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존스의 목소리는 크다. '타이거 톰'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포효하는 그의 넓고 거칠은 창법은 헤비 메틀계의 데이비드 리 로스와 견줄만하다. 만약 그가 70년대에 음악을 시작했더라면 최고의 메틀 보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교회 성가대화 중학교 합창단 시절 톰의 큰 목소리는 늘 선생님의 지적을 받았다. 전설적인 재즈 트럼펫터 바디 볼든의 연주가 1마일 밖에까지 들렸다지만 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그의 고향 웨일즈에서 런던까지 울려 유리창이 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목소리가 미국시장으로까지 전파된 것인지 톰은 클리프 리처드가 '영국의 엘비스'에 국한된 인기를 얻는 동안 미국에서 세계적인 수퍼스타가 되었다.
사우스 웨일즈의 폰티프리드 태생('40.6.7. 본명: Thomas Jones Woodward) 톰 존스는 걷기 시작하면서 성가대에서 노래할 정도로 조숙했다. 그래서인지 정규 교육을 마친 16세에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철도 들기전에 가장이 된 톰은 생계를 위해 공자상의 막노동에서 외판원까지 다양한 종류의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던 시절에 톰은 가수의 꿈을 키우며 그룹 Tommy Scott And The Senators를 조직하여 63년에는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고, 이듬해에는 고든 밀스를 만나게 되어 성공가로에 들어서게 된다. 고든은 톰의 동향 4년 선배로 보컬 트리오에서 활동하다 작곡가와 매니저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면서 톰이 이끄는 그룹의 공연을 보게된 것. 그는 톰에 이어 잉글버트 험퍼딩크 등을 키워낸 영국 뮤직 비즈니스계의 대부이다.
톰의 매니저가 된 고든은 우선 톰의 이름을 63년 영국 영화의 제목 그대로 톰 존스로 고쳤고, 런던의 유명의 클럽 무대에 서게 해주었다. 그러나 악을 쓰듯 너무 날카로운 톰의 목소리와 세련되지 못한 율동으로 런던에서의 시작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는데, 하지만 곧 대 히트는 시작되었다.
톰의 첫 히트곡은 B.S.차트에도 10위('65.4)를 기록한 'It's Not Unusual'로, 이 곡은 원래 고든이 다른 여가수에게 써주었으나 반응을 얻지 못했는데, 톰이 다시 레코딩하여 히트시킨 것이다. 이후 톰의 히트곡은 계속 쏟아져 'What's New Pussycat?'이 B.S.차트 3위('65.6)까지 오른 것을 비롯, 65년 한해에만 5곡이 히트를 기록했다.
고든은 처음에 톰을 십대 팬들을 겨냥한 스타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톰의 모습이 너무 위압적이며 저돌적이어서 십대들이 두려워 한다는 판단아래 곧 성인 취향으로 전환했다. 톰이 엘비스처럼 으리으리한 턱시도의 정장을 하고 엉덩이를 휘둘러대며 등장하자 사람들은 곱슬 거리는 검은 머리와 호랑이 눈처럼 투기가 서려있는 눈을 보고 '호랑이 같은 톰'(Tiger Tom)이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
이즈음 톰은 내시빌의 작곡가인 컬리 풋맨의 곡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러 영국 차트 3주 정상과 B.S.차트 11위('66.12)를 기록하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톰은 66년부터 71년까지 매해마다 3-5곡을 히트시켰는데, 그중에서 B.S.차트 15위('68.3)곡 'Delilah'.67년 9월에 49위까지 올려 놓았다가 다시 69년 12월에 6위를 기록하는 'I'll Never Fall In Love Again'. 5위('69.12)곡 'Without Love(There Is Nothing)'.14위 ('70.8)곡 'I(Who Have Nothing)'.2위('71.2)곡 'She's A Lady'.41위 ('71.10)곡 'Till'등이 우리에게도 커다란 반응을 불러 모았다.
한편 톰은 리메이크의 명수이기도 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은 톰의 가창력은 발라드는 더욱 진하고 감동적으로, 록은 터질듯한 박력으로 처리하여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곡으로 만들었다.
72년부터 톰의 전성기는 지난듯 했으나 TV쇼 프로그램의 사회자와 라스베거스 무대에서의 인기는 식을줄 몰랐다. 그리고 고든 밀스의 지휘를 받으며 레코딩 활동을 계속했는데, 76년 앨범 「Say You'll Stay Until Tomorrow」의 타이틀 곡을 15위('77.1)에 올려놓으며 건재를 과시했다. 타이틀곡과 함께 이 앨범에는 'Proud Mary'.'Papa'.'My Way'.'Anniversary Song'.'Ebb Tide'등이 수록되어 올드 팬들에게 반가운 선물이 되었다. 이어진 77년 앨범 「What A Night」 역시 타이틀곡과 'No one Gave Me Love'.'I Wrote This Song(To send My Love To You)'등이 히트했다.
톰의 80년대 활동은 계속되는 라스베거스 무대와 함께 'All The Love Is on The Radio'와 'Give Her All The Roses'를 히트시킨 85년작 「Love Is on The Radio」까지 컨트리 스타일로 일관했다. 86년에는 영원한 음악적 동반자인줄 알았던 고든 밀스가 타계하는 슬픔이 도래했으나, 이듬해 타이틀곡과 'A Boy From Nowhere'를 히트시킨 앨범 「Matador」로 스스로의 발판을 다졌다.
88년에는 이색적으로 테크노 팝 그룹 아트 오브 노이즈와 함께 프린스의 곡 'Kiss'를 레코딩하여 B.S.차트 31위('89.1)에 올려놓았고, 이듬해에는 「Move Closer」를 발표하며 끊임없는 활동을 계속했다. 톰의 근작은 자이브에서 크리셜리스로 이적하여 91년에 내놓은 「Carrying A Torch」로, 반 모리슨이 프로듀스.작곡.연주 등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 앨범은 아일랜드 출신 반 모리슨과 웨일즈 출신 톰이 경지에 이른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내한공연을 가졌던 83년에 큰 아들 마크가 아들을 낳아 43세의 나이로 할아버지가 된 톰은 87년에 손녀를 보았고, 92년 52세의 어엿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적 열정은 아직도 20대에 머물고 있다. 현재 톰 존스의 가족은 모두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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