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마음이야!

성심원 까페에 올라온 박민희 후배의 글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리차드 강 2011. 1. 11. 15:16

Sung Sim Boys Town 졸업생 형님들께...

 

서울시 강남구 잠원동 聖心園 1984년 전경

아무리 따뜻하게 입고 나왔다 하더라도 곳곳 틈 사이로 숨어 들어오는 찬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ㅋㅋ 글쓸때가 2월이라 )

2009년 새해를 우리집 친구들과 시작해봅니다 . (나의 동생들아 가는거야 ..)

안녕하세요 이곳을 다녀 가시는 형님들 1985년 1번 버스를 타고 작은 다리를 건너 수녀님 손을 잡고 초등학교 3학년 아이로 첫 인사를 드리던 박민희 가 벌써 기축년을 맞이하여 34세을 향해 열심이 뛰고 있습니다 . 에고 우리 형님들은 ....

07년 11월 교통사고로 오른발을 크게 다치며 9개월의 병원 생활을 열심이 (울면서 ㅜ.ㅜ) 마치고 집에서 쉬는 시간을 가지며 보내는 저에게 아주 커다란 변화을 가져오는 일이 하나 주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저녁시간과 아침 학교 등교 시간 전 까직 (성심원) 친구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만약 형님들에게 이런 일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는지 궁금 하네여 ) 전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맘 뿐이였죠. 막상 핑계를 생각하니 거참 ㅡ.ㅡ 어찌 이리 머리가 나쁜지 새삼 느끼며..>>>>>>>

굳게 맘 먹은 다짐과 원장 수녀님의 응원을 등에 메고 산 13 번지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 (빈 속에 깡 소주 한잔 들어가면 온 내장들이 식도에서부터 차례로 찌릿 찌릿 함을 느끼며 몸을 한번 떨게 하는 한순간 처럼) 어릴적 많은 형들, 친구들, 동생들, 어머니 수녀님, 신부님, 그리고 나의 소중한 추억들....

매주 토요일 1/2/3 층복도를 왁스와 온몸으로 싸웠던 초등학생, 계단 청소할때 쇠 무늬 하나 건드리면 죽음이였고, 화장실 청소 빨리 끝나길 바라며 소변을 참던 소심했던 나, 각방 쓰레기를 큰통에 모아 성심원들어오는 다리에있는 소각장까직 메고가기,작은 목욕탕에 그리 많은 초등학생 한번에 들어가기 ,각방 조장 형과 어머니 수녀님의 방청소 및 손,발톱검사 파리가 윙윙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을수 있던 조용한 식사시간,그렇게 많은 닭장에서 계란 꺼내기,송아지가 나올때면 우르르 달려가서 같이 송아지 구경하고 부활절미사후에 약수터에서 하던 고기 파티 ,여름 휴가에 전체 자던 막사 텐트 (왕 왕 큼) 소똥푸기,모내기,밭일하기,가을이면 밤따고 수녀님 모르게 대추따고, 크리스마스의 지옥의 성가연습 ,좋합선물셋트과자, 언덕에 형들이 만들어 주던 눈썰매장 형들의 외발 스케이트 바라보기, 비록 이런추억들은 90년을 들어서면부터는 하나 하나 없어지기 시작했지만 ( 아 나의 방장 한규형 어디 어디 ,, ㅎㅎ) 동아형 글 잘보고 있습니다 전 글재주가 없어 망설이다 형의 열성에 저도 한번 올려봅니다.

성심원 설립자 故 이우철 시몬 神父님과 김의경 수녀님 (1980년 초)

집에 들어서면서 느끼는 첫 인상은 내가 자라던 집의 느낌이 아니고 가정집에 온 느낌 이라고 해야 할까요 각 학년마다 담당 수녀님이 계시고 (현) 본관은 중/고 합 19명, 유아 3명 이 생활합니다 (제가) 졸업할때 당시 본관에서 45-50 명 정도였으니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너무 생각적이고 옆 친구보다는 나 개인이 우선인 지금의 시대 배경에 현존하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첨 만남은 솔직이 싹 깡다구를 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층 복도에 모이라는 뜻을 이해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게 하더군여 ..한편 돌아서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런 모습이 더 좋은건 아닐까, 힘에 움직이고 타인의 눈치를 보는 행동보다는 자기 자신의 담은 행동 약간은 이기적인 이런 사고 방식이 나아가 사회 생활에 더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ㅜ.ㅜ 깡다구 뺄건 다 빼면서 이런말 적네여 )

*** 아.!! 차차 신학기 방 이동으로 이제는 중1 5명, 중2 7명, 중3 4명, 고1 3명, 고2 4명 입니다 *** (3명의 악동은 별관으로이동 )

(( 옛날방식은 아무런 이유 제기 없이 명령하에 움직이고, 개인적보다는 단체를 향해 생활범위가 정해저있고 성심원 생활 이외는 다른건 할수 없었던,원하는 것보다는 원하는 것을 포기할주 알아야하는))이런 작은 습관들이 몸에 익어 형들과 저의 범위 친구들과 동생들중에 (저역시) 자기의 그릇을 찾지못하고 주관적인 행동보다는 누군가가 이끌어 주기를 바라고 졸업후 갑자스런 자유의 표출이 한순간의 기쁨이지만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알지 몰라 잠자리처럼 한 원을 그리며 그자리에 맴돌고 원하는것을 향해 달리기 보다는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게 익숙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겁쟁이와 실패한 사람이 핑계가 많고 유창하다 했나요 제가 쓰고도 뭔 핑계가 많은지 키워주신 은혜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게 사람으로써 무지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현 성심원 동생들은 수녀님들과 아주 재미있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조회라는 말보다는 가족모임이라는 말을 배우고, 매주일에는 외출이라는 시간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느껴보고, 마이뱅크를 만들어 각 담임 수녀님과 돈을 알아가고 학원을 다니면서 자기의 공부의 질을 더욱 올리고,컴퓨터실과,놀이방을 통해 선후배 사이의 벽을 좁히고 (성심원 도서관을 원장수녀님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비록 저학년에 한해 움직이지만 수녀님께 엄마라는 말도 배우고, 원장수녀님과 각 담임 수녀님들은 무엇을 어떻게 더 좋게 아이들에게 해주실지 매일 토론 하시고 아이들이 정말 원생보다는 한 가정에서 자라는 하나 하나의소중한 사람으로서 자라고 있습니다 정말 이우철 신부님이 원하시는 성심원의 참뜻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이런 수녀님들의 마음을 아직 아이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ㅡ.ㅡ)

잠원동 집 한가운데 있던 지붕위의 글씨 1980년 초 (동자는 어리버리 돈키호테다)

BOYS HOME SUNG SIM WON 이라는 글이 정확하게 박혀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아이들이 공동체 생활 (성심원) 과 수녀님의 사랑 (가정집같은 분위기) 이런 생활에서 많이 혼동하며 역이용하고 하고 점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도 아니 더 원하고 얻으면서 또 한편 지켜야 하는 성심원의 생활을 이해 못하는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가정에서 너무 커서 오는것과 부모님이 80%이상 계신다는 점 또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점이겠죠 이런 보이지 않는 갈등과 사춘기를 보내는 힘든 아이들을 돌보시고 수녀님들의 본분이신 (수도자의 생활 ) 까직 하시면서 힘든 하루 하루를 사랑으로 이해 하시는 수녀님들께 졸업생 한 사람으로써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수녀님들 화이또 .!! )

2009년 신학기 부터는 아이들이 이런 수녀님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항상 웃고 행복이 넘치는 성심원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또 그런 것을 할수 있도록 하려고 아이들과 제가 있는 동안 힘내야겠죠 .. ^^

졸업하신 형님들 친구들 동생들 모든 분들께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사회 생활이 힘들고 가정을 이루고 보니 가정이 우선 먼저인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릴적 소중한 추억이 있고 사회의 한 사람으로써 살아갈수 있도록 키워주신 성심원을 잊지 마시고 명절과,원경일, 어버이날, 같은 날은 집에 오셔서 어머니 수녀님외에 아이들을 사랑 해주시는 많은 수녀님들 또 우리의 사랑스런 많은 동생들 (왕 왕 귀여운 5살 유치부)를 만나 주로 오세여 어른 수녀님들과 본관의 좋은 수녀님들이 기다리고있습니다 ^_________^ ^__________^

1985년 5월 어느날 故 김남수 주교님께서 수지 성심원을 축성해주시기 위해 오셨다.

이번 신부아버님의 기일 미사에 너무 저조한 85년 이후 졸업하신 형님들과 08년 졸업생들의 빈자리를 보면서 많은 수녀님과 어머니 수녀님의 허전한 마음을 느껴 봤습니다 그리고 위 형님들은 모임을 하고 계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모임의 참 뜻을 이런날 보여 주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 아.! 이거 쓰고 난 이자 죽었다) ( ㅡ.ㅡ) (ㅜ.ㅜ ). 아무리 힘든 시기의 경제 속에서 힘들게 살아 가고 있고 아님 넘 싫거나 힘들었던 성심원의 생활이였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를 나아주신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버려서는 안된다 생각합니다 이건 유교 사상의 뿌리가 남은 우리나라의 근본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이치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성심원이라는 커다란 집이 아닐까요.

힘들때 옆에 있었고 배움의길을 열어주시고 배고플때 식사를 춥고 피할곳이 필요할때 밥과 잠자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으로 주신 이우철 신부님과 김의경 어머니 수녀님과 많은 수녀님들이 저희들의 부모님 입니다 이번 어느덧 김의경 어머니 수녀님도 한쪽 시력이 잘 안보이시고 다리의 힘이 없으신 94세 할머니의 (이런 표현도 되나?)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하지만 어머니 마음속에는 졸업한 아이들의 이름 이름 하나 하나가 아직도 튼튼하고 커다란 상자속에 이쁘게 담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생각하며 쓰다보니 저 역시 잘한건 하나도 없군여 주제넘어 이런 글을 올린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부탁을 하나 올립니다 이번 5월 8일 어버이날은 많은 형님들과 동생들이 많이 찾아 주셔서 어머니 수녀님과 많은 수녀님 가슴에 카네이션 꽃밭을 이루었음 합니다.

내일이면 개구리도 잠에서 깨어나는 경칩입니다 이제 슬슬 봄내음이 우리의 가슴을 여리게 만들겠죠 항상 힘내시고요 얼마나 성공적으로 살아가는야가 아니라 얼마나 삻을 치열하게 살아가는냐가 중요 하다고 하는군여 천천이 앞으로 걸어 가실길 바랍니다.

2009.03.10 졸업생 박민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