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문화

호치민 평전 (Ho Chi Minh) - 두권의 책 소개│冊

리차드 강 2009. 6. 15. 22:27

호치민 평전 (Ho Chi Minh) 2003년판

총을 든 간디!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푸른숲| 2003

총을 든 간디, 호치민 전기의 결정판!

Hồ Chí Minh (May 19, 1890 – September 2, 1969)

유교적 교양을 쌓은 인문주의자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베트남 독립을 설계하고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한 투쟁에서 승리한 민족 지도자. 20세기 국제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 죽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 호치민!

호치민은 인간해방을 열망한 공산주의자이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민족주의자였으며,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듀이커는 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스크바, 베이징, 워싱턴과 끈질기게 협상함가 동시에 이 세 강대국의 반목을 교묘하게 이용하던 과정을 밀도 높게 재구성하고 있다. 철저한 조사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도 매혹적인 이 평전은 우리 시대의 가장 우뚝하고 신비스러운 인물, 영감과 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계시적인 초상화이다.

지금까지 호치민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나왔지만, 윌리엄 J. 듀이커의 전기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꼼꼼한 조사, 심오한 통찰, 유려한 문체에 바탕을 둔 이전기를 통해 마침내 20세기의 가장 매혹적이고, 신비하고, 논란 많고, 영향력 있는 인물의 신비가 벗겨졌다.

- 스탠리 카노 (<베트남 : 역사>의 저자)

수십 년 동안 어떤 음모라 할 만한 것 때문에 우리는 호치민의 삶의 핵심적 진실을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호치민은 존경하기도 쉽고, 증오하기도 쉬운 사람이다. 호치민 자신은 생전에 세계의 눈에 모래를 뿌리고, 일부러 다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장애를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일을 해냈다. 듀이커는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교조적인 결론들을 세심하게 피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기 위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다. 듀이커의 책은 정보가 풍부하고, 신뢰할 만하고, 진지한 전기이다.

- 더글러스 파이크 (텍사스 공과 대학 베트남센터 부소장)

     

     

"반은 레닌, 반은 간디"

책을 쓰기 위해서 이십여 년이 걸린 셈이라고 서문에 밝혔는데,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의 문서 보관함 속에 잊혀졌던 기억들을 꺼내고, 당시의 사진들, 호치민이 남기거나 호치민을 평했던 많은 글과 편지들을 책에 담아냈다.

치우침이 없이, 이념적인 색깔을 들어내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해 가는 글 속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호치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열렬한 투쟁자로만 기억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의 반쪽을 놓치게 될 것이다.

물론, 호치민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에게 이념보다 우선이었던 것은 '베트남' 조국이었다. 베트남 사람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받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는 일이 그에게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싸웠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지상의 모든 민족들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모든 민족은 생존의 권리, 행복과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나된 베트남, 모든 베트남 민중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대화와 설득으로, 때로는 강대국간의 힘의 논리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그래도 안될 때는 직접 무기를 손에 들고 투쟁을 하는 방법으로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투쟁했다.

프랑스로부터의 허울뿐인 독립, 실질적인 독립을 얻어내기 위한 프랑스와의 전쟁, 이념에 따른 남과 북의 분단, 미국의 침공과 끈질긴 전쟁. 그 험난한 세월을 보내지만, 끝내 베트남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호치민은 눈을 감는다.

나이가 들어서 호치민은 '호 아저씨'라고 불렸다고 한다. 노인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그 자신도 누구보다 베트남을 사랑했던, 온화한 미소의 호치민을 발견해본다.

"평화가 회복되면 농업세를 1년 간 면제하여 베트남 인민이 전쟁 동안 겪은 곤경에 보답하고, 피로 얼룩진 기나긴 전쟁 동안 인민이 보여준 노력과 희생에 당이 직접 감사해주기를 바란다..." - 윤성화(2003-03-26)

     

     

저자및 역자 소개

저자 | 윌리엄 J. 듀이커
윌리엄 J. 듀이커 : 베트남 현대사와 호치민의 생애를 깊이 있게 연구해온 예외적인 역사학자이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해외 파견 장교로 사이공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호치민이란 신비로운 인물에 매혹되었다. 그 후 거의 30년 동안 베트남과 중국, 러시아, 미국에 있는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수많은 관련자들을 인터뷰 한 끝에 호치민에 관한 엄청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였다.

<호치민 평전>은 이 기나긴 조사, 연구의 총체적 성과물이다. 1997년 펠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역사학과 교수직에서 퇴임하였다.

저서로 <성스러운 전쟁 Sacred War : Nationalism and Revolution In A Divided Vietnam>, <베트남 Vietnam : Nation in Revolution>, <베트남에서의 승리 Victory in Vietnam : The Official History of the People's Army of Vietnam>등 베트남 관련 연구서 10여 권이 있다.

역자 정영목 - 서울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신의 가면: 서양신화>,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눈먼 자들의 도시>, <서재 결혼시키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여행의 기술>, <불안>, <동물원에 가기>, <사자의 꿀>, <눈뜬 자들의 도시>,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석류나무 그늘 아래>, <책도둑> 등이 있다.

목차

서문
머리말
조직 일람표

1장 빼앗긴 땅에서 (1890 ~ 1911)
2장 성난 말 (1911 ~ 1923)
3장 견습 혁명가 (1923 ~ 1924)
4장 용의 아들 (1924 ~ 1927)
5장 마법의 검 (1927 ~ 1930)
6장 붉은 응에 틴 (1930 ~ 1931)
7장 광야로 (1931 ~ 1938)
8장 곽보의 동굴 (1938 ~ 1941)
9장 불어오른 강물 (1941 ~ 1945)
10장 격동의 8월 (1945)
11장 재건과 저항 (1945 ~ 1946)
12장 호랑이와 코끼리 (1945 ~ 1950)
13장 디엔 비엔 푸 (1951 ~ 1954)
14장 두 전쟁 사이 (1954 ~ 1957)
15장 모두 전선으로 (1959 ~ 1969)

에필로그 - 신화에서 인간으로
역자후기
호치민 연보
주석
찾아보기

▶ 사진은 베트남전쟁 미국개입으로 인한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한 스님의 등신불이다.

     

베트남 전쟁 -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군 폭격기의 무차별 아이팜 탄 투척후 불에 그을려 화상을 입은 아이들이 미군 카메라맨들이 무서워 도망가고 있다. 벌거벋은 채 뛰고 있는 여자아이는 현재 미국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미군의 총구가 북베트남 늙은 여인의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

     

미군이 북베트남인을 사살한뒤 허리가 잘린 시신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어린아이다.

     

미군들이 북베트님인을 사살한뒤 시신을 장갑차 뒤에 메달아 끌고가고 있다.

     

즉결 처형...재판없이 위협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남 베트남 형사가 권총으로 머리 관자놀을 향해 쏘고 있다. 그는 그자리에서 즉시 사망하여다. 이 사진은 당시 필름 영상으로 찍혔던 것이다.

     

워싱턴 DC 에서 베트남 전에 반대하며 시위하는 도중 군인이 총에 단검을 하고 위협을 가하고 있을때 이들은 그 총뿌리에 꽃을 달아 주는 평화의 시위를 했다. 1967년이다.

     

호치민 평전 (Ho Chi Minh) 2001년판

길 위에 나서봐야 위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산을 오르고 나면 또 다른 산이 보인다. 그러나, 애써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에야 만 리 먼곳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호치민 평전 / 챨스 펜 / 김기태 / 자인 / 2001

외세에서 해방된 통일 베트남의 건설에 일생을 바친 호치민 주석의 전기를 다룬 책. 베트남 최대도시 사이공의 새 이름 "호치민 시", 현재 건설중인 1700킬로미터에 달하는 남북관통국도인 "호치민 국도"에 이르기까지 서거한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베트남을 움직이는 정신적인 힘으로 건재하는 호치민. 이 책은 그런 호치민 주석의 어린시절부터 그의 정치사상, 활동, 고난, 그리고 국제 공산주의 활동과 대미 관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베트남전쟁까지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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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나타나 있는 호치민의 실상은 상상속의 흐릿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고 때론 다른 사람의 기억속에서만 존재하는 변형된 실루엣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나머지는 문헌 기록과 저자 자신이 직접 본, 55세의 호치민일 뿐이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의 잔혹한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인도와 버마를 점령한 후 점점 식민지를 넓혀오는 영국에 맞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지배하길 원했던 프랑스는 서둘러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정확한 지명도 생략한 채 인도와 차이나의 중간에 있다는 이유로 <인도차이나>로 명명된 것.

저자는 1944년,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정보국, 미 중앙정보국 CIA의 전신)의 요원으로 인도차이나 관련임무를 맡기 위해 중국의 쿤밍(昆明)에 파견되었다. 그는 자유프랑스계 민간인 공작원과 함께 첩보활동을 하고 있던 한 독립그룹(GBT)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침 미합중국 제14공군 책임자인 체놀트 장군을 만나 미국의 지원을 받으려 노심초사하던 호치민과 접촉하면서 절친한 인연을 만들었다. 운명의 장난인가? 호치민은 미국의 OSS 요원으로 등록되었다.

호치민은 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조국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외세와 싸웠으므로 언제나 본명으로는 활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 많은 가명을 만들어 썼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활동과 혁명적 과업을 시도하거나 완수하여 베트남 독립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호치민이 출생할 당시의 베트남은 북부의 《통킨》, 중부 연안지대의 《안남(安南)》, 동남부의 《코친차이나》로 분리 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민족의 분열을 원했으므로 이렇게 분리하여 통치하면 효율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베트남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어를 강요했다. 하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프랑스 식민통치를 철저히 배운 다음 그것을 더욱 잔혹한 억압통치로 발전시켰으니 프랑스는 일본의 롤 모델과 같았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국토를 재건하기도 바빴다. 세계 여러 곳의 식민지에선 반란이나 내란이 일어났고 본국은 진압병력을 적시에 보내줄 수 없었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인도차이나엔 더더욱... 할 수 없이 프랑스는 장개석의 중국군과 영국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위난(雲南) 군벌인 루한(盧漢)장군의 출병은 부패에 물들은 이리떼와 같이 약탈과 강탈로 북베트남 민중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모든 귀중 물자를 수탈했으며 북베트남을 혼란으로 몰아갔다.

영국군은 남베트남에 상륙하자마자 이 내란의 소용돌이에 대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무장 해제된 일본군 사령관 테라우치(寺內)장군에게 재무장을 요구했고 베트민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더글라스 그레이시 영국 점령군 사령관은 르클레르크 프랑스 원정부대 사령관이 올 때 까지 일본군을 이용한 효율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2차 대전의 굴욕과 상처는 대국 프랑스의 자존심을 멍들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승전국이 되었고 다시금 인도차이나에 진출했다.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호치민을 분노케했다. 완전한 통일 베트남을 이룩하고자 했던 호치민에게 프랑스는 좀비같은 대상이었다.

프랑스에게 있어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의 균형추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동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서 엄청난 자원과 곡창지대, 아름다운 자연은 군침을 흘릴만 했다. 프랑스로선 어느 지역보다 베트남이 중요한 식민지였다. 어떻게든 베트남을 손에 넣었어야 했다. 집요하게 베트남을 지배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드골대통령은 북베트남에 정규군을 파병했다. 그들의 군대는 라오스와의 접경지대인 디엔비엔푸에서 보 응엔 지압 장군이 이끄는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민(VM, 베트남 독립동맹)에 의해 전멸되다시피 한다. 그들은 공정부대의 투입에서부터 철저하게 격멸당했다.

1890년 5월 19일 호치민은 북부 안남의 낌리엔에서 출생했다. 어릴적 이름은 응엔 신 꿍, 후에 정식이름은 응엔 떳 타인(阮必勝), 누나인 타인과 구별하기 위해 계속 ‘꿍’으로 불렸다. 이후 바(Ba), 응엔 아이 꾸옥, 브엉, 타우친, 똥반서, 쩐, 호찌민(胡志明)으로 이름을 계속 바꾸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활동을 전개했다.

호치민은 잔악한 식민통치를 일삼던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한편으론 폭압에 신음하던 하층 민중들을 위한 사회개혁과, 정치부패, 민중분열을 우려했다. 그에게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의 분류는 무의미했다. 조국 베트남을 위한 일이라면 공산주의자도 좋았고 때론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로 불리워도 관계치 않았다. 심지어 자유주의자라고 불려도 상관하지 않았다. 당시엔 모든 자유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갖고 있던 제국들이었으므로 당연히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로 기울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해산하고 정식으로 베트남 노동당을 창당하면서 죽는 그 순간까지 (1969.7.20) 그는 적지 않은 시간을 중국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보다 몇 배 더 긴 시간동안 프랑스와의 전쟁과 남베트남과의 살육전, 그리고 네이팜탄을 퍼붓는 미국과의 전쟁을 견뎌내야 되었다. 그에게 있어선 외세를 배제한 완전한 자주국가인 통일베트남만이 자신의 모든 희망이었다.

그에게 있어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활동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에게 올바른 가치와 정의는 오로지 베트남 민족의 해방이었고 독립적인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 있어 호치민은 확고한 정신과 가치를 베트남 민중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바로 이념에 유린당하지 않는, 오직 베트남 민중들의 행복과 건강한 삶을 추구했던 것이다. 자국 국민들을 편안하게 지켜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념이라도 받아들였으며 맞서기 어려운 초강대국이라도 끝끝내는 이겨내었다. 그만큼 그는 처절했으며 위대한 리더였다.

이 평전은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고, 특히 학창시절과 프랑스에서의 공산주의 활동, 중국 광둥과 광시에서 활약했던 북베트남 수복활동에 대해선 상세한 기록이 부족하다. 아무리 평전이 저술자의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러한 기록 부실은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베트남, 2차대전 이후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된 우리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곧이은 내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미국의 공세도 막아내고 결국 통일을 이룬 나라

이렇게 우리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고 끝내 승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지만 미국의 요구에 의해 전쟁에 참가에 패배를 한 과거가 있어서일까? 제도권 교육만으로는 거의 접할 기회가 없었던 나라의 혁명에 대해 언제 한번 찾아봐야지 하다 이번에야 호치민 평전을 찾아봤다.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호치민 관련 서적은 청소년용 1종과 사진집 1종, 2003년에 나온 평전과 바로 이 책 이렇게 4종 밖에 없었다. 그 중에 2003년에 나온 평전은 무려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가방에 넣고 오가며 읽기에는 버거울 것 같아 이 책으로 선택했는데 아무래도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우선 번역에 대한 아쉬움, 집중력이 부족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 번역서적을 읽으면서 문장이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외국어로 된 책을 그 언어학자가 아닌 책의 주제와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가 번역했을 때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아마 이 책도 그런 것 같다. 저자는 찰스 펜이라는 전직 미국 OSS요원에 베트남이 미국과의 전쟁 이전 호치민과 직접 접촉하였던 사람인데 번역한 사람은 베트남어과 교수이다. 굳이 원서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저자가 베트남어로 쓰지는 않았을 확률이 높은데 왜 베트남어를 전공한 사람이 번역을 했을까? 어차피 책 분량도 적고 그래서 깊이도 얇은데 베트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영어를 전공한 사람이 번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분량이 적다보니 호치민이 그 당시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공감이 이뤄지지 않고 단순히 살아온 과정, 사건을 객관적으로 접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라 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한 인물 그것도 한 국가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의 80생애를 다루기에는 작은 책의 300페이지 분량으로는 너무 부족했을 것이다.  

이런 아쉬움들이 남지만 베트남혁명사에 대해, 호치민에 대해 예습을 한 번 했다 여기고 2003년에 나온 두꺼운 평전에 도전해봐야겠다. 그런데 왜 호치민 평전은 영어로 씌여진 책만 번역되었을까? 베트남의 독립,혁명,건국영웅이니 당연히 베트남어로 쓰여진 평전도 있을텐데 베트남어나 베트남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에게 심각한 편향이 있는걸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호치민 작전', '호치민 국도', '호치민 정치학원',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스며든 '호치민'의 거대한 영향력은 1969년 그가 서거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호치민 주석의 무덤에는 수많은 베트남인들과 외국인들의 참배가 끊이질 않고, 오늘날 베트남을 움직이는 정신적인 힘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호치민 사상'이다. 베트남 국민의 마음은 물론 베트남 전체를 움직이는 힘, 호치민을 역사속에 영원히 살아있게 만든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책은 어린 시절부터 서거하기까지 호치민 주석의 정치사상, 공산주의 활동과 대미 관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 찰스 펜은 미 정보국 전신인 OSS에 근무하면서 호치민 주석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졌기 때문에 호치민 주석에 대한 어느 책보다도 정확하고 생생한 기록을 전한다. '호치민'이라는 한 인간의 일대기와 더불어 고난에 찬 베트남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 소개

찰스 펜(Charles Fenn) : 아일랜드 태생의 미국인으로 반파시즘 활동을 한 방편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미국의 첩보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극작가 등 문예활동에 전념하였다.

김기태 : 1937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또한 베트남 사이공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수학하고, 같은 학교 사범대학 어학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관계학과와 베트남어과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동남아연구소 소장을 맡기도 했다. 2007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명예교수로 있다.

     

이 책은 호치민에 대한 간략한 전기라고 할 수 있다. 호치민의 성장기에는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그와 관계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베트남의 식민지 상황과 프랑스의 압체가 호치민을 어떠한 소년으로 만들었는가가 나와 있다.

그의 젊은 시절 프랑스행에서는 그곳에서 베트남 민족주의 단체, 노동조합 활동, 공산주의 단체 활동을 담고 있으며, 프랑스라는 식민지 본국의 문화와 삶이 어떠한 그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드는가도 간략하게 나와 있다.

그는 프랑스로 갈 때 그 배의 조리사로 가게 되는데 - 여기서 조리사가 지금의 요리사와 같은 수준이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3D 업종이다. - 이러한 경험은 영국의 호텔요리사, 미국행 등 그가 국제적인 경험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가 소비에트 연방을 오가며 제1,2인터내셔널 활동을 하고, 중국에서 베트남 출신 젊은이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교육하는가가 나와 있다. 그는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중국의 남부지방에서 미국에서 파견된 OSS 대원들과 만나 격추된 미군기 조종사들을 찾는데 도움을 주면서 함께 일하기도 한다. 당시 미국쪽 책임자와 만나 그의 사진을 얻어 싸인을 받고 함께 작전을 펼치게 된다. 그는 이 때 권총 몇 자루를 얻게 되는데 당시 베트남 독립운동의 여러 분파가 모여 독립운동 조직을 만드는 안건을 토의할 때 그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인물임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세력들을 통합하고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는 호치민이 얼마나 재치있고 꾀가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런 것을 스포일러라 하는감,...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망치기선수,..ㅠ.ㅠ)

아마도 이런 일화가 등장하는 것은 글쓴이가 당시 OSS 대원으로서 직접 호치민과 공작을 벌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고 자기가 직접 함께 한 일이라서 확실한 근거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 뒤 그가 조국을 떠난지 45년 만에 처음 베트남으로 들어가서 북부 정글에서 혁명 본부를 설치하는 모습과 활동이 자세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베트남 해방사에서 중요한 디엔비엔푸 전투나 베트남 남부의 통일전선 결성, 구정 대공세 등은 거의 설명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다른 책들을 참고해야할 것이다. 그보다는 프랑스 해방전쟁 당시에는 그가 조직의 지도자로서 프랑스와 협상을 하는 모습, 미국과 전쟁을 할 때에는 그가 미국에 요청한 평화 협상을 위주로 그의 죽음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위의 이미지는 그냥 올렸다. 아무런 의미없다.
ⓒ 어리버리 돈키호테

이 책은 그의 성장과정,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 공산주의자로서의 면모, 외교가로서의 활동과 평화를 추구한 모습 등을 간략하게 서술한 책이다. 따라서 프랑스로부터 어떻게 베트남이 해방을 쟁취하는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조직을 지도하였는가는 다른 책을 읽어야 풀릴 일이다.

이 책의 장점은 위에 적은 바와 같다. 이 책을 적은 이가 미국인이라서 미국적인 시각이 일부 가미되어 있음은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을 지키려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미국이 저지른 만행, 미국의 패권주의적 의도 등은 역시 호치민의 일생을 중심으로 하다보니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은

① 한 인간으로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사이를 걸어간 호치민의 일생을 보여주기
② 베트남이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와 투쟁한 근대사 보기,
③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관심을 가지면서도 마음에 빚을 지고 있는 월남전쟁
이 세 가지 가운데
①번 '호치민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호치민 평전의 또 다른...

     

     

     

     

     

     

호치민 Hồ Chí Minh - 한대수 (고민 Source Of Troble 2002)

한대수 9집 고민 (Universal Music 2002)

한대수 韓大洙 / Hahn, Dae-Soo 1948-

No.2 - 호치민 (작사, 곡:한대수) 4:38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학자의 집안이고 불란서 점령 당시에
왜 서양세력이자기 나라를 이렇게 장기간 동안 점령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또 워낙 문학가 집안이니까
여러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하게 되죠.

호치민 호치민 호치민

그래서 적을,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라라는
요런 명언이 있으니까 불어를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요)
그런데 불란서를 가야 되겠는데 유람선의
요리사 조수로 취직하게 됩니다.
불란서에서 불란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또 거기에서 맑시즘을 배웠고
드디어 어떠한 계기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아 그래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대학교에 입학해서 과연,
제국주의, 자본주의 요런데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다가 러시아의 힘을 얻고 중국에 또 이사를 갑니다
여러가지 민중의 고통, 민중의 핍박,
또 프롤레타리아 거기에 대해서 배우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옵니다
 
미국이 이젠 등장하는데 그 부패된 고딘디엠 정부를
지원하면서(반)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아주 지속된 전쟁의 끝없는 폭격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로 당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겨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호치민 호치민 호치민

you are a nguyen ai quoc(구엔아이콱), you are a phan chu trinn(판추치린)
you are a nguyen sinn cung(구엔싱쿵), you are a nguyen tat tranh(궨타탕)
you''re not a chung ryang lee(청량리), you''re not a chang kai shek(장개석)
you''re not a jung tae choon(정태춘), you''re not a zhou en lai(주은래)
you are a van tien dung(반티엔둥), you are a hoang quang binn(황광빈)
you''re not a sun yat sun(손문), you''re not a park jung hee(박정희)
you''re not a shin bal dae(신발대), you''re not a pal dae gi(팔대기)
you are a nguyen ai quoc(구엔아이콱), you are a phan chu trinn(판추치린)

     

Ho Chi Minh Nov. 22, 1954

Ho Chi Minh July 16, 1965

     

Ho Chi Minh Sep. 12, 1969

Ho Chi Minh May 12, 1975

     

Credits

마스터링 엔지니어 :  이태경
믹싱 엔지니어 :  김동인
기획사 :  風流
마스터링 스튜디오 :  서울 사운드
믹싱 :  Core Recording Studio

producer 한대수, 하종욱
executive producer 하종욱
product coordinator 신원규
recording engineer 김동인, 홍민웅, 박윤정(O2 music studio, 2001, 11, 9-15)
mixing engineer 김동인(core studio, 2001, 11, 19-20)
mastering engineer 이태경(seoul sound, 2002, 9, 15)
photography 박준(front & back cover), 박영재, dvd 2.0
designer by 김민

all words & music by 한대수
한대수(vocal, guitar, harmonica, chorus, narration, 줄), 김도균(guitar), 이우창(piano, keyboard), 김인건(guiar), 배찬우(bass), 박동식(drums), 오영진, 신원규(chorus), 최경림, 박윤정(narration), 조아름, 홍이순(violin), 양현진(viola), 유은경(cello)

Introduction

한대수 9th <고민, Source of Trouble)

평화와 사랑이라는 말이 공허해진 시대에 그것을 공허하지 않게 말할 줄 아는 예술가 -조한혜정(교수)
한대수-지구 밖으로 걸어가는 사나이, 내려온 음유시인-한국의 딜란 토머스 -양화선(조각가)
귀족의 육체와 평민의 영혼을 가진 주살사의 문명 비판 -김규항(문화평론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자유를 향한 고독한 걸음 -이정선(싱어송라이터)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 -손무현(싱어송라이터)
좋다. 다른 말은 구차할 것 같다. -남규홍(SBS PD)
그의 노래는 삶의 회화. 그의 삶은 사랑의 노래. -김정태(KBS PD)
한대수는 소박한 소리 밥상을 차릴 줄 아는 사람이다. -홍신자(무용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정직하게 살아가는 한 유목민의 삽화. -박준흠(대중음악 평론가)

-한대수 사진시집 <침묵> 中-

한대수는 이토록 다양한 정의가 가능한 아티스트다. 그는 길지 않은 삶에서 만났던, 내가 격은 유일한 천재이자 광인이었다. 한대수와의 앨범 작업은 수십 번씩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아득함의 연속이었다. 레코딩은 2001년 11월 9일, 10일, 13일, 14일 15일. 5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닷새라고 하지만 녹음 시간은 오후 7시부터 12시까지였으니 하루에 2 프로도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중 이틀은 세션들만이 연주한 날이었다.

한대수는 순간의 느낌, 최초의 감정을 숭배하는 아티스트였다. 그는 마이크에서 두 번 노래하지 않았다. 가사가 조금 틀려도, 리듬이 조금 엇나가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호합니다"라는 자신만의 긍정으로 일관했다. 레코딩 첫날 한대수가 스튜디오에 들어 왔을 때 너무나 당황했다. 그의 손에는 악보도 없었다. 공책에서 찢어낸 낱장의 종이에는 어떤 곡은 가사만 있었다. 그 위에 코드라도 그려져 있으면 다행이었다. 심지어 어떤 메모에는 제목만 덜렁 적혀 있고, 현장에서 가사를 써 내려가기도 했다.

"준비가 안 되셨으면 다음에 다시 하시죠?", "한번 더 부르시면 좋은 느낌이 나지 않을까요?" 그는 주변의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했다. 스스로의 음악에 불성실하지 않은가? 무책임하지 않은가? 라는 의심과 아쉬움을 표현했지만,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앨범을 이런 식으로 레코딩했다"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공동 프로듀서로 임명한 나에게 의견을 묻고, 그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넓게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여 자신의 고집에 이견을 거듭하기라도 하면 공동 프로듀서이자 제작자인 사람 조차 스튜디오에서 쫓아내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한대수는 대단한 집중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집중력은 스튜디오 안의 모든 공기를 지배했다. 그는 스튜디오로 오는 먼 길을 산책하며 자신의 머리에, 가슴에 입력했던 노랫말을, 리듬을, 멜로디를 정리했다. 그것은 머리 속에 있던 감정의 조각들을 레코딩하는 가장 가까운 시점으로 옮겨가기 위한 그의 의식이자 창작 습관이기도 했다. 그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극대화된 감정을 끄집어냈다.

세션들의 불만도 많았다. 모니터링을 한 후 "다시 한번 해 볼께요"라며 악기를 들고 스튜디오로 향하지만, 비록 당사자가 흡족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만족스러웠다면 "다시 해도 더 좋은 음악은 없다"라고 손을 잡아 끌었다. 그는 딱딱거리는 소리가 싫다고 메트로놈도 못 틀게 했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강간'이라고도 표현했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세션들만의 이틀간의 레코딩은 한대수 몰래 틀린 리듬과 멜로디를 수정한 시간이었다.

"리듬이 딱딱 맞고 멜로디가 매끈하게 표현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깃든 사람의 감정이죠. 느낌이죠. 그 순간의 느낌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시 찾으려 해도 증발되고 없어요. 나는 정확하지만 느낌이 없는 연주 보다는 비록 틀렸더라도 느낌이 살아있는 연주가 좋습니다"
그는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한대수 9번째 앨범 <고민, Source of Trouble)은 모두가 이렇게 기록되었다.

'마리화나'는 2001년 5월 뉴욕에서 어느 젊은 여인의 '의약용 마리화나 합법 1인 시위'를 하는 광경을 보고, 그녀와의 인터뷰를 한 후 지었던 동명의 자작시(한대수 사진 시집 <침묵> P.216)에 리듬과 멜로디를 입힌 작곡이다. 이 노래는 2001년 10월 25일에 있었던 <The Last Solo Concert>에서 전인권, 강산에와 함께 노래했던 바 있다. 여기에서 한대수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마리화나의 찬미'가 아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금기를 명령하는 사회, 그리고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대중들의 굳은 의식, 닫힌 관념을 건드리고 있다. 그가 뜻하는 것은 사물에 대해, 현상에 대해 의심하고 토론하고 열린 대화를 하자는 '담론(談論)'의 형성이다. 더불어 Ganja-Manja, Weeds-Seeds, Spliff-Cliff, Reefer-Differ, Marijuana-You Wanna, 1930(Ninetten Thirty)-Dr. Leary, Devil-Devil, Cancer-Horse, Doobies-Movies, So Hard-Avant Garde와 같은 각운(Rhyme)의 표현에 주력하면서, 마리화나의 역사, 마리화나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3집 <무한대> 이후 한대수의 음악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록적인 요소가 강하게 주입되어 있는 곡으로, 1960년대 히피 문화를 주도했던 포크와 록의 절충을 기하고 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혁명가, 정치가, 구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호치민'의 삶을 한대수식의 랩, 나레이션으로 기술하고 있는, 파격적인 스타일의 작품이다. 애초 한대수가 랩을 하겠노라고 했을 때, 모두들 농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한대수는 <The Last Solo Concert> 공연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기타리스트 김인건과 김도균 그룹의 배찬우, 박동식에게 하나의 코드(Dm)만을 일러 준 채, 가이드 연주로 사용될 데쓰 메탈 풍의 맹렬한 기타 솔로와 록 리듬을 주문했다. 그 위에 한대수의 실로 신선한 나레이션과 당시 스튜디오에 있던 유일한 여성이었던 O2 뮤직 스튜디오의 레코딩 엔지니어 박윤정에게 "아 그래요"라는 대사를 맡겼다. 그의 설정은 할아버지가 꼬마 손녀에게 호치민의 삶에 대해 설명하는 대화 형식이었다. 그리고, 한대수의 의도를 정확하게 헤아린 김인건의 기타 솔로가 베트남전의 전운과 폭격에 대한 밑그림으로 다시 레코딩되었다. 록의 고향 영국에서 록과 블루스를 유학하고 귀국한 기타리스트 김인건은 데스 메탈 그룹 '메가 데쓰(Mega Death)'를 연상케 하는 과열된 기타 리프와 열정적인 솔로 프레이즈를 쏟아내며, 한대수가 시도하는 새로운 하드 록 스타일에 융단 폭격을 가하고 있다. 곡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는 '구엔아이콱', '판추치린', '구엔싱쿵', '구엔타트랑', '반티엔둥', '화왕빈', '트란바람', '판반동'은 호치민이 베트남 반공 정권의 감시를 피하며 가명의 나열이다. 그밖에 청량리, 팔때기, 신발대 등은 그냥 어감이 좋아 사용한 의미없는 명사이다.

'As Forever'는 마리화나와 마찬가지로 <The Last Solo Concert> 공연에서 처음 공개된 바 있는 곡이다. 베이스 기타의 배찬우, 드럼의 박동식은 김도균 그룹의 멤버이며, 네 명의 스트링 세션 역시 <The Last Solo Concert>에서 함께 했던 이들이다. 스트링 편곡은 뉴욕에서 재즈 피아노와 빅 밴드 작, 편곡을 전공했던 이우창이 담당했으며, 미성의 코러스는 한대수의 음악 팬이자 소프트 록 그룹 '스위티(Sweetie)'의 보컬리스트 오영진이 담당했다. 클래시컬한 스트링 편곡과 사랑과 이별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애조 띈 멜로디가 우아하게 묘사되는 발라드이다. 한대수의 음악에서 많지 않은 사랑 타령이지만, 그는 사랑의 희열과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지만, 궁극적인 주제는 삶의 영원성, 사랑의 영원함에 대한 부정이다.

'질주'는 <삼총사> 앨범의 3명의 주체 한대수-김도균-이우창이 한데 모인 트랙이다. 여기에서 한대수는 작곡과 리듬 기타를, 김도균은 전체 곡의 진행을 이끌어 가는 멜로디 기타를, 이우창의 피아노, 키보드 연주는 곡의 분위기를 살리는 장치, 효과로서 자리한다. 레코딩에 들어가기 전 한대수는 자신이 설정한 작곡의 배경을 영화적인, 회화적인 설명으로 대신했다. 그의 묘사를 옮기면 "애인과 이별을 했어. 그 씁쓸한 느낌을 안고 고속도를 달리는데 비가 온다 이거지. 차창 밖으로는 빗물이 번지고, 그 빗물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번지고...그 속을 혼자 마구 달리는거야. 쓰라린 상처를 안고 말이지" 한대수는 자신의 공감각적인 표현을 몇 개의 코드로 설정하고, 김도균과 이우창의 음악적 능력에 맡겼다. 한대수의 모호한 주문은 현실로 살아났다. 첫 번, 두 번째 테이크를 그냥 보낸 후 세 번째에 절로 한대수가 이야기했던 그림은 스피커 밖으로 흘러 나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대수-김도균-이우창 세 사람의 내적인 대화, 커뮤니케이션이 일구어낸, 신비스러운 느낌의 기악 협연이다.

'여름 노래'는 '동요와 같은 곡이다. 애초 포크 가수이자 동요 가수인 이성원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던 곡으로, 단순한 코드 진행에 친근한 리듬,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3. 3조의 운율을 지키며, '아가씨 눈웃음 꽃잎은 분홍색, 나뭇잎 햇살은 내 맘을 비추네' 같은 예쁜 시어의 선택에 주안점을 둔 서정시이다. 한대수의 1집 <멀고 먼 길>, 2집 <고무신>에 내비쳤던 포크 음악에 대한 향수를 유발하는, 따스하고 목가적인 감성의 노래이다. 곡이 너무 예뻐, 곡 길이를 조금만 늘리면 어떨까 ? 한 코러스만 더 해도 좋을 것 같다라고 의견을 말했지만, 한 대수는 2분 길이에 어울리는 곡이다라는 사족을 거부했다. 훗날 완성된 곡을 들으며 그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겨울 노래'는 '여름 노래'와 짝을 이뤄, 작사-작곡한, 어른들을 위한 동요이다. 러시아 남성 합창단의 음악을 염두에 둔 배킹 코러스(Backing Chorus)는 한대수 자신과 제작에 함께 참여한 공연 기획자 신원규가 담당했다. 겨울의 황량함을 이야기하지만, 주제는 소박하고 소시민적인 희망이다. "둘이 같이 가봅시다. 파랑새 노래하는 초가집 마을로"와 같은 노랫말은 1집 <멀고 먼 길>의 '하룻밤', '행복의 나라로', <고무신>의 '오면 오고', '오늘 오후', <무한대>의 '또 가야지'와 같은 맥락에서, '희망', '작은 꿈'을 '자연'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는 여전히 '희망'을 노래한다.

'오늘 가면'은 '여름 노래', '겨울 노래'와 마찬가지로 한대수의 음악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포크 음악에 대한 회귀이다. 한대수의 청년 시절 음악적으로 많은 감화를 주었던 밥 딜런의 음악적 영향이 담겨 있는 곡으로, 한대수의 기타와 하모니카는 그가 처음 음악을 했던 시절로의 회귀, 향수를 자극한다. 1집 <멀고 먼 길>의 '잘 가세'의 "내일 가고 오늘 오면 다시 찾으리", 2집 '오면 오고'에서의 "오면 오고 가면 가고 내 마음 난 몰라"에서의 노랫말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30여년의 음악 생활에 대한 반추, 어제와 오늘의 대화를 의미하고 있다. 한 대수의 음악에서 자연과 시간(어제, 오늘, 내일)은 영원한 음악적 소재이자 주제이다.

'상사병'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 갈증을 연주곡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기이한 작곡이다. 김인건의 몽환적이고 신비적인 기타 사운드는 일렉트릭 기타를 신디사이저에 걸어 다중적인 이미지로 피어 오른다. 그동안의 앨범 작업에서 톱, Kazoo, 물, 종, 타자기, 컵소리, 담배 뿜는 소리, 종소리 등 특이한 악기, 일상속의 소음을 응용했던 한대수는 얇은 양철 판에 묶인 줄을 긁는 악기로 사운드의 실험을 한다. 이 양철 줄 악기의 긁는 소리는 사랑에 사랑에 대한 갈증, 그리움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로 형상화 되었다.

'천사들의 잡담 1'과 '천사들의 잡담 2'는 1991년에 발표된 한대수의 5번째 앨범 <천사들의 담화>의 미발표 트랙이다. 우연히 이우창의 집에서 <천사들의 담화>의 미발표 음원을 듣고, 한대수라는 천재와 광인이 어떻게 창작을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다큐멘터리이자, 인터뷰라고 생각되어 한대수와 이우창의 동의를 얻어 수록하게 되었다. '천사들의 잡담'이라는 제명은 연습의 과정, 곡의 느낌을 교환하는 과정을 옮긴 것이라는 점에서, '담화'가 아닌 '잡담'이 정확하다는 한대수의 의견에 따랐다.

'천사들의 잡담 1'은 한대수가 들국화의 기타리스트였던 조덕환(그의 연주는 <천사들의 담화>에 수록되지 않았다)과 이우창에게 자신의 작곡을 설명하면서 코드를 일러 주고, 새로운 곡의 느낌에 대한 소감을 탄성으로 말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짐작대로 한대수와 이우창은 몹시 취해 있는 상태이며, 녹음 장소는 <천사들의 담화> 앨범의 스튜디오였던 한대수의 아파트 응접실이다.

'천사들의 잡담 2'는 즉흥 작곡, 즉흥 연주로 진행되는 재즈, 블루스 스타일의 곡이다. 전주에 등장하는 음향은 한대수가 달구어진 후라이팬에 계란 요리를 하는 소리이며, 팝콘 튀는 소리 같은 소음(사운드)은 양쪽에 달린 줄을 흔들어 치는 장난감 북이며, 문에 매달려 있는 벨도 소품으로 사용되었다. 1991년 <천사들의 담화>를 레코딩 당시, 거리에서 산 중고 업 라이트 피아노(피아노의 구입가격 보다 운반비가 훨씬 많이 들었다고 한다)에 앉은 이우창은 자신의 천직인 재즈 피아니스트로 블루스 즉흥 연주를 하고 있고, 한대수는 주술사처럼 음향 효과와 구음을 쏟아낸다. DAT 테이프에 담긴 그들의 잡담은 영매에 가깝다.

우리 집 사람이 말했다. 그녀는 한대수를 잘 알지 못한다. 어느 날 한대수의 자서전을 읽고, 사진 시집을 읽고, 내 CD장에 있는 한대수 앨범을 다 듣고서는 말했다. "한대수의 음악, 시를 읽으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가 모순 투성이인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감내해야만 했던 불운과 불행, 아픔과 절망을 느꼈다. 그래서 더더욱 그가 노래하는 사랑과 희망이 가슴 시렸다"고 말이다.

한대수의 음악은 철저한 자기 고백이다. 그의 음악에는 관념적인 이상, 내 것이 아닌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음악에는 자신이 걸어왔던 삶의 모든 조각들이 스며있다. 외로움과 그리움, 고통과 기쁨, 체념과 희망, 자신과 이웃, 그의 삶의 빛과 그림자가 시로, 노래로, 일기로 담겨 있다. 그의 음악은 곧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늘려간 <고민, Source Of Trouble>이다.

글 / 하종욱

     

한대수 - 고민 - Source Of Trouble (풍류,2002)

한대수 9집 - 고민 : MARIJUANA / 호치민 (2002)

Universal Music | 2002-11-14

1. Marijuana,  2. 호치민,  3. As Forever,  4. 질주,  5. 여름노래,  6. 겨울노래,  7. 오늘가면,  8. 상사병,  9. 천사들의 잡담 1 (1991, 4, New York),  10. 천사들의 잡담 2 (1991, 4, New York)

근래 들어, 자타가 공인하는 ‘기인’ 한대수의 재조명이 한창 바쁘게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우선 소문만 무성하던 ‘다큐멘터리 한대수’가 공개됐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의 외계인스런 면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인간 한대수’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한대수 본인의 사진 시집 ‘침묵’도 발간되었다. 아마도 한대수의 캐릭터 때문인지 시건 사진이건 범상치 않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듯 하다. (시집을 못 본 분들이라면 지금 소개하는 9집의 첫 트랙을 통해 대강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집과 다큐멘터리 상영에 맞춰 미디어도 언제 외면했냐는 듯이 한대수를 앞다퉈 다루고 있는 모양이다. 8집 [Eternal Sorrow]가 제작자를 찾지 못해 어렵게 발매됐던 일을 떠올린다면, 참 세상이 약아 빠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됐건 한대수가 받는 스포트라이트가 늦은 감은 있으나 반가운 일이로되, 다만 그 속에 음악인으로서의 한대수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던 차에 마침 한대수의 9집 음반 [고민]이 발매되었다. 아마 한대수의 예전 음반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얼굴을 위악적으로 일그러뜨린 커버 사진을 떠올릴 것이다. 이번엔? 갈치 한 마리를 꼭 쥐고 굳은 표정으로 커버 사진을 찍었다.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갈치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질지도… 아니면 말고.

첫 곡 <Marijuana>의 가사는 한대수의 추종자라면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날 것이다. 분명 사진 시집 ‘침묵’의 말미에 동명의 시가 있었다. 뉴욕의 ‘의약용 마약 합법 1인 시위’를 하는 한 여성과 인터뷰하며 착상한 이 노랫말은 결코 마리화나 찬가가 아니다. 이런저런 마약에 대한 견해를 가치 중립적으로, 한대수식 라임에 맞춰 풀어 나간다. 특히 훵키한 배경음 위로 주절거리듯 내뱉는 한대수의 탁성이 이채롭다. 이어지는 곡 <호치민> 역시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호치민이 누군가, 막말로 ‘빨갱이’ 아닌가. (세계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해 싸웠다고 박박 우기는 월남전 참전 전우회가 들으면 몸에 총질할 이름 아닌가.) 이 곡은 아예 보컬 파트가 없고, 시종 전설적 베트남 정치인에 대한 구술(랩?)로 이루어져 있다. 격렬한 기타 리프와 로킹한 리듬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아마도 인간 백정 미국으로 인한 베트남전의 상흔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주 1) 그러고 보니 초반 두 곡은 듣는 이에 따라 상당히 논란이 될 만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하긴 한대수가 국내 최초, 최후의 히피임을 고려하면 자유-반전의 상징인 마리화나와 호치민을 다루는 게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김인건- 김도균 밴드와 함께 작업해 밴드 색채가 강한 음반 내에서 <여름 노래>와 <겨울 노래> 연작은 이채로운 순간이다. 두 곡 모두 어쿠스틱 기타가 중심이 되어 포크 가수 이성원과도 같은 목가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것도 ‘동요’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멜로디는 단순하고 노랫말은 예쁘장하며 반주는 간소한 걸 보면 ‘성인용’ 동요라고 우길 수도 있겠다. 이런 ‘단순’하고 ‘어쿠스틱’한 기조는 <오늘 가면>으로 계속 이어진다. 기타 스트러밍과 하모니카가 주도하는 ‘밥 딜런’식 포크인데, 아마도 이 곡을 들으며 한대수의 옛 작업들을 떠올리는 사람도 꽤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음반에서 가장 공을 들였을 <상사병>은 몽환적이고 나른한 무드가 청자의 감상을 이끌어내는, 그러나 실제로는 사운드 실험을 펼친 트랙이다. 앰비언트적인 기타음이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잔향 속에서, 여성의 ‘보고싶어요’라는 대사와 한대수의 철판에 줄 긁는 소리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한대수는 이전에도 톱이나 카주와 같은 악기의 사용을 시도한 바 있다)

음반을 마무리하는 <천사들의 잡담> 연작은 한대수 5집 <천사들의 담화>를 떠올리게 한다. 녹음 연도가 91년인 것으로 보아 당시 발표하지 않은 레코딩인 듯한데, 파트 1은 코드를 불러주는 한대수와 이우창의 대화, 파트 2에는 각종 소음과 재즈 피아노 연주가 뒤섞여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술먹고 떠드는 걸 녹음한 것 뿐인데도 들으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봐서는 안될 기이한 광경을 훔쳐본 느낌이랄까? 아무튼 음반은 불협화음의 기이함 속에서 마무리된다.

한대수와 같은 거장의 음반을 놓고 새삼스럽게 극찬하는 건 속보이는 짓일지 모른다. 무턱대고 ‘노장에 대한 예우’의 덫에 걸려드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으니까. 그래서 본작은 최근 진행중인 ‘한대수 재조명’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싶다. 아마도 다큐멘터리에서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음악인 한대수’가 아쉬웠던 사람이라면, 본 음반에서 조금이나마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포크 1세대의 이단아적 존재에서 록 음악까지 자유로이 오고 가던 음악인으로서의 한대수가 이 음반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 음반에는 흘러간 뮤지션이 아닌 ‘쌩쌩한’ 현역 뮤지션 한대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주 1) 한대수는 베트남전이 막바지이던 1971~74년에 해군으로 군복무를 했다. 당시엔 상당수의 뮤지션들이 월남 위문공연단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그들이 마초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갔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특히 미 8군 무대에 생계를 기대고 있던 뮤지션들이 이런 현상이 심했다.

(주 2) 이 음반은 김도균, 이우창의 음반과 함께 ‘삼총사’란 타이틀의 박스셋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 배성록 | 2002/11/30

     

한대수   韓大洙 / Hahn, Dae-Soo

홈페이지 (Homepage) : http://www.hahndaesoo.co.kr
출생 : 1948년 03월 12일 / 대한민국
데뷰(Debut) : 1974년 (멀고 먼 길)
종교 : 기독교

학력
-부산 경남중학교 졸업
-부산 경남고등학교 수료
-미국 A.G. Berner 고등학교 졸업
-미국 뉴 햄프셔 주립대학교 수의과대학 수료
-미국 뉴 욕 사진전문학교 졸업

프로필
1969년 이화여자 대학교,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부산대학교, 드라마 센터 공연
1970년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에서 디자이너(3급 공무원)로 근무
1971-74년 군복무(해군 149기)
1974년 코리아 헤럴드 신문 기자 겸 사진작가
1977년 뉴욕시 Color Wheel, Chroma Copy의 사진작가 활동, 락 밴드 "Genghis Khan"의 리더로서 클럽 Trude Heller, CBGB's 등에서 공연
1988년 L.A.로 이주. Color House, Burbank 사진관 매니저 활동
1991년 뉴욕으로 이주. Nathaniel Lieberman studio, architectural 활동
1993년 Speed Graphics사 매니저 활동
1997년 Crossbeat Asia의 후원 하에 일본의 락스타 Carmen Maki와 함께 일본 공연 및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유니텔 락 콘서트 "Koreanism" 공연
1999년 양희은의 "아주 특별한 만남" 공연(5.5-9, 영산 아트홀)에서 고정게스트로 공연
2000년 SBS 포크 페스티발(5.27-28, 올림픽 공원 잔디마당)에 양일간 참가


Introduction

Hahn Dae-Soo has long felt that "where you live is not as important as what you are." Born and raised in Korea, this young singer/composer now reflects that his music may have been the spark that ignited the contemporary music movement in his homeland. Hahn, who left Korea in the late '70's for the USA, notes the changing times and tunes in his country. "There's a growing vitality and acceptance of pop and rock music in Korea....and a lot of great musicians are ready to make this movement a reality."
His own songs were, and still are, reality on the changing Korean scene. Hahn's one Day," "Wind And I" and "Last Dream," in concert and on record, have raised the pop music consciousness of college students throughout Korea. "Open up those windows / Let's awaken the world / With your narrow eyes / To the Land of Happiness / We shall march," the lyrics of a Hahn song, has become a campus anthem for young Koreans who are building a new nation.
It's an anthem that could only spring from the talents of this unique singer/composer.... made from the mix of Korean and American cultures and alive with the special harmony of today's Pacific basin beat. Hahn acknowledges this when he refers to himself as a "cultural mixed breed." And his songs still echo with a deep love of his homeland and his desire to "heal the wounds through music."
His songs do exactly that with their regard for the old and their special feeling for the new. Influenced by many of American Pop/Rock musicians, Hahn Dae-Soo can see the changes that are now sweeping the Asiatic/Pacific nations. It's a new wind, a time for new music.... music that he has now brought to the USA with the hope that it will also be heard by the youth everywhere as it is in Korea.

- from http://www.hahndaesoo.co.kr.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