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라흐마니노프 살롱 풍의 피아노 소품 6.7번 - Howard Shelley, piano│라흐마니노프

리차드 강 2013. 3. 3. 06:10

Morceaux de salon, Op.10 - No.6 & 7

라흐마니노프 살롱 풍의 피아노 소품 6.7번

Sergei Vasili'evich Rachmaninov 1873~1943

Howard Shelley, piano

No.7 : Mazurka In D Flat Major - No.6 : Romance In F Minor

     

     

라흐마니노프 vs 차이코프스키

불행한 가정 vs 화목한 가정

라 흐마니노프는 비록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모두 잃었으며 이런 경제적 파탄 때문에 부모님들은 갈라서게 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넘겼고 음악가가 되기 위한 힘든 시기도 이겨내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부유했으며 부모님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비교적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났음에도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예민한 성격을 보였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의 우울증은 타고난 것으로 보고 있다.

     

     

낭만주의 vs 비관주의

라 흐마니노프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함께 관통하는 정서라면 러시아적인 서정과 비애, 슬픔일 것이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신경쇠약을 달 박사의 최면요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극복했듯이 그 음악이 가진 내밀한 슬픔은 비교적 건강한 정신을 토대로 한 낭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극도로 예민한 감성을 타고난 차이코프스키는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 정신적인 도움에 힘입어 창작의 원동력을 얻기는 했지만, 그의 우울은 결코 가셔지지 않는 것이었다. 알려진 대로 그의 죽음이 콜레라이든 아니면 강요된 자살이었든 우울은 그를 마지막까지 따라 다녔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 흐르는 애수의 정조는 라흐마니노프의 애수와는 다른 비관적인 분위기를 한 자락 깔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제자 vs 스승

차 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가 처음 만났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였으며 라흐마니노프는 아직 학생이었는데 대 작곡가는 젊은이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미 교수직에서 물러난 차이코프스키에게서 직접 음악을 배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세계에 일찍부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다름아닌 차이코프스키였으며, 동시에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러시아적 로맨티시즘의 진정한 계승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대 작곡가는 청년 라흐마니노프에게 작곡에 대한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런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자 라흐마니노프는 스승이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을 위해 했던 것처럼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피아노 트리오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을 써서 헌정하기도 했다.

 

유부남 vs 독신남

심 리 치료로 창작 생활의 위기를 극복한 라흐마니노프는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더욱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또 지휘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의 결혼 생활은 원만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이와는 달랐다. 그가 동성연애자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사랑을 거절하지 못하고 결혼을 했는데, 그들의 결혼 생활은 곧바로 파경으로 이어졌다. 그 후 차이코프스키는 독신으로 살았다. 물론 작곡가로서 명예를 얻기는 했지만, 그의 음악과 그가 남긴 편지들을 보면 타고난 우울증,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주위의 편견으로 인한 자괴감 같은 것들이 평생 그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음을 어렴풋이 나마 짐작할 수 있다.

글 : 월간조이클래식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y Rachmaninov (1873-1943)

러시아적 서정을 담아낸 우리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삶을 그린 영화 ‘샤인’에서 주인공이 졸업 연주회 때 들려준 인상깊은 음악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에서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 주인공들(그들은 유부남 유부녀이다)의 복잡한 심경을 노래한 음악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서 먼저 로맨티시즘의 향기를 떠올리게 된다. 또한 20세기 전반기까지 생존했건만 그에게서는 현대 작곡가라기보다는 낭만주의 작곡가의 취향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이것은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가진 한계로 인식되어 당대에는 시대착오적 작곡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낭만적인 작품들은 이제 폄하보다는 연주자나 음악 애호가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그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만든다. 이런 그의 음악세계는 귀족 출신으로 조국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로, 또 작곡가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 길을 걸어온 그의 삶 속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예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어머니는 장군의 딸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은 겉보기처럼 평안하지 못했다. 아버지 바실리가 낭비벽이 심한 데다 여러 가지로 무책임했기 때문에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해 나갔는데, 결국에는 빚을 청산하기 위해 부인이 지참금으로 갖고 온 토지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홉 살까지는 귀족의 자제답게 넓은 집에서 보냈지만, 오네그의 저택이 팔린 뒤에는 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 라흐마니노프의 일반교육은 가정교사에게 맡겨졌고, 최초의 음악 교육은 어머니가 했다. 물론 집안에서는 그가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군대의 사관 후보생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피아노 교사를 초빙해야 할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도 등록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제적인 문제로 파경을 맡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 도시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런 불행한 가정문제는 어린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는데, 음악원에서의 일반 과목 성적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하고 만 것이다. 어머니는 세르게이의 사촌으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실로티와 의논하여 아들을 니콜라이 즈베레프의 문하에 들어가게 했다.

엄격한 스승이었던 즈베레프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술가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교적인 인물로 키워냈다.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의 일요일 오후 모임에서 안톤 루빈슈타인, 타네예프, 아렌스키, 차이코프스키 등 러시아의 유명한 음악가들을 만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피아니스트에서 작곡가로 힘찬 발돋움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에게 받은 음악 수업 덕분에 1887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어려움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88년부터 라흐마니노프는 질로티에게 피아노와 작곡법을, 타네예프에게 대위법을, 그리고 아렌스키에게 화성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작곡가의 꿈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당시 라흐마니노프는 여전히 즈베레프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는 라흐마니노프를 단순히 피아니스트의 재목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라흐마니노프가 작곡을 하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스승과 뜻이 어긋나게 되자 라흐마니노프는 미련 없이 그의 집을 나와 고모의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공부하라고 했지만 그는 고모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살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그의 첫번째 대작이며 작품 번호 1번인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발표된다. 이 작품의 1악장은 음악원 원장인 사포노프가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라흐마니노프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등장하여 연주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는 다른 학생들보다 1년 앞서 음악원의 졸업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단막 오페라 ‘알레코’로 음악원 최고의 영광인 금메달을 받고 졸업하게 되었다. ‘알레코’는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옛 스승인 즈베레프도 화해할 수 있었다. 또한 즈베레프는 제자에게 출판사를 소개시켜주었는데 이후 이 출판사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20년간 출판하게 된다.

음악원을 졸업한 젊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작품 활동을 해나가면서 동시에 피아니스트로서도 공식 데뷔를 해서 청중들에게 큰 갈채를 받게 된다. 또 ‘알레코’가 볼쇼이 극장에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여기에 차이코프스키도 참석하는 등 작곡가로서 그의 전망은 밝아 보였다.

한때 전도 유망했던 라흐마니노프에게 예기치 않았던 절망의 시간이 찾아왔다. 1895년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야심작인 교향곡 1번이 1897년 글라주노프에 의해 초연됐을 때 완전한 실패를 거두자 라흐마니노프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 작품이 다시는 출판될 수 없도록 악보를 회수해버리고 다른 작품의 작곡에도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켜 졸도라도 한 느낌으로 멍한 나날을 흘려 보냈다. 손이나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 처해 있을 때에도 사촌인 실로티는 유럽과 영국, 미국 등 연주여행을 가는 곳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연주해 세상에 널리 알렸고 급기야 런던의 음악협회에서 라흐마니노프를 런던에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1899년 런던 데뷔 무대를 갖고 난 후 라흐마니노프는 협주곡을 만들어 다시 그곳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1번 협주곡이 적당치 않다고 생각한 라흐마니노프는 새 협주곡을 쓰려고 했지만 교향곡 1번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가 존경하던 톨스토이를 찾아가 조언을 듣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자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최면 요법에 의한 심리 치료를 받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되다

결혼까지 하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새롭게 자신감을 얻어 작품 활동은 물론이고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몇 년을 활동하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1917년 러시아를 떠나 서유럽으로 향했다. 곧 가족들도 뒤를 따랐고 프랑스, 스위스에서 활동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 정착해서는 작곡보다는 연주 활동에 치중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은 그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다. 그는 4개월 동안 40여 회의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물론 그는 당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뛰어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거대한 손과 큰 체구에서 터져나오는 강렬하고 화려한 기교는 가는 곳마다 청중들의 박수 갈채를 이끌어냈다.

그의 탁월한 피아노 실력은 이미 음악원 시절부터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을 정도였다. 항상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무대에 올랐던 그는 페달 사용을 지극히 절제했음에도 빌로드 같이 부드러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작품도 직접 연주했는데 이렇게 바쁜 연주 생활에 쫓기느라 작품 활동은 활발하게 진행하지 못했다.

1926년이 되어서야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코렐리 주제에 의한 랩소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교향곡 3번, 칸타타 ‘종’, ‘3개의 교향적 춤곡’ 같은 작품을 썼다. 또한 라흐마니노프는 1929년 4월부터 1941년 12월 사이에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녹음했는데, 지금 우리는 이 음반들을 통해 그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전설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적 서정을 노래한 음악가

피아니스트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날린 그였지만 불행히도 작곡가로서는 평론가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했다. 새로운 작곡기법을 찾아 나선 20세기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오히려 그의 정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로 뒷걸음질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음악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밀한 음악언어에서 풍겨나오는 로맨티시즘의 향기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관현악 기법이 빚어내는 그의 음악적 개성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피아노 음악에서 이루어놓은 성과는-낭만적 정서와 내면의 고뇌를 실은 비르투오시즘에 있어서-역시 그와 같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쇼팽과 리스트에 견줄 만하다. 또한 미국에 살면서도 서구 생활 양식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고, 언제나 러시아를 그리워했던 라흐마니노프였는데, 그는 어느 시기의 작품에서건 러시아적인 서정을 담아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무리하게 연주여행을 강행하며 살아가다 끝내 몸이 상한 라흐마니노프는 1942∼43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를 결심했는데, 그는 1943년 2월 17일 연주여행을 마친 후 병세가 악화되고 말았다. 검사 결과 그의 병은 암이었고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라흐마니노프는 그로 한 달여 뒤인 3월 28일 미국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길영│음악 칼럼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I RACHMANINOV (1873-1943)

라흐마니노프의 가문은 유서있는 러시아 귀족이며, 아버지는 근위대의 대장이었다. 부계의 할아버지도 역시 군인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도 있어, 아마튜어 피아니스트로서도 다소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라흐마니노프는 4세 때부터 교양이 높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농노해방이후 사회적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점차로 농토를 잃게 됐고, 1882년 19세 때에 양친이 서로 별거하게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페테르부르크에 옮겨서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의 유아과정에 입학, 피아노공부를 계속했다. 85년 사촌형 알렉산드로 실로티(A. Siloti)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 니콜라이 즈베레프(N.S. Zverev)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실로티 역시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는 리스트에게 사사하여 90년부터 모교의 교수가 된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외에도 화성학과 작곡법을 아렌스키(Arensky)에게 ,대위법을 타니예프(Taneyev)에게 배웠고, 뒤에 실로티에게도 피아노를 배웠다. 재학시절부터 그는 작곡을 시작하여, 9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작곡된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실로티에게 바친 곡으로서, 모스크바의 구트헤일 출판사에서 op.1(작품번호 1번)으로써 출판되었다.

91년에는 피아노경연에서 제1위로 입상, 이듬해 졸업작품으로 단시일에 쓴 오페라<알레코>로써 금메달상을 획득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이 오페라는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으로 93년에 볼쇼이극장에서 첫공연을 가졌다. 92년에는 피아노곡집 <홪상적 소품집>도 작곡되었다. 그 곡집의 제2곡인 전주곡(C#단조)은 그의 피아노곡으로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93년 존경하던 치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맞게되자, 그는 이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하기 위해서 피아노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D단조)을 작곡했다.

이 해 모스크바의 마린스키여자전문학교의 피아노과 교사가 되는 한편, 러시아명지를 순회연주하여 명성을 떨쳤다. 95년에는 교향곡 제1번(D단조)을 작곡, 이곡은 97년에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첫 공연을 가진 바 있으나 아주 평이 나빴다. 이에 의기소침한 나머지 그는 한동안 다른 길을 택하여 오페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으나 , 이것 역시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98년 런던 필하모니협회의 초빙을 받아 영국에 건너갔고, 피아니스트/지회자로서 자작을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귀국하게 되자 제 1교향곡의 실패에서 받았던 정신적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아서 새로운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도록 청탁을 받으면서도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모스크바의 정신병과의 명의 사다르박사의 치료로써 신경쇠약은 완치되고, 1901년에 피아노협주곡 제2번(C단조)을 완성 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첼로 소나타(1901), 13의 프렐류드(1903~4)등의 걸작을 낳게됐다. 05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의 지휘자를 맞게되고, 이무렵에 오페라 <인색한 기사>와 <프란체스카다 리미니>를 작곡, 동극장에서 초연되었다.

07년부터 09년까지는 드레스덴에 살면서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 교향곡 제2번(E단조)과 피아노 소타타 제1번(D단조), 교향시 <죽음의 섬>을 썼다. 제2교향곡은 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같은 해 초연된 스크랴빈의 교향곡 제4번<법열의 시>를 능가하여 클린카상 제1위에 입선된 걸작이다. 09년 미국을 순회연주하고, 보스턴교향악단을 지휘한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한편, 피아노협주곡 제3번(D단조)을 작곡했다. 10년에 귀국하여 17년까지는 주로 피아니스트,지휘자로 활약하고, 피아노곡및 가곡 작곡에 손을 대었다.

이 무렵의 작품인<성 크리소느토무스의 전예악>은 옛러시아의 즈나메니 성가를 인용한 것인데, 20세기의 러시아정교의 전례음악으로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에게 또다시 크나큰 시련이 들이닥쳤다. 러시아혁명은 그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귀족출신인 그는 공산정권이 싫은 나머지 1917년 말에 파리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정주하며, 해마나 여름에는 스위스에서 정양을, 가을에는 유럽의 곳곳을 순회연주하는 식의 생활을 되풀이했다.

26년부터는 오랫만에 작곡을 위한 붓을 들어 피아노협주곡 제4번(G단조)을 완성했고, 그뒤 34년에는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36년에는 <교향곡 제3번>(A단조), 40년에는 <교향적 무곡>을 작곡했으나, 그 가운데서 <파가니닌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만이 일반에게 알려져 있다. 이무렵 그는 고국 러시아로 북귀 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크랴빈이나 바실렌코등이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 받을 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육중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정력적인 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는,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고, 특히 자기작품의 연주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출처 : 세광출판사 <음악대사전>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

     
     

1899년의 라흐마니노프, 모스크바 글린카 박물관 소장. 벽에 차이코프스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때 받은 금메달 증명서,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푸가와 피아노 작곡과정의 수료증과 아울러 '금메달'상을 받았는데, 그에 앞선 수상자로는 타네예프와 코레첸코가 있었다. 스크랴빈은 아푸런 상도 받지못하고 음악원을 졸업했다.

     
     

유럽으로의 연주여행 길에 오른 라흐마니노프,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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