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선율로 빚은 사랑의 핑크빛 환상 : 보 비더버그의 '엘비라 마디간'
<엘비라 마디간>은 1889년 덴마크의 한 숲 속에서 스웨덴 육군 장교 식스틴과 덴마크의 줄 타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이 동반 자살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 것이다. ‘불륜’이라는 소재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요즘 시각에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영화지만 당시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금지된 사랑’이라는 것에서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풀밭. 그 풀밭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들. 그리고 그 나비를 따라가는 한 쌍의 연인. 이것만으로도 내 환상은 충분했다. 그런데 여기에다 사랑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는 드라마틱한 결말까지 가미되어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적인 사랑이란 말인가.
이 영화에서 나를 매료시킨 또 하나의 환상은 바로 모차르트의 음악이었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제2악장이 이 영화의 주제음악인데. 두 사람이 풀밭에서 나비를 좇는 장면을 비롯해 영상이 아름다운 장면이면 어김없이 이 음악이 등장해 영화 전체를 로맨틱 무드로 끌어가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처음 <엘비라 마디간>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음악이 주는 달콤한 로맨티시즘에 매료되었다. 영화를 본 후 너무나 음악이 좋아서 악보를 사다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그 멜로디에 도취되기도 했었다. 현악기의 피치카토 반주에 맞추어 등장하는 피아노의 멜로디가 두 연인이 느끼는 무한한 행복감을 그대로 음악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이 음악을 배경으로 식스틴과 엘비라는 각각 이런 대사를 읊는다.
“때때로 내 자신에게 행복한가 물어볼 때가 있어. 그러면서 혼자 되뇌이곤 하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하고 말이야. 사람들은 아마 우리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 할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들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변화를 과감하게 받아 들일거야.”
“전쟁을 본 적이 있나요. 식스틴 당신은 군인이잖아요. 그런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전쟁은 군인의 일이죠. 그렇죠? 파리에서 서커스 텐트가 불 탄 적이 있었어요. 누군가 수류탄을 던졌나 봐요. 저는 그때 겨우 두 살이었지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동물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대요. 그 냄새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해요. 전쟁은 환상의 행진이 아니예요. 식스틴. 불타버린 육신의 냄새 같은 것이지요.”
이 대사에서처럼 두 사람은 불타 버린 육신의 냄새와도 같은 전쟁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들의 도피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 현장으로부터의 도피이자 도덕과 인습의 두꺼운 장벽으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식스틴과 엘비라는 자신들을 옥죄던 두 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덴마크의 숲 속에서 완벽한 행복감을 느낀다. 사랑이 무슨 죄란 말인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아다지오의 로맨틱한 선율은 두 사람이 느끼는 이런 완벽한 행복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 멜로디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위험한 사랑의 어두운 그림자를 달콤한 로맨티시즘으로 감쪽같이 은폐한 당의정과 같다.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에 대해 핑크빛 환상을 갖도록 한다. 물론 개중에는 이 음악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미로운 슬픔, 그 슬픔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즐기는 로맨틱한 슬픔일 뿐이다.
어느 날, 현실의 벽에 부딪친 엘비라가 식스틴에게 말한다. 사람은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 사랑의 환상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자살을 위해 권총을 준비해 간 식스틴은 엘비라가 풀밭을 뛰어다니다가 나비를 잡는 순간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성이 울리자 나비를 잡으며 행복해하고 있는 엘비라의 모습이 정지화면으로 잡힌다. 곧 이어 들리는 또 한 방의 총성.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완결되었다. 그 정지화면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렇게 영원하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서 사랑을 빼앗아갈 수 없어요.”
영화의 배경으로 쓰인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1785년 모차르트가 스물 다섯 살 때 비인에서 작곡해 그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로부터 숭고하고 장엄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면 ‘숭고하고 장엄하다’는 평은 이 곡의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음악으로 쓰였던 2악장 아다지오는 더욱 그렇다.
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전에는 몰랐던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빠른 곡보다는 느리고 서정적인 곡이 좋은데, 그런 곡을 들을 때마다 모차르트를 왜 위대한 음악가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아다지오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아다지오 목록에서 제외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의 취향일 뿐이며, 이런 내 취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천재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내릴 만큼 내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로맨틱한 선율이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일까. 그 지나치게 달콤한 살롱음악적인 분위기가 갑자기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이 곡을 굳이 색깔로 비유하자면 핑크빛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을 때에는 이런 핑크빛 무드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런 무드에 빠져들 수 있었으며, 달콤한 표정으로 그것을 즐길 수 있었다. <엘비라 마디간>처럼 두 남녀가 슬로우 모션으로 풀밭을 뛰어다니는 장면이나 바닷가 모래사장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달려가는 장면을 보면서도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직접 그렇게 멋진 장면을 연출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 간지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 동안 내가 꿈꾸어오던 그런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 환상이 워낙 컸기 때문에 절망도 깊었으며, 그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데에도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엘비라 마디간>과 같은 감미로운 사랑의 환상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은 사랑에 대해 얼마든지 무모할 수 있는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니까. 물론 지금도 어느 날 문득 젊은 시절 가슴을 훑고 지나갔던 찬란한 희열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때가 있다. 코 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문득 봄을 느낄 때, 빗방울이 들이치는 유리창 너머로 축축하게 젖은 거리를 바라볼 때,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지난 시절의 유행가를 우연히 듣게 될 때. 그럴 때면 <엘비라 마디간>을 동경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던 젊은 시절의 나를 떠올리곤 한다.
끝내는 깨질 수밖에 없는 찰라적인 행복에 목숨을 걸었던 시절. 모차르트의 감미로운 선율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의 환상을 찾았던 시절. 그 시절이 찬란하기는 하지만 설사 누가 내게 그 시절을 돌려준다 해도 결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찬란한 희열의 순간은 없지만 더 이상 가슴저린 사랑의 아픔도 없는 지금의 안정감이 나는 좋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그리고 그 속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내게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하는 빛바랜 로맨티시즘일 뿐이다.
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