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강명순 - 프라하의 봄 No.2. Polka - Allegretto grazioso
프라하의 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 ·자유화의 열망이 점차 고조되어 갔으나, 노보트니 정권은 이를 외면한 채 소련만을 추종하였다. 1960년대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민주·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에 밀려 마침내, 1968년 1월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당 제1서기를, 체르니크가 수상을, 온건파 스보보다가 대통령직을 각각 맡았다. 이들 개혁파는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즉 민주·자유화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재판의 독립, 견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집회의 자유보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경찰정치의 부활저지, 경제계획의 추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서의 연방제로의 이행,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다. 따라서 사실상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되었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광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가 있자 온 국민은 ‘프라하의 봄’이라 하여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 체제변화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군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함으로써, 이 자유화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하였다. 1969년 4월 소련은 둡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후임 서기장에 후사크를 임명하였으며,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였다.
보헤미아의 짙은 향기 --- 프라하의 봄 비가 내리겠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프라하의 아침하늘은 비교적 푸르고 상쾌하게 열리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나로서는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눈곱만 떼고는 호텔을 나와 뷔쉐흐라트 성으로 향했다. 이곳은 체코의 역사상 최초의 왕조가 둥지를 틀었던 곳으로서 지금은 겨우 성터와 '로튼다'라 불리는 최초의 교회 형태의 건축물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기왕이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프라하의 뿌리부터 그 숨결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 였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이곳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체코가 자랑하는 음악가 '드보르작'과 '스메타나'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일러서 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관광코스에서는 빠져있기 때문인지 동네 주민들 몇 명만이 문밖을 쓸고 있을 뿐, 고요함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AD 4세기 경 슬라브족이 이곳을 침략하면서 족장의 이름을 따 '보헤미아'라는 부족국가를 세우고 이후에 훈족에게 쫓긴 게르만 민족의 일부가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 역시 족장의 이름을 따서 체코라는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6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체코의 역사가 사라지게 되는 묘한 일이 발생한다. 9세기 경, 프라하의 남부 쪽으로 모라비아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지만 모라비아 역시 다시 마자르족에 의해 멸망되고 만다. 프라하는 체코 왕국의 수도로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 뷔쉐흐라트 성을 건설하고 최초로 프레미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프라하 성이 건설된 것에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프레미스 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각기 독특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큰딸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재주가 있었고 둘째는 병을 낫게 하는 재주, 그리고 막내인 리브쉐는 예언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느 날 리브쉐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저 곳에 한 농부가 성을 짓고 있는데 거길 가면 그 농부가 도끼로 문턱을 찍고 있을 것이다' 라고 예언한다. 과연 그곳에는 농부가 도끼로 문턱을 찍고 있었고 왕은 그 자리에 성을 건설할 것을 명했다. 프라하라는 말은 체코어로 '문턱'을 뜻한다. 성 바울 성당의 뒤뜰에는 도끼를 든 농부와 왕의 셋째 딸이 손가락으로 프라하 성 쪽을 가리키는 모습의 조각이 서있다. 그 후 농부와 리브쉐는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의 프라하성은 한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9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에 거쳐 조금씩 지어져 완성된 것이다. 성당 옆 공동묘지는 검정색 혹은 회색의 화강암 묘들로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대부분이 이 지역 주민들의 가족묘들인데, 가지런히 꽃을 놓은 모습들이 묘지라기 보다는 공원을 연상케 하여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묘는 서로 떨어져있었다. 스메타나의 묘비는 오벨리스크처럼 높이 서있었고 드보르작의 것은 회랑의 중간쯤에 흉상과 함께 안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체코의 영웅적인 민족음악가로서 합스부르크의 압제에 시달리던 국민들을 음악을 통해 민족혼을 심어주며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던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제 1악장은 바로 비쉐라트 성을 표현하고 있다. 나의 조국이나 드보르작의 '신세계' 모두 체코 국민의 신념과 민족혼에 관한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서 우리 귀에도 비교적 익숙한 곡이다. 나이 지긋한 노수녀 한 분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지나간 인생을 모두 회고하는 듯 회한의 표정으로 묘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성의 입구에 보존되어있는 '로튼다'는 오늘날의 성당의 전신으로서 둥근 원형의, 꼭대기에 십자가가 걸려있는 자그마한 벽돌 건물로서 프라하 시내에 3곳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은 지금의 프라하성 내의 성 비투스성당 자리로서, 그것을 허물고 성당을 건축한 것이다. 로튼다는 너무 조그만 예배당이라 '저렇게 조그만 예배당에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예배당을 모두 이렇게 작게 지었는데, 당시에는 오직 신부들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밖에서만 예배를 보았는데, 비가 오거나 날이 추우면 예배를 보기가 어려워 신도 수가 줄게 되었으므로 나중에 크게 지어서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쉐라트성을 나와 프라하 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프라하성의 명성은 비단 체코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에서도 가장 멋있고 훌륭한 성으로 정평이 나있다. 중세의 웅장함과 섬세함이 곳곳에 깃들여 있는 이 근사한 성을 보기 위해 연간 천만명 이상이 이곳을 찾는다. 불현듯 1, 2차 대전을 겪었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프라하 성을 비롯한 모든 중세의 건축물들이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세계 제 2차 대전 때 이웃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95퍼센트 이상이 파괴된 것을 비교하면 너무나도 대조적이기 때문이었다. 프라하가 온전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차대전이 발발하자 체코는 폴란드, 헝가리와 함께 3국 동맹을 맺어 독일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막상 히틀러의 군대가 프라하로 진군을 시작하자, 프라하는 단 하루도 더 생각하지 않고 독일에 백기를 들어버렸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체코를 배반자라고 비난하며 히틀러에게의 대항을 계속했다. 그 결과 바르샤바는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부다페스트 역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프라하는 재빨리 항복한 덕택에 단 한발의 폭탄도 얻어맞지 않았다.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돈을 쓰며 체코의 경제에 많은 보탬을 주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블타바(몰다우)강 너머로 보이는 프라하 성 전경 프라하성은 블타바강(독일어는 몰다우강)옆 절벽 위에 세워졌다. 뒤쪽으로는 완만한 언덕의 오르막이 있는데, 성비투스 성당과 주교의 거처를 비롯하여 현재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고 있는 왕궁과 여러 개의 사원들, 그리고 몇 개의 부속건물들이 성내의 중심부에 건설되었고, 그 위로는 12세기에 원래 수도원으로 지어졌다가 현재로는 전 세계의 진귀한 고서들이 200만 권이나 소장되어있는 스트라홉스카 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원래 성은 두 가지 개념의 성이 있는데, 한가지는 '흐라트'라 불리는 것으로서 화약과 총포가 개발되기 전인 오래 전에 축성된 것을 말한다. 총포가 개발되기 전이라 창이나 활 등 구식무기로만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깎아지른 절벽 위나 산 꼭대기에 건설함으로서 적들의 침입을 용이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총포의 발달로 인해 이러한 위치적 요건이 별로 의미가 없게 되었으므로 전쟁보다는 행정 관리를 위해 평지에 짓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자멕'이라 부른다. 프라하성은 '흐라트'에 속하면서도 '자멕'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특이한 구조의 성이라 할 수 있다. 성의 위쪽으로는 왕족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이 기거했으며 아래 쪽으로는 평민들이 살고 있었다. 예로부터 프라하는 블타바강을 끼고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는 상업도시였으며, 상업에는 언제나 유태인들이 개입되기 마련이어서 지금도 당시부터 형성된 유태인 자치구역이 구 시가의 한 쪽에 현존하고 있다. 성의 중간쯤에는 단아하고 자그마한 성당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그 이름은 '로레타성당'이다. 마침 정시를 가리키고 있어서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성당의 종 탑에는 29개의 조그만 종들이 매 정시마다 종을 치는데 그 종소리의 멜로디에는 "성모마리아에게 천 번의 경배를!" 이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한다. 이 로레타성당은 이탈리아의 로마에도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 더 있다. 프라하에서는 독일의 루터보다도 100년 앞서 얀후스라는 신부에 의해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는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카톨릭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얀후스가 화형(火刑)으로 순교한 후 그 정신을 본받은 신교도들이 스웨덴 지원군의 협력으로 프라하 근교의 백산 에서 구교도들과 마지막 일전을 벌였으나 불운하게도 이곳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로레타성당은 구교도들의 희생을 애도하고 카톨릭의 승리를 기리는 뜻에서 세워진, 피에 의해 지어진 사연이 깊은 성당이다. 전쟁이 끝난 후 체코 전역에는 이와 똑같은 성당이 60개나 지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제는 신교도들이 다 죽었으므로 지금부터 체코는 구교의 국가다' 라는 의미를 모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후에 중 북부 유럽에서는 나중에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꾸준히 지지를 받은 신교도들과 구교도들 사이의 골 깊은 갈등이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켜 무려 100년 동안이나 피비린내로 얼룩지게 된다.
까를교에서 보이는 다양한 전형적인 체코의 Sky Line 들 시계가 정각 12시를 가리키자 대통령궁 안 뜰에서 근위병 교대식이 거행되었다. 잔뜩 기대를 하며 기다렸지만 런던 버킹검의 근위병 교대식이나 크레믈린의 그것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어 보여서 다소 실망했다. 대통령궁을 지나 성의 중심부에 들어오면 거대한 첨탑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바로 성비투스 대성당이다. 끝이 뾰족한 고딕양식의 이 웅장한 성당은 폭이 60미터, 길이가 120미터에 달하며 첨탑의 높이는 100미터에 이르는 대규모의 성당으로서 929년부터 1929년까지 무려 천년동안 지어졌다. 전형적인 고딕식 카톨릭 성당의 전형으로서 전면에는 예수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일대기를 부조로 조각을 한 것이 특징인데, 이 성당의 육중한 청동 문에는 11세기경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바츨라프 대왕의 일대기를 부조로 해놓은 것이 특이하다. 그곳에는 어릴 때 가정교사로부터 교육받는 광 경에서 왕이 되었을 때의 장군복장에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과 왕을 시기하는 이복동생들의 칼에 맞아 이 성당의 앞에서 살해당하기 직전 문고리를 잡고 있는 모습 등이 새겨져있다. 이복동생의 자객들을 피해 도망을 가던 왕은 마지막으로 이 성당 앞에 이르렀다. 문이 열리면 목숨을 건지게 되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츨라프 대왕은 결국 막다른 문 앞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이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때는 우리의 고려시대에 속한다.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어떤 건축물을 지었었는가를 비교해 보면 이들의 스케일과 건축기술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딕식의 성당들은 종교성과 신비감을 강조하기 위해 천정을 매우 높게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벽을 높이 쌓아야 하는데, 높이 쌓다 보니 벽이 무리한 하중을 받게 됨으로서 창문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홀 중간에 기둥들을 세우고 처마를 바깥쪽으로 잡아당김으로서 힘을 분산시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 것인데, 마치 텐트를 칠 때 가운데 폴대를 꽂아 텐트를 세우고 양쪽으로 잡아당기는 원리와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하여 벽에는 외부로부터 빛을 받아 현란한 색상으로 신비스러운 성서의 분위기를 더해주는 스테인드글래스의 설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정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거대하고 완벽한 건축물이다.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한쪽에 과거 종교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는 것이 볼만하다. 특히 성당의 제단 뒤로 은(銀) 3톤을 녹여 만든 순은제의 관, '네포묵 신부의 관'은 모양도 매우 특이하고 사연도 깃들어 있다. 12세기 경 체코의 왕이었던 바츨라프4세는 자신의 포악함으로 인해 많은 정적들이 주위에 있었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항상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왕비가 네포묵 신부를 찾아가 무언가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었다. 의심이 들었던 왕은 왕비가 무엇을 말했는지 신부에게 캐묻기 시작했지만 신부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하느님과의 약속으로서 남에서 누설할 수 없으며, 설사 왕의 자격이라 할 지라도 밝힐 수 없다고 대답을 거절했다. 왕은 계속해서 신부를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캐내려 했지만 끝내 대답을 거절하자 자존심이 상할 데로 상한 바츨라프 4세는 신부의 혀를 잘라버리고 돌로 묶어 블타바강 위의 까를교 위에서 물에 던져 수장시키고 말았다. 나중에 후손들이 이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까를교 위에 동상을 만들어 세웠으며 그의 시신은 은관에다 봉하여 성비투스성당에 안치하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네포묵 신부의 잘린 혀는 수백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썩지 않고 박물관에 보존되어있다.
궁전 내에는 당시의 궁정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공간이 많이 있다. 체코는 크리스탈이 특히 유명하여 샨들리아를 비롯한 유리 용기들은 대부분이 화려한 보헤미안 크리스탈로 만들어 졌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과 당대의 오스트리아 황제와 체코를 다스렸던 오스트리아의 총통의 초상들이 아직까지 걸려있다. 이곳을 지나 잠시 뒷길로 나가면 프라하 성을 축성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 봉헌하기 위하며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성트리제 교회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로는 걸리버의 소인국에나 등장할 법한 조그만 집들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이곳을 일컬어 '황금소로'라 부른다. 이 지역은 옛날 궁중의 잡일들을 처리하고 식료품을 배달하며 대장간을 하던 평민과 천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후에는 납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을 믿은 일단의 기술자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황금소로(黃金小路)'라는 애칭이 붙게 되었다. 이곳에는 특히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체코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프란츠 카프카'가 살던 집이 있는데, 푸른색의 벽에 21번지라고 표시되어 있다. 카프카는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188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나,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매우 못마땅히 생각하였다. 누이동생만이 친구이자 동조자였을 뿐이었다. 카프카는 불행하게도 40세에 정신병으로 죽고 만다. 카프카는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현대인의 불안한 삶을 표현했던 실존주의의 대표적 문학가로 작품으로는 '변신' '심판' 등이 있다. 카프카의 생가인 21번지와 그 옆집 20번지는 지금의 대통령 하벨의 영부인이 장애자들로 하여금 수공제품을 만들게 하고 이곳에 전시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장애자를 위해 사용하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던 곳으로서, 이 영부인은 지금도 체코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다소 지치긴 했지만, 내친 김에 까를교와 구 시가 광장까지 모두 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까를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체코가 자랑하는 다리이다. 이 다리가 처음 지어진 것은 9세기. 처음에 나무로 만들어졌던 이 다리는 그러나 홍수로 그만 유실되고 말았다. 그 후 11세기 중반에 다시 돌로 지어졌지만 그도 역시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버리게 된다. 지금의 다리는 1357년, 약관 20세의 건축가에 의해 탄생된, 블타바강위에 놓인 18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축가인 '피터팔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축에 관한 한 가히 천재적인 기술의 소유자였다. 정확한 하중계산으로 균형과 견고함을 지닌 멋진 다리를 건설함으로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된 것이다. 이 까를교의 길이는 560m. 폭은 10m. 다리의 양쪽에는 각각 15개씩 성서의 인물들의 조각상들이 서있다. 이 조각들은 15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한 개씩 만들어 추가된 것이다. 피터팔로의 손길은 나중에 성 비투스성당과 틴성당에도 미치게 된다.
시청 건물에서 바라본 틴 성당과 구시가 광장 이곳에서 바라 보는 프라하성의 모습, 특히 밤에 블타바강의 건너편으로 보이는 프라하성의 야경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된다고 한다. 다리 중간에는 혀를 잘린 채 강물에 던짐을 당하는 네포묵신부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반석의 전면에는 네포묵신부가 병사들에 의해 돌에 매달려 거꾸로 떨어지는 모습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떨어지는 신부의 모습을 손으로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하도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만지는 바람에 거기만 노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리 위에는 언제나 관광객들과 행상인들로 붐빈다. 다리 건너편에서 구 시가 광장으로 이르는 길은 무척 재미나다.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선물가게, 술집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역시 언제나 많은 인파로 법석거렸다. 재미나는 것은 광장으로 가는 동안 여러 장의 전단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았는데, 하나같이 크고 작은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공연될 오페라와 연주회, 그리고 연극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날그날 오페라나 연극의 배우들이 직접 공연장의 의상을 입고 나와 전단을 나누어주는 모습이 이채롭다. 모차르트, 푸치니, 로씨니, 베토벤을 비롯한 거장들의 음악들이 여름철만 되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오르는 곳이 바로 프라하로서, 음악의 고장이라 자처하는 비엔나를 무색케 한다. 이것은 프라하의 시민들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수준이 높은 민족이며 얼마나 예술과 가까이 접하고 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요금은 대개가 우리 돈 2-3천원 정도로 놀랄 만큼 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여러 날을 머물며 매일 다른 공연을 보고 말겠다는 마음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모차르트는 짤즈부르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도시 비엔나보다 이곳 프라하에서 훨씬 인정을 받았으며 그래서 생전에 이곳을 여러 번 방문하여 공연활동을 했다. 프라하 시민들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매료되었고 그를 열렬이 환호했다.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오페라 중 하나인 '돈 지오반니'는 바로 이곳 프라하의 국민극장에서 초연되었고, 1791년 그가 죽었을 때 이곳의 성 니콜라스 성당에는 3천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다. 혹시 '밀로슈포르만'이라는 영화감독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이 사람은 10여 년 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영화 '아마데우스'를 감독한 사람으로서, 바로 체코 사람이다. 인간의 시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표현한 작품으로 모차르트의 일대기를 흥미 진진하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이 영화에서 아카데미 의상 상을 탄 것은 체코 만의 독특한 푸른색 때문이었는데, 청색과 감청색이 혼합된 것같은 이 멋진 푸른색은 프라하성의 대통령궁을 지키는 근위병의 유니폼에 이용되고 있다.
넓은 구 시가 광장의 중앙에는 종교지도자 얀후스의 동상이 서있었다. 그는 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체코 제 1의 명문대학인 찰스대학교(까를대학교)의 초대 총장이기도 했다. 그는 구교인 카톨릭의 불합리한 점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교황과 성직자들을 맹 비난했다. 얀후스는 체포되어 종교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된 후 이 광장 한가운데에서 장대에 묶여 꼿꼿이 세워진 채 화형에 처해진다. 1415년의 일이다. 장작불이 더디게 타오르자 한 농부가 마른 볏짚을 잔뜩 장작더미 위에 쏟아 부으며 잘 타도록 불을 추슬렀다. 이때 얀후스는 그 농부를 가엾은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던진다. "우매한 성스러움이여....." 이 말은 '분별력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얀후스의 동상은 1915년 얀후스의 순교 5백주년을 기념하여 세워 졌으며, 동상의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지켜라' 이토록 숭고한 역사가 담겨있는 동상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상의 반석 위에는 철없는 젊은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마냥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시청 건물의 벽에 조성된 14세기의 천문시계 이 광장의 하이라이트는 구 시청사 옆에 있는 천문시계이다. 1300년대, 체코가 동유럽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할 무렵 당시의 왕인 찰스 대왕이 큰 영토를 다스리는 것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무엇인가를 제작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무명의 과학자였던 니콜라스는 명령을 받고 바로 이 천문시계를 제작하게 된다. 현재의 것은 1490년 다시 개조된 것이다. 위 아래 두 개의 원으로 되어있으며 천동설에 입각한 당시의 우주관을 보여준다. 위의 원은 칼렌다륨이라 하여 해와 달, 그리고 북극성의 위치를 가리키며 1년에 한바퀴 씩을 돌면서 연월일과 시간을 나타낸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매 시간을 정확히 나타내주는 것이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다. 밑에 있는 원은 플라네타륨이라고 하며 12개월의 계절별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서 보혜미안의 농경생활과 관련있는 것이라 한다.
시청 건물의 벽에 조성된 14세기의 천문시계 해와 달을 가리키는 위쪽의 원형 시계 좌우에는 각각 두 개씩의 인형이 서있는데, 매시 정각이 되면 왼쪽의 해골이 줄을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해골의 다른 손에는 모래시계가 들려져 있다. 이 때 기타를 들고 있는 해골 바로 옆에 있는 인형과 시계 오른쪽의 거울을 든 인형, 그리고 돈주머니를 든 인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다. 기타는 쾌락을 뜻하며 돈주머니는 부를, 그리고 거울은 사치와 허영을 상징한다. 해골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해골이 고개를 끄떡이며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것은 '타락한 인간들이여, 너희들이 아무리 쾌락과 부와 허영을 탐닉해보았자 결국은 죽음의 시간은 멀지 않았노라' 라는 메시지를 나타낸다. 나머지 인형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는 것은 '그게 아닌데, 그럴 리가 없을 텐데'하는 인간의 속성과 무지함을 묘사한 것이다. 아래의 시계 좌우에 역시 두 개씩의 인형이 있는데, 이 인형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래의 인형들은 세 사람의 현인들과 한 사람의 천사로서, 위의 인형들과는 달리 지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결국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종이 시간을 알리면서 인형들이 움직이는 동안, 시계의 꼭대기에 작은 창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하나씩 지나가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회계하라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계하고 복음을 믿을 때 영생을 얻으리라." 마지막으로 그 위에 있는 황금색의 닭이 "꼬끼오"하고 소리를 내면서 시계가 울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람들은 이 닭을 베드로의 닭이라 부른다. 매시 정각마다 이 시계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린다. 체코인은 동구의 나라들 중에서도 민족적인 자긍심이 대단히 강한 민족이다. 그들은 2차대전 이후 구 소련에 의해 1948년 공산화에 들어가 20년간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서 경제적으로 계속 낙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인접한 서유럽의 나라들에 영향을 받아 서방세계에 대한 동경과 자유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60년대 민주화 운동지도자였던 두브체크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프라하의 봄'을 주창한다. 봄이란 것은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프라하에 자유가 올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일제의 압제 속에서 한줄기 뜨거운 불길처럼 타오른 우리의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연상케 한다. 1968년 이 민주화 운동은 절정에 이르러 매일같이 수만 명이 바츨라프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었으며, 이때 찰스 대학의 학생이던 '빨라치'라는 학생이 정부의 진압에 분노하여 분신자살을 하게 되자 이것을 기화로 전 국민이 들고일어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던 브레제네프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대를 파견해 무려 6천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로 진군하여 무력으로 운동을 짓밟아 버리게 되었다. 이때 지도자 두브체크는 체포되고 운동은 결실을 얻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만다. 후일 두브체크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살다가 1990년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 그렇다면 두브체크는 '프라하의 봄'을 보고 죽었을까? 그렇다. 그는 체코에서 직접 프라하의 봄을 이루는데는 좌절을 하였지만 체코 국민들의 끊임없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는 끊임없이 지속되어, 1989년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혁명으로 번지면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곧바로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조국의 모습을 살아 생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블타바강 건너의 프라하 성은 파란만장한 체코의 역사를 굽어보며 프라하의 시민, 아니 모든 체코 국민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민족적 자존심을 유유히 지켜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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