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Concertos 1 & 2
Album Title: Chopin: Piano Concertos 1 & 2 Composer: Frédéric Chopin (1810 - 1849)
1. Piano Concerto No. 1 in E minor, B 53/Op. 11 (39:00)
2. Piano Concerto No. 2 in F minor, B 43/Op. 21 (31:15)
스무 살의 쇼팽이 살던 폴란드 바르샤바는 독립을 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혼란스러움을 벗어나고자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는 가족과 마지막 휴가를 보낸 뒤 1830년 10월 11일 폴란드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고, 바로 이 자리에서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를 초연했다. 환송식이 열린 자리에서, 폴란드의 흙이 담긴 은잔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11월 2일, 쇼팽은 “죽기 위해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라는 느낌을 뒤로 한 채 다시는 밟아보지 못할 폴란드의 땅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피아노 협주곡에 담긴 첫사랑에 대한 은밀한 고백 1829년 8월 빈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마치고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음악원 졸업과 빈에서의 성공은 쇼팽이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의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자신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열 아홉 살의 쇼팽은 처음으로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쇼팽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이 났지만, 처음 느끼는 강렬한 기분과 뜨거운 가슴이 고스란히 음악으로 녹아들어 바르샤바 시대의 절정을 장식하는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폴란드 '쇼팽의 집'정원에 있는 쇼팽 조각상. 쇼팽은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초연했다. 그의 친한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Tytus Woyciechowski)에게 1829년 10월 3일에 쓴 편지에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숭배할 수 있는 이상형을 찾았다네. 매일 밤 그녀 꿈을 꿀 정도야. 그러나 그녀를 처음 본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나는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있네. 협주곡 f단조의 느린 악장을 작곡하면서 그녀를 떠올리곤 하지.” 그 상대는 폴란드 음악원의 학생이었던 성악가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Konstancja Gladkowska)였다.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한 쇼팽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고, 쇼팽이 세상을 뜨고 난 뒤 모리츠 카라소프스키(Moriz Karasowski)가 쓴 쇼팽 전기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곧 잊어버리게 된 이 풋사랑에 대한 감정이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의 라르게토 악장과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의 로망스 악장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음을 쇼팽 생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친구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뿐이었다. 그의 소심한 마음 때문인지 이 [2번 협주곡]은 글라드코프스카에게 헌정되지 않고, 몇 해 뒤 파리 시절 친교를 맺은 미모의 백작 부인 델핀 포토카에게 헌정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 협주곡의 새로운 어법이 탄생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낭만주의 협주곡 양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불균형이 단점으로 오랫동안 지적받아 왔다. 쇼팽 스스로도 오케스트라 반주 없이 솔로 파트만 연주했던 것을 미루어본다면, 그가 오케스트라 부분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파리 시절에도 주위에서 폴란드 고유의 양식을 대변할 만한 오페라를 작곡하라고 부추겼지만, 자신의 미숙한 관현악 기법을 알고 있었던 쇼팽은 솔로 피아노를 위한 작품에 더욱 집착했다. 그러나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많은 작곡가들이 그 관현악 파트를 보강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개정판으로 쇼팽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 칼 타우지히(Karl Tausig)가 교정한 [1번 협주곡]과 카를 클린트보르트(Karl Klindworth)의 [2번 협주곡]을 꼽을 수 있다. 쇼팽은 피아니스트로서 단 30여 회의 대중 연주회를 가졌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특히 1번을 자주 연주했다. 1830년 11월 폴란드를 떠난 그는 빈, 브레슬라우, 뮌헨, 파리를 경유하며 개최한 연주회에서 [1번 협주곡]을 연주했지만 그 이전에 작곡한 [2번 협주곡]만큼 뜨거운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1832년 2월에 가진 정식 파리 데뷔 연주회에서야 비로소 [1번 협주곡]은 그가 기대했던 수준의 찬사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후 성공적인 평가를 받은 [1번 협주곡]은 파리에서의 쇼팽의 위상을 확고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쇼팽이 파리에 머물던 시절에 사용하던 피아노. 쇼팽은 자신의 연주회에서 [1번 협주곡]을 자주 연주했다. [2번 협주곡]은 1830년 3월 17일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공연은 쇼팽의 바르샤바 정식 데뷔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 관습에 따라 1악장 연주를 마치고 난 뒤 호른과 현악기를 위한 즉흥곡을 한 곡 연주하고 2, 3악장을 연주했다. 초연 당시의 여러 신문들은 이 협주곡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쇼팽의 뛰어난 연주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특히 당시 비평 중에 오케스트라 튜티 부분이 피아노와 잘 어우러지며 협주곡의 정신을 완벽하게 전달했다는 비평이 이채롭다. 현재 작품번호는 제1번 e단조가 Op.11로 앞서 있지만, 사실은 제2번 f단조 Op.21이 한 해 먼저 작곡되었다. 이렇게 작곡 순서와 출판번호가 뒤바뀐 이유는 쇼팽이 먼저 작곡한 2번에 비해 나중에 쓴 1번을 더 만족스러워했기 때문에 이를 먼저 출판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1악장 - 알레그로 마에스토소 2악장 - 로망스 : 라르게토 3악장 - 비바체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1악장 - 마에스토소 2악장 - 라르게토 3악장 - 알레그로 비바체
글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발행일 2010.03.01.
상송 프랑소와 (Samson Francois, 피아니스트, 1924~1970) 프랑소와는 1924년 5월 18일 푸랑크푸르트에서 출생, 1970년 10월 22일에 4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급서했다. 신동이었던 그는 7세에 베오그라드 음악원에 입학, 1934년에는 니스음악원에 입학했으나, 대피아니스트이자 프랑스 피아노 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알프레드 코르토의 인정을 받아 에콜 노르말에서 코르토에게 사사하고, 파리 음악원에서는 또 한 사람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마르귀리트 롱(Marguerite Long)에게 각기 사사하면서 현대 프랑스 피아노 주법의 진수를 체득하였다. 1943년에 롱-티보 국제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제2차대전이 종료한 1945년에 국제적인 연주활동을 시작, 곧바로 절대적인 명성을 획득했으며, 코르토에 이은 대피아니스트로 인정받게 되었다. 프랑소와의 피아니시즘은, 대단히 개성적이면서, 무한한 상상력과 이상하리 만큼 예민한 감성을 건드리는 강렬한 느낌으로, 팬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성격적으로도 예술가적인 캐릭터의 소유자였던 프랑소와의 컨디션이 좋을 때의 연주는 풍부한 환타지와 기품, 주체할 수 없는 정열, 로맨틱한 정서와 순수한 맛 등, 듣는 이의 혼을 잡아끄는, 매력이 철철 넘치는 것이었다. 그의 레파토리는 결코 넓지 않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가의 작품만을 연주했다. 그가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브라암스를 절대로 연주하지 않았던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글 출처: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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