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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스트라우스 II: 황제 왈츠 Op.437 합창 - 빈소년 합창단 | 가곡 아리아

리차드 강 2018. 5. 3. 08:29

Kaiser(Emperor)-Walzer, for orchestra, Op. 437

요한 스트라우스 II 황제 왈츠 Op.437

Johann Strauss JR 1825~1899

관현악 연주

 

오스트리아 작곡가 J.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왈츠(작품 437).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재위 40년 기념무도회를 위하여 1888년 작곡된 것으로, 89년 베를린의 식당 쾨니히스바우에서 초연되었다. 행진곡풍의 서주와 4개의 왈츠, 코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축전음악으로서의 장중함과 화려함을 지닌 빈 왈츠의 명곡이다.

19세기 초반 무렵,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갖은 탄압과 정보정치에 의해 불안과 긴장이 맴돌고 있었는데, 서민 사회에서는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스타일의 무도곡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사교춤인 미뉴에트나 가보트는 남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새로이 유행하기 시작한 왈츠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둥켜 안고 쉴새 없이 도는 것인 만큼 그 인기나 전파속도는 눈부실 정도였다. 거리마다 댄스홀이 늘어 나면서 왈츠 악단이 대단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게 되었고, 서민 사회에서 시작된 왈츠는 급속히 상류 사회에 까지 확산 되게 되었다.

이무렵 왕성한 창작력과 함께 대중과 항상 호흡을 같이 하며, 대중의 기호를 명확하게 파악하여 주옥과 같은 명작을 남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왈츠 「황제」Kaiser ,op 437

작품전체에 축제 기분이 감돌고 스케일이 큰곡이지만 스트라우스의 왈츠 중에선 그리 유명한 곡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달콤하고 매우 아름다운 선율로 만들어진 비인 왈츠 입니다. 이 곡은 1889년 오스트리아의 프린츠 요제프 1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4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궁정 대 무도회를 위해 작곡된 곡 입니다. 황제의 위업을 찬미하는듯한 당당한 작품으로 넓은 홀에서 쌍쌍이 돌아가며 춤을 추는 장면이 여실히 그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합창

서주:

템포 디 마르치아 C장조 2/2박자
행진곡풍의 서주가 나온 얼마 후에 제1왈츠의 주요 테마가 4/4박으로 연주가 됩니다.

제1왈츠 : C장조 두도막형식

제2왈츠 :Ab장조두도막형식

제3왈츠 : C장조 두도막형식

제4왈츠 : F장조 세도막형식

후주 :

후주의 선율이 처음에 연주되다가 제3왈츠의 A,B가 연주되고 최후로 후주 선율이 다시 조용히 나타나 화려했던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한후 급격히 변하여 힘차게 연주 됩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1830.8.18~1916.11.21]

1848년 3월혁명의 와중()에서 즉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죽을 때까지 다난한 시대를 반세기 이상 통치하고, 신비적으로 장수()한 백발의 노황제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1849년 헝가리의 반란을 러시아의 원조로 진압한 것,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패배하여, 다음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세운 것 등이 중요하다.

그 이후 내정적()으로는 입헌적() 정치를 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독일과 협조하여 평화를 지키며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발칸문제로 러시아와 대립하여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황후 엘리자베트는 암살당하고, 황자() 루돌프는 변사()했으며, 황태자가 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등, 가정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사건이 겹쳤다.

 

Johann Strauss JR 1825~1899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빈 숲속의 이야기》《봄의 소리》 《황제 왈츠》 《예술가의 생애》오페레타 《집시 남작》 《박쥐》폴카곡《트리치 트라치 폴카》 《샴페인 폴카》
《피치카토 폴카》

빈 왈츠로 유명한 음악 가문의 한 사람이다. 그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장남으로 <왈츠의 왕>이라 불린다. 6세 때 36마디로 된 왈츠를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음악가라는 어려운 직업을 갖는 것을 아버지가 극구 반대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은행원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였으나, 어머니의 이해로 아버지 모르게 바이올린을 F.아몬과 A.콜만에게 배웠으며, 성슈테판대성당 합창대장이었던 요제프 드레히슬러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844년 18세 때 공개연주 공인 허가증을 입수하고 15명으로 구성된 악단을 구성하여 최초의 무도회를 열었는데 대단히 평판이 좋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악단과 경쟁하였으나, 1846년 화해했다.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악단을 통합하여 유럽 각지를 순회연주하였다.

1848년 3월 혁명 때 공화파를 위하여 행진곡을 작곡한 것으로 인하여 궁정에서 연주하는 기회가 늦어진 그는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로 즉위하자 1863~70년까지 궁정무도회의 지휘를 맡게되었다. 1856~86년에 걸쳐서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연주하여 <왈츠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1872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프로이센-프랑스간의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1만명의 오케스트라, 2만명의 합창단, 100명의 부지휘자를 동원할 정도로 대규모의 음악회를 갖기도 하였다. 1878년 아내 트레프츠가 세상을 떠나자 30세 연하의 성악 지망생 릴리 디트리히와 재혼하였으나 순탄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1887년 아델레 도이치와 세번째 결혼을 하여 만년에는 행복한 생활을 하다가 1899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초기작품은 기성의 춤곡이나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편곡하여 연주하는 일이 많았으나, 이후에 사교적인 단순한 춤곡에서 탈피하여 표출력을 겸한 감미로운 선율과 뛰어난 관현악법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58년 오펜바흐의 오페라 《부파》가 빈에 소개되고, 주페의 빈풍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자 극장측의 의뢰로 오페레타 《박쥐》 《집시 남작》등의 16곡의 오페레타를 작곡하였는데, 이 빈 오페레타의 전통은 R.호이베르거, K.첼러 등을 거쳐 레하르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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