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ck

맘스틴 전기 기타와 오케스트라 협주곡 내림 마단조 "밀레니엄"

리차드 강 2010. 3. 20. 14:02

전기 기타와 오케스트라 내림 마단조 밀레니엄

Yngwie Johann Malmsteen (1963 - )

1. Icarus Dream Fanfare, 전곡연주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 orchestra in E flat minor  (39:37)

   Composer: Yngwie Johann Malmsteen (1963 - )
   Conductor: Yoel Levi
   Orchestra: The Czech Philharmonic Orchestra
   Venue   Personnel: Yngwie Johann Malmsteen (electric guitar); Czech Philharmonic Orchestra.
Engineers: Chris Tsangarides, Tomoyoshi Ezaki.
Recorded at Rudolfinum Dvorak Hall, Prague, Czeck Republic. Includes liner notes by Yngwie Johann Malmsteen.

Label  Dream Catcher (1998)
Label: Dream Catcher Records, UK / Pid

     

     

01. Icarus Dream Fanfare
02. Cavalino Rampante
03. Fugue
04. Prelude to April
05. Toccata
06. Andante

07. Sarabande
08. Allegro
09. Adagio
10. Vivace
11. Presto Vivace
12. Finale

     

     

Yngwie Johann Malmsteen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 Orchestra in E Flat Minor

어느 한 장르의 고유한 모습만을 지니는 음악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된 요즘, 음악에 있어서의 크로스오버라는 형태는 더 이상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음악 소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장르 따위가 아니라 음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판단의 근거가 희박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압도적인 외형적 사실에 큰 의의가 주어지는 경우, 예컨대 거장들의 협연이나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의 만남과 같은 테마들 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한 세대 전이나 지금이나 늘 많은 팬들과 매체에 의해 조명을 받아오고 있다. 록 밴드가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 대중 가수가 성악가와 한 무대에 선다, 팝 음악에 낯익은 클래식 소품의 선율이 도입된다, 권위 있는 오케스트라가 정기 연주회에서 팝 히트곡을 연주한다,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팝과 클래식이라는, 태생적으로 확연히 다른 두 음악의 만남에 대한 호기심의 표명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물론 거기에는 저급한 대중문화와 고급한 예술이라는 웃기는 이분법의 논리에 익숙해진 적지 않은 이들의 시선도 포함된다. 그들은 이 대견스러운 조우에 흐뭇한 눈길을 보내며 음악의 질적인 성과와는 관계없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비단 이러한 태도가 아니더라도 대중음악(특히 록음악)과 고전음악 사이에는 분명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렇듯 서로 다른 세계의 두 음악이 벽을 넘어 융화된다는 사실, 속俗과 성聖의 만남, 현실과 이상의 조화, 땅과 하늘의 어우러짐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한 아티스트가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하거나 앨범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제작비를 지불할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시도는 더 이상 혁명적인 실험도, 또는 음악적 진보를 위한 과정도 될 수 없다. 즉 대부분 철저히 아티스트 또는 그룹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탓에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표방한 작품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의 음악적 역량을 가진,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의 과외 작업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특히 클래식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거나 고전 음악적 취향을 가진 이들은 한두 번쯤 이런 작업을 생각해보는 듯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팝(록)/클래식 크로스오버'는 아티스트의 지명도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지닌다. 음악적으로야, 그것이 고전음악의 외피를 입고 있는 한 어찌 바흐나 비발디,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등을 능가할 수 있으랴. 물론 그들의 작업 중에는 간혹 창조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음악적 완성도를 담은 수작들이 있는 반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작품들도 있다.

록음악계에서 이러한 시도는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진다. 오케스트레이션이 포함된 곡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타이틀로 내건 앨범들만을 나열해봐도 적지 않은 작품들이 나온다. 무디 블루스(Moody Blues)와 런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Days Of Future Passed]('67)를 필두로 딥 퍼플(Deep Purple)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69), 프로콜 하룸(Procol Harum)과 캐나다의 에드몬튼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함께 한 [Live In Concert With The Edmonton Symphony Orchestra And Da Camera Singers]('72), 이후 90년대에 와서는 독일의 레이지(Rage)와 체코의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Lingua Mortis]('97), 이 앨범의 주인공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And Orchestra In E Flat Minor Op. 1: Millennium]('98), 메탈리카(Metallica)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S&M]('99), 스콜피온스(Scorpions)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Moment Of Glory](2000)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아티스트의 과한 욕심에서 비롯된 듯한 몇몇 아쉬운 앨범들을 제치고 잉베이 맘스틴의 작품은 단연 돋보이는 앨범들의 축에 든다.

북유럽의 거친 바다를 누빈 바이킹의 후예, 완고한 독불장군과도 같은 눈매를 가진 스웨덴 출신의 이 거물급-음악적으로든 외형적으로든- 기타리스트는 자신의 재능만큼이나 욕심이 많은 뮤지션이다. 록음악에 고전음악의 형식을 도입하여 전에 없던 새로운 스타일, 즉 바로크 메탈(baroque metal)이라 명명된 장르를 탄생시킨 그는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고전음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 이상(理想)의 현현(顯現)이라 할 수 있는 앨범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And Orchestra In E Flat Minor Op. 1: Millennium]으로 15년의 음악 활동 경력에 중요한 일점을 남긴다. 록에 클래식의 방법론을 도입한다는 기존의 개념에서 벗어난 그는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서, 기타라는 악기를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와 같이 협주곡의 중심이 되는 고전 악기의 반열에 위치시켰다. 결국 그의 빼어난 기타 테크닉은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에 극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기존의 관현악 곡에서 느낄 수 없었던 화려함과 친근함을 더해주었고, 말 그대로 록과 클래식의 경계를 뛰어넘는 멋진 음악의 완성을 이루었다. 물론 기존의 그의 번뜩이는 속주와 그가 이루어낸 미학적인 테크닉에 비추었을 때 이 작품이 음악적으로 새롭다거나 특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고, 일부 팬들과 매체는 그 부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발표된 그의 여러 작품들 중 단연 첫손에 꼽을 만한 이 앨범으로 그는 자신이 지닌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했을 터이고, 그것은 그의 또 하나의 간절한 바람이었던 라이브 연주의 실행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긴 제목을 가진 이 앨범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And Orchestra In E Flat Minor: Live With The New Japan Philharmonic]이다.

대중음악 뮤지션과 대규모 오케스트라와의 작업은 여러 면에서 위험성을 내포한다. 우선 막대한 비용을 조금이라도 덜 부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테이크 수를 줄여야 하며, 수십 명의 인원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가 힘든 탓에 만족할만한 녹음을 이끌어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잉베이는 이미 그 작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고, 더군다나 이번엔 한 번에 끝내는 라이브인 것이다. 오케스트라 앨범의 발표 직후부터 그의 공연에 대한 구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약 3년간의 준비 끝에 그가 협연의 대상으로 선택한 오케스트라는 일본의 뉴 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新日本フィルハ-モニ-交響樂團)이다. 1972년 지휘자인 세이지 오자와(小澤征爾)에 의해 창립된 이래 활발한 활동으로 현재 세계적인 명문 오케스트라의 대열에 포함되는 뉴 저팬 필하모닉과 잉베이 맘스틴의 만남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잉베이가 굳이 일본의 관현악단을 택한 까닭은 아마도, 이미 전성기를 지난 그 자신의 입지가 일본에서만은 여전히 확고한 상태인 탓일 게다. 결국 2001년 6월 15일 도쿄의 스미다 트리포니 홀(Sumida Triphony Hall)과 17일 시부야의 분카무라 오차드 홀(Bunkamura Orchard Hall)에서 행해진 공연은 일본에서의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모두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했으며, 공연 내용은 주요 일간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 중 17일의 성공적인 공연은 실황 앨범, 비디오와 DVD로 제작되어 그의 팬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

앨범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And Orchestra In E Flat Minor Op. 1: Millennium]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공연에서 잉베이는 밴드의 리더가 아닌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서 철저히 솔로이스트의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그의 기타 연주는 베이스, 드럼 등과 더불어 록의 기본 편성이 아닌 오케스트라와의 협주에 충실한 클래식 악기의 역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업은 그의 말처럼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록과 클래식의 접목 또는 융합이 아닌 클래식 음악을 순수하게 일렉트릭 기타로 표현한 하나의 대규모 실험이었던 것이다. 잉베이가 작곡한 모든 작품들과 옛 명곡들의 오케스트라 편곡은 [Concerto Suite...]에 참여했던, 빌리 조엘(Billy Joel), 레인보우(Rainbow), 코지 파웰(Cozy Powell) 등과의 작업으로 유명한 데이빗 로젠탈(David Rosenthal)이 담당했다. 지휘자 다케모토 다이조(竹本泰藏)가 이끄는 69명의 거대 오케스트라와 60명의 합창단이 함께 한 이 공연에서 잉베이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은 듯하다.

[Concerto Suite...]의 수록곡들과 데뷔작 [Rising Force]('84)의 명곡들인 Black Star', 'Far Beyond The Sun', Icarus Dream Suite', 그리고 [Trilogy]('86)의 Trilogy Suite Op. 5'와 [The Seventh Sign]('94)의 Brothers' 등을 포함한 17곡이 철저한 관현악 곡으로 편곡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클래식 공연의 현장감과 깔끔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모든 곡들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에너지의 흐름은 이 라이브 앨범을 특징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각각의 곡들을 가득 채우는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잉베이의 기타 솔로의 어우러짐은 더할 수 없이 커다란 상승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예컨대 메탈리카의 [S&M]을 들으며 가졌던 심한 위화감-오케스트라와 밴드 사운드가 이루는 철저한 평행선-이나 스콜피온스의 [Moment Of Glory]를 가득 채우던 과도함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조화이다. 사실 이 앨범들은 밴드의 기존의 인기 곡을 편곡한 작품들을 담은 탓에 마이너스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의 편곡과 연주에 있어서의 시각의 차이가 결과적인 느낌의 차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Fugue'나 Toccata', 'Andante', Sarabande' 등 철저한 클래식의 방법론에 입각한 잉베이의 작곡은 (알비노니의 Adagio' 등 기존 소품들에서 차용한 선율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고스란히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업이었다는 뜻이다. 때문에 그 특유의 격정적인 기타 연주와 더불어 펼쳐지는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웅장한 코러스에서 부조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기타가 등장하지 않고 오케스트라 연주만으로 펼쳐지는 오프닝 작품 Black Star'나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Far Beyond The Sun' 등 기존 곡들의 변형은 다소 어색함을 주기도 한다. 우리 귀에 친숙한 오리지널에서의 화려한 에너지가 거세된 탓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심각할 정도의 큰 어색함이나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적어도 이 공연이 바탕을 두고 있는 곳, 잉베이가 의도한 사운드의 근원은 철저한 클래식의 형식이고 그것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지극히 조화로운 울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물 간 것처럼 여겨지는 거장 잉베이 맘스틴의 역시 거장다운 면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앨범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한다.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며 때로 가슴을 슬며시 어루만져주는 이 멋진 기타 연주와 이 감성적인 관현악의 부드러운 조화를 통해서 말이다.

글 / 김경진

     

     

Yngwie Malmsteen (잉베이 맘스틴)

잉베이 맘스틴(Lars Johann Yngwie Lannerback) 가수
출생 1963년 6월 30일, 스웨덴
데뷔 1984년 1집 앨범 'Rising Force'
경력 1985년 그룹 '알카트라즈' 탈퇴
수상 1985년 음악잡지 기타 플레이어 선정 최고의 락 앨범

“테크닉에 미치는 것은 바보짓이고 불필요하다. 내가 언제나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루브(Groove)감을 지닌 연주인이 되라는 것이다.”

80년대 록계에 클래시컬 속주기타의 열풍을 몰고온 슈퍼 기타리스트 잉베이 맘스틴은 1963년 6월 30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수백 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오페라 명가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3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은 잉베이가 기타를 잡기 시작한 것은 5살 때부터이다. 그러다가 7살 때인 70년 TV에서 방영된 지미 헨드릭스 추모특집을 보고 감동 받아 본격적으로 기타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잉베이의 실력은 크게 향상되어 먼저 시작한 형이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잉베이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드럼으로 포지션을 바꿀 정도였다. 그리고 형제는 Burn And Power 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75년에 잉베이는 마침내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입수하게 된다. 이 기타를 가지고 그는 4년 여에 걸친 맹연습을 하며 모든 테크닉을 정복해 갔다.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멤버였던 누나로부터 독보력과 스케일 이론을 배우며 이론과 실제를 착실히 쌓았다. 77년 의무교육을 마친 잉베이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4트랙의 MTR을 구입하고 데모테입 제작에도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이후 그는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라는 밴드를 조직하게 되는데, 잉베이와 라이징 포스에 대한 소문은 스웨덴 국내에 퍼져 스웨덴의 CBS 레코드로부터 계약제의도 들어왔다. 그러나 레코드 회사측의 ‘스웨덴 내에서의 히트를 유도’하는 제의가 마음에 안 들어 이를 거부했다. 당시 잉베이의 목표는 세계시장이었기 때문이다. 82년에 그는 마이크 바니의 눈에 띄어 기타 플레이어지에 소개되고 곧이어 LA로 가, 론 킬이 이끄는 스틸러(Steeler)에 가입하였다.

스틸러에서 1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탈퇴한 잉베이는 그래험 보넷의 알카트라즈에 가입, 'Island In The Sun', 'Too Young To Die', 'Jet To Jet', 'Kree Na Koorie' 등의 명곡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멤버간의 갈등과 음악적인 견해차이로 이 그룹에서 2장의 앨범에 참여한 후 그는 곧 자신의 독자적인 새 그룹 라이징 포스를 결성해 'Far Beyond The Sun', 'Black Star', 'Evil Eye', 'As Above So Below', 'I’ll See The Light Tonight' 등등 록기타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었다.

잉베이 맘스틴이 연주하는 프레이즈는 클래식적인 발상이 대부분이다. 내추럴 마이너, 하모닉 마이너, 디미니쉬드 스케일을 사용해 속주 애드립을 만들어 가는 게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그는 같은 줄 위에서 7∼8 잇단음 이상의 긴 프레이즈를 매우 빠르게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은 바이올린을 켜는 주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며, 이외에 그가 대중화시킨 아르페지오 스윕피킹도 바이올린 연주를 응용한 것이다.

또한 얼터네이트 피킹만으로의 연결시 나타나는 속도와 부드러움의 한계를 소위‘2현 스윕’으로 극복, 스피디한 프레이즈를 좀더 유연하고 힘을 안 들여 연주할 수 있게 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위와 같은 그의 면모가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은 솔로 프레이즈를 할 때이다. 그의 애드립에서 엿볼수 있는 스케일 프레이즈-마치 스케일 연습을 하듯 음을 차례로 늘어서게 하며 연주하는 속주-는 그가 기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코드 하나 하나에 맞추어가며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이므로 매우 세밀하고 규칙적인 솔로라인을 만들어낸다. 잉베이 맘스틴의 등장으로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연습실로 직행했고 클래시컬 속주기타의 새 지평을 열게 되었다.

사 용 장 비

◇Fender Stratocaster(Di Marzio HS 3 픽업 내장)
◇Marshall Amps(50W), (100W)모두 가지고 있음. Marshall‘MarkⅡ’50W(69~72),DOD Overdrive Pre Amp FX-50
◇TS-9 Tube Screamer, Roland Chorus Echo, Samson Wireless, Korg Tuner, Moog Synth, COM Strobo Tuner, Bob Bradshaw Pedal Board, Korg Digital Delay SDD 1000(2대), SDD-1200(Chorus 용), Digital Voice Processor DVP-1, Rocktron HushⅡC, Furman Power Supply PL-8, JEN Cry Baby, SDD 2000 Sampling Delay

글/조성진

     

     

Yngwie Johann Malmsteen (1963 - )

데뷔/결성 : 1983년
활동 시기 : 1980, 1990, 2000년대
멤     버 : 솔로활동

팝 음악을 지탱하는 두 가지 커다란 줄기인 뮤지션십(Musicianship, 음악적 숙련도와 완성도)과 애티튜드(Attitude, 음악을 하는 태도)는 항시 반목과 암묵적 화해를 거듭하며 대중 음악의 역사를 쌍끌이 해왔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대변자였던 프로그레시브 록과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로 대표되었던 펑크(Punk)간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만 생각해봐도 이는 명백하다.

이런 상황은 펑크가 지하 세계에서 숨죽이며 기회를 엿봤던 1980년대를 거쳐 얼터너티브라는 얼터 에고(alter-ego)로 재림(再臨)했던 1990년대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런지와 함께 주류 록 네트워크를 잠식한 다수의 모던 러버들은 테크닉 위주의 헤비 메탈에 맹공을 가하며 세력을 위축시켰던 것. 재빨리 시류를 탔던 메탈리카(Metallica) 정도만이 예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속주 기타의 대명사 잉베이 맘스틴은 이런 위급한 사태 속에서도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하기야 원체 자신감을 넘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상으로 똘똘 뭉친 그였으니, 눈 하나 깜짝할 리가 만무했다. 인터뷰에서도 탐구 정신이 실종된 당시 록 신을 비난하며 그의 외고집이 정도(正道)임을 수 차례 설파했다. 자신의 음악이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전락했고 오직 마니아들의 충성 속에 유지된다는 사실에도 불구, 꾸준히 닦아놓은 길의 항로를 바꾸려 하지 않으며 마이 웨이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바로 클래식으로부터 차용해온 대위법과 하모닉 마이너 스케일을 중심으로 쉴새없이 쏟아내는 음표의 향연, 속주 기타 제왕으로서의 길이다.

From Guitar Kid to Guitar Zeus

잉베이 맘스틴은 1963년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오페라 명가 출신인 어머니의 우산 아래 3살부터 피아노를 수학했던 그는 7살 때,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아 기타리스트를 인생의 방향 지표로 삼았다. 이후 10대 초반 시절에 3년 동안 하루 8시간씩이라는 고된 수행을 거치며 내공을 축적했고, 영향 받은 아티스트들인 지미 헨드릭스와 리치 블랙모어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해냈다. 오페라 단원이었던 누나로부터 독보력과 스케일 이론을 사사 받아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 기타 키드는 16살 때 밴드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해 4트랙 짜리 데모 테이프를 완성, 이것을 슈라프넬의 대표이자 그 당시 많은 속주 기타리스트를 발굴했던 혜안(慧眼)의 소유자 마이크 바니에게 보냈다.

이를 듣고 단번에 반한 마이크 바니가 구애의 손길을 뻗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정기 기고매체였던 기타 플레이어(Guitar Player)지에 잉베이 맘스틴을 소개해주었다. 킬(Keel)의 보컬리스트였던 론 킬(Ron Keel)이 이끌었던 스틸러(Steeler)에 가입시켜준 것 역시 마이크 바니였다.

1983년 단 한 장의 앨범에 참여하고 스틸러를 떠난 잉베이 맘스틴은 그레이엄 보넷(Graham Bonnet)을 만나 알카트라즈(Alcatraz)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1984년의 데뷔작 과 라이브 앨범 에서 출중한 연주력을 선보이며 세계를 상대로 잉베이 맘스틴식 기타 브랜드를 널리 알렸다. 그리고 1984년, 부활한 라이징 포스와 함께 처녀작 를 내놓으며 바로크 메탈의 전성 시대를 활짝 열었다. 'Far beyond the sun', 'Black star', 'Evil eye', 'Icarus dream suite Op. 4'등, 전곡이 보석이었다.

1980년대에 등장했던 1985년의 소포모어 앨범 과 1986년의 3집 , 1988년의 4집 등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어서 잉베이 맘스틴은 이 시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쌓아나갔다. 1960년대의 지미 헨드릭스, 1970년대의 에디 밴 헤일런에 뒤를 잇는 기타사의 히어로로 그가 지목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허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헤비메탈 신 전체의 하락세와 함께 그의 음악도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애호가들이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항상 똑같고 새로운 맛이 없다.', '왼손의 서커스에만 몰입하는 한심한 연주자'라는 등의 혹평이 잇달았다. 그러나 기타를 쳐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속주 기타는 왼손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핑거링과 피킹이 합일(合一)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구사할 수 없기에 그러하다.

주위의 입방아와는 무관하게 잉베이 맘스틴은 연달아 음반을 발매했지만 피드백 효과는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1990년의 , 1992년의 . 1995년에 출시된 , 1996년의 리메이크 음반 , 1998년의 , 1999년의 등, 대부분의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베스트 콜렉션으로 구매 동기를 유발시킨 (1992), 'Never die'와 아름다운 발라드 'Mean to be' 등이 히트하며 기타 인스트루멘탈 팬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냈던 1994년의 수작 ,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1998) 정도가 예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특히 후자는 그가 오랜 기간 갈망했던 소원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은 본격적인 클래식과의 만남이었다.

2000년 들어 그는 (2000)와 (2002)으로 다시금 기타 명장(名匠)의 풍모를 뽐냈고 2002년 현재, ]으로 팬들의 곁을 다시 찾아올 예정에 있다. 마지막으로 잉베이 맘스틴의 음악 철학을 파악할 수 있는 뱀발 하나.

“테크닉에 미치는 것은 불필요하고 바보짓일 뿐이다. 내가 언제나 주장하고 싶은 바는 그루브감을 지닌 뮤지션이 되라는 것이다.”

 2002/10 배순탁 (greattak@izm.co.kr) / 오이뮤직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