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유시인, 이 시대의 저주받은 존재, 그러나...
- 강 헌 / 음악평론가 (백창우 독집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를 듣고)
디스코 리듬이 록과 포크의 정신을 일거에 학살해 버린 1979년에 영국의 트레버 혹은 '비디오는 라디오의 스타를 죽였네'(Video Killed the Radio-Star)를 내놓으며 서구 대중음악의 묵시록을 서술했다. 디스코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M-TV의 등장 전야인 1970년대 말은 서구 대중음악사의 세기말이었다. 서구의 대중들은 과격하고 원시적인 록의 정서와 지성적인 반항의 기치를 내건 모던 포크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달콤한 댄스뮤직에 몸과 영혼을 맡겼다. 밥 딜런은 유대교로 개종했으며 존 레논은 정신병자의 총탄에 희생되었고 레게의 진정한 사제 밥리는 암으로 죽었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이보다 더욱 불행하고 야만적인 사태가 4년전인 1975년에 한국에서 일어났다. 유신의 긴급조치는 갓 발아하기 시작한 이 땅의 새로운 노래문화를 군홧발로 짓밟았으며 애상과 비탄으로 얼룩진 선율과 리듬의 숙명을 거부하고 나선 일군의 젊은 대중음악가들은 시위선동자로, 향정신성 의약품에 관한 위반 혐의로, 드물게는 향군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노래할 수 있는 자유를 구금 당했다. 10·26의 현장에 대학가요제 출신의 트로트 싱어송라이터 심수봉이 술상 말미에 앉아 있었던 70년대 마지막 가을의 장면은 이 땅의 권력자들이 대중음악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에 걸쳐 진행되었던 '통기타의 혁명'은 활짝 타오르기도 전에 다만 불씨로 남아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 심어졌다. 김민기는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며 한대수는 자신을 버린 이땅을 똑같이 버렸다. 이정선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가렸고 조동진은 '작은 배'에서 내려 자기 내면의 동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 갔다. 다만 이 암흑의 시기에 갓 군복을 벗고 다소 촌스럽게 나타난 정태춘이 이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 모던 포크의 정신을 계승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을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권력의 강간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변화가 수용자의 세계에서 일어났다. 80년대라는 잠복기를 지나 90년대에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발병한 이른바 신세대 증후군은 대중음악을 보다 가혹한 상품 경쟁으로, 그리고 보다 시각적인 이미지의 이전투구로 몰고 갔다. 80년대 중후반을 관통하며 한국대중음악의 2차 르네상스를 주도한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군단의 위용도 김현식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급격하게 퇴조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드물었던 음유시인의 존재는 거의 절멸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송창식은 87년의 앨범을 끝으로 침묵을 자신의 언어로 지정하고 있으며 섬세한 감수성의 올을 보여 주었던 하덕규는 종교적 구원 앞에 자신의 음악적 아이덴티티를 희생하지 않았던가?
이 황폐한 모던 포크의 지형도에서 다만 끊임없이 자기개진의 형극을 걸어온 정태춘과 저 80년대 진보주의의 아들들인 안치환과 김광석이 고군분투 중이다. 하루에도 몇 장의 신인 앨범이 쏟아지는 대중음악의 시장에서 오직 자신의 눈으로만 인간과 세계를 읽어 보려는 시도는 이제 낡고 버림받은 음악적 시도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두 말할 나위 없는 것이지만, 포크의 음악적 태도가 언제나 새로운 패션의 변화를 갈망하는 십대와 어울리기 힘든 장르임은 명백하다. 댄스뮤직이나 러브 발라드와는 달리 포크는 그 편성이 앙상하다 싶을 정도로 단조롭지만 그 속에서 날카로운 응시와 구체적인 묘사, 그리고 추상적인 인식의 직관력을 획득해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던 포크의 지지자들은 대중음악이 단말마적인 감정의 일회성 소비재가 아니라 삶의 현실에 예술적으로 개입하는 형식으로 파악하려는 자들이다. 진지한 사고를 정중히 사양하는 이 산업사회의 배경에서 이 장르는 만들기도 어렵고 받아내기도 어려운 음악인 것이다.
손가락으로 간신히 꼽을 수 있는 정도인 한국 모던 포크의 계보학에서 앞의 이름들에 비한다면 백창우의 이름은 어딘지 낯설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진보적인 노래 그룹으로 노찾사와 자웅을 겨룬 노래마을의 리더이자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줌될 수 있다면>의 작곡가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상당히 늘어날 것이고 한때 열풍이었던 '주부가요열창'이나 노래방의 단골 레파토리인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와 <사랑>의 작곡가이기도 하다면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백창우의 정곡을 찌르는 라벨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이 첨단의 시대에 저주받은 음유시인이다. 그의 메시지는 80년대 후반 '아 대한민국'에서 정태춘이 묘파했던 것처럼 강렬하고 직설적이지 않으며 그의 손에서 빚어지는 선율은 안치환의 수많은 노래들처럼 감정을 곧바로 들끓어 오르게 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어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나직한 그의 보컬 톤은 김광석의 기품 넘치는 윤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정말이지 그의 노래들은 이 시대에 존중받고 있는 모든 기준들과 담을 쌓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그의 의의와 한계가 동거하고 있는 결절점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던 포크의 계보 속의 싱어송라이터임을 밝히는 그의 두 번째 솔로 앨범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덕윤산업)는 같은 제목의 두권짜리 시집(신어림 간)과 함께 조용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앨범은 장마비 소리, 바람 소리, 개짖는 소리 같은 음향을 배경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은 어커스틱 기타와 다양하지 않은 표정의 질박한 목소리가 만나 벌이는 조촐한 술판을 연상하게 한다. 그의 마음이 빚어내는 선율은 극적인 도약과 활기 넘치는 질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빠른 템포와 갖은 음향의 조미료에 길든 사람들에게 이 앨범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마인드컨트롤의 교재쯤으로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노래는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무명시인의 작지만 따뜻한 시선을 닮아 있다. 열한 곡의 노래를 다 부르는 동안 그는 단 한번도 목청 높여 웅변하는 법이 없지만 정신 없는 도시와 황폐화하고 있는 농촌의 구석을 찬찬히 정관해 가는 그의 서정은 지금의 대중음악계에선 이미 멸종의 위기에 다다른 것이다.
'아무렴, 삶의 큰 들에 고운 꽃만 피었을라구' <그래 거런 거겠지>에서 슬쩍 밝히는 그의 미의식은 바로 이 앨범의 음악적 기조이기도 하다. 이 미학 정신은 예술이 기교가 아니라 진실임을,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결핍된 삶의 산물임을, 목청높이 공약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는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00그는 오프닝 <장마>와 <나무의자>에서 전통적인 모던 포크의 소박한 선율을 통해 해학적인 동요 풍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발효시킨 <땅>을 통해 이와 같은 미학을 현실화한다. 그의 가사와 선율은 서로를 배반하거나 기만하지 않는다. 그것은 곰삭을대로 삭아서 어느새 얼굴마저 닮아 버린 부부와 같다. 가령 <나무의자>에서 '몇 잔 소주에 흠뻑 취하며', '잊혀진 이름들은 없는지 잊혀진 얼굴들은 없는지' 가만히 점검해 보는 선율의 호흡은 어떠한 강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또렷하게 각인된다.
특히 <저 어둠 속 저 바람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는 반복적인 수사학과 단조롭기 그지 없는 악곡의 호응은 믿을 수 없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 여백의 시정은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며 신제품 수입에만 열을 올려 온 한국대중음악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한번씩 얼굴을 내미는 나레이션은 이 앨범의 음악적 흐름을 차단하는 역기능을 보인다. 그는 많은 말을 하고 싶어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나레이션이 없었다면 <저 어둠 속 저 바람 속>은 오히려 완결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몇몇 노래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것으로 보여지기까지 하는데, 가령 <소년>의 말미와 <겨울나라에 연하나 띄우자>에 삽입된 낭송은 70년대적 뉘앙스가 충만한 이 노래들을 거슬러 올라간 시대의 감상(感傷)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이 사소한 흠집으로 이 앨범이 폄하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앨범 최후의 미덕은 '사랑'이라는 화두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랑은 이미 자본주의의 교환가치로 전락했으며 예술의 이름으로 그것은 값싸게 거래된다. 이 앨범엔 한국대중음악에 미만한 '사랑타령'은 단 한곡도 없지만 노래 모두가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서정은 이 시대엔 이미 미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낡은 '사랑'이 무참하게 버림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백창우가 그렇게 목마라하는 '사람 하나 만나고 싶은' 소망이 영원히 유예될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무 것도 지키려고 몸부림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다.
시대가 질주하고 있는 도로를 거부하고 허름한 오솔길을 선택한 이 낡은, 그러나 소중한 음유시인의 또다른 재산목록을 살피고 싶다면 한꺼번에 나온 두 권의 시집이 친절하게 일러줄 것이다. 앨범과 같은 제목의 이 시집을 읽어 가노라면 바로 어눌한 투의 그의 노래를 바로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노래의 밑그림이기도 한 그의 글은 모노크롬의 그의 프로필과 닮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나중에라도 노래로 만난다면?
'내가 살았던 열한개의 집에서 우리 문패를 달았던 적은 모두 다섯 번 우리의 삶도 어쩌면 한 절반쯤은 그렇게, 남의이름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 가운데 제 얼굴을 가졌던 이는 몇이나 될까 우리의 삶도 어쩌면 한 절반쯤은 그렇게, 다른 얼굴로 사는 것은 아닐까
<문패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