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聖음악

앨범: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사도전례 - Francesco Cera, organ (2001 Dynamic)

리차드 강 2013. 2. 21. 08:30

Missa Apostolorum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사도전례

Andrea Gabrieli (circa 1532 - 1585)

1. Introitus (Toccata / chant: Mihi autem)

 

Album Title: Andrea Gabrieli: Missa apostolorum, mass for organ Work

Composer: Andrea Gabrieli (circa 1532 - 1585), Gregorian Chant
Conductor: Giovanni Conti
Performer: Francesco Cera (Organ)
Ensemble: Ensemble More Antiquo

Audio CD (July 24, 2001)
Number of Discs: 1
Label: Dynamic Italy
Copyright: (c) 2001 Dynamic Italy
Recording Time 1:06:32
Genre: Classical
Styles: Keyboard

     

     

1. Missa apostolorum, mass for organ  (1:06:32)
   Composer   Andrea Gabrieli (circa 1532 - 1585)
   Conductor   Giovanni Conti
   Performer   Francesco Cera (Organ)
   Ensemble   Ensemble More Antiquo
   Genre   Mass / Renaissance Period
   Period   Renaissance
   Venue   Chiesa Collegiata, Bellinzona, Switzerland (01/23/2001/01/24/2001)

     

     

1. Introitus (Toccata / Gregorian chant: Mihi autem)
2. Kyrie (Alternatim)
3. Gloria (Alternatim)
4. Canzon Dopo l'Epistola (Canzon francese "Je n'en dirai mot, bergere")
5. Alleluia (Gregorian chant: Te gloriosus)
6. Credo apostolorum (Alternatim)
7. Offertorium (Ricercar Arioso Ⅲ.)
8. Sanctus (Alternatim)
9. Ad Elevationem (Motet in tablature "Fuit homo missus a Deo")
10. Agnus Dei (Alternatim)
11. Communio (Gregorian chant: Amen dico vobis)
12. Postcommunio (Canzon "Qui la dira")
13. Oratio (Gregorian chant: Protege Domine / Intonazione del Ⅰ. tono)
14. Ite, missa est (Gregorian chant / Intonazione del Ⅶ. to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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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 Gabrieli (1532/1533-1585), Psalmi Davidici

Andrea Gabrieli(1532/1533-1585)는 후기 르네상스 이태리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으며, Giovanni Gabrieli의 삼촌으로도 알려져있다. 그는 베네치아 악파 작곡가들 가운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첫 작곡가였으며, 베네치아 스타일의 음악을 이태리 뿐아니라 독일에까지 유행할 수 있도록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Andrea Gabrieli의 초기 삶에 대하여는 추정되고 있는 것일 뿐 정확하게 확인되어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마도 베네치아 태생인 것으로 보이며, 일찌기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에서 Adrian Willaert 의 제자로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1550년대 초반 베로나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확인되는 몇 몇 근거가 확인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베로나 궁정의 악장직을 지내고있던 Vincenzo Ruffo와 관계되어 있었으며, 이를 증거하듯 1554년 Ruffo는 가브리엘리의 마드리갈 작품들을 출판한 바 있으며, Gabrieli 역시 Veronese academy를 위해 몇몇 작품을 작곡하였다. 그는 또한 1555년에서 1557년까지의 기간동안 Cannaregio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한 사실이 알려져있는데, 이 기간에 산 마르코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직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562년 독일로 갔으며  Frankfurt am Main 과 Munich을 방문했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프랑스, 이태리, 독일어를 사용한 세속 노래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방대한 라틴 종교음악을 작곡한 바 있는 가장 폭넓은 장르를 소화했던 작곡가 Orlande de Lassus와 친구가되었다. 이러한 음악적인 유대는 서로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는데, 라수스가 베네치아의 이 위대한 작곡가로부터 베네치아 스타일의 음악 어법을 배운 반면, Gabrieli는 바바리아의 라수스로부터 수많은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으 수 있었으며, 라수스가 회피했던 순수한 기악 음악을 포함한 최근의 모든 음악어법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1566년 가브리엘리는 북이태리의 가장 저명한 음악적 지위 가운데 하나였던 St. Mark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선발되었으며, 이 직위를 삶을 마칠 때 까지 유지하였다. 이 시기 그는, 동시기를 호흡했던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곡가의 한사람이라는 명성을 얻고 유지하게되었다. 아울러 산 마르코 성당의 독특한 음향학적인 공간구조에 맞추어  다성합창 스타일을 발전 시켰으며, 또 부분적으로 바로크 음악의 시작으로 정의되는 콘체르타토 어법의 발전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자신의 독특하며 규모가 큰  ceremonial style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산 마르코 성당에서의 그의 업무는 분명히 작곡을 포함하는 것으로 종교적이며 의식적인 행사에 필요한 엄청난 분량의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들 중 몇몇은 역사적인 관점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다양한 축제들과 아울러 오스만 투르크와의 사이에 있었던 Lepanto (1571)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음악등을 작곡하기도 하였으며, 1586년에는 일본으로부터 사신으로 온 몇몇 왕자들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이력의 후반에 저명한 스승이되어 가르쳤는데, 그의 탁월한 제자들 가운데에는 조카였던  Giovanni Gabrieli, 음악 이론가였던  Lodovico Zacconi, 독일인으로 독일에 concertato style 을 보급했던 Hans Leo Hassler 등을 포함한 다수를 두었다.

그가 사망한 날짜와 그에 따른 주변 정황은 1980년대에 그의 이름을 수록한 한 명부의 기록이 발견 될 때 까지 모호한 채로 남아있었는데, 이 기록을 통해 그가 52세의 나이로 1585년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를 통해 그의 출생이 1532/1533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Gabrieli는 다작의 다재다능한 작곡가였으며, 종교와 세속 성악작품, 혼성합창단과 기악을위한 음악, 순수 기악 음악을 포함한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들 대부분의 작품들은 산 마르코 성당의 음향학적 공간구조에 적합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백여곡의 모테트와 마드리갈 뿐 아니라 소수의 기악을 위한 작품들 역시 포함되어있다.

그의 초기 음악 스타일은   Cipriano de Rore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의 마드리갈 작품들은 16세기 중반의 전형적인 트렌드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그의 초기 음악은 클라이맥스에 호모포닉한 텍스처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이는 그의 후기  grand style 을 예견토록해주는 것이다. 1562년 라수스와의 만남 이후 그의 음악 스타일이 괄목할만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 저명한 네덜란드인 라수스는 가브리엘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가브리엘리가 산마르코 성당에서 봉직하고있을 때 16세기 음악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있던 Franco-Flemish 대위법적인 스타일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했으며, 대신대성당에서 연주될 목적의 악기와 보칼 그룹이 섞인 안티포날한 거대한 음향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의 음악은 서로 다른 레벨의 피치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결합된 프레이즈가 반복될 수 있도록하였다. 비록 특정한 악기 사용을 명기하지 않았으나, 의도된 악기의 사용은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음악의 섹션들의 형태를 결정짖는 텍스처와 소노리티라는 측면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다음 세대를 위해  Venetian style 음악을 명확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가 산마르코 성당을 위한 음악만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태리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의 극음악 가장 최초로 재현한 음악가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Sophocles의  Oedipus tyrannus를 위해 합창단드을 위한 작품을 썼는데, 이는 각각의 성부 그룹에 따라 다른 선율 라인을 갖는 것이다. 이는 1585년  Vicenza 에서 상연되었다.

분명히 Andrea Gabrieli 는 자신의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며, 그가 사망한 이후 조카 Giovanni Gabrieli가 그의 작품 디수를 출판했다. 본 음반에 수록된 그의 Psalmi Davidici 는 1583년 프랑코-베네치안이었던 안젤로 가르다노라는 출판업자에 의해 출판되었다. Andrea Gabrieli 는 이 작품들을 통해 가장 평화로운 베네치아 공화국의 오르가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직위는 당시개의 음악가들이 가장 갈망하던 최고의 직위였으며, 가브리엘리는 이 거대한 명성의 직위를 차지하고있었다. 이 작품이 다름아닌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 13세게에 헌정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가브리엘리에 의해 작곡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가브리엘리는 스스로 피 헌정자인 교황에게 전하는 글을 통해 이 작품이 자신의 음악 인생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단언하였다. 베네치아의 오르가니스트였던 가브리엘리에의해 작곡된 이 Psalmi Davidici 는 당시기  출판을 목적으로 하나로 모아진 유일한 혼성작품은 아니었다. 이 작품들은 팔레스트리나의 성공적인 Cantico  dei Cantici(1582년 최초로 출판된 것으로 보이나 유실되었음)와 뮌헨에서 1584년 출판되었던 라수스의 동명의 작품으로 Psalmi Davidis poenitentiales란 타이틀의 작품이 출판된지 1년 후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의 타이틀 페이지에는 Psalmi Davidici 가 모든 유형의 악기에 적합하도록하였으며, 모든 목소리에 맞출 수 있도록 했다고 명기되었다. 이러한 기록는 이후 베네치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는데, 본 작품에 그러한 최초의 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들 작품들과 그의 조카의 작품들 사이에는 언뜻 보기에도 명백한 차이를 드러내고있는데, 베네치아의 축제의 위용과 브라스의 떠들썩함은 없으며, 대신 성스러운 교황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 처럼 보이는  고요하고 묵상적이며, 내면적이고 종교적인 트랙들로 여기 저기 채워져있다. 이 작품들은 8명(2 sopranos, contralto, counter-tenor, 2 tenors, baritone and bass)의 목소리와 cornet, 2 trombones, bassoon, 3 viols - soprano, tenor and bass, organ 등 8개의 악기로 구성된 앙상블을 위한 것으로 구상되었다. 이 와 같은 베네치아 전례의 시편은 휴식 없이 연주되었으며,  그 성격적인 특징으로 인해 흔히 장례의 추도 음악으로 연주되었는데, 이들 작품은 아마도 오스만 투르크와 사이에 있었던 레판토 전투에서 전사한 베네치아의 도제와 몇몇 그 후임자들의 장송 전례에 연주되었을 것로 추정된다.

는 헨델이 하노버 궁전의 악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영국으로 여행을 하고자 게오르규 선제후에게 기한부 휴가를 얻고 독일을 떠났다. 자작 오페라를 상연하고 앤 여왕의 생일 축하 송 가를 작곡하는 등의 활동으로 여왕을 비롯한 영국의 상류 사회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 그는 이 행운에 도취되었고, 하노버에서의 귀국 명령에도 불복하고 영국에 계속 머물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가 게오르규의 미움을 사던 중 앤 여왕이 갑자기 서거 하고 다음의 영국 왕의 자리에 게오르규가 즉위하는 기가 막힌 사태가 벌어지고야 만다. 당연히 헨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그를 의리 없는 인간으로 생각하던 새국왕에 의해 상 류 사회의 활동은 끝남과 함께 연금의 혜택도 사라진다. 앤 여왕의 총애를 받던 신세에서 갑자기 상황이 처참해진 그는 실망 속에 잠겨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이런 그의 모습은 그를 아끼던 주 변의 모든 친구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이 친구들은 헨델을 위해 국왕의 마음을 돌 릴 수 있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들이 생각해 낸 좋은 방법이란 템즈강에서 거행될 왕의 즉위 축하 뱃놀이 잔치에 몰래 배 한 척을 띄우고 관현악단을 여기에 태워 헨델이 만든 음 악을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뱃놀이를 하던 날, 헨델의 친구들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이 국왕은 강가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이 ≪수상 음악≫을 듣고 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았고, 즉 시 다시 연주할 것을 명함과 동시에 악장의 이름을 수소문했다.

글 출처: 인터넷에서....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