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희 누님에 대한 추억
박인희 누님은 그 얼굴에 화장도 안했던 분이라 솔직히 '미인'하고는 무지하게 거리가 멀지. 레코드판의 자켓 사진을 봐도 화장기라고는 전혀 없다. 머리 모양도 맨날 긴 생머리이고 옷도 거의 신경도 안쓰는 수준이었다. 꾸며봐야 그 얼굴에 뭐 달라졌겠냐 마는, 그런데도 이 누님은 나에게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다. 나는 박인희라는 누님의 이름은 잊지 않고 누님의 노래는 내 가슴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1956년 3월의 어느날, 몇몇 문인과 음악인이 명동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거나해질 즈음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즉석에서 휴지에 쓴 한 편의 시를 동석한 작곡가 이진섭에게 건네자 이진섭은 평소에 기억해두었던 선율과 가사의 뉘앙스가 일치하는 순간 단숨에 그린 악보를 옆자리의 나애심에게 전달하며 노래를 청한다.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을 노래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인환은 "명동의 백작(伯爵)"으로 불릴 만큼 당대의 멋쟁이었다.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게다가 한껏 멋을 부려 명동을 찾을 때면 명동은 언제나 그를 반겼다. 박인환은 다방 "동방싸롱" 혹은 유명무명의 술집에서 술과 낭만 그리고 문우(文友)들과 어울리며 현실의 고통을 시와 술로 삭였다.
책과의 인연도 남달랐다. 책을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서가였고 해방후에는 2년간 파고다공원 근처에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가 숨진 곳도 지금의 교보문고 후문쯤에 있었으니 죽어서까지 책과의 인연을 이어간 셈이다. 박인환이 "답답해, 생명수(약)를 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심장마비로 요절한 것은 1956년 3월20일, 30세 때였다. 이상(李箱)을 기린다며 사흘간 쉬지않고 술을 마신 것이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다.
지인들은 그가 평소 좋아했던 조니워커 술과 카멜 담배를 시신과 함께 망우리에 묻었다. 박인희 노래의 매력은 문학적 낭만이다. 인생과 사랑을 부드러운 어조로 애기하는 듯한 그의 노래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빛깔이 바래지 않는다.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과에 다니던 1970년 이필원과 함께 "뜨와에 므와"를 결성해 가요계에 데뷔했다. 약속, 세월이 가면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불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최고의 학과를 다닌 것이다. 나도 불문학과를 다닌 여자와 사귄적이 있어서 안다. 대부분의 취업요강에는 "전공 불문"이라고 되어있는 곳이 많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불문학 전공자를 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문학 전공하는 사람에게 진짜 그런 말을 하면 한 대 맞을 수도 있다.
1972년 박인희 누님이 결혼을 해서 이필원과 박인희는 각자의 길을 간다. 그는 DJ와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71년 동아방송 "3시의 다이얼"로 시작한 DJ생활은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모양이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를 무단으로 개사해서 부른 노래이다. 그때는 다 그랬으니까. 이 누님이 지금은 전혀 연락이 안된다고 한다. 그냥 미국에서 조용히 사시는 모양이다. 마지막까지 DJ를 하던 방송국의 PD도 연락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으로 이민가서 산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완전히 연락이 끊어져서 알수 없다고 한다.
이 누님의 얼굴은 어떻게 변했을까? 너무 궁금하다. 보고 싶습니다. 누님 . . . 누님의 노래는 저에게 추억이고 고향입니다.
글 출처 : 동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