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끌어안는 여린 목소리 이지상 네 번째 앨범 《기억과 상상》
2006-08-29 [서정민갑 : 대중음악평론가]
가수 이지상의 앨범이 벌써 4집째가 되었다. 전대협 노래단 건준위로부터 시작하여 조국과 청춘, 노래마을을 거쳐 솔로로 독립한지 벌써 8년째이니 2년에 한 장꼴로 음반이 나온셈이다. 가수가 음반 내는게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일까만은 민중가요 부르면서 먹고 살기 너무 힘든 탓에 음반 한 장 나오는 것을 볼때마다 안쓰러움과 대견함이 뒤섞일 때가 많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정치적 억압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면 이제는 여전한 경제적 어려움과 문화적 척박함이 더 큰 어려움이다. 어떤 음반을 내도 예전처럼 팔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민중가수라고 해도 알아주기는 커녕 손쉽게 부르는 장기판의 졸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으니 제 살길 찾으며 음악 생활 계속해 나가는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벌써 이지상의 앨범이 4집째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만큼 노래운동의 역사가 흘러왔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이지상이 90년대 대학 노래운동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조국과 청춘 활동을 거쳐 서정적이고 소박한 민중가요의 일가를 이루었던 노래마을 활동을 한 뮤지션으로서 민중가요의 중요한 역사를 함께 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노찾사로 대표되는 80년대 노래운동 출신과는 달리 90년대 노래운동 출신으로서 가장 빨리 개인활동을 시작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래운동의 대중적 인기가 거의 노찾사에게 집중되어 노래운동 출신이라는 것이 특별한 장점이 되지 못하고 아직은 노래패 활동 중심이었던 90년대 후반 상황에서 이지상의 솔로 활동은 이후 민중가요 진영에서 많은 뮤지션들이 솔로로 활동하는 흐름의 기원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음반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안치환을 빼고 이야기한다면 이지상은 민중가요진영에서 가장 많은 솔로앨범을 발표한 뮤지션이며 또한 가장 활발한 라이브 활동을 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이기에 이제는 중견 음악인이라고 불러도 그리 과한 표현은 아닐것이다.
조국과 청춘에서 활동할 때 이지상이 만들었던 곡은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 같은 발랄한 곡들이었다. 그전까지 무겁거나 투쟁적이었던 민중가요의 주류적인 감성과는 달리 20대 대학생들의 상큼하고 젊은 감성을 고스란히 흡수한 이 곡은 당시 대학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고 이후 <바위처럼>과 같은 민중가요 댄스 뮤직의 효시가 되었다.
고단한 삶의 피로와 쓸쓸한 마음의 생채기를 위무하는 듯 슬픔에 젖어 있는 그의 노래는 자신의 지친 마음을 드러내는 자화상과도 같다.
그러나 노래마을 활동을 거쳐 1998년 이지상이 내놓은 첫 앨범에서는 조국과 청춘 시절의 발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울하게 읊조리는 그의 보컬은 고단한 삶의 피로와 쓸쓸한 마음의 생채기를 위무하는 듯 슬픔에 젖어 있었다. 승리와 확신을 말하기 보다는 세월과 외로움을 고백하는 그의 노래는 자신의 지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화상과도 같았다. 솔로로 독립해서 개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그는 첫 앨범에서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들려주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2집과 3집에서도 이지상의 음악은 언제나 기쁨보다는 슬픔쪽으로 머리를 기대는 편이었다. 조금은 서툴고 어눌한 듯한 그의 보컬은 여릿한 마음의 현을 건드리는 <무지개>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같은 곡에서 진가를 발휘하며 이지상만의 울림이 있는 음악들을 빚어냈다. 그밖의 다른 곡에서도 섬세한 노랫말에 어울리는 서정적인 멜로디를 잘 뽑아냄으로써 이지상은 민중가요 포크씬의 흐름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지상의 네 번째 앨범 《기억과 상상》은 이지상이 처음으로 내놓은 더블 시디이다. 이번 앨범에서 이지상은 사회적인 메시지는 기억편에 담고, 개인적인 메시지는 상상편에 담았다. 지금까지의 앨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여리고 순정한 시각으로 <돈과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미련한 세상>을 한탄하면서도 <그대>로 대표되는 사랑과 그리움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부드럽고 은근하게 다가오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은 여전하고 <토막말> 같은 노래에서 느껴지는 슬픔의 울림 역시 그가 실력있는 싱어송라이터임을 확인하게 하기 충분하다.
그럼에도 음반 두장을 계속 이어 듣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단지 곡 수가 많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내놓았던 음반의 분위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송라이팅과 편곡은 음반에 담긴 곡들을 어디선가 들어본 곡처럼 느껴지게 한다. 굳이 일일이 예를 들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전작과 비슷한 음악적 흐름은 음반 전체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여기에 기억편의 <해빙기>와 <오늘도 한 아이가> 에서 보이는 기존곡과의 유사한 전개도 앨범의 가치를 반감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억편의 <편지>나 <겨우 열 다섯>에서 이어지는 감정의 과잉 역시 절제가 아쉬운 대목이다. 더불어 상상 편의 음악들이 상상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이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이지상의 앨범은 개별 곡들의 완성도 높은 창작력에 비해 음반의 완성도가 높지 않은 딜레마가 반복되고 있다. 사실 이지상의 음악이 보컬의 매력이 높지 않아 곡의 완성도로서 음악의 아름다움을 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편곡의 문제이며 또한 프로듀싱의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지상이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올바름의 추구가 음악적 자유로움을 옥죄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슬픔과 안타까움에 대한 토로와 순수함에 대한 믿음과 염원은 민중가요의 중요한 미덕이지만, 좀 더 솔직한 기억의 고백과 좀 더 자유로운 상상이 어울어진다면 기억과 상상의 대화는 전혀 새롭고 다른 음악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벌써 이쯤에서 멈추기에는 이지상은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이 많고 발랄한 상상 역시 넘치는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