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잘린 투렉과 골드베르크 변주곡
골드베르크 변주곡'인가 '굴드베르크 변주곡'인가
이 말은 굴드가 이 작품의 해석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정작 바흐 해석에서 굴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군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한 인터뷰에서 굴드는 로잘린 투랙이라고 대답했다. 그에 의하면, 자신이 공부하던 시절 바흐 연주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지던 연주가들은 피셔, 란도프스카, 카잘스 등이었는데, 그들의 바흐는 '최면술을 거는 듯한 방식으로 연주하는 후기 낭만주의 연주 스타일'에 기반을 둔 것이었고, 이러한 스타일은 바흐와는 맞지 않는 것으로 자신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 투랙의 바흐를 들었다는 것이다.
투랙이라.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은 굴드의 녹음과 함께 바흐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특유의 느린 템포 위에 얹어지는 정연한 흐름, 투명한 텍스처, 소박한 듯 하지만 정교하게 조절되는 청명한 음색 등을 절묘한 필치로 섞어내는 그의 바흐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매력을 쉽사리 지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이미 네 번이나 녹음을 했건만, 최근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다시 한 번 녹음을 시도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간판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레온하르트, 피노크, 앙타이, 길버트 등의 원전연주자들의 쳄발로 연주가 바흐 해석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이에 관한 한 피아니스트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싶다. 그리고 이들 연주가들이 그간 이룩한 성취 또한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피아노는 끝인가? 투랙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쇼팽, 리스트, 브람스, 스크라빈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풍부하면서도 감미로운 음향'의 피아니즘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의 입장은 100년의 전통으로 300년의 역사를 대신할 수 없으며, 특정 시대, 특정 양식, 특정 작곡가의 해석에 19세기의 기준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 형상화하는 독자적인 어법과 독창적인 음향을 발견하고 스스로 성숙시켜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그가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들을 비교해 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1988년의 녹음(VAI)에서는 청명하면서도 산뜻한 울림으로 엮어가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정교한 흐름을 살려내고 있으며, 전체 연주 시간만도 90분이 넘어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홀의 두번째 라이브 녹음(VAI)에서는 개개의 음표를 찍어내는 듯한 울림으로 중후한 흐름을 끌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이치 그라모폰의 최근 녹음에서는 '마음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10대 시절 이미 자신이 바흐 연주가라는 사살을 깨달았다는 투랙! 1914년 생이니까 이제 그의 나이 84세... 아직도 바흐를 연주하는 그에게 바흐의 약동하는 리듬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바흐는 그때 그 바흐인가? 아니면 인생의 황혼기에서 만난 새로운 바흐인가? 뫼비우스의 띠는 끝나지 않는 법... -박성수/음악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