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제3세계 음악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 빠블로 네루다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혁명의

리차드 강 2009. 4. 10. 17:42

Mikis Theodorakis & Pablo Neruda - "Canto General"

"Canto General " 모두의 노래 (2004)

테오도라키스 & 네루다 2004

CD 1. 2 - Track 전곡 연주

 

Canto General Mikis Theodorakis ; Pablo Neruda  (Juni 2004)
Neruda, Pablo 1904-1973

Maria Farandouri, Petros Pandis, ST. Jakob's Chorus
Direction Stefan Skoeld, Stockholm Orchestra , Direction Mikis Theodorakis
Recording : Live Recording at Olympia Halle Munich
Label : FMRecords - Greece 1975 / 2004

     

Disc 1
1 Allgunas Bestias (몇몇 짐승들)
2 Voy A Vivir (나는 살리라)
3 Los Libertadores (해방자들)
4 A Mi Partido (나의 당에게)
5 Lautaro (라우따로)
6 Vienen Los Pajaros
(새들이 온다)

Disc 2
1 Sandino (산디노)
2 Neruda Requiem Aeternam
3 La United Fruit Co.
(유나이티드 푸르츠 사)
4 Vegetaciones (식물)
5 Amor America (사랑하는 아메리카)
6 Emiliano Zapata (에밀리아노 사빠또에게)
7 America Insurrecta (반란의 아메리카)

시대의 고난을 치열히 헤쳐나간 두 예술혼의 운명적 만남.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 빠블로 네루다 [Canto General (모두의 노래)]

민중의 노래, 고난의 악보위에 아로새기다. 시대의 고난을 온몸으로 부딪혀 이겨낸 두 거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빠블로 네루다의 숙명적 만남. 오라토리오로 승화된 이 시대 민중의 삶을 향한 뜨거운 예찬

국내 최초로 번역된 네루다의 대표 서서시 '모두의 노래' 수록. 72p에 달하는 빠블로 네루다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앨범제작동기와 앨범 리뷰 booklet. '모두의 노래, Canto General' 공연 실황중 테오도라키스가 직접 지휘한 최고의 완성도와 음악성. 테오로라키스 음악의 최고의 해석자 마리아 파란두리, 페트로스 팡디스 참여. 96khz/24bit 리마스터링을 통한 최초의 음질 구현.

Maria Farandouri

     

 
     

 
     

 
     

[모두의 노래 Canto general] Mikis Theodorakis-Pablo Neruda

추천트랙
cd 1: 3(Los Libertadores),
cd 2: 1(Sandino), 4(Vegetaciones), 7(America Insurecta)

마르크스와 네루다로 상징되던 시대에서 사르트르 혹은 바슐라르가 부활하는 시절로 미끄러져가고 있는 지금은 그야말로 개인의 시대, 해체의 시대인걸까요. 민족주의 혹은 식민지반봉건을 언급하는 일은 매우 촌스러운 것이 되겠지요. 개인의 영역,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그 어떤 가치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월드컵처럼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이벤트를 제외한다면.

빛만큼이나 빠르게 날아가고 소멸하는 시간을 잠시 멎게 하고서, 지구의 시민들이 우중이거나 민중이던 시절로 돌아가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세계를 공포와 광증으로 몰아갔던 20세기 후반부는 숱한 괴물과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정치가, 군인 그리고 학자와 예술가의 이름으로 등장한 그들이 남긴 상흔과 유산 덕분에 21세기는 불확정성의 시대, 카오스의 비탈길에서 미끄러져가고 있을진대 우리가 지금 관심 두는 ‘음악과 시의 영웅’들은 적어도,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항거하며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섰던 천재들입니다. 그것이 빵과 땅의 쟁취를 위한 투쟁이었든, 사랑을 노래하고 자유를 노래하는 음풍농월의 무한분배를 위한 투쟁이었든. 빠블로 네루다 탄생 백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집대성한 방대한 분량의 평전과 함께 그의 시집 ‘모두의 노래’를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만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실황음반이 함께 선보입니다. 이것은 우리(한국사람들)의 역사나 산물은 비록 아니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문화적 지표가 될 ‘공헌’입니다. 그것도 극한의 상업주의가 지배하는 문화적 불황의 시대에 일개 출판사와 음반사가 힘을 합쳐 이룬.

윤이상, 한스 아이슬러, 빅또르 하라 그리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조국의 아픔과 자신의 음악행위를 운명적으로 하나의 지점에서 받아들인 이들. 예술과 양심을 하나의 정점에서 추구한 이들. 그 자신들의 정신적 긍지나 양심보다 더 천박한 현실의 이념의 벽에 부딪혀 억압받은 이들. 그 때문에 오랫동안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음악가들. 예시한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 인물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비록 고령이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업적을 기대하게 할 만큼 열정을 불사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현재 더욱 문제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으며 이제 지구에 몇 남지 않은, 시대정신과 영혼의 자유를 음악 속에서 평생 추구해온 표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7살부터 비잔틴 성가와 그리스 민속 음악을 배워 무반주 가곡을 작곡하기도 하고 합창단을 조직해서 활동하기도 한 음악천재 테오도라키스를 투사로 만든 역사의 시작은 다름아닌 그가 십대였을 때 발발한 2차대전입니다. 독일의 침략으로 혹독한 시련 속으로 빠져든 그리스에서 그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제국주의와 투쟁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영국, 미국, 터키, 독일 등과의 복잡한 지배와 항거의 역사를 써온 조국에서 민족세력인 좌파의 일원으로서 테오도라키스는 구속과 추방, 수감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가 1948년 마크로니소스의 군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그리스의 비극적 상황을 그린 작품 ‘Symphonietta'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이때까지도 그는 이후 다가올 비극과 시련을 예감하지 못하고 오직 희망만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내전과 고난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음악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50년대에 파리에 유학하여 메시앙과 유진 비고트에게 음악분석과 지휘를 배우기도 한 그는 하나하나 역작들을 완성하면서, 그리스 민중저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진화해갔던 것이죠. 그리고 드디어 1971년 칠레 아옌데 정부 출범때 초청된 테오도라키스가 그곳 젊은이들에게 칠레의 자랑 네루다의 시로 작곡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훗날 약속대로 완성된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 초연 현장에 초청되었던 네루다는 병 때문에 참석치 못하고 피노체뜨의 쿠데타 와중에 죽음을 맞이했지요.

그리스의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적 상상력과 칠레의 민중시인 네루다의 시를 만나게 한 것도, 결국은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열렬한 스탈린주의자이자 사랑을 노래하는걸 좋아하던 네루다와, 밑바닥 계층의 음악 렘베티카에 서구적 화성과 예술성, 민족주의를 가미하는 업적을 이룬 테오도라키스. 두 예술가의 짧고 굵은 교감이 끝내 <모두의 노래>라는 민중을 향한 약속이자 선물을 완결짓게 만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선물을 삼십년이 흐른 지금 우리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네루다의 시 수백 편을 묶은 대작인 이 음반은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지휘하고, 테오도라키스의 곡을 가장 완벽하게 해석하는 가수 마리아 파란두리와 페드로스 팡디스, 그리고 성야곱합창단과 스톡홀름 오케스트라가 뮌헨 올림픽홀에서 연주한 실황입니다. 역동적이면서도 초역사적인 이미지를 극적으로 발산하는 곡 ‘Sandino'는 그리스의 신화 속 스펙터클을 상상하게 하기도 하고, 독재체제에 저항하던 민중들의 도도한 물결과 그 격정을, 그리고 자유와 사랑을 꿈꾸는 사람의 영혼을 상징하는 로망이 넘치는 곡입니다. 이 밖에도 해방과 위대한 혁명가들, 남미대륙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격정적으로 노래하는 네루다의 시와 함께 ’네루다를 위한 레퀴엠‘까지 모두 열네 트랙에 총 두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은 대작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음반 <모두의 노래>의 부클릿 또한 가치가 높은데, 음악에 쓰인 네루다의 시 번역문과 함께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네루다와 테오도라키스에 관한 소개가 온전히 번역되어 있어 성의와 진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체 게바라는 수염과 베레모가 멋지지만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자라서 싫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풍경이 오늘의 초상입니다. 민중을 위해 꿈을 꾸고 민중을 위해 고독한 예술의 칼을 벼리던 지난날의 영웅들의 진실은, 이러한 기념비적이고 수고로운 작업이 아니고서는 드러나지도 않고, 가슴으로 느낄 도리도 없습니다.

한때 민족해방을 지고의 과제로 삼았던 민중 시인 김남주가 옥중에서도 네루다를 번역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반면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서 민중과는 담을 쌓은 듯한 정현종이 탐식하듯 번역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는 우리에게 영화 ‘일 포스티노’를 제외하고서 거의 유일하게 각인되어 있는 네루다의 흔적이기도 하지요. 네루다는 저항하던 투사이며 정치가이기도 했지만, 에로티시즘을 숭상하며 오직 사랑을 읊고 싶어하던 연애광이기도 했음을,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평전 <빠블로 네루다>를 통해 새삼 읽고 보니, 그의 적나라한 인간적 면모를 실감하게 되는 묘한 보람이 있습니다. 테오도라키스의 오라토리오를 들으며 네루다의 평전을 읽는 일은 다름아닌 ‘낭만적이고 지적인 성찰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잘난 알랭 드 보통조차 배 아파할 수도 있을.

김수영과 조태일, 그리고 김남주라는 당대의 시인들을 흠모하며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의 열정을 키워온 사람들이 적잖이 있지요. 그리고 차마 윤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김민기의 노래에서 자유정신과 현실주의를 호흡하던 청춘도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 군사독재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유력한 힘들은 따지고 보면 그 시인들과 음악가들이 때때로 던지던 몇마디 시와 노래에서 싹텄는지도 모릅니다. 김남주를 읊고 김민기를 흥얼거리던 때가 있는 사람에게, 네루다와 테오도라키스가 남긴 <모두의 노래>는 대륙과 민족을 뛰어넘은 의미심장한 꽃이자 탄환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비록, 달콤한 멜로디에 모호한 추상어들이 현실을 ‘잊게’ 만드는 노래들과 함께 나른한 위안을 막대사탕처럼 즐기는 일이 더 익숙해진 오늘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음악칼럼니스트 강민석 2005-12-14

     

 

 

     

 

Pablo Neruda (Left), Mathilde Neruda und Mikis Theodorakis (Right), 1972 in Paris

     

가슴에 저며드는 저항과 서정의 노래
위대한 두 영혼의 만남, ’모두의 노래’

아마 우리에게는 아직 없는 것같은데, 브라질에는 빌라-로보스가 있고 그리스에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1925-)가 있다. 민족의 영혼과 토속의 냄새가 물씬 묻어나면서도 서구의 음악어법과 잘 어울리는, 그런 작곡가 말이다. 하기야 그리스나 브라질은 반쯤 서구이고, 우리는 아주 다르니까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무리이겠지만 말이다.
테오도라키스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 ’그리스인 조르바’ ’페드라’ 등 그리스의 토속성과 서정미가 어우러진 음악으로 국내에도 팬들이 제법 많은 인물이다. 특히 작년 여름 아테네 올림픽을 계기로 국내 언론을 통해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다.

그의 숱한 명곡들 가운데는 그리스어가 아닌 스페인어 가사로 된 노래가 하나 있다. ’행동하는 지성’의 전형이자, 중남미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칠레 출신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73)의 시편에 오라토리오 형식의 곡을 붙인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 깐또 헤네랄).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당시 우리에게는 ’민중의 노래’ 혹은 ’대중의 노래’로 발췌번역, 소개된 바 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연상시키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명연설(1948년)로 대통령의 변절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한 네루다가 칩거와 피신생활 틈틈이 써내려간 불멸의 대서사시이다.

중남미의 지리와 역사, 전설과 문명, 미국의 패권주의와 자본에 유린당한 처참한 양상, 그리고 핍박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연히 일어선 민중지도자들의 모습을 절절하고 웅장한, 그리고 때로는 섬세하고 서글픈 어조로 읊조린 이 시편이 그리스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저항운동가인 테오도라키스의 손을 거쳐 불후의 명곡으로 남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1970년 테오도라키스는 파리로 향한다. 청년 시절 유학생으로 청춘을 불태웠던 곳이었건만 군사정권에 의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망명길에 오른 그에게는 꼭 반가운 재회만은 아니었으리라.

거기서 만난 인물이 네루다. 체코의 민중작가 얀 네루다(Jan Neruda)에 매료돼 자신의 이름마저 바꿔버린 이 위대한 시인은 마침 칠레 최초의 민중정권을 수립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 받은 터였다. 과거 정치범으로서 망명과 도피의 신산한 날들을 보냈던 그는 그리스에서 온 이 21년 연하의 음악가에게서 동지애와 함께 정열과 에너지, 그리고 아름답고 깊은 영혼을 발견했다.

테오도라키스는 네루다의 주선으로 칠레를 방문, 민중이 일어나 의로운 사회를 만들려 애쓰는 모습을 목도한다. 아울러 네루다의 수많은 시가 노래로 불리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그는 ’모두의 노래’를 음악으로 승화시키기로 결심한다. 아옌데 대통령은 소장하고 있던 네루다의 시집을 꺼내 들고 몇 편을 직접 낭송하면서 그를 격려했다.

초연은 197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있었다. 청중은 테오도라키스와 네루다를 연호했고, 테오도라키스는 감격에 겨워 전화기를 들었다. 류머티즘이 도져 이슬라 네그라에 머물고 있던 네루다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테오도라키스는 그 다음 차례로 예정돼 있던 칠레 공연에서는 시인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 공연은 무산됐다. 칠레 정국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테오도라키스는 베네수엘라에서 칠레의 쿠데타 소식을 듣는다. 다음 공연 예정지인 멕시코에서는 아옌데의 사망 뉴스에 이어 네루다마저 쿠데타 이후 병세가 악화돼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테오도라키스가 곡을 계속 가다듬고 있던 중에 그리스의 군부독재가 종식되자 그는 귀국한다. 1975년 꿈에 그리던 조국에서의 공연을 하게 됐을 때, ’모두의 노래’에는 네루다의 시집에 없는 곡 하나가 추가됐다. ’네루다를 위한 진혼곡’(Neruda Requiem Eternam)이었다.

한편 칠레는 여전히 군부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다. 테오도라키스의 마음 한구석은 늘 그늘져 있었다. 그러나 1990년 드디어 칠레에도 민선정부가 들어섰고, 그는 1993년 비로소 칠레에서 ’모두의 노래’를 울려퍼지게 할 수 있었다. 칠레 초연 계획이 무산된 지 꼭 20년 만의 일이었다.

네루다 탄생 100주년이던 2004년 테오도라키스는 팔순이 된 몸을 이끌고 다시금 ’모두의 노래’를 지휘했다. 이번엔 스페인에서였다. 마리아 파란두리를 비롯해 1975년 그리스 공연의 주요 멤버들이 모두 참여했다. 그의 나이로 보아 직접 지휘로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국내 최고의 월드뮤직 전문 레이블인 알레스 뮤직이 낸 그리스 FM레코드의 라이선스 음반은 1981년 뮌헨 올림픽 홀에서 테오도라키스가 직접 지휘하고, 마리아 파란두리(Maria Farandouri)와 페트로스 판디스(Petros Pandis)가 성 야곱 합창단(St. Jakob’s Chorus)과 호흡을 맞춰 노래한 실황을 CD 2장에 담은 것이다. 연주는 스톡홀름 오케스트라.

장대하고 웅장한 작품 스케일에 걸맞게 다양한 민속악기들이 어울려 내는 사운드가 일품이며, ’테오도라키스 음악의 최고 해석자’로 꼽히는 파란두리와 판디스의 가창은 격정과 흥분, 절망과 신음, 저항과 희망을 오가며 듣는 이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다른 데서 나온 몇몇 음반에 비해 클래식 음악보다는 월드뮤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 노래들을 듣다보면 비슷한 주제, 비숫한 형식의 성악곡인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하라’가 떠오르는데, ’광주…’보다는 좀더 서정적이고 감싸안는 맛이 있다.

70여쪽에 달하는 해설지에는 귀한 자료가 많이 담겨 있으며, 특히 ’모두의 노래’가 국내 최초로 완역돼 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번역은 평전 ’빠블로 네루다’(애덤 펜스타인. 생각의 나무)의 역자인 서울대 김현균 교수와 라틴 문화에 대해 국내에 꾸준히 소개해온 우석균(서울대 언어교육원) 박사가 담당했다.

서울=연합뉴스 2005.12.21

     

 

     

 

파블로 네루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파블로 네루다는 2004년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인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시와 그의 생애를 알게 된다면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본명은 리카르도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였다. 그의 아버지인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가 네루다의 시 창작을 좋아했다면 우리는 위의 기다란 그의 이름을 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자식의 이름에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경우에도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가브리엘 마르께스로 표기하기 보다는 그냥 마르께스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파블로 네루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서 체코 이름을 발견했고, 그 이름의 주인공이 체코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였다. 물론 그는 여러가지 필명을 사용했으나 최종적으로 네루다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이었기 때문에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中에서)이라고 말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생애

1904년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고 만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스트랄 역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이름을 따 필명으로 삼았다.)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詩作)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두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 15세 무렵의 네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시에 재능을 보였고, 그가 칠레 전역에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것은 불과 20세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동안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게 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때로 도발적이었고, 관능적이었으며 고독과 죽음의 주제와 함께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네루다는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멈추지 않았다.

 

파블로 네루다의 공직 생활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이 말은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억들을 상당히 억누르며 하는 말이다.)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외국의 작가나 시인들이 공직에 나서는 경우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를 비롯해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 네루다의 파리 생활 무렵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그가 아시아에서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파블로 네루다. 투사가 되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 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계급적 존재로 인식했던 그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의지와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의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총가요집>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리고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단지 비현실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슬픈 일이다.모든 것이 현실적인 시인은 모든 얼간이들까지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지독히 슬픈 일이다.단순명료한 규칙이나 신이나 악마가 처방한 성분도 없지만, 이 두 중요한 신사들은 시의 영역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한 번은 첫번째 신사가 이기고, 다음에는 두번째 신사가 이기지만 시 자체는 결코 지지 않는다. - 파블로 네루다 <추억> 중에서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민중의 불꽃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후 칠레가 어떻게 변해갔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의 우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중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도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파블로 네루다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창너머로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마자 장교 하나가 침실로 들어와 집안 수색하겠다고 통고했다. 네루다는 불쑥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시(詩)라네."

 

파블로 네루다 - 영원한 청춘의 시인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갔고 이 시간 현재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칠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들 피노체트 일당에게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는 지금까지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도서 & 참고사이트

마추피추의 산정/ 파블로 네루다/ 민용태 옮김/ 열음사/ 1985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추원훈 옮김/ 청하/ 1992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민음사/ 1994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서성철, 김창민 편/ 까치/ 2001
-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까치 출판사에서 출판한 여러 좋은 책들 중 물을 많이 내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국내의 라틴 아메리카 학회 소속 학자들이 각자 논문을 만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시인, 작가들에 대해 글을 상재하고 있다. 이번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글은 그 중에서 김세훈 선생의 글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 곽재성, 우석균 지음/ 민음사/ 2000년
 - 위의 책이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간략한 통사와 더불어 문화, 예술, 환경 등에 대해서 곽재성, 우석균 두 명의 필자가 재미있게 잘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한 가지 장점을 더 추가하자면 인터넷 시대답게 관련된 사이트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을 꼽으라면 적은 분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대충대충이 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옥에 티인 셈이고, 라틴 아메리카 읽기를 시작하는 분들은 이 책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리란 생각이다.

칠레의 모든 기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지음/ 조구호 옮김/ 크레파스/ 1989
- 미겔 리틴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산티아고 알바레스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미겔 리틴은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때 해외로 망명했다. 칠레 당국은 그의 귀국을 영구히 허가하지 않을 사람 명단에 올려 특별 관리했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귀국해서 독재정권 하의 칠레를 촬영해 전세계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책은 그런 미겔 리틴의 영화 제작기를 마르께스가 인터뷰하여 기록한 것이다.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배윤경 지음/ 이후/ 2000
-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적인 가수이자 칠레의 저항가수였던 빅토르 하라의 일대기와 살바도르 아옌데 그밖에 많은 라틴 아메리카 가수들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게다가 부록으로 빅토르 하라의 노래가 담긴 음반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반드시 사 볼만 한 책이다. 놓치면 아쉬워 할 것이다.

 http://www.uchile.cl/neruda/
 http://vinkka.telefragged.com/neruda/

출처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그리스 반독재운동 상징 "적색분자",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작곡가 데오도라키스(1925~)는 음악적 업적만큼이나 정치적 인물로서 자유와 해방,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한 그리스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그의 삶의 궤적은 그대로 그리스 현대사와 연결돼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데오도라키스는 점령군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항하던 청년단체에 가담하면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이력은 시작된다. 전후 영국의 내정간섭으로 그리스는 좌우로 양분돼 내전(Civil War, 1944~1949)이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이 기간 중 좌익계의 민족해방전선은 외세에 대항해 극렬한 저항운동을 펼쳤지만, 1946년 왕정이 복고되자 빨갱이 사냥은 계속되었고 데오도라키스는 적색분자로 체포돼 마크로니소스 섬의 수용소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턱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6년 여의 내전은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은 반(反)공산주의 연합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종식 후 아테네 음악원과 파리 음악원 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았고 "코플리 음악상" 수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데오도라키스의 젊은 시절 정치적 투쟁은 1960년대 들어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음악으로 나타났다. 그 뿌리는 민족악기 부주끼와 전통음악인 렘베티카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마노스 하지타키스와 더불어 그리스 민중의 정서를 담은 수많은 가요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왕정은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으로 규정했고,  때 마침 평화시위행진 중이던 EDA(좌익민주연합) 의장 람브라키스가 테러로 사망하면서 시위는 격화된다.

이에 데오도라키스는 1963년에 람브라키스 민주청년당(Lambrakis Democratic Youth)를 설립하고, 1964년에 피레우스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적 역량을 지속하였다.

왕정에 대한 반체제 시위는 새로운 의회의 선거를 약속했지만, 1967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계엄령 아래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섬으로 추방당하였다.

또한 검열과 고문은 파시스트 정권의 표현이었다. 좌파 운동과 함께 혁명가요가 대중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군부는 군법령 13호를 발표했다. 그 중에는 직접 데오도라키스의 작곡, 지휘, 연주, 심지어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데오도라키스의 노래들과 같은 네오 키마와 렘베티카는 지식인과 학생의 반독재 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다시 한 번 불을 지피며 부활했고 지하클럽에서 신진 가수들에 의해 맥을 이어나갔다.

데오도라키스는 지하에서 활동하며 '애국전선'을 도모했지만 체포되어 투옥됐다. 하지만 1957년 모스크바 음악제에 그리스 대표 파견단으로 참여했을 때 심사위원 쇼스타코비치와 한스 아이슬러,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가 아서 밀러와 대중음악가수 해리 벨라폰테 등이 주도한 국제 연대운동으로 데오도라키스는 3년여만에 석방됐고, 곧 세계여론에 밀린 군부는 데오도라키스를 국외로 추방시켰다.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세계적으로 그리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약 1천 회의 음악회를 주최했고 '독재에 반대하는 저항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

1983년에 레닌 평화상 수상, 1987년 터키의 국민 작곡가 줄푸 리바넬리와 "그리스-터키 우호 협회"를 발족하였고, 또한 10년 뒤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영토분쟁으로 에게 해의 긴장이 지속되자 "평화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하고 1997년 6월 니코시아(Nicosia: 키프로스)의 '녹색국경'에서 공연했다.

1992년 공직을 사임한 이래 세계평화와 인권운동을 멈추지 않고 클래식 작곡과 지휘에 전념하고 있다. 데오도라키스는 교향곡, 오페라, 발레음악,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등 고전음악에서부터 영화음악과 1,000곡 이상의 가요들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르기도 했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aino)>, 영화음악으로 영화감독 줄스 다생의 1962년<페드라(Phaedra)>와 1964년<그리스인 조르바(Zorba il Greco)>, 1969년 군부독재 당시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vras) 감독의 <계엄령(Stage of Siege, 1972)>등이 있다.

특히 <계엄령>의 OST는 칠레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 "깐토 헤네랄(Canto General: 모든 이를 위한 노래)"을 오라토리오로 만든 "깐토 헤네랄"에서 따온 명곡들로 구성돼 있다.

(배윤경/음악평론가 민족음악협회 회원)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