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곡

명태 - 오현명 (변훈 작곡)│My Favorite 한국의 가곡

리차드 강 2009. 2. 9. 06:01

명태 - 오현명

내 마음의 노래 (RCA 지구레코드 1974. 2)

양명문 시; 변훈 곡; (한국의 歌曲)

Side B No.1 - 명태 (베이스 오현명)

 

명태 - 양명문詩 - 변훈曲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때 (카아~~~)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도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허허헛 명태라고
헛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미지 출처 : 오마이뉴스 이종찬의 <맛이 있는 풍경>

     

변훈 邊焄│( 1926 ~ 2000.8.29 )

한국의 작곡가이자 외교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와 파키스탄 총영사 등을 지냈다. 그가 6.25전쟁 피난 중 대구에서 지은 가곡 《명태》는 연극적인 해학적 구성을 사용한 ‘한국적 리얼리즘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음악·정치
출생지 : 함남 함흥
주요작품 : 《명태》 《떠나가는 배》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54년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인 1953년 외교관 공채시험에 합격한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부영사와 파키스탄 총영사를 지냈으며, 1981년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퇴임하였다.

대학 재학 중 6·25전쟁을 맞아 피난지인 대구에서 《명태》를 작곡하였다. 미8군 통역관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감상실인 대구의 ‘녹향’을 드나들다가 화가 이중섭, 소설가 최정희 등과 함께 이곳에 자주 다니던 시인 양명문에게서 시를 받아 《명태》를 작곡하였다. 세상살이의 애환을 가난한 시인의 술안주가 되어버린 명태에 빗댄 이 노래는 베이스 오현명과 윤치호가 불러 유명해졌다.

그의 가곡은 한국적 가락과 우람한 서정이 특징이었으며, 그중 《명태》는 연극적인 해학적 구성을 사용한 ‘한국적 리얼리즘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만년에는 밝고 유머가 넘치는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양명문의 시에 곡을 붙인 《명태》, 《낙동강》, 《떠나가는 배》 등과 《한강》(정공채 시), 《설악산아》(정공채 시), 《쥐》(김광림 시), 《님의 침묵》(한용운 시) 등이 있다.

 

변훈 2 

군 복무시절 - 변훈과 김동진

원래 이 곡은 6.25사변중 국군으로 전투중이던 변훈님이 쓴 곡에 종군기자로 있던 양명문님이 가사를 쓴, 당시로선 혁신적인 곡이었다.

1952년 초연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젊지만 자유로울수 없는 영혼들의 자조섞인 신세를 명태에 비유해 풍류남아로나마 남고파 하는 역설적인 신세 한탄조가 느껴진다. 한참 세월이 흐른 지금엔,자연을 벗하고저 바다 앞에 선
호쾌한 장부들의 권주가 정도로 들린다.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 밤 늦게 시를 쓰다가 / 소주를 마실 때 /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 쫙쫙 찢어지어 내몸은 없어질지라도 /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 명태 명태라고 /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성악가 오현명은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를 구성지게 불러 팬들의 심금을 울렸었다. 노랫말 때문인지 몰라도, 명태는 왠지 서민의 고달픈 삶을 많이 닮았다. 어부들에 의해 잡혀 올라와 북어나 동태, 생태, 황태 등 영문도 모른 채 팔자가 나눠지는 그 신세도 왠지 처량하기만 하다.

변훈(1926∼2000) 1926년 함경남도 함흥 태생, 주포르투갈 대사 등을 역임한 외교관 출신 작곡가로 함남중학교를 거쳐 연희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53년 외교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외교관 초임시절 브라질 등지의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부영사와 파키스탄 총영사 등을 역임했으며,81년 5월 주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28년간의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또 작곡가로는 1947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금잔디」를 시작으로 윤동주 작시의 「무서운 시간」, 시인 김광섭의「차라리 손목잡고 죽으리」등의 작품을 내놨다. 특히 바리톤 오현명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명태」(양명문 작시)는 해학적인 가사와 민속적인 가락으로 한국 가곡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변훈 씨는 이밖에 김광섭 작시의 「나는야 간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정공채의 「갈매기 우는구나」, 조병화의 「낙엽끼리 산다」,등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외교관시절, 인도의 간디수상을 접견하는 변훈

     

변훈 3

밤늦게 시를 쓰다가 북어와 함께 소주를 마시는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은 이 시를 쓴 시인 자신일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말라 비틀어져 입을 벌리고 있는 북어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고, 명태의 운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명태, 너는 전생에 무엇이었느냐"고. 명태가 물었다.

”시인, 너의 전생은 무엇이었기에 나와 이렇게 인연이 되어, 내가 너의 한 잔 술 안주거리가 되어 너를 즐겁게 해주고 있느냐“고 물었다. 명태의 말 속에는 다음 생에서는 너와 나의 신세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내뱉고 있었다.

찢겨져가는 명태를 보면서 시인은 어쩌면 마치 자신의 몸이 찢겨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시인은 명태를 위해 시를 쓰기로 했다. 그러면 명태의 불운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것이니까.

◀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창작혼을 불태우던 1985 년 1 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내 석은애씨의 피아노 반주로 자작 가곡을 불러보는 변훈씨

시인은 독백한다. ‘너의 육신은 내 입으로 들어가 없어질지라도 너 영혼은 환한 저승길로 가라’ 고. ‘그리하여 너의 이름이 길이 길이 남아 있으리라’ 고.

명태는 월남 문인 양명문의 시에 6.25사변중 국군장교로 있던 변훈님이 곡을 붙인 가곡으로서 발표 당시에는 가히 혁신적인 곡이었다.

1952년 초연 당시엔 기존의 한국가곡의 틀을 깨는 돌연변이 같은 음악으로 치부되어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시인은 명태의 신세와 자신의 신세를 비유하면서 이 시를 썼지만 작곡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젊지만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들의 자조 섞인 신세를 명태에 비유해 풍류를 즐기는 사람으로나마 남고자 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엔 자연을 벗하고저 바다 앞에 선 호쾌한 장부들의 권주가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노랫말 때문인지 몰라도, 명태는 왠지 서민의 고달픈 삶을 많이 닮았다. 어부들에 의해 잡혀 올라와 북어나 동태, 생태, 황태 등 영문도 모른 채 팔자가 나눠지는 그 신세가 왠지 처량하기만 하다.

한국적인 익살, 그리고 한숨이 섞여있는 자조적이면서도 재치가 있는 노래 명태....

명태와 바리톤 오현명씨의 인연을 오현명씨의 회고에서 찾아보았다.

일제시대 만주땅에서 출생한 그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자라다 6세 때 현제명 성악곡집을 듣고 음악적 감화를 받았다. 형의 친구인 작곡가 임원식씨로부터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듣고 中 1때 교회 무대에 처음 섰고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가 만든 조선 합창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징병을 당해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거기서 조국해방을 맞이하였고, 만주로 되돌아가던 중 38선이 막혀 서울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 극적으로 현제명씨를 만났고 그 밑에서 일하다가 경성음악학교 장학생으로 입학, 평생의 스승 김형로씨를 만났다. 6·25 때는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북되던 중 탈출하여 국군 정훈음악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일생의 레퍼토리가 된 가곡 「명태」를 만났다.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을 때, 연락 장교로 있던 작곡가 변훈씨가 날 위해 만들었다며 던져주고 간 악보뭉치 속에 「명태」가 있었지요. 멜로디보다 가사 위주로 가는 생소한 방식, 해학적인 가사가 좋아 발표했다가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어요. 작곡가가 낙담해 진로를 바꾸기까지 했으니까요. 1970년에 다시 불렀다가 유명해져서 어딜 가나 오현명 -명태, 명태 -오현명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작곡가 변훈(1926∼2000)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며, 주포르투갈 대사 등을 역임한 외교관 출신 작곡가로 함남중학교를 거쳐 연희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53년 외교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외교관 초임시절 브라질 등지의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부영사와 파키스탄 총영사 등을 역임했으며,81년 5월 주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28년간의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1947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금잔디」를 시작으로 윤동주 작시의 「무서운 시간」, 시인 김광섭의「차라리 손목잡고 죽으리」, 김광섭 작시의

「나는야 간다」, 김소월의 「초혼」「진달래꽃」, 정공채의 「갈매기 우는구나」, 조병화의 「낙엽끼리 산다」, 김영삼 시 「귀향의 날」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작품집으로 <갈매기> (세광출판사, 1981년)가 있다.

- 글 : 내마음의 노래(2006. 10. 1)

 

"변 훈(邊 焄)" 3

한국 가곡의 새 장르를 개척한 직업외교관 작곡가

2000 년 8 월 29 일 향년 74 세의 나이로 별세한  변 훈(邊 焄)은 작곡가로서 한국 가곡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변 훈(邊 焄)에게 '명태'는 한국 가곡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표작인 동시에 쓰라린 추억이 담긴 가곡이다. 또 그가 음악을 포기하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명태' 때문이기도 하다.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휘자 정종길에게 작곡을, 바리톤 최봉진에게 성악을 배운 그는 외교관의 길로 접어 들기 전부터 작곡에 심취, 1947 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금잔디'를 첫 작곡한 데 이어 윤동주 작시의 가곡 '무서운 시간'(48 년), 양명문의 '낙동강'(51 년), 시인 김광섭의 '차라리 손목 잡고 죽으리'(52 년) 등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했다.

1952 년 변훈은 그의 인생을 뒤바꾸게 되는 <명태>를 바리톤 오현명을 통해 부산 극장에서 첫발표회를 가졌다. 고달픈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가난한 시인의 술 안주가 되어 버린 명태에 빗댄 풍자가이기도 한 '명태'는 탄생하자 마자 세인들의 숱한 빈정거림을 받았다.

베이스 오현명(吳鉉明)이 부른 이 곡을 듣고 음악 평론가 이성삼(李成三)씨가 연합신문에 '이것도 노래라고 발표하나'라는 평론을 써, 변훈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남성적이고 너무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인 변훈의 '명태'였기에 홍난파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 익숙해 있던 그 당시 음악계의 몰이해와 냉대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작곡자가 전문 음악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편견도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어쨋든 그는 그 이후 음악을 접고 외무부에 특채 되어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리톤 오현명은 '명태' 발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 해군 정악대에 복무 중이던 어느날, 나보다는 세 살 아래인 邊씨가 악보 뭉치를 들고 찾아 왔어요. <귀향의 날><낙동강'>등 여섯 곡의 가곡이 들어 있었죠. 노래를 부르던 친구가 작곡도 하나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중 유난히 눈길이 간 노래가 <명태>였어요. 하지만 발표 때 객석 여기 저기서 터지는 웃음 소리를 듣고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죠."

또 오현명은 "고인(변훈)은 선이 굵은 성격의 소유자"라며 "음악계의 아웃사이더로 평생을 나그네처럼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고 회고 했다.

대구에 가면 '녹향'이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우리 가곡 중 걸작으로 칭송 받는 변훈의 가곡 ‘명태’의 노랫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김동리가 부산 ‘밀다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6ㆍ25 피란시절(1951 년), 이중섭·최정희·양주동·박계조와 함께 대구 ‘녹향’에 파묻혀 지내던 당시 종군기자였던 시인 양명문이 ‘녹향’ 다탁(茶卓)에서 써내려간 ‘명태’ 시를 변훈이 건네 받아 곡조를 붙인게 바로 '명태'였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고전음악감상실 1 호를 서울의 옛 ‘르네상스’ 감상실 쯤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실지 모르나 그 보다 더 오랜 원조가 1946 년 대구 향촌동에서 문을 열었고, 지금도 대구 중앙로의 옛 대구 극장 맞은 편에서 영업 중인 ‘녹향’이라는 곳이라고 한다. (수 년전 신문에서 우연히 '녹향'에 관한 기사를 보고 대구에 내려갔을 때 찾아가 인사를 드린 이후 부터 대구에 내려갈 때면 시간 나는대로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초연이 실패로 돌아 간 '명태'가 한국 가곡사의 획을 긋는 수작으로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

음악 평론가 서우석(徐友錫)은 <문예중앙> 80 년 겨울호에 쓴 '음악과 사실성'이라는 글에서 <명태>를 '언어의 억양과 사실성에 충실한 노래'라고 극찬했다. 이어 음악 평론가 박용구(朴容九)도 "홍난파, 현재명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서 탈피한 <명태><쥐> 등은 40 년대 이 땅에 리얼리즘 가곡의 씨앗을 뿌린 김순남, 이건우의 맥을 잇는 듬직한 산봉우리"라고 평가했다. 그가 외교관으로 해외 공관 이곳 저곳을 다니는 동안 천덕꾸러기였던 <명태>는 점차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귀한 몸'이 되었다.

오현명의 독창회에서 으레 앙코르곡으로 불려지며, 오현명이 무대에 설 때면 객석에서 '명태!'를 연호하는 청중이 늘 있게 마련이라고 한다. 어부에 잡힌 명태의 입장에서 쓴 해학적인 노래말은 이전에 없던 신선함과 함께 '한국적인 和聲(화성)'을 창출했다는 음악적 새로움도 간과할 수 없다. 작 곡가 李旭(이병욱)은 "명태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국 가곡이라 내세울 수 있는 곡이 생겼다. 봉선화로부터 이어 온 이전의 가곡들은 사실 우리 색깔 이 없었다"고까지 말했다.

이에 고무 된 변훈은 81 년, 28 년 간의 직업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여의도에 '오페라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을 연 뒤 '시와 노래와 그림과'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 달 한 차례씩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주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28 년 간의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뒤 음악에만 전념 할 정도로 가곡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했다.

양중해 작시의 '떠나가는 배'와 김영삼의 '귀향의 날'을 비롯한 전쟁 또는 실향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들과 '설악산' 같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노래들도 그의 음악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시인 정공채(鄭孔采)와 콤비를 이뤄 전국을 누비면서 조국 산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임진강' '한강' '한려수도' '한라산' 등의 노래에 담아 내기도 하고, 김소월의 '초혼',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명시(名詩)의 가곡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외교관 시절에도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김광섭 작시의 '나는야 간다'와 '바다의 소곡', 김소월의 '초혼'과 '진달래꽃」'등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은퇴 이후에도 '갈매기 우는구나'(정공채 시), '쥐'(김광림 시), '춤의 판타지아'(정한모 시), '낙엽끼리 산다'(조병화 시) 등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여 왔다.

지병을 앓기 시작한 10 여년 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비롯한 성가를 위주로 작품 활동을 벌여 왔다. 그의 작품들은 "서양음악에 창과 아악, 시조, 민요같은 전통음악 기법을 도입, 동양적 색채를 풍기는 독특한 멜로디를 지니고 있으며, 노랫말 또한 중시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노래"라는 게 음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故 변훈은 우리 가락의 풍류와 해학, 애뜻한 사랑이 충만한 민족을 노래한 작품을 창작, 가곡계 발전에 공헌한 점이 공로로 인정 돼 화관문화훈장으로 추서 됐다.

글 : 음악 서적 / 웹사이트 참조 편집 / 네이버 블러그 <뮤즈>

양명문 (1913~1985)

작사가 양명문은 평양출생(1913~1985) 문인으로 호는 자문(紫門). 1942년 일본 도쿄센슈대학[東京專修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4년까지 도쿄에 머물러 있다가 북한에서 8·15해방을 맞은 뒤 1·4후퇴 때 월남했다. 1951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구국대원 및 육군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55~58년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뒤 국방부 전시연합대학, 수도의과대학 등에서 시론과 문예사조를 가르쳤으며 1966년 이후에는 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자유문학가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시인협회와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지냈다. 1957년 한국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와 1970년 아시아 작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극작가 김자림이 그의 부인이다. 시인의 막내아들 형태(나라은행 미국 벨뷰 소장)씨는 "어머니는 문학 선배의 소개로 아버지에게 희곡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찾아간 것이 인연이 돼 부부가 되셨다"며 "아버지로부터 `당신은 글쓰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오기로 글을 써서 계속 보여드린 결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싹터, 13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고 한다.

1940년 첫 시집 〈화수원 華愁園〉을 펴내 문단에 나왔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쓴 몇 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어 8·15 해방 이후에는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거나 반공 이데올로기와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한 현실참여적인 시를 썼다. 대표적으로 〈부두의 만가〉(문화세계, 1953. 9)·〈푸른 비둘기〉(현대문학, 1955. 8)·〈두루미의 노래〉(자유문학, 1957. 8)·〈밤나무〉(현대문학, 1968. 8)·〈민족의 대행진〉(자유공론, 1982. 8) 등이 있다. 시집으로 〈송가 頌歌〉(1947)·〈화성인 火星人〉(1955)·〈푸른 전설〉(1965)·〈이목구비〉(1965)·〈묵시록〉(1973) 등이 있다.

- 글 : 내마음의 노래(2006. 10. 1)

     

오현명 1

바리톤 오현명과 가곡<명태>는 결코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가곡<명태>가 가지고 있는 참으로 한국적인 내음과 해학적인 멋이 오현명이 통해 다시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가곡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명태>는 모를 사람이 없으리 만큼 유명해진 노래임에도 유독 오현명의 <명태>이어야 하는 이유는 오현명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 유머감각과 구수하고도 푹익은 연륜의 멋을 그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앞에서 오현명은 한국 가곡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고 그 공로패를 받게 된다. 한국 가곡이라는 입장에서 오현명을 바라다 보면 필경 그는 한국 가곡을 위해 태어난 성악가 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다른 한면, 예컨대 이 나라의 오페라계를 통해 그를 바라다 보면 그는 역시 오페라를 위해 태어난 음악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 교육자로서 오현명을 생각해보면 그는 영낙없는 타고난 교육자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수가 없다.

이처럼 오현명은 그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어느 한가지도 소홀함이 없는 분명한 모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 성악계에서 오현명의 이름은 그 누구의 이름보다도 빛나는 족적을 남겨놓았다.

해방 후 첫 오페라 무대였던 <춘희>에 출연한 이래 가장 많은 오페라 출연횟수를 기록하고 있고 18년간이나 국립오페라단장을 역임하면서 오페라 기획과 연출 등을 통해 오페라 문화 발전에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슨 <오페라 실패담>을 읽어보면 우리나라의 오페라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현재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알게 해준다.

1953년 서울음대 강사로 출발, 한양음대 교수로 정년을 맡기까지 그중 8년간은 한양음대 학장으로서 후학들을 위해 일했고 그가 펴낸 <발성법>은 많은 성악도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성악가로 소개했고 또 성악가로서 기억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성악가로서의 오현명은 아마도 영원히 우리의 가곡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리라 확신한다.

오현명은 이태리나 독일가곡 또는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야 독창회 프로그램으로서 무게가 있다는 일반적 사고를 일찍 타파함으로서 우리의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가졌을뿐 아니라 작품 속에 깊이 스며있는 한국적 '얼'을 찾아 내어 이를 청중들에게 확연히 설명해 줌으로써 한국 가곡이 생활속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감당해 내었다.

     

     

오현명 2

'명태' 하면 작곡가인 변훈보다 먼저 그 이름을 떠올리기 마련인 바리톤 오현명!

1974 년 지구 레코드에서 '내 마음의 노래(韓國의 歌曲)'라는 타이틀 RCA 레이블로 출반된 우리 가곡 전집 중 제 1 집에 실려 있는 '명태'인데 바리톤 오현명씨가 부른 여러 버전 중 제가 즐겨 듣는 녹음입니다.

여담으로, 어느날 처가(妻家)에 갔다가 바리톤 오현명씨가 부른 '명태'가 들어 있는 레코드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길래 장인 몰래(?) 슬쩍 업어 온 일이 있는데, 그때 슬쩍해 온 그 레코드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장인 어른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 야단 맞을 일은 없지만 설사 생전에 아셨대도 막내딸을 제일 귀여워 하셨으니까 막내 사위인 저를 그렇게 크게 나무라진 않으셨을겁니다.

<명태>를 들을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는데제가 20 대 때에서울 신촌로타리에서 서강대학 지나 신수동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을 때 부산이 고향인,술을 지극히 사랑(?)했던 후배가 어디서 술이 한 잔 거나하게 취하면 으례 2 차로 내게 찾아 와서 이 '명태'를 틀어 달래 놓고는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온 2 홉 들이 쇠주와 함께 명태 안주를짝짝 찢어 먹으면서 '커 ~' 하는 부분을 몇 번이고 거듭 되풀이해서 틀으며 쇠주를 마시던 모습이 30 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태>를 들을 때마다 눈에 선합니다.

글 출처 : 네이버 블러그 <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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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분터 시작된 "가을맞이 가곡의 밤"은 한국가곡의 열풍을 일으키게 했고 수많은 인기가곡들과 인기성악가를 배출해 내었거니와 언제나 우리가곡의 밤에 마지막을 장식한 성악가는 오현명이었고 그가 부르는 <명태>라든가 김연준의 가곡 <쳥산에 살리라>등은 청중들을 휘어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명태>를 통해서 그는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고 또 느낄 수 있는 맛과 멋을 유감없이 토로해 내었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또 물질 문명이 우리를 좀먹는다 해도 우리의 고향 우리의 산천 그리고 그속에서 웃음짓는 한국인의 삶의 멋은 결코 빼앗길 수 없음을 오현명은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청산에 살리라>에서 그가 보여준 영원의 세계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차원높은 정신세계의 구현임을 확인시켰고 이를 서정적인 따뜻함으로 풀어가는 그의 노래는 사느라고 고달파하는 현대인들의 막막한 가슴에 뜨거운 위로를 던져 준 것이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오현명의 노래를 들으면 대중적 친근감까지도 차원높은 고전으악의 향기로 포장 시킴으로써 우리 가곡의 품격을 높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음악적 바탕이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고전적 부리에서 출발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제 8순이 이미 넘은 성악가로서 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라 많은 무대를 지금도 소화해 내고 있다. 그의 저서 <한국가곡의 연주와 해석>을 보면 한국가곡에 대한 그의 연구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게 한다. 다시말해 그가 한국가곡에 쏟고 있는 정열은 우리의 정서, 우리의 멋을 우리의 가곡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대중속에 뿌리 내리게 함으로써 살아있는 음악으로서의 가치를 모든 이들에게 알리려는 의도가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다.

음악을 재현예술이라 부르는 것은 작곡된 작품이 반드시 연주가에 의해 재현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성악가 오현명의 출현은 이나라의 예술가곡이 새롭게 태어나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음을 이시간 다시한번 확인해 두고 싶다.

바리톤 오현명에게 한국가곡의 공로상을 수상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마땅히 그리고 좀더 일찍 이 상을 받았어야 했다.

     

마른 명태

     

집에 가는 길에 매달린 명태 (필름스캔)

출처 : http://www.slrclub.com/ 파란색깔 님

     

명태 ? (명태의 이름은 몇개일까 ?..... )

1. 봄에 잡은 명태 -- 춘태
2. 가을에 잡은 명태 -- 추태
3. 겨울에 잡은 명태 -- 동태(冬太, 凍太와 헷갈리지 말 것!)
4. 그물로 잡은 명태 -- 망태
5. 낚시로 잡은 명태 -- 조태
6. 원양어선에서 잡은 명태 -- 원양태
7. 근해에서 잡은 명태 -- 지방태
8. 강원도에서 나는 명태 -- 강태(江太)
9. 새끼명태 -- 노가리
10. 갓 잡은 명태 -- 생태
11. 얼린 명태 동태(凍太)
12. 그냥 건조 시킨 명태 -- 북어(또는 건태 乾太)
13. 반쯤 말린 명태 -- 코다리
14. 얼렸다 녹였다 반복해서 말린 명태 -- 황태

출처 : 인터넷 여기저기...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