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개요 및 배경 슈만은 1810년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적 출판을 하는 한편 문필에도 종사하는 문학가였다. 그는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친은 그것을 불안히 여겨서 라이프찌히 대학에 보내서 법률을 공부시키지만 그는 이 대학의 비크박사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한층 음악에 힘썼다. 결국 어머니가 음악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음악에의 열정이 지나쳐서 슈만은 그만 손가락을 다치고 만다. 그래서 연주가로서의 희망을 잃어버린 슈만은 작곡과 지휘 평론 등에 길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그의 이름을 드높게 만들었다. 비크박사와의 관계로 슈만은 그의 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비크박사는 두 사람의 연애를 반대한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랑은 승리를 거두어서 맺어지게 된다. 결혼 문제로 오래 동안 비크박사와의 다툼에 심신이 피로해진 슈만은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1856년 7월 29일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팔에 안겨 편안히 생애를 마쳤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 많은 가곡이 있으며 음악 평론집 "음악과 음악가"가있다. 슈만은 피아노 독주곡에서는 수많은 걸작을 썼으나 피아노 협주곡은 이 한 곡을 완성했을 뿐이다. 20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30세가 되기까지는 피아노 독주곡만을 작곡했으며 1840년에는 가곡을 이듬해인 1841년에는 관현악곡을 중심으로 작곡했다. 이러한 변화는 클라라와 결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협주곡의 최대의 특징은 제1악장의 제1주제가 제2악장과 제3악장에서도 변형되어 활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멘델스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슈만에 의해서 다시 명확하게 된 것이다. 또한 피아노만을 중요하게 다룬 것이 아니라 관현악과의 일체성 속에 피아노의 아름다움이 발휘된 작품이다. 낭만적인 향기가 감도는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서도 명곡으로 꼽힌다. 동일한 악기편성에 의한 모차르트 K581(수타틀러 5중주)과 쌍벽을 이루는 걸작으로서 이 두작품은 또한 클라리넷을 쓴 실내악곡 중에서 가장 빼어난 명작들이다. 이후 브람스와 뮐펠트는 함께 자주 연주회를 하게 되었으며 뮐펠트는 넓은 지역을 다니며 브람스가 그에게 작곡해 준 작품들을 연주하였다.
슈만에게는 낭만파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작품 54 가단조가 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해 부디 피아노 협주곡을 써 달라는 클라라의 요청에 따라 작곡된 것으로 그들이 결혼한 다음해인 1841년에 제1악장이 작곡되었다. 슈만은 처음 이곡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으로 출판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4년 후에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마음이 변했다. 자기도 그의 곡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곡을 쓰려고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전에 써 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에 손을 가해 이것을 1악장으로 하고 여기에 2,3악장을 덧 붙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현재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 작품 54>이다. 이 곡은 1악장과 2,3악장 사이에 4년이라는 공백이 있음에도 실제로 곡을 들어보면 4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를 전혀 느낄수 없다. 마치 단숨에 작곡한 것 같이 전체적으로 밀접한 구성을 이루고 있어 안정적인 통일감을 준다. 그리고 전곡이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일관되어 있는 것도 이곡의 특색중의 하나로, 당시의 여러 피아노 협주곡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독주 피아노의 기교를 지나치게 뽐내려는 연주 스타일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슈만은 일찍이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기교를 과시하려는 명인 피아니스트를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쓰고 싶지 않다." 라고 적고 있는데 그의 이 피아노 협주곡은 그가 의도했던 데로 되었다. 이 곡의 초연은 1846년 1월 1일에 라이프찌히에서 클라라의 피아노 독주와 멘델스존의 지휘로 연주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곡이 완성되었을 때 클라라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오래동안 슈만의 화려한 피아노 곡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그의 곡을 연주할 일을 생각하면 나는 여왕처럼 행복하다."
작품 구성 슈만의 최대 걸작인 이 협주곡은 처음에 따로 따로 작곡한 것을 후에 합쳐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제1악장은 31세 때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으로 작곡하였고 4년 후인 1845년 봄에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듣고 이 환상곡으로 협주곡을 만들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해 5월 드레스덴에서 2개의 악장을 작곡하여 협주곡으로 완성시켰습니다. 고도의 피아노 기교를 요하는 이 작품은 1847년 1월에 슈만의 지휘 하에 클라라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 되었습니다. 이 곡은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에 환상적이며 내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했는데, 탁월한 기법에 낭만적인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일품입니다. 고도의 연주 기술과 풍부한 인간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낭만파 시대의 대표적인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악기편성] 피아노, 플룻2, 오보에2, 클라리넷2, 파곳2, 호른2, 트럼펫2, 팀파니와 현악5부.
제 1악장 (Allegro affettuoso a단조 4/4박자) 독특한 무드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악장이다. 관현악의 화음과 강력하고 리드미컬한 독주 피아노에 의한 인상적인 서주 후에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로맨틱하고 쓸쓸한 제1주제를 제시한다. 이 주제는 제2, 제3악장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멜로디이다. 독주 피아노가 주제를 확보하여 발전시키는데, 이 동안에 관현악이 여러 가지 형태로 주제의 동기를 보여준다. 클라리넷으로 부는 멜로디가 제2주제에 해당하지만, 음형으로서는 제1주제와 비슷하며, 고전적 소나타 형식처럼 확실한 분석은 불가능하다. 독주 피아노가 주제의 동기를 투티로써 높게 연주하여 전개부로 들어가고 있다. 속도는 안단테로 느려지며, 독주 피아노와 클라리넷, 플룻이 주제를 전개하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부분이다. 돌연 독주 피아노가 격렬하게 서주를 나타내서 관현악과 번갈아 가며 진행되고, 조바꿈을 겹친 후에 목관 악기가 제1주제를 a단조로써 불어서 재현부로 들어간다. 재현부에서는 제시부에서 나온 멜로디를 여러 가지로 변형, 처리하여 슈만이 쓴 카덴짜로 들어간다. 코다에 이르러 알레그로 몰토로 속도를 빨리하여 화려하게 마치고 있다.
제 2악장 (Andante grazioso F장조 2/4박자) 3부 형식으로 간주곡(Intermezzo)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지극히 달콤한 정감에 차 있으며 낭만적이며 느긋한 협주곡풍의 목가라고도 할 수 있다. 현과 피아노의 아름다운 응답으로 주제가 펼쳐나간다. 이러한 분위기는 아마도 지금까지의 협주곡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것일 것이다. 이것이 1악장 제1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간부는 C장조로, 갑자기 첼로에 표정이 풍부한 낭만적인 선율이 연주된다. 이때에 피아노의 움직임은 아주 슈만답다. 이것을 다른 악기가 이어받고 F장조로 돌아온다. 곡은 다시 제1부의 재현에 해당되고 있는 제3부에 접어들어서 최후에는 속도를 점차적으로 늦추어서 1악장의 제1주제를 클라리넷과 파곳으로 느긋하게 장조와 단조로 두 번 상기시킨다. 그리고는 쉴 틈 없이 바로 제3악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 3악장 (Allegro vivace A장조 3/4박자) 소나타 형식으로 첫머리의 강력한 제1주제가 독주 피아노로 연주되는데, 이것도 제1악장의 제1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주제는 독주 피아노에 의해서 확보되고 진행되며 현악기에 의한 리드미컬한 제2주제로 전개된다. 이곳은 C장조로 조바꿈되어 있다. 단순한 음형이기는 하지만, 쉼표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3박자가 아닌, 2박자로 들리는 교묘한 수법이다. 전개부는 관현악에 의한 제1주제의 투티로써 시작되며, 현악기가 푸가로써 전개된다. 오보에 등에 의한 인상적인 멜로디가 삽입되며, D장조로 제1주제가 나타나 재현부로 전개된다. F장조와 D장조는 개성적인 상호 관계는 없으나 감각적으로는 신선미가 있는 조바꿈이다. 슈만의 작품은 코다가 긴 편인데, 이 곡도 270마디를 넘는 긴 것이다. 관현악의 투티로 시작하여 흡사 전개부처럼 발전되어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가 끝난다.
슈만의 음악 : 빛나는 동화의 환상 Edwin Fischer(1886년 10월 6일- 1960년 1월 24일) 나는 그를 존경하는 친구처럼 사랑한다.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는 그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러나 또 나는 그에게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정신의 박명이 그에게 찾아 들기 훨씬 전부터 그의 곡에는 비감의 그늘이 비쳐서 그 깊은 고뇌가 더욱 허무하고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 속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이성이 어디서 끝나고 발광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분명 빛나는 동화에 가득 차 있었고, 축제 같은 불빛과 왕자 같은 자랑과 기품에 가득 차서 - 자주 아름다운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그는 '모든 나뭇잎과 가지 끝에 푸른 불꽃이 타고 있는 붉은 도깨비불이 뒤얽혀서 뱅글뱅글 맴도는' 동화의 숲 속에 자기가 데려와 진 줄 알았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또 흔히 친구까지도 믿지 못하여 저 박명 속을, 저 저녁 어둠 속을 헤매었다. 그리고는 이제 아무도 자기를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이해하여 주려고도 않는다는 감정이 그의 마음에 숨어들어 온 것이다. 이것이 벌써 광기였던 것일까. 그리고 젊고 발랄한 브람스가 새 멜로디를 가슴 가득히 안고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최고의 자기 억제와 이상주의적 심정을 가지고 브람스의 장래를 예언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 줄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 가슴의 미소 속에 스스로 깨져 흩어진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라인강에 몸을 던진 고뇌의 결말 그는 자기 집 가장 위층 가장 구석진 방에 틀어 박혔다. 그리고 훗날 브람스의 손에 의해서 보충된 그의 일기도 그저 드물게 밖에는 그의 내심을 밝혀주지 못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밤의 그림자가 그의 위에 내려졌다. 라인강에 몸을 던짐으로써 자기의 고뇌에 결말을 지우려고 한 그의 시도는 뒤에 브람스의 '라단조 협주곡'의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제 1 주제의 동기가 되었다. 그는 오랜 정신적 박명상태 속에서도 때로는 예전의 정열이 가끔 빛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불꽃은 꺼졌다 지금은 그의 묘 앞에 핀 창백한 백합꽃만이 지난 날의 그의 지상의 순례를 이야기해준다.
만약에 꽃이 움직인다면 그러나 그의 음악은 살아서 마술적인 천재 예술가나 지휘자의 손이 닿으면, 혹은 영감을 받은 가수가 노래 부르면, 그의 마법의 나라가 완전하게 새로운 생기를 띄고 되살아난다. 거기에는 1840년대의 빈이 다시 살아나고, 환성을 지르며 노래 부르고 춤춘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것들이 모두 나서서 열을 지어 가장행렬을 이루고 앞을 지나간다. '여인의 사랑'과 '시인의 사랑'이 에로스의 영원한 불이 되어 사랑의 제단 위에 불탄다. '숲의 전경', '아이들의 전경', '세레나데' 속에 크라이슬러(슈만의 피아노곡 '크라이슬레리아나'의 작곡을 자극했던 '호프만'의 소설의 주인공)의 모습이 요정처럼 나타난다. '다장조의 피아노 환상곡'의 3부작은 피아노의 혼의 상징이다. '폐허'나 "아버지 라인"이나 "성야"를 그는 혹은 가곡으로, 혹은 피아노곡으로 셋 이상의 부문에 걸쳐 작곡하였다. 만일 꽃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라면 장미, 백합, 튤립 등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행렬을 이루어 낭만주의의 "푸른 꽃"에 이끌려 그의 묘 앞에 와서 그것을 장식하리라.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 1810~1856)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로베르트 슈만은 1810년 독일 색스니 주 즈비카우에서 태어나 1856년, 46세에 본 근처에서 죽었다. 슈만은 일생 동안 음악만큼이나 문학에 심취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에 묻혀 살았다. 아버지는 책을 팔고 또 출판하는 사람이었다. 14 세 때 그는 아버지가 출판하던 책에 원고를 발표했다. 그리고 17세 때는 시를 썼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열광케 한 것, 그의 말 그대로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되려 했다. 일곱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고 얼마 후 작곡에도 손을 댔다.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작곡이 썩 괜찮은 직업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1826년 아버지가 죽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어머니는 슈만이 음악 하는 것을 더 불안해했다.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는 법대생이었다. 라이프치히로 온 지 몇 주 안 되어 그는 피아노 선생을 찾아냈다. 그리고 연습에만 매달렸다. 그 선생 댁에는 어린 딸이 있었다. 그녀 이름은 클라라. 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이미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였다. 슈만은 같이 피아노를 배우는 한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었다. 그의 초기 피아노 명곡인 '교향적 연습곡', '카니발' 등은 그녀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하지만 슈만은, 14세의 클라라와 훨씬 더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남녀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 이야기가 음악 자체로 펼쳐지게 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는 슈만의 제자인 브람스와 아름다운 사랑과 존경의 생애를 함께 하게 된다. 클라라는 음악사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 중 하나이다. 1830년 슈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곳 법대 교수가 훌륭한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것. 1832년에 이르면 어머니도 슈만의 음악을 향한 집념에 두 손을 들게 된다. 슈만은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클라라 집에서 한집안 식구 처럼 살았다. 숱한 음악을 작곡했고 소설에도 손을 댔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피아노 연습을 계속하여 유명한 연주자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행이자 다행인 사건이 일어났다. 1833년 그는 손가락 힘을 강하게 해 주게끔 자신이 고안한 연습 기계를 직접 실험해 보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의 길이 끊기고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1834년부터 그는 <새음악 잡지>라는 이름의 잡지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음악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썼다. 뒷날 이 잡지에 특히 그는 브람스를 소개했다. 이름이 아직도 낯선 청년 음악가 브람스를 그는 '베토벤의 위대한 독일 음악 전통을 이을 대가'라고 소개했다. 과연 브람스는 슈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슈만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슈만이 빈을 방문하여 슈베르트의 '위대한 C장조 교향곡'을 발견하여 멘델스존에게 건네 준 것은 1838년이다. 잡지 영향력이 점점 커져 갔다. 이 시기에 그는 클라라를 사랑하게 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운명적인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클라라도 자신을 사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은 금세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딸이 철없어 보였다. 유명 피아니스트로 키웠는데 기껏 작곡가 지망생과 결혼하겠다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보기에 슈만은 은혜를 모르는 제자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싸움이 길고 지리하게, 또 추잡하게 이어졌다. 싸움은 법정으로 비화했다. 스승은 제자를 미성년자 유괴죄로 고발했다. 1840년이 되어서야 둘은 겨우 결혼 승낙을 얻었다. 빈의 한 악기사에서 피아노를 한 대 결혼 선물로 주었다. 이 피아노는 클라라가 내내 쓰다가, 그녀가 죽은 후에는 브람스가 쓰게 되었다. 둘의 결혼 생활은 그지없이 행복했다. 결혼 전에도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사랑은 숱한 작품들, 특히 피아노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클라라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들이 홍수처럼 넘쳐 났다. 두 개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라는 그의 대표적인 연가곡집 등 한평생 작곡한 2백 50여 곡 중 절반이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다. 극심한 우울증이 슈만을 사로잡는일이 잦아졌다. 1854년 2월부터 그는 환청을 듣기 시작 했다. 헛소리는 때론 감미로운 음악으로, 때론 죽이겠다는 위협 소리로 들렸다. 마침내 그는 라인 강에 몸을 던졌다. 자살 기도였다. 다행히 지나가는 배가 그를 건져 내 목숨을 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 병원으로 실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 후 숨을 거두었다. 그의 평생에 걸친 걸작은 피아노 독주곡들이다. 슈만은 자신의 가장 친밀하고 직접적인 감정들을 피아노 독주곡들을 통해 표현했다. 그 대부분은 물론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슈만이 어두운 내면의 고통을 예술로 빚어 낸 것이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그 고통이 견딜 만하고, 급기야 소중해지게끔 되는 그런 열매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