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가요

우리들의 노래 - 김인순 │ 옛날 다방

리차드 강 2009. 4. 14. 17:01

우리들의 노래 - 김인순

비오는 날에는 / 초저녁별 / 안건마 편곡집

김인순 (1953 - 1981)

Track. 02 - 우리들의 노래 (한국 1973)

 

김인순의 '우리들의 노래'를 아시나요?

김추자나 김정미를 [선데이서울]이나 [주간경향] 같은 연애주간지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리고 양희은이나 김광희를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 같은 문학계간지에 비유할 수 있다면, 김인순은 [학원]이나 [여학생] 같은 하이틴 월간지에 비유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저 비교법은 참신하다. 1975년 가요계는 대마초로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이 겨울엔 한 청신한 여가수의 앳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왔다. '여고 졸업반'을 부른 김인순은, 그 노래와 함께 추억의 옹이가 되었다. 1953년생 그녀는, 1981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귀엽고 고운 노래.

글 출처 : 빈섬의 옛날다방

     

우리들의 노래 - 김인순

사랑하는 그대의 검은 눈동자 속엔
나를 사랑한다는 미소가 스며드네

우리 서로 만나면 말은 하지 않아도
못한 말은없었고 할 말도 많아요 라~

나를 좋아 한다는 믿음직한 그이와
남산에서 만나면 산책을 하지요

하루라도 못보면 어쩔줄을 모르고
그러다가 만나면 토라져서 울지요 라~

     

 

 

     

정갈한 사운드 속의 소녀의 노래들

대마초 파동으로 흉흉했던 1975년 12월에 인기가요 차트 정상을 차지한 곡은 "여고졸업반"(장제훈 작사·정민섭 작곡)이라는 곡이었다. "이 세상 모두 우리 꺼라면 / 이 세상 전부 사랑이라면 / 날아 가고파 뛰어 들고파 / 하지만 우린 여고 졸업반 / 아무도 몰라 누구도 몰라 /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 / 뒤돌아 보면 그리운 시절 / 생각해 보면 아쉬운 시간 / 돌아 가고파 사랑하고파 / 아아 잊지 못할 여고 졸업반"이라는 가사가 전부이고 형식도 단순한 곡이지만 워낙 히트한 곡이었기 때문에 마치 한 시절의 스냅 사진을 보는 듯한 곡이다. 주인공은 고(故) 김인순(1953~1981)이다.

"여고졸업반"에 대해서는 약간의 '고증'을 덧붙여야 한다. "여고졸업반"은 [Golden Folk Album Vol.12](오리엔트/신세계, SO-0055, 1975.7.26)에 수록되어 있다. 정상의 히트곡이 가수의 독집에 실리지 않았다는 점도 지금 관점에서는 특이하다. 물론 이 앨범에는 이 곡 외에도 "나는 열 아홉이어요"(이장희 작사·작곡), "소녀의 기도"(장제훈 작사·김인순 작곡)가 실려 있어서 김인순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Golden Folk Album] 시리즈가 나현구(제작자), 이장희(작곡가·가수), 강근식(편곡자·연주자) 등의 이름과 불가분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곡의 배경에 대해 '짐작'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김인순은 정미조("불꽃", "휘파람을 부세요"), 이성애("잠발라야"), 장미리("말 전해 다오") 등과 함께 나현구 사단을 대표하는 여가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들은 '포크송'이라기보다는 '팝 스타일의 가요'를 지향했고 그 결과 TV와도 친화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개하는 음반은 1974년에 발매된 김인순의 독집 앨범이고 오리엔트가 아닌 애플에서 발매된 것이다. 그렇다면 김인순 역시 이장희, 송창식, 김세환, 4월과 5월 등과 마찬가지로 '애플(이종환 사단)로부터 오리엔트(나현구 사단)로 이적한 케이스'에 속할 것이다. 그녀를 후원한 인물이 이장희였음을 고려한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음반은 스타로 등극하기 이전에 발매한 시험작일 뿐일까? 물론 김인순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가을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은 잘못 짚은 것이다. 앨범을 발매할 무렵 김인순이 KBS 라디오의 [젊은이의 라디오] 그리고 1974년 TBC 라디오의 [팝송 다이얼]의 DJ를 맡았다는 사실을 추가한다면 그녀는 이미 '미디어 스타'였다.

김인순은 자작곡을 많이 부르는 가수는 아니기 때문에 이 음반은 '노래' 이전에 작곡과 편곡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작곡자의 이름을 살펴보면 이정선, 강태웅, 백순진(4월과 5월), 이수영(어니언스) 등이다(개별 곡의 작사가와 작곡가는 아래 수록곡에 표기에 두었다). 당시 '통기타 부대' 가운데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인물들이다. 즉, "여고졸업반"을 비롯하여 김인순의 히트곡들인 "푸른 교실", "언니의 일기", "선생님 안녕히" 등 직업적 작곡가들이 '김인순을 위해 만들어 준 곡들'이 아니다. 그래서 김인순이 '만년 소녀'라는 이미지로 고정되면서 대중적인 곡을 부르기 전 젊고 실력 있는 작곡가들의 곡을 어떻게 소화해냈는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몇몇 곡들은 화성 진행이나 멜로디의 윤곽이 매우 '어려운' 곡들이다.

편곡은? "외로운 소녀"의 작곡가이기도 한 안건마의 몫이다. 안건마가 어니언스, 김정호, 석찬, 현혜미 등의 편곡자로 유명하다는 말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고, 오랜 기간 동안 '안건마 악단'을 이끌어 왔다는 경력에 대한 소개도 사족일 것이다. 편곡의 전반적 특징은 피아노가 전체적인 사운드에 품격을 부여하고, 드럼-베이스-기타는 '안건마 편곡집' 특유의 톤으로 탄탄하게 받쳐 준다. 그 결과 '리듬'과 '무드'가 모두 살아 있는 사운드가 나온다. 특히 바운스감이 있는 리듬이 정갈한 무드를 자아내는 "비오는 날에는"에서의 리듬감은 지금 들어도 매우 인상적이다.

곡마다 특징적인 악기를 동원하여 무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안건마의 솜씨는 이 음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초저녁별"에서는 실로폰이, "옛날의 그 노래"에서는 트럼펫이, "사랑해 영원히"에서는 색서폰이, "외로운 소녀"에서는 현악이, "가을밤"과 "새와 고기와 나"에서는 기타가 각각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대부분의 '가요 음반'에서 여러 악기를 배치한 결과는 '임시변통'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음반의 경우는 오히려 '적재적소'라는 인상이 더 강하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한국에서 '챔버 팝(chamber pop)'의 전통을 찾으려고 한다면 이 음반은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음반에서 안건마의 편곡은 어니언스나 김정호의 음반처럼 전면에 나서거나 화려하게 이끌지 않고 배후에서 슬며시 받쳐준다. 그 결과는 정갈하고 깔끔한 사운드다. 이런 사운드는 사춘기 소녀의 일기를 담은 듯한 가사와 더불어 '소녀적 환상'을 표현해 주고, '여고생' 혹은 '소녀'라는 단어로 표현되던 김인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김추자나 김정미를 [선데이서울]이나 [주간경향] 같은 연예주간지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리고 양희은이나 김광희를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 같은 문학계간지에 비유할 수 있다면, 김인순은 [학원]이나 [여학생] 같은 하이틴 월간지에 비유할 수 있을까... 비유가 적절했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여가수'의 경우만 한정해 보더라도, 1970년대 중반은 '문화적 다양성'이 개화된 시기였다. 물론 "여고졸업반"이 라디오와 TV에서 울려퍼질 무렵에는 이 모든 것이 묵사발나기 시작했지만...

P.S. 김인순은 애플과 오리엔트를 거친 뒤 지구 레코드로 옮겨서 몇 종의 앨범을 더 발표한 뒤 1981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http://www.weiv.co.kr
신현준 homey@orgio.net | contents planner

     

美聲薄命…그녀는 만년 <여고졸업반>

70년대 중반 포크가수, 방송DJ로 남자 중고등학생들의 우상으로까지 군림했던 만년 소녀가수 김인순. 35세의 한창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세월이 정지한듯 밝고 푸르른 여고생 이미지의 흔적은 지워지질 않는다.

여고 졸업반 - 김인순

미인은 아니었지만 다정다감하고 깨끗했던 그녀의 노래들은 낭만이 듬뿍 배어나는 옛추억의 가슴떨림을 느끼게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불멸의 히트곡 <여고졸업반>등 소녀적 감성의 노래들은 졸업시즌이 되면 지금도 어김없이 부활하여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1953년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은행간부였던 부친 김오봉과 모친 홍성길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여난 김인순. 윤택한 집안의 늦둥이는 부모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아쉬움이란 없었다. 쾌할하고 사교적이었던 성격뿐 아니라 피아노, 노래, 고전무용, 발레, 운동 등 예체능에도 뛰어난 재능은 항상 주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했다.

남산초등학교 2학년때는 어린이 성우로 KBS 방송출연을 하더니 4학년때는 서울시립합창단 창단멤버로 활약했다. 병약했던 부친은 늦둥이의 재주가 유일한 낙이자 자랑이었다.

김인순은 공부와 운동, 노래로 우등상과 예체능 관련상을 부지기수로 타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던 효녀였다. 또한 상으로 타온 노트, 전과, 사전을 불우한 친구에게 나누어 준 선행으로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은 ‘악순이’‘64방미인’.

늑막염을 앓을 만큼 열심히 공부한 김인순은 명문 이화여중에 입학, 세상을 등진 부친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중학시절의 별명은 몸이 너무도 말라 골골하다하여 말라깽이였지만 본격적인 성악공부로 음악콩쿠르에서 입상을 할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화여고에 입학해서는 200대1의 경쟁을 뚫고 교내방송 아나운서가 되는가 하면 합창대회때는 지휘자로 배구시합때는 센터로 나서며 타고난 재주를 뽐냈다.

대중음악에 빠진 것은 기타를 치는 막내오빠의 멋진 모습 때문이었다. 오빠를 따라 기타를 배웠다. 비범한 음악재능과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김인순은 일취월장, 곧 오빠를 능가했고 고2때까지 학내에서 7번의 개인리사이틀을 가질 만큼 소문난 노래꾼으로 명성을 날렸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수험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녀에게 매일같이 교문앞에서 기다리는 30대 남성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프로였던 <세븐틴>의 PD 김진성이었다. ‘한번만 출연을 해달라’는간청에 못이겨 방송에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문제가 생겼다. 놀라운 팬들의 반응을 접한 김인순은 시험공부보다는 노래에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연세대 신방과 낙방이었다. 처음 맛보는 쓰라린 좌절도 잠깐, 타고난 낙천적 성격은 곧 쾌활함을 되찾고 이번에는 성우가 되기위해 방송국으로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이때 만난 이장희는 그녀를 <0시의 다이얼>게스트로 초청하여 포크싱어로 첫발을 딛게 만들었다.

이때가 73년 5월. 데뷔부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탄탄대로를 질주하며 KBS라디오 <젊은이의 광장>, 74년엔 동양라디오 <팝송 다이얼>의 소녀DJ로 청순한 이미지를 굳히며 성장했다.

데뷔곡은 청소년층에 인기가 높았던 <언니의 일기-아시아,ALS354,75년5월>. DJ뿐만 아니라 가수로도 발판을 닦게 했다. 75년 12월 두번째 앨범 <여고졸업반>은 공전의 빅히트로 가요순위프로 1위에 등극하며 단숨에 톱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친구사이> <선생님 안녕히> <푸른교실> <소녀의 기도>등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하며 청소년층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인기가수로 자리를 굳혔다.

또한 이정선의 <비오는 날에는>, 오세은의 <새와 고기와 나>, 방의경의 <하양나비> 같은 비상업적 작곡가들의 신선한 곡들을 취입하며 음악적 영역을 넓혔다.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던 티없이 맑은 내용의 학창시절에 대한 노랫말은 만년 소녀가수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었다.

78년 9월 김인순은 천호동의 한 교회에서 MBC 아나운서 박유명과 결혼을 하더니 8개월후, 이전과는 다른 풍의 <긴밤에> <용서하는 마음>등 사랑을 주제로 한 신곡을 내며 만년소녀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맑은 소녀의 이미지에 매료되어있던 팬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낙심한 김인순은 가수활동을 접고 평범한 주부로 가정생활에 전념, 팬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2년후 81년, 가수의 꿈을 접기가 힘들었던 김인순은 의욕적인 활동을 재개했지만 예전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77년 2월 어느 신문에 나온 김인순의 <사주>는 소름을 끼치게 한다. “음력 2월에는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격. 사람 조심하고 특히 교통사고에 요주의...” 11년후 그녀는 인천 가좌동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인천시내 모업소 출연후 승용차를 타고 경인고속도로를 통해 귀가하던중 과속으로 달리던 7.5톤 트럭이 그녀의 승용차를 들이 받은 것이다.

늘 여고생같은 푸르름과 더불어 재주가 비범했던 만능탤런트 가수 김인순.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비운의 가수이지만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멜로디들은 70년대를 기억하는 팬들의 마음속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 출처 : 주간한국 2001/11/21 ]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