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irth of Polyphony 聖음악 CD 3: 다성음악의 탄생 Various Artist (2005 Harmonia Mundi) 1. Domine labia mea aperies
Album Title: Saced Music CD 3 - La naissance de la polyphonie (1100-1300) / The Birth of Polyphony Composers: Anonymous, 11th century F Anonymous, Aquitanian Rep Anonymous, Codex Bamberg Anonymous, English Anonymous, French Anonymous, Gradual of Aliénor, Anonymous, Montpellier MS Anonymous, Leonin, Perotin
Polyphonie Aquitaine а Saint-Martial de Limoges (xiie siècle) 1. Domine labia mea aperies / Deus in adjutorium meum (Choeur) (1:19) 2. O primus homo coruit, versus (à 2 Voix) (from Matines de Noel) (5:36) 3. Resonemus hoc natali (3:23) École de Notre-Dame (xiie siècle) / The Notre Dame School (12th century) 4. Puer natus est nobis (with trope Gaudeamus hodie), Introït tropé (Messe de la Nativite) (6:00) 5. Kyrie (2:13) 6. Propter veritatem, gradual (7:00) 7. Graduel: Viderunt omnes / Notum fecit Dominus, organum for 4 voices (11:03) Hoquets du Manuscrit de Bamberg (xiiie siècle) / Hockets from the Bamberg Manuscript (13th century) Composer Anonymous, Codex Bamberg 8. In seculum longum (0:59) Chansons mariales du XIIIe siècle / 13th-century Marian Songs 12. Ave Maria gratia plena (2:40) 13. Pia mater gratie, conductus (2:46) 14. Ave nobilis venerabilis, conductus (3:48) Graduel d'Aliénor de Bretagne (xiiie-xive siècles) 15. Kyrie: Orbis factor, polyphony (5:41) Messe Mariale a la Cathedrale de Salisbury (xiiie-xive siècles) Composer Anonymous, English 16. English Ladymass (from Salisbury Cathedral): Kyrie: Kyria christifera (3:58) 17. English Ladymass (from Salisbury Cathedral): Gloria (2:59) 18. English Ladymass (from Salisbury Cathedral): Sanctus - Benedictus (1:44) 19. English Ladymass (from Salisbury Cathedral): Agnus Dei: Virtute numinis (2:42) 폴리포니 Polyphonie [獨, 佛] polyphony[英] 폴리포니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다성(多聲)을 의미하며, 다성음악이라 번역된다. 즉,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단선음악(單線音樂 ; 모노디)을 제외한, 그 이후 현대까지의 유럽 음악은 모두 폴리포니라 할 수 있다. 레보비쯔는 그의 저서 《쇤베르크와 그 악파》에서 폴리포니란 말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느나, 그것은 희귀한 예이거나 아마도 유일한 예일 것이다. 일반적인 관용으로서의 폴리포니, 즉 다성음악은 가장 좁은 의미의 대위법적 기술을 사용하여 작곡한 음악이다. 그러나 대위법이란 말은, 작곡기교적으로 말하면 비교적 한정된 의미를 갖는다. 즉, 병행 오르가눔에서 비롯하여 네덜란드 악파의 극히 복잡한 대위법 기교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성음악의 단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폴리포니를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2개이상의 독립된 성부에 의해 구성된 악곡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이 경우, 한가지 문제 되는 것은 <독립된 성부>라는 말일 것이다. 17세기 이후에 전개된 화성적 악곡, 즉 호모포니 양식은 많은 성부를 사용해서 씌어지는 것이 통례이다. 그중의 주된 성부는 하나뿐이며 그밖의 것은 그것을 반주하기 위해 존재하는 종속적인 것이라는 해석에서 호모포니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인데, 화성 음악 중에서도 다성적인 수법으로 작곡되는 것이 또한 적지 않으며, 다성적인 외형을 하고 있어도 실상은 화성의 연속을 분해함으 로써 그러한 양상을 나타내 곡도 가끔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독립된 성부>라는 말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폴리포니와 호모포니와의 경계가 확실해지지 않는 수도 있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말해서 악곡의 구성은 수평적인 선의 움직임과 수직적인 음의 쌓임으로 대별되는 것으로서, 단선음악 이외의 모든 음악은 이 두 요소 가운데서 어느 하나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다만, 어떤 경우에 어느 한쪽이 주된 것이 되었을 때, 다른 한쪽이 종속적인 것이 되거나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한 것이 될 수도 있으나, 전혀 그 요소가 없어진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 폴리포니(polyphony)란? 폴리포니는 다성 음악 즉 다성부 음악 또는 다선율 음악등으로 번역되는데, 그 초창기형태은 오르가눔으로부터 네델란드 악파에 의한 복잡한 기법, 나아가서는 바하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인 향기 높은 여러 작품에 이르기까지 폴리포니 기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근데 화성음악에서도 폴리포니 기법은 부분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호모포니: 어떤 한 성부가 주선율을 담당하고 다른 성부는 그것을 화성적으로 반주하는 형태의 음악양식. 자의상(字義上)으로는 그레고리오성가와 같은 단선음악(모노디)을 제외한 현대까지의 유럽음악을 모두 폴리포니라고 할 수 있다. 레보비츠도 그의 저서 《쇤베르크와 그 악파》에서 폴리포니라는 말을 이러한 뜻으로 쓰고 있다. 관용으로서의 폴리포니, 즉 다성음악을 가장 좁은 뜻으로 말하면 대위법적 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음악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위법이라는 말은 작곡기술적으로 말하면 비교적 좁은 뜻밖에 지니지 않는다. 즉 병행 오르가눔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악파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대위법기술의 전개에 이르기까지에는 갖가지 다성음악의 단계가 있다. 따라서 폴리포니를 완전히 표현하려면 2개 이상의 독립된 성부에 의해서 구성되는 악곡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이 경우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독립된 성부'라는 말이다. 17세기 이후에 전개된 화성적인 악곡, 즉 호모포니라 불리는 양식은 많은 성부를 사용해서 쓰는 것이 통례이다. 그 중에서 주된 성부는 하나뿐이며 다른 것은 그것을 반주하기 위해 존재하는 종속적인 것이라는 해석에서 호모포니라는 명칭이 쓰이고 있으며, 화성음악 가운데도 다성적인 작법에 의해서 작곡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또한 다성적인 외관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실체는 화음의 연속을 분해함으로써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곡도 더러 있다. 이런 경우에는 '독립된 성부'로 된 것이라는 해석방법에 의해서 폴리포니와 호모포니와의 경계는 불명확하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말해서 악곡의 구성은 수평적인 선의 움직임과 수직적인 음의 쌓임으로 대별되는 것이며, 단선음악 이외의 모든 음악에 있어 이들 두 요소는 어느 쪽도 제외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경우에 한편이 주된 것이 되었을 때, 다른 편이 종속적인 것이 되어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전혀 그 요소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폴리포니적 요소와 호모포니적 요소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폴리포니적 악곡의 주된 악식으로는 모방·카논·푸가·정선율 변주 등의 형태가 있으며 이것들은 네덜란드악파 이후 끊임없이 쓰이게 되었고, 화성음악의 시대에서도 되풀이하여 쓰이고 있다. 낭만파시대에는 기술한 좁은 뜻의 다성적 요소가 가장 적었으나, 현대에는 이것이 다시 우세해졌다고 할 수 있다. 모노디(monody)란? 화성도 대위법도 없는 단선율의 음악, 또는 그 양식. 단음악이라고도 한다. 모노폴리의 경우 여러 악기가 단순히 하나의 성부를 소리 내는 반면 모노디는 레치타티보(낭송양식)의 메인 선율에 통주저음의 반주가 붙는다는 것이 모노폴리와 모노디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악기의 반주가 따를 경우라도 그것이 창가 선율의 충실한 중복이거나 즉흥적인 장식을 하고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모노디라 할 수 있겠다. The birth of Polyphony 서양음악의 첫 번째 대혁명 ▶ 단선율, 즉 모노디 시대의 음악은 그저 목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선율이었다. 그리고 오음 음계(pentatonic) 패턴 속에서 만들어진 이 선율은 음고의 변화, 비브라토, 포르타멘토 등과 같은 의식적인 장식들에 의해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또한 동양에서는 음악에 경외심을 갖고 있었는데, 음악에 대한 동양의 이러한 생각은 서양으로 건너와 기독교적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대혁명의 주역, 레오냉과 페로탱 과거 중세 수도자들이 부르던 영창은 우리의 생각처럼 순수한 그런 단선(monody)음악이 아니었다. 그 단선음악에는 드론(drone)이라는 지속 저음이 함께 했는데 이 드론 위로 단선율이 함께 연주되었다. 이때 드론은 우리의 삶이 잠시 머물다 가는 시간 배경과 같은 의미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영원히 계속되는’ 드론 위를 한 선율 선이 부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론과 단선율 사이에 형성된 음정 관계는 최초의 화음을 낳게 되는데, 이 다른 음들 사이에 발행하는 상이한 진동비로 인해 다양한 감정의 긴장과 이완이 만들어진다. 이 우연한 결과는 ‘초기 원시(primitive)’ 음악과 고대 동양음악의 찬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연주자들은 이러한 우연적인 화성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피터크로슬리는 티베트의 외딴 곳에 남아 있던 칸틸레이션(cantillation, 영창)에 대해 언급하며 실제 연주자들은 이것에 대해 어떤 인식이나 생각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 했다. 한편 유럽 기독교 문화에서는 이것을 매력적인 것이라며 가치 부여를 하고 있었다. 음악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이고 신학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인간이 되신(incarnation) 하느님. 또한 하느님을 멀리해 타락한 인간. 서구 기독교는 이와 같은 종교적 상황 설정으로 인해 리듬, 화성 등에 있어 이원적인 개념의 음악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동양에서는 밝고 어두움, 뜨거움과 차가움, 자신과 타인, 선과 악과 같이 이원적인 생각이 도덕적 함의 외에 종교나 철학의 핵심 요소였다. 서양문화에 있어 완수라는 의미는 모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것 안에 있는 많은 다양한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옛날(primitive)’ 사람들은 음고가 다른 두 음이 동시에 울리는 것에 대한 인식은 몰라도 이를 철학적·심리학적인 면에서 개발하거나 발전시키는 데는 별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기독교에서 자신이 인간으로 화하기도 한 하느님은 인간에게 세상의 삶이 죄로부터 벗어나 구속받고 구원으로 가기 위한 순례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런 탓에 기독교는 이원적인 의미의 십자가란 상징물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십자가는 수평선에 수직선을 가로질러 얹어놓은 것으로 영원을 상징하는 동양의 원 모양의 상징들과는 구별된다. 그렇다면 서양음악의 첫 번째 대혁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모노디로부터 폴리포니로 바뀐 것이다. 화성이라는 결과를 낳은 이 우연적인 혁명은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 혁명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페로탱을 들 수 있다. 페로탱은 그의 스승으로 여겨지는 레오냉과 늘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12세기에서 13세기로 바뀔 무렵, 폴리포니를 만든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레오냉과 페로탱은 다른 많은 익명의 작곡가들과 더불어 노트르담 악파의 음악가로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당과 같은 종교시설에서 봉직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다만 레오냉이 편찬한 <오르가눔 대전집(Magnus Liber Organum)>이 주교좌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정도만이 확실할 뿐이다. 오르가눔과 콘둑투스라는 폴리포니 이 <오르가눔 대전집>은 두플룸(duplum)이라고 하는, 부가 선율이 있는 평성가 악보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평성가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선법들로 이루어졌다. 이 교회선법은 옥타브 안에 온음고 반음의 배치를 달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 현재의 장단조 음계의 평균율과는 차이가 있으며, 음향이나 정서적인 면에 있어 독특한 특색을 보인다. 교회선법에는 무지카 픽타라는 변화음(대부분 B♭이나 F#이다)이 있다. 이것은 F에서 B음 간의 온음 세 개로 이루어진 음정(트리톤)인 ‘악마의 소리’, 증 4도 음정의 ‘불완전성’을 ‘정정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선법은 이런 변화음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온음계(diatonic)를 바탕으로 한다. 한편 폴리포니는 다양한 타입으로 나뉜다. 우선 오르가눔(organum)을 들 수 있다. 이 오르가눔의 평성가는 음가가 길어 여기에 붙는 가사의 의미를 듣고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가사는 세상적인 덧없는 표현 영역을 넘어선 종교어로서의 기능이 강하다고 할 서 있다. 그리고 이 평성과 위(때로 이것 아래로 내려오기도 하지만) 음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제 2 선율 두플룸이 놓인다. 이 두플룸 선율은 간혹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단독으로 이것만 작곡되어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콘둑투스(conductus) 타입을 들 수 있다. 이 스타일은 전례보다는 행렬에 사용되는 것으로 ‘진행 중인’ 두 세명의 가수들에 의해 불린다. 행렬을 따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각 성부는 보통 음 대 음으로 정률화된다. 리듬에 있어서는 강과 약을 조합해 세 개를 한 단위로 해 형성된 리듬 모드가 있다. 세련되게 양식화된 리듬형태로 댁틸(dactyl), 아이앰빅(iambics), 아나페스트(anapests), 스폰디(spondees) 등이 있다. 이런 선율 모드와 리듬 모드는 인도 전통음악에서의 라그(rag), 탈(tal)과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선율 음계나 주기적 강약 법칙으로, 우리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공리인 셈이다. <오르가눔 대전집>의 편찬자로 알려진 레오냉은 사실 불분명한 인물이다. 도마같이 의심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전설적인 상상의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니 말이다. 이에 반해 페로탱은 <오르가눔 대전집>을 개정 · 확대하고, 때로는 축소하는 편찬 작업을 펼친 인물로, 사본 필경자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의 완성자’로 추앙 받았던 인물이다. 두플룸에 제 3의 선율인 트리플룸을 첨가함으로써 다성음악의 음악적 감흥을 놀랄 정도로 높인 인물 또한 페로탱이다. 경쾌한 트리플 강약은 삼위일체에 대한 상징뿐 아니라 ‘내쉬고-들이쉬고-내쉬는’ 육체의 자유스러운 호흡 과정과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확대 가능한 개념으로 3/8박자의 곡을 두 마디 들으면 6/8박자로, 네 마디를 들으면 12/8박자의 애교 있는 춤곡으로 들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주기적인 악센트에는 화성과의 함의 관계가 없다. 실제 화성은 절대적인 하느님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는 4도, 5도의 협화음정, 선율적 진행에 따라 우연히 생기는 경과적 불협화음, 그리고 멜리스마 장식들로 인한 화성이 고작이었다. 페로탱은 폴리포니의 육감적인 즐거움을 넘어 육체적인 에너지를 힐데가르트 폰 빙엔 단선율 칸틸레이션에서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 높은 정신적인 차원으로까지 부양시키고 있다. 특별히 이것은 ‘알렐루야’ 같은 단어 위에 빙빙 회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트로프(trope)에서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작자 미상의 라틴어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매혹적인 ‘알렐루야 나티비타스(Alleluia nativitas)’가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도의 부활(Easter-egg), 신앙고백(Christ-Fish), 생명의 양식(Bread of life)과 같은 상징을 통해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견져 구원으로 이르게 한다. 두플룸과 트리플룸은 선율적 개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곡 중간중간에 당김음이 등장하기도 한다. 경과적인 비 화성음은 각 선율의 정체성을 보여주기보다는 떠들썩하게 무시해버리는 음악에 효과적이다. 이 우연적인 불협화는 인도 전통음악에서 볼 수 있는 음고 변화와 비견되는 것으로 놀랍게도 1950년대 미국의 즉흥적인 재즈에서 볼 수 있었던 음악적 특장들을 예견한다 하겠다. 미니멀리스트의 본향, 페로탱 음악 존 콜트레인 같은 아티스트들은 아프리카적인 것을 인도의 폴리모드(polymodality)와 폴리미터(polymeter)에 결합시킨 연주를 들려준 바 있다. 미니멀리스트의 대부인 스티브 라이히는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발리 등에서 몸소 생활 체험으로 경험한 현지 문화와 음악을 자신의 멀티모드, 멀티미터 음악에 적용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런 작품 구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페로탱으로부터 얻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 란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또 다른 초창기 미니멀리스트 테리 아일리 또한 1980~90년대 주로 즉흥적인 피아노 작품으로 페로탱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작품 활동을 한 바 있다. 힐데가르트 혼 빙엔의 모노디들이 새로움을 좇는 애호가들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폴리포니의 탄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손에는 페로탱, 다른 한 손에는 라이히와 라일리를 들고 비교하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결론은 인간의 의지와 자아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서양의 전통적인 관념이 너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13세기 폴리포니가 이에 대한 관념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들려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페로탱 최고의 작품들 중에는 두 개의 4성무 작품 , 이 있다. 비교적 생동감 넘치는 평성가 베이스, 두플룸, 트리플룸은 자유로운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선율과 리듬은 종교적인 거룩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러나 네 번째 성부의 진행은 간헐적이다. 또한 주기적 강약의 박자를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단편적이며 드론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어쨌든 각 성부는 칸투스 피르무스의 장식적인 부차적 성격을 갖고 있으나, 각 성부는 모노디처럼 단독으로 불릴 수도 있는 하나의 독립체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아침, 즉 실제적인 영적 재생을 의미하는르네상스에 대한 흥분된 기대도 숨어 있다. 에서는 솔로 독창 성부가 합창곡풍의 응창 성가와 얽어져 있는 그라두알(Gradual)이다. 가사는 ‘세상의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에 의한 구원과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짤막한 내용의 텍스트다. 음악은 즐겁게 뛰어가듯 움직이며 기분 좋은 법석을 피우는데, 각 성부들은 세 개의 원형 선율을 그리며 흥겹게 찬송한다. 원시적 신비함과 소박한 맛을 들려주는 힐리어드 힐리어드 앙상블의 연주를 감상할 것을 권하고 싶은데 이 단체는 무지카 픽타, 조율, 음의 정조법(intonation)과 같은 연주 실제에 관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는 단체자. 오늘날의 평균율은 이들의 음악과 이질적이다. 힐리어드 앙상블은 피타고리아 조율과 민톤(mean-tone) 조율 사이의 다양한 절충안을 찾아 연주하고 있는데, 1996년 힐리어드 라이브 시리즈 음반에 실린 해설지에는 연주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이 설명되어 있다. 이 단체의 연주는 엄격하기로 유명해 자신들의 연주에 기악 반주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현악기나 작은 오르간(portative organ)으로 연주해야 될 거라고 생각되는 드론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뛰는 듯한 활기찬 리듬, 개방 음색, 선율의 경과적 불협화를 특징으로 한 이들의 연주 접근법은 어지러울 정도로 대담하다. 특별히 비트의 침묵에 의해 패턴 붕괴로 우연히 등장하는 초기 카논 형태에 있어 진면목을 보여준다. 기보된 악보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악보의 패시지를 보면 일반적인 의미의 기능화성 음악이라기보다는 쨍쨍거리는 배음 소리가 특징인 종의 청명한 소리를 닮은 소리를 보여주고 있다.(EX. 2). 의 텍스트 내용은 단순히 하느님께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지만 음악적으로는 무아지경을 연출하는, 규모가 큰 작품이다. 고양된 음악일수록 감정 흥분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무지카 픽타 부분에서는 불안정한 새로운 감각을, 리듬 또한 재즈 느낌을 들려준다. 이 곡을 연주하는 힐리어드 앙상블의 튜닝은 어찌 보면 광대처럼 희극적이다. 페로탱의 음악이 작곡 당시 어떤 소리였는지 알 수 없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칸틸레이션은 거룩하고 감미로우며 놀랄 정도로 초자연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힐리어드 앙상블의 연주가 보다 인상적이고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해석 면에서 매우 기교적이고 세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론 페로탱 이후 8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제 3세계 폴리포니 음악에서처럼 원시적인 신비함과 소박한 맛을 들려준다. 페로탱이 활동하던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는 종교 중심의 신앙 시대에서 이성과 과학 시대로 바뀌는 중요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지금과 거의 비슷하다. 희망적인 모험에는 공포감에 의한 전율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사실 어느 면에 있어 레오냉, 페로탱과 같은 중세인들의 경험은 우리들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탄생을 앞두고 자포자기 식으로 춤추고 겁에 질려 비틀거리며 당황해하기도 했지만 르네상스는 결국 현재의 우리 모습을 만들지 않았는가? 음악은 그 순간에 탄생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연주자들에 의한 잡다한 생각들은 연주 해석에 있어 몇 가지 대안을 제공한다. 우리는 과거 악보를 접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아시키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 시기의 음악을 활기차고 생기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글 ㅣ Wilfrid Mellers · 번역 ㅣ 이희정 이상은 음악 잡지 「Choir & Organ」에서 발췌한 기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글 출처: polyphony ensemb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