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갈망

"예수의 생애" 중 主의 고난 - 운보 김기창 화백 │ 한국의 성화

리차드 강 2009. 6. 4. 13:35

"예수의 생애" 중 主의 고난 - 운보 김기창 화백

     

 

최후의 만찬

     

 

게세마니 동산의 기도(祈禱)

     

 

재판받다

     

 

수난당하다

     

 

십자가를 지고 끌려감

     

 

십자가에 못박힘

     

 

예수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다.

     

 

부활(復活)

     

 

승천(昇天)

     

운보 김기창 화백과 예수 그리스도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은 7세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후천성 귀머거리가 됐다. 17세때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 지 6개월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입선해 일찌기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 

1937년 선전에서는 `고담`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광복 이듬해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 아내로부터 입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 말문을 틔었다. 
그 뒤 수차례에 걸쳐 부부전을 개최하는 등 금슬을 과시했지만 76년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만년을 외롭게 지냈다. 
 
운보는 6.25전란 당시 1.4후퇴로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갔다. 처가의 창고 하나를 방으로 개조해 3년간 피난살이를 했다. 그때 군산비행장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당시 어떤 큰 영감이 그를 사로잡았으리라. 그 곤궁한 시절 운보는 '예수의 일생'이란 대업을 완성했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예수와 당시 등장인물, 배경을 모두 한국인과 한국 복식, 배경으로 바꾸어서 성경의 내용에 따라 29점을 그렸다. 

운보는 서울에 올라와 1954년 4월 임시로 꾸민 화신백화점 5층 화랑에서 성화전 (聖畵展)을 열어 이 작품들을 처음 선보였는데 그 독특한 '한국화' 작업이 신선한 화제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한 독일신부가 예수의 부활 장면이 빠졌다며 1점을 더 그리기를 권해 '예수의 일생'은 30점이 됐다고 한다. 

운보는 타계한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이 "의지의 작가요, 정열의 뭉치"라고 불렀듯 다양한 작풍을 섭렵하며 1만5천여점(삽화.데생 포함)의 작품을 남겼다. 

인물. 산수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기의 동양화에서부터 한국 산하의 정기를 힘차고 대담하게 그린 청록산수,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바보산수, 예술정신을 자유롭게 펼친 추상작품 등 그가 다룬 주제와 표현방식에는 한계가 없었다. 

특히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활짝 핀 '바보산수'에서 그는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통해 우리의 민화를 계승한 자유롭고 해학적인 화풍을 보여주었다. 

운보는 바보산수에 대해 "나는 작가 정신이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 죽은 것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 있어요. 바보란 바로 덜 된 것이지요. 예술도 끝이 없는 것이어서 언제나 덜돼있을 수 밖에 없지요.”라고 말했었다. 

대표작으로는 '정청' '군마도' '군작도' '가을' '갓 쓴 예수' '흥락도' '문자도' '점과 선 시리즈'등이 꼽힌다.

단.... 그는 스승을 따라 친일을 했다는 점...

     

슬픈 소리 - 김수철

黃天길 The Road To Hwangchon (서울음반 1989)

김수철 金秀哲 / Kim, Soo-Chul (1957- )

Side A No.4 - 슬픈 소리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