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집 심연과 심연 사이 사랑 그리고 인생
- 박은옥, 흔들림 없는 서정 그 서늘한 아름다움
최창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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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춘, 박은옥 결혼 기사(주간경향 1980년 4월 27일, 587호)
지상에 한 길이 있다. 길과 길 사이에 또 다른 길이 놓여있다. 길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없이 펼쳐져 있다. 길은 길로 통한다. 길과 길은 서로 만나거나 또 어긋난다. 길 위에 서면 나는 또 하나의 길이 된다. 한 점에서 시작된 길의 운명은 다른 한 점으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된다. 길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그래서 매번 바뀌지만 돌아보면 늘 같은 자리이다. 인간은 길 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길 위에서 죽는다. 집은 길과 길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이다. 처음의 집, 어머니의 자궁에서 최후의 집, 대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인간은 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집을 나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길 위를 헤매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와 너는 흘러가는 것이다. 길 위의 인생 길 위의 사람들 그리고 길 위의 집. 길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지표는 그것이 전부인지도 모른다.
연전에 노회한 신문기자이자 탁월한 에세이스트인 김성우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어느 글에선가 길은 가고 싶고 집은 있고 싶다고 그의 날렵한 문체를 빌어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길은 떠나고 싶고 집은 머물고 싶다. 집은 길을 위해 서 있고 길은 집을 위해 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나고 길을 떠나기 위해 집에 돌아온다. 인생이란 하루의 일과처럼 출가와 귀가의 영원한 순환인 셈이다. 그의 말을 다시 빌려 길에 관한 명상을 마무리짓자면 머물러야 할 것인가 가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이제 길은 쉬고 싶고 집은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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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영혼을 위로하는 길위의 노래
박은옥의 노래는 궁극적으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일대기이다. 그 떠남의 장소는 일정치가 않다. '해 지고 노을 물드는 바닷가'의 '물새들의 울음소리 저 멀리 들리는 고요한 섬마을'(회상)일 수도 있고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 갈 길은 머나먼' 그리하여 '사공이 나를 태우고 노 저어' 가는 '또 다른 나루'(서해에서)이기도 하며 '고행의 수도승'이나 '사색의 시인'들이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 허위허위 달려가면 당도할 수 있는 '시인의 마을'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노래에 등장하는 뭇사람들은 '떠나가는 배'를 타고 '나그네'가 되어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기약도 없이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긴' 채 흘러가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년 전 당쟁과 모함, 살육으로 얼룩진 이 땅의 정치판을 박차고 나와 죽장에 삿갓 쓰고 괴나리봇짐 하나만 달랑 맨 채 삼천리 조선팔도를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유유히 떠돌던 천하의 가객 김병연처럼 정처없이 길을 나서는 것이다.
그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 위에는 노래를 부른 박은옥 자신의 모습도 투영돼 있지만 곡의 가사를 직접 써 붙였던 정태춘의 젊은 시절 고뇌에 찬 모습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다. 그가 온몸을 던져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하며 괴로워했던 것은 시대적 아픔이라기보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명제였을 것이다. 가수 생활 어언 이십 년간을 노래하는 동반자 혹은 동지로서 그 숱한 고해를 거쳐 동고동락하며 오늘에 이른 이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자리에서 섣불리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아픔이 한 개인의 실존적 명제보다 앞선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어떤 단정적인 진술로 때로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대중음악계의 판도 내에서도 아주 드물고 그래서 희귀하기조차 한 그들 부부의 가치를 어림짐작으로나마 저울질해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 내외의 빛나는 음악적 성취도에 대해서는 나 말고도 이 분야의 전문적인 평자들의 입에 의해 여러 차례 상찬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글을 쓰는 사람이지 음악을 비평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의 음악세계에 관해 이렇다저렇다할 입장은 못 된다. 아니, 그런 자격이 처음부터 없다고 하는 쪽이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이 부부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면 듀엣으로 음반을 내는 일은 물론이려니와 가끔, 아주 가끔은 한 개인의 이름으로도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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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어떤 시보다도 정결하고 품격이 높았던 한 가수의 서늘한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는 그 서정적인 노래를 통해 세속의 먼지에 찌든 나 자신의 남루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박은옥은 노래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몇 안 되는 가수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노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거짓에서 참으로,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추한 것에서 고상한 것으로 이끌고 가는 신비스러운 힘이 깃들여있다. 그것은 도저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선 생각할 수 없는 일상의 범주에서 저만치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힘이지만 그러하기에 그 힘은 성스럽고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일상의 노래가 일상적이지 않게 들린다면 그건 성가나 예불가에 해당하는 경지와 진배없는 것은 아닐까.
가령, 우리는 이적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어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지명도 잘 모르는 어떤 장소를 지나치게 된다. 그러다가 불현듯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공간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이끌림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인간의 언어로는 뭐라고 딱 부러지게 해명하기 곤란한 그 나름의 어떤 고유함, 그런 고유함에는 반드시 신성한 숨결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가 따라붙는다. 슬픔이나 기쁨, 노여움이나 반가움들은 그러하기에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의 발산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다분히 무한한 자연의 일부분, 살아 숨쉬는 생명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치 공기 속에 숨어있는 정령의 영혼을 감촉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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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은옥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일단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편안함은 거리의 여기저기를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우연히 교회나 성당 앞을 지나치게 됐을 때 건물 안에서 새어나오는 찬송가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그 앞에 서 있게 되는 경우나 한적한 절집의 경내로 들어섰을 때 잔잔하게 밀려오던 풍경 소리와 함께 저절로 내 마음이 숙연해지던 종교적 체험과 다를 바 없다.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처럼 나는 박은옥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세상일에 치이고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내 마음의 언저리를 보이지 않는 어떤 이의 손길에 의해 부드럽게 치유받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무신론자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적인 어떤 힘, 불가사의한 자연의 치유능력은 믿고 있다. 신은 믿지 않는데 신적인 어떤 힘은 믿는다니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그건 마치 시인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시적인 것은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터무니없는 믿음과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가치체계의 신봉자다. 자연의 힘은 그만큼 놀랍고 신비롭다. 우주의 어떤 차원에 이르는 자연의 위대함은 중심을 갈구하는 나바호 인디언의 노래에서도 전해진다. '내 앞도 아름답고, 내 뒤도 아름답고, 내 오른편도 아름답고, 내 왼편도 아름답고, 내 위도 아름답고, 내 아래도 아름답다.' 박은옥의 노래는 내게 어떤 종교의 교리보다 더 강하고 진실한 '종교적'인 믿음의 실체가 인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이 다름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매번 일깨워주는 것이다.
출처 : 맑은영혼을 위하여 | 글쓴이 : 김승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