920년 봄이 찾아올 무렵, 심화된 분파주의로 인해 모든 이들이 한계에 이르렀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이탈리아의 단순한 삶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코와 반제티는 미국에 남아 있을 시간이 더 짧아질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 미국에서의 체류 기간이 아니라 그들의 자유라는 건 결코 생각지 못했다.

사코는 꽃이 피는 따뜻한 4월 내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담한 몸집에 에너지가 넘치는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그의 작은 집 뒤에 있는 밭에서 한 시간 동안 일했다. 그의 집은 보스턴에서 남서쪽으로 27킬로미터 떨어진 공장지대인 스토턴에 있었다. 봄철 모종을 심고 뉴잉글랜드의 늦서리에 얼지 않도록 대비하면서 사코는 동틀 때까지 밭을 돌보았다. 아내 로지나와 일곱 살짜리 아들 단테와 밥을 먹고 나서는 혼잡스런 출근길에 합류하여 3K 제화공장으로 걸어갔다. 사코는 테두리 절단사였는데, 매사추세츠에서 번성하고 있던 제화업계에서 일류 기술자로 꼽혔다. 그는 다른 기술자들이 작업한 구두를 넘겨받아서 회전하는 날에 밑창을 대고 필요 없는 가죽을 잘라 낸 뒤 작업이 끝난 구두를 통에 던지고 다른 구두를 집어 들었다. 부족한 시급을 성과급으로 보충하면서 사코는 일주일에 8달러를 벌었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들이 벌어 가는 돈은 그의 3분의 1쯤이었다. 그해 봄 내내 그는 돈을 많이 벌었다. 밤에는 부업으로 그의 공장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아버지에게 100달러를 부쳤고, 저축액은 1,500달러가 넘었다. 이탈리아 남부 아드리아 해 연안의 작은 도시 토레마조레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우리는 늘 이탈리아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고 로지나 사코가 회상했다. 이른 봄에 도착한 편지 한 통이 그 계획을 재촉했다.

3월 23일, 까만 봉투가 스토턴에 배달되었다. 어머니 안젤리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슬픔에 휩싸인 사코는 소년 시절에 ‘늘 꿈꾸었던’ 나라에서 해 온 청춘의 실험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단테 그리고 임신 5개월인 로지나는 5월에 이탈리아로 출국하기로 했다. 사코는 여행 서류를 알아보러 이탈리아 영사관에 다녀온 뒤였다. 영사관에서 가족사진을 갖고 다시 오라고 했다. 사코와 몇 명의 목격자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사코는 4월 15일에 가족사진을 갖고 영사관을 다시 찾았다.

결혼한 지 일곱 해가 지났지만 ‘닉과 로지’는 여전히 애인 사이 같았다. 사코의 급진주의적 관점을 반대하는 로지나 아버지(“저 사람은 결국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를 피해 도망친 두 사람은 흔들림 없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이어 갔다. 한 해 뒤 단테가 태어났고, 1916년에는 딸이 태어났으나 딸은 한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사코는 성실하게 가족을 돌보았고, 가까운 이들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나중에 감옥에서 전형적인 일상의 한 장면을 서툰 영어로 묘사했다.

매스 주 사우스 스토턴의 작은 집에서 우리 살던 때 기억난다. 저녁이면 로지나, 단테, 나, 우리 자주 친구 만나러 갔다. …그 시간이면 단테는 언제나 잠이 들어서 집으로 올 때 내가 늘 안고 왔다. 가끔 로지나가 내 대신 아이를 안았다. 아내가 단테를 팔에 안을 때 우리 두 사람 단테의 장밋빛 뺨에 따뜻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 시절… 그때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반제티는 그해 봄, 플리머스에서 생선 행상을 했다. “나는 죽도록 일해야 하는‘데이고(Dago, 포르투갈, 이탈리아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였다”고 회고한 열두 해의 고된 노동 끝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친구한테 생선 행상에 쓸 손수레를 샀다. 생선 장수 벌이는 보잘것없었지만, 행상 덕택에 반제티는 그의 폐를 괴롭혀 온 숨 막히는 공장과 주방으로부터 벗어났다.

또 자유 시간이 생겨서 그가 좋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가능하다면 평화로운, 그러나 필요하다면 폭력적인 혁명을 꿈꾸었다. 그는 한 주에 두 번 생선 한 통을 사서 깨끗이 씻고는 수레의 얼음 위에 진열했다. 그리고 생선 비린내를 맡으며 플리머스의 이탈리아인 주택가와 포르투갈인 주택가를 지나갔다. 빨랫줄들이 걸려 있는 골목길을 지나고 떠들썩하게 노는 아이들을 지나며 이탈리아어로 “생선이요! 생선!” 하고 외쳤다. 대가리를 잘라 내고 저울로 생선 토막 무게를 재면서, 반제티는 대구, 가자미, 황새치를 팔았고, 특별히 장어를 팔 때도 있었다. 보스턴의 어부들이 수확을 별로 못한 주에, 반제티는 필그림(Pilgrims,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플리머스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이 도착했던 바위에서 멀지 않은 플리머스 부두 근처로 대합을 잡으러 갔다.

반제티는 생선 팔러 다니는 곳마다 유명했고 사랑받았다. 종종 고객의 집 부엌에 앉아서 블랙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몇 해 앞서 술을 끊겠다고 다짐한 뒤로 그가 자신에게 허용한 가장 독한 음료가 블랙커피였다. 손님들과 편안하게 어울리면서 그는 삶과 문학에 대해 쉼 없이 이야기했다. 무성하고도 긴 콧수염, 느낌이 풍부한 눈동자, 쾌활한 태도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서른한 살이 되도록 그는 자신의 일가를 이루지 않았다. 그는 친척 아주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결혼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여자 친구를 사귄 적도 없고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었더라도 사랑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 사랑은 내 가슴속에서 억눌려 있었을 테니까요.’ 사교적이지만 고독한 반제티는 친구들과 책 그리고 그가 진정 ‘사랑하는’ 무정부주의에만 집중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작은 집, 밭, 몇 권의 책과 음식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다. 나는 돈도, 여가도, 세속적인 야망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양들과 늑대들’의 세상이라고 그는 자주 얘기했는데, 자신이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는 한 번도 밝힌 바가 없다.

반제티는 친구가 많았지만 빈첸조 브리니와 그의 자녀들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반제티가 플리머스에 도착하자마자 묵게 된 집이 빈첸조의 집이었다. 브리니의 자녀 셋 모두 ‘바르트’를 매우 좋아했지만, 반제티는 벨트란도를 유난히 아꼈다. 벨트란도를 ‘내 영혼의 아들’이라고 부르던 반제티는 숙제를 도와주고, 바닷가나 숲에서 벨트란도와 함께 거닐며 식물 분포와 동물 분포를 알려 주었다. 체포되기 며칠 전에, 반제티는 벨트란도가 야구공을 줍는다고 밭을 짓밟아 놓고는 그걸 나무라는 이웃 어른에게 말대꾸하는 걸 보았다. 반제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사과하라고 타일렀다. 벨트란도는 반제티를 좋아하여 아버지하고 보내는 시간보다 반제티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는 내 우상이었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타이 콥(Ty Cobb, 1904∼1928년에 활약한 미국 프로야구 선수)이 우상이었지만, 내 우상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였다’ 하고 벨트란도는 회고했다.

“두 사람을 석방하고 매사추세츠를 구하자! 미국의 명예가 사코와 반제티와 함께 죽는다!” 사형 집행이 다가오자 매사추세츠 주 청사에서 피켓시위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프롤로그 전문,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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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브루스 왓슨(Bruce Watson)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공장 노동자, 바텐더, 임시직 타자수로 일했으며 로렌스, 매사추세츠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글을 쓰고 있다. 미국 이주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다룬 『빵과 장미』(Bread & Roses)와 세계 최대의 미국 장난감 회사였던 A. C. 길버트사의 창업주 얘기인 『사내아이들과 장난감 제조법을 바꾼 사람』(The Man Who Changed How Boys and Toys Were Made)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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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수영
"한 권의 책을 옮길 때마다  첫 번째 독자라는 설렘을 느끼며,  독자로서 느낀 감동을  잘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옮긴 책으로 『헬렌 켈러』,  『조화로운 삶의 지속』,  『흡연의 문화사』 등이 있다.

 

사코와 반제티 : Sacco & Vanzetti

일단 제 구질구질한 설명 백마디 보다 작곡이란 일을 하는 자유노동자 엔니오 모리코네 씨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들을 소재로 한 <사형대의 멜로디>란 영화의 주제곡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해야만 했던 이 두 사람의 아픔과 자신의 아이들을 포함한 후세의 노동자들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진정 무엇인지를 충분히 전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난 경멸을 받으며 일생을 살다갔을 것이다. 나는 아마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무명의 인생실패자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나, 그리고 우리의 발전이며 승리이다. 설령 더 많은 삶을 살게 되더라도, 나는 인내와 정의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을 위해 지금 내가, 우리가 한 이것과 똑같은 일을 또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 우리의 말, 생명, 고통은 이 순간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선량한 제화공, 가난한 생선행상이지만 생명을 거는 것, 바로 이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최후의 순간은 우리 것이다. 최후의 괴로움도 바로 우리의 승리일 뿐이다.

여러분, 용기를 냅시다.

<사형집행 4개월 전에 쓴 바로톨로미오 반제티의 글 가운데>


"얘야, 울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단다. 슬픔에 찬 엄마의 마음을 돌리려거든 내가 그전에 했던대로 이렇게 하려무나. 엄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오래도록 걷고, 여기저기서 들꽃도 따며, 그러다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대자연의 조용함이 어우러져 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거라. 그러면 엄마도 즐거워할테고 너도 틀림없이 마음이 편해질 게야. 그러나 일순간 행복하다고 해서 너 자신만을 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건 진실로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단테야,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학대를 받고 짓밟히는 사람들을 도와라. 그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저씨처럼 세상의 벽에 싸우다 쓰러지는 우리의 동지들이란다. ...어쩌면 그들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유의 환희를 이룩하기 위해 커다란 벽과 싸우다 쓰러지는 너와 나의 동지들이란다....."

<니콜라 사코가 사형수 독방에서 아들 단테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가운데>

Bartolomeo Vanzetti (second from right) and Nicola Sacco (far right) as seen in SACCO AND VANZETTI, a film by Peter Miller. A First Run Features release.

포효하는 20세기 초, 시카고의 갱들은 양대재벌의 끄나풀이 되어 아무런 제약도 없이 방치되었고, KKK나 애국단체를 표방한 집단 역시 대단한 기세로 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시민들이 무고하게 폭행을 당하고, 수갑이 채워져 시내에 끌려 다니며 열풍 속에서 찜질을 당하는 등 그 잔인함은 유례를 보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1만 명을 헤아렸는데, 이것이 바로 1919년의 빨갱이 사냥이라 불리는 ‘평화 사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율 속에서 영화 사형대의 멜로디에 묘사된 세계적인 비극인 사코와 반제티 사건이 발생했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 현금 수송차가 일단의 갱단에 의해 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4월 15일에도 마찬가지 수법의 강도 사건이 일어나 두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뉴욕에 인접한 매사추세츠의 주도 보스턴에서 발생했다. 그로부터 18일 후, 사법성 창문 밖으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14층 높이에서 뛰어내렸으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이 남자는 이탈리아인 인쇄공으로, 이미 두 달 동안이나 ‘종합정보부’에서 고문을 받아 온 안드레아 살세드였다. 그런데 그의 동료였던 이탈리아 이민자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두 사람은 그 무참한 사체를 접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상 그는 살해된 것이었다. 살세드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면서, 곧 다른 동료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사코와 반제티는 사법국의 정보망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것을 깨닫지 못했다. 두 사람은 살세드가 사망한 이틀 뒤에 체포되었다. 그런데 사코와 반제티의 혐의는 어처구니없게도, 앞서 소개한 두 건의 강도 사건의 범인이었던 것이다(당시 무수한 보고서가 두 사람의 무고를 증명하므로, 얼마나 끔찍한 재판이 진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참 세월이 지난 1977년 7월 19일, 이 매사추세츠의 주지사 마이클 토카키스가, “그 재판의 판결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고 이례적인 명예회복 성명을 발표한 것을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27년 8월 22일, 두 사람은 전기의자에 앉혀졌다. 로맹 롤랑과 버나드 쇼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구제에 나섰다. 전 세계에서 격렬한 비난이 쏟아지고 광장으로 많은 군중이 항의를 위해 몰려드는 가운데, 시계가 심야 영시를 지나 23일을 맞이한 순간 찰스타운 형무소 전등이 깜빡이는 것을 모두들 바라보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몸에 강력한 전류가 흘렀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 패닉과도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이 처형을 명령한 인물은 매사추세츠 주지사 앨빈 플라였다. 그는 자동차 판매업자이기도 했는데, 이 사건에 동요를 보이며, 처형해야 할지 특사해야 할지를 두고 세 사람과 상의한 뒤에 전기의자행을 명령했다. 이 결정을 내린 세 사람은, 첫 번째 인물이 하버드 대학의 총장 A.로렌스 로웰이었다. 이 대학은 모건 상사의 폴 C.캐보트가 관리인이 되어 스테이트스트리트 투자회사와 손을 잡고 자산을 불리고 있었다. 두 번째 인물은 당시 특별경영자협의회의 간부요 후에 제너럴모터즈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는 알프레드 P.슬론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고 있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총장 새뮤얼 스트래튼이었다(MIT의 그 유명한 MBA 경영대학원의 이름이 왜 슬론으로 붙여졌는가도 다 이유가 있다). MIT의 스트래튼에게 돈을 주고 있던 슬론은 모건 상사와 듀폰의 중역이며,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이기도 했다. 스트래튼에게 처형 여부를 물은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자동차 판매업자였다는 사실 등, 이 모든 것을 우연의 조합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세 번째는 전직 판사 로버트 그랜트였는데, 현재로서는 이력이 분명치 않다.
당시 수백만을 넘는 석방 탄원서가 밀려들었는데, 이유 없이 무고한 인간을 처형할 리가 없다. 당시 사법장관 존 서전트는 그 이름도 공교롭게 라드로 저축은행의 사장이었는데, 그에게 장관 자리를 준 인물도 말할 필요조차 없는 불문가지, 모건가와 록펠러가의 연합이었다. 한편 항의하는 군중이 밀려든 곳은 유니언퍼시픽 철도회사에서 유래한 유니언스퀘어였다. 그 악마의 전기의자에 스위치가 넣어지는 순간 군중은 숨을 죽인 채 광장의 대형 시계를 보고 있었는데, 그 건물은 아나콘다(록펠러가 설립했고 또 대주주였던 구리광산업체) 계열의 아말가메이티드 은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이제 곧 일어나려고 하는 더욱 커다란 사건의 전조에 불과했으니....그것은 바로 제2차세계대전이다.
(중략)

2차세계대전하면..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악마로 덧칠된 콧수염난 한 인물을 곧바로 연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2차세계대전의 역사를 들춰보면, 수많은 군인이 등장하고 여러 지휘관이 지도를 펴놓고 지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영화들에서 묘사된 대로, 병사들의 눈에 비친 사관은 어느 나라에서나 횡포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사관 중의 사관인 전쟁을 총지휘한다고 볼 수 있는 다음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 스팀슨 육군장관
■ 포레스터 해군장관
■ 누드센 전시생산국장
■ 스테티니어스 Jr. 전시자원국장
■ 리드 전시생산국 소비재부장
■ 마셜 육군참모장
■ 아이젠하워 연합군 최고사령관
■ 스미스 참모총장
■ 맥아더 장군
■ 기포드 전시통신위원회부장
■ 해리슨 전시생산관리본부장
■ 데이비스 전시석유국장관

이 인물들을 임명한 것은 포드자동차 회사나 이스트먼코닥이 주도한 ‘경제개발 위원회’였는데, 다시 위의 순서를 따라 그들의 실제 직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모건상사(존 P.모건이 설립)의 고문변호사
■ 딜론 리드 은행(잭 모건의 지시로 나치스에 자금을 융자했던) 사장
■ 제너럴모터스(주니어스 모건이 중역) 사장
■ US스틸(존 P.모건이 설립) 회장
■ 제너럴일렉트릭(존 P.모건이 설립) 회장
■ 팬아메리칸 항공(모건 상사의 번견이며 대륙횡단비행의 주역인 찰스 린드버그가 중역) 중역
■ 팬아메리칸 항공(상동)의 중역 비서
■ 유나이티드푸르츠(모건상사의 동족 회사) 중역
■ 래밍턴랜드(토머스 X 모건이 사장으로 있는 스페리사와 합병한 한국의 풍산금속과 유사한) 사장
■ 아메리카 전화전신(상동) 부사장
■ 스탠더드 석유 캘리포니아(존 D.록펠러가 설립) 중역

이것이 2차세계대전의 실상이다. ‘경제개발 위원회’는 일명 ‘전쟁 준비 위원회’라고도 불렸는데, 창설자가 ‘포드 재단’의 폴 호프만, 회장이 ‘이스트먼코닥’의 중역 마리온 폴섬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이 전쟁은 군인들이 치른 전쟁이 결코 아니었다. 현대에 들어와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했듯이, 금융재벌의 하수인들인 일단의 투기업자가 잠시 넥타이를 벗어던지고 제일 먼저 스스로 군복으로 갈아입고 작전사령실을 점거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작전본부, 즉 증권거래소의 모습을 보지 않는 한 2차세계대전의 진상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히로세 다카시 선생의 <제1권력>에서 인용발췌)

글 출처: 마르넷의 포스팅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