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A Ceremony of Carols, for treble voices (or chorus) & harp, Op. 28 (22:24) Common Name A Ceremony Of Carols For Treble Voices Or Chorus & Harp Composer Benjamin Britten (1913 - 1976) Conductor Dom Ireneu Segarra Performer Maria Lluisa Ibanez (Harp) Choir Escolania De Montserrat Ensemble Capella e Escolania de Montserrat Genre Cantata Date Written 1942; England Period Modern; 20th Century Venue 1974 Notes This selection contains passages in English and Latin.
1. Procession 2. Wolcum Yole! 3. There Is No Rose 4. That Yonge Child 5. Bululalow 6. A Dew In Aprille 7. This Little Babe 8. Interlude For Harp Solo 9. In Freezing Winter Night 10. Spring Carol 11. Deo Gratis! 12. Recession
벤자민 브리튼(1913-1976)은 20세기 최고의 합창음악 작곡가 중의 한사람으로 그의 작품은 세계 도처에서 공연되고 있다. 브리튼은 그레고리안찬트에서 작품의 소재를 구하여 이를 현대적인 음악과 결합시켰다. 또한 영국음악과 영국 민요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였다.
이곡은 브리튼이 1942년에 예배용으로 작곡한 곡으로 8부로 된 고음성부에 하프반주로 되어있다. 가사는 대부분 작자 미상인 9개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캐롤이다. 6번과 8번을 제외하고 는 모두 중세영어로 되어있다. 1번에서 8번은 아기 예수와 성모마리아를 찬양하는 크리스마스캐롤이며, 9번은 이세상에 아름다움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를 노래한 곡이다.
1. Procession (입장 행렬) 그리스도 탄생하셨다. 우리의 구주가 나셨도다. 천사 기뻐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하느님께 영광있으라. 알렐루야!
2. Wolcum Yole! (오라 하늘의 왕) 오라 하늘의 왕. 아침에 태어난 아기 찬양을 받을 만한 분이여 우리가 기쁨으로 맞이 하리라. 모든 사람에게 순결하고 기쁜 소식이 여기 있도다. 촛불도 기뻐 춤추며 축복의 여왕을 노래하네. 우리모두 큰 기쁨을 나누며 새로운 해를 맞이하자.
3. There is no Rose (어떤 장미꽃도) 이 세상의 어떤 장미꽃도 아기 예수의 순결함 같지 못하네. 조그만 장미 속에 그작은 공간에 하늘과 땅이 깃들어 있네. 그 아기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는 보네. 천사가 목자들에게 노래하며 말하기를 지극히 높은 하느님께 영광 있으라. 우리 모두 이세상의 악을 떠나서 이기쁜 탄생을 축하하세.
4. That yonge child (그 어린 아이) 그 어린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노래로 아기를 달래네. 그 노래는 세상의 누구도 따르지 못할만큼 아름다운 선율이었네. 그녀가 달콤한 소리로 노래를 하면 나이팅게일도 같이 노래하네. 그 노래를 듣지 아니하는 자는 어리석은자.
5. Balualow (자장가) 오 나의 진실로 사랑하는 예수여. 당신의 촛불을 내 마음에 밝히소서. 그러면 나의 마음은 당신께 묶여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이다. 그리고 당신의 영광을 노래로써 영원토록 찬미하겠나이다. 내 마음의 무릎을 꿇고 당신앞에 엎드리어 자장가를 부르리라. 아름다운 노래로.
6. As dew in Aprille (4월의 이슬) 나 흠없는 동정녀를 찬미하리라 왕중의 왕이 그녀로부터 나셨도다. 4월의 이슬이 풀위에 조용히 내리듯 그녀의 품에 내려 오셨도다. 그녀 외에 순결한 여인이 없으니 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하지 않은가?
7. This little Babe (이 어린 아기) 어린 아기가 사탄의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주기 위하여 오셨도다. 그의 오심으로 지공은 떨고 한 연약한 아기로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도다. 마굿간을 진영삼았고 보루는 고작 무너진벽 구유로 참호 삼았으며 그의 눈물은 화살이 되어 적을 물리쳤도다. 그는 우리의 보호자 되시며 우리는 그를 떠나지 않으리라.
8. Interlude (간주곡)
9. In Freezing Winter Night (얼어붙은 추운 겨울밤) 보라! 얼어붙은 추운 겨울밤에 구유에서 떨고 있는 불쌍한 아기를 여관은 빈 방이 없고 아무도 이 어린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내어 주지 않네. 마굿간은 왕자의 궁전이고 구유는 그의 의자 짐승들이 탄생을 축하하며 초라한 옷이 그의 예복이 되었도다. 우리 모두 기쁨으로 나아가서 그의 왕께 경배하며 모든 영광 돌릴지어다.
10. Spring Carol (봄의 캐롤)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골짜기엔 사슴과 양들이 뛰어놀고 밀은 싹이 트기 시작하네.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선물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것. 항상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감사하세.
11. Deo Gracias (하느님께 감사할지어다) 하느님께 감사할지어다. 아담은 4천년이나 기다렸으나 그 시간이 결코 길다 생각치 않았다. 하느님께 감사할지어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었으 되 모든 것은 그가 딴 사과때문 이었다. 하느님께 감사할지어다 만일 사과를 따지 않았다면 우리의 동정녀 하늘의 여왕은 없었으리 그러한 사실이 있음에 축복있으라. 그러므로 우리는 노래하리. 하느님께 감사할지어다.
12. Recession (퇴장 행렬) 그리스도 탄생하셨다. 우리의 구주가 나셨도다. 천사 기뻐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하느님께 영광있으라. 알렐루야!
벤자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서 제정된 그레고리오 성가가 영국 캔터베리 초대 대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으로 소개되면서 비로소 영국의 음악 역사는 시작된다. 10세기엔 윈체스터 대성당에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15세기의 작곡가 존 턴스터블은 유럽에까지(특히 프랑스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뛰어난 창작 활동을 했다. 16세기와 17세기엔 윌리엄 버드·존 다울런드·기번스·토머스 몰리 같은 재능 있는 작곡가들이 영국의 음악을 빛냈다. 그러나 이무렵까지만해도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작곡가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로소 나타난 최초의 국제적 작곡가는 헨리 퍼셀(H.Purcell,1659∼1695)이었다. 그러나 퍼셀은 40세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영국의 작곡계는 오랜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영국의 바로크 음악은 독일인인 헨델이 메꿔 준 셈이다. 오히려 이 시대부터 영국 음악계는 유럽 대륙에서 건너 온 작곡가들의 시장으로 터를 잡는 형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웬일인지 영국 음악계는 창작 부문의 결핍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덧 이러한 현상은 영국의 전통처럼 굳혀 지는가 싶었다. 그러던 가운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단의 재능 있는 작곡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엘가·델리어스·홀스트 등 세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평가도 제한적인 국제성을 가졌기 때문에 명실상부하게 국제적으로 영국 음악의 거장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기를 영국 음악계는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그 소망을 성취시킨 인물이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이다. 헨리 퍼셀 이후 실로 3세기만에 등장해서 영국 작곡계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리는 눈부신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리튼은 작곡가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 였으며 또한 저명한 지휘자이고 음악제의 관리자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브리튼은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우스토프트의 합창단 간사로 활동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에 친숙했다. 영국 중산계급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12세 때부터 브릿지(F. Bridge)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9살의 어린 소년이 현악4중주곡을 작곡할 정도로 놀라운 재능을 보인데 탄복하고 브릿지 자신이 브리튼을 가르치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그의 지도법은 대단히 엄격한 것이어서 후일 브리튼이 위대한 작곡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16살 때, 장학금을 받고 왕립음악대학에 진학하여 작곡과 피아노를 연마하고 이 무렵 '단순 교향곡(Simple Symphony)'을 썼다. 1934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부친이 별세했기 때문에 당장의 집안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당장의 호구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긴 했으나 이때의 경험이 후일 그의 창작에 큰 보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시인 오든(W. Hugh Auden)을 알게된 것은 그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를 통해서 영시(英詩)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에 눈뜨게되고, 시와 음악의 미학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또한 오든과의 교우(交友)를 통해서 예술가의 사회적·정치적 책임에 대해서도 새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후일, 브리튼이 지금까지의 레퀴엠과는 전혀 형태를 달리하는 라틴어 전례문(典禮文)과 오웬의 영시(英詩)를 결합 시켜서 전쟁의 부당성과 민족간의 화해를 모토로 삼는 [전쟁 레퀴엠]을 쓰게된 것도 오든의 영향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實證)인 셈이다.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은 이름난 '행동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그의 생애를 일관하게된데는 어린 시절의 스승이었던 프랭크 브릿지(Frank Bridge)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릿지는 세계 제 1차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이 빚어내는 학살과 엄청난 피해를 목격하면서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자신의 사상을 어린 제자에게 심어 주었던 것이다. 후일, 브리튼은 스승을 일러서 '온화한 평화주의자'로 불렀는데, 이에 비해서 그 자신은 '행동하는 적극적인 평화주의자'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평화에 대한 그의 사상을 처음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15세 때인 1915년에 쓴 수필이 있다. 동물들을 죽이는 사냥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전쟁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잔혹행위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수필이 주변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곧 메어(Walter de la Mare)의 시(詩)를 텍스트로 삼은 가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중의 한 노래는 덫을 놓는 사냥 감시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1936년, 그의 최초의 걸작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는 작품 [우리들 사냥의 조상들(Our Hunting Fathers)]을 썼다. 새와 짐승들에게는 물론 사람들에게 잔혹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오든(W.H.Auden)의 작품을 주제로 삼은 관현악 곡이었다. 이 작품은 동시에 유태인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독일에 대한 명백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과 작품 활동을 상기한다면 1942년, 브리튼과 피터 피어스(Peter Pears)가 미국에서 3년간을 보내고(1939년, 오든이 미국으로 귀화하자 브리튼도 유럽의 불안한 정세를 피해서 피어스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 돌아와서 참전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법정에 서게되는 일련의 사건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브리튼이 참전거부의 의사를 명백하게 밝히자 영국 정부는 그에게 왕립 공군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고 브리튼이 이를 수락하자 참전문제로 야기된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기에 이른다. 또한 영국 법정은 브리튼과 피어스가 군대를 위한 연주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군복무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우리는 벤자민 브리튼이 '행동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학자 켈러(Hans Keller)는 브리튼을 '적극적 평화주의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하는 평화주의는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6일전쟁이 발발 했을 때 "무기를 드느니 차라리 아랍의 탱크 앞에 드러눕는 것이 낫다"고 이 전쟁을 비난한데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브리튼은 자연 속에서, 그리고 영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해변에서 일을 하고 낚시나 테니스, 스포츠 카, 서포크의 모래언덕을 지나는 긴 산책을 즐겼다. 브리튼은 일의 계약을 제외하고는 런던에 가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때는 지휘자로서 또는 반주자로서 참가하였으며, 그의 친구인 테너 가수 피터 피어즈와는 대개의 경우 함께 참가했다. 피어즈는 피터 그라임즈 역을 초연했으며, 브리튼은 그를 위하여 유명한 세레나데 op. 31(1943) 같은 가곡을 많이 작곡했다.
브리튼은 본질적으로는 성악곡 작곡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모든 인성에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유명한 가수들을 존경하고 있었다. K. 페리어는 최초의 루크레시아 역을 맡았으며, D. 피셔 디스카우에게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노래와 격언을 헌정했고, 자네트 베이커를 위해서 '페드라 op. 93'을 썼다. 그의 음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어린이의 목소리에 대한 특별한 기호이다(작은 연통 소제, 캐럴의 제전, 봄의 교향곡, 나사의 회전 중 마일즈 역, 전쟁 레퀴엠 등).
브리튼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서정적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영국적인 작품이다. 실리적인 성격이었던 부리튼은 자기의 음악은 항상 그 어떤 욕구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질을 희생시키지는 않았다. 대단한 교양을 갖추고 있던 그는 시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도 예민했다. 특히 엘리자베스왕조 시대의 거장들의 음악이나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작품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나타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