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슈베르트: 교향곡 9번 다장조, D.944 "Die Große ('The Great')" - John Barbirolli - Halle Orchestra (1966 His Master's Voice)│낭만파

리차드 강 2016. 1. 14. 03:27

Symphony No.9 in C major, D.944 - Die Große

슈베르트 교향곡 9번 다장조 Die Grosse

Schubert, Franz Peter 1797~1828

3. Scherzo-Allegro Vivace - 4.1.2 전악장

 

John Barbirolli - Halle Orchestra - Kingsway Hall, London 1964

     

슈베르트 교향곡 9번 다장조 D.944 "Die Große ('The Great')"

슈베르트가 작곡한 9개의 교향곡 중 마지막이자 가장 긴 교향곡으로, 작곡가가 사망하기 직전인 1828년 완성되었다. "연주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슈베르트 생전에 연주되지 못하다가 사망한 지 10여 년 뒤인 1839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펠릭스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알레그로, 안단테 콘 모토,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알레그로 비바체의 4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흔히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교향곡》과 비견하여 '제9번'이라 부른다. 그러나 곡의 웅장함이나 깊이에서는 《합창교향곡》에 비견되지만, 곡 전체의 스타일과 서법, 관현악 구사 등에 슈베르트 음악의 특징인 매력적인 아름다움과 고요함이 배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품이 초연되기 전에 R.슈만이 작곡가의 자필악보를 발견하고 슈만 자신의 신문인 《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ur Msik》를 통해 "성스러울 정도의 음량을 지닌 작품"이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슈만은 또 자신의 첫번째 교향곡인 《봄교향곡》을 작곡하기 전에 《대교향곡》을 여러 차례 들었으며, 슈베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24년에 슈베르트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교향곡을 "대 교향곡"이라 표현했다. 그것은 이전에 쓴 작품보다 모든 면에서 장대한 교향곡이라는 뜻에서 였다. 슈베르트는 그문덴과 가스타인에서 휴일을 보내며 만사를 잊고 작곡을 시작했다. 한 친구의 술회에 따르면 이 때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길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슈베르트의 가장 오랜 친구이자 처음 그의 전기를 쓴 요제프 폰 슈파운은 이 곡을 일컬어 "작곡자 자신이 너무나 애착을 가졌던 대 교향곡"이라며, "슈베르트는 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교향곡을 가스타인에서 작곡했다"고 덧붙인다.

작품에 드러나 있는 남성적인 힘의 전개는 상대적으로 여성스러운 8번 “미완성”과 대비되는데 이는 마치 베토벤의 7번에서 느끼는 베토벤의 6번과의 대비 같은 것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다가 남성적 힘만을 강조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에 대한 메시지도 피력한다는 점에서 베토벤의 9번을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이 9번은 슈베르트를 존경하던 슈만이 슈베르트의 묘에 다녀오면서 그의 형의 집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발견하여 이후 멘델스존이 초연하게 됩니다.

     

     

천성적인 보헤미안이며 평생 이렇다 할 고정 수입도 없이 가난하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살았던 슈베르트. 그의 천재는 극히 제한된 작은 서클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내성적이어서 그토록 많은 명곡을 썼으나 그의 작품이 생전에 공개 연주된 기회가 거의 없었다. 넘쳐 흐르는 선율의 원천을 생각게 하는 제9교향곡도 1828년에 작곡했지만 너무도 방대하고 연주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빈 악우협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이어 곧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38년에 낭만파 작곡가 슈만이 빈의 베링 묘지를 찾아갔다. 그 묘지에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베토벤의 무덤에는 장미꽃이 꽂혀 있었지만 슈베르트의 무덤에는 꽃 한 송이 없었다. 가장 존경하는 두 음악가를 생전에 볼 수 없었던 슈만의 머리 속에, 그들이 살았을 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만나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바로 슈베르트의 친형인 훼르디난트가 아직 살고 있음을 안 슈만은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로 즉시 그곳을 찾아갔다. 훼르디난트는 동생을 추모하여 찾아온 슈만을 반갑게 맞이하며 동생 슈베르트가 남긴 유품을 이것저것 보여 주었다. 이윽고 책상 위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쌓여 있는 미발표의 초고에 눈이 갔다. 바로 슈베르트가 죽기 9개월 전(1828년 3월)에 작곡한 만년의 걸작 교향곡 제9번이었다. 악보의 페이지를 넘기며 슈베르트 특유의 격조 높은 곡상의 전개에 슈만은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을 가눌 길이 없었다. 훼르디난트에게서 초연의 승낙을 얻은 그는 초고를 즉시 라이프찌히로 보냈다. 라이프찌히에는 그 무렵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멘델스존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이듬해인 l839년 3월 21일, 멘델스존의 지휘로 역사적인 초연이 이루어졌다. 슈베르트는 마지막 교향곡인 이 제9번에 대해 대단한 자신을 갖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친구들에게 "이제부터는 가곡을 쓰지 않기로 했어. 앞으로는 가극과 교향곡에 힘을 쏟을 거야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내성적인 그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그는 이 곡을 완성하자 곧 초고를 싸 들고 전 오스트리아 음악협회를 찾아갔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용이 어렵고 거창하며 지나치게 길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소심한 슈베르트는 설명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와 버렸다. 이 곡이 초연된 뒤 슈만은 그가 주관하던 "신음악시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솔직히 말해서 이 교향곡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슈베르트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슈배르트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 베푼 것을 생각해 볼 때 너무도 지나친 찬사이므로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그렇다고 생각된다면 이 교향곡을 들어 보라. 이 속에는 당당한 음악상의 작곡 기술 외에 갖가지 다채로운 생명이 나타나 있고 도처에 깊은 의미가 있으며 하나하나의 음이 날카로운 표현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슈베르트 특유의 로맨티시즘이 넘치고 있다. 그리고 또 마치 장 파울의 네 권으로 된 장편 소설처럼, 천국적으로 길다.

슈베르트의 '제9번' 하면 꼭 인용되는 말이 슈만의 이 "천국적으로 길다"는 표현이다. 단지 시각적인 길이만이 아니고 '끝없이 이어가는 신성한 아름다움'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제8번 "미완성"과 제9번 사이에는 약 6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지만 두 곡의 성격 또한 그 세월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제8번 "미완성"은 내성적ㆍ서정적으로 썼으나 제9번은 외향적이며 밝고 당당하다. 슈만도 지적하고 있듯이 전체적으로 로맨티시즘이 흘러 넘친다. 목가적인 호른의 선율로 시작하는 제1악장 서주의 아름다움은 슈베르트 서정의 최고의 응집이다. 이 악장의 두 개 주체의 유연한 진전도 눈부시다. 제2악장 안단테 콘 모토의 우수에 가득 찬 멜로디도, 또 제3, 제4악장의 발랄한 곡조도 슈베르트가 자신감에 넘쳐 작곡에 전념하고 생명력을 불태웠음을 느끼게 해준다.

(안동림-이 한 장의 명반)

     

     

슈베르트 교향곡 9번 다장조 D.944 Die große

작곡 : 1825~26년
초연 : 1839년 3월21일,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49년(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2, 트럼펫 2, 트롬본 3, 팀파니, 현악 5부
연주시간 : 약46분

 

작품개요

1825년 5월부터 10월까지 슈베르트는 긴 여행을 떠났는데, 그 여행에는 그문덴과 가스타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머무르고 있던 곳에서 신세를 진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베르트는 그때 작곡한 대(大)교향곡에 대해서 조금씩 언급했는데 그 때문에 그 시기의 전후에 대 교향곡이 작곡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 대 교향곡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채로 지명을 따라 '그문덴 가스타인' 교향곡 D.849로 통해 왔지만 최근에 와서 음악학의 연구로 이 시기에 작곡된 교향곡은 '대 C장조' D.944로 판명되었다. 참고로, 이 곡의 자필 총보는 비엔나 악우협회(Wien Musikverein)에 보존되어 있으며, 같은 시대의 필사악보도 존재한다.

초연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1839년에 이루어졌지만 슈베르트가 살아 있을 때에 비엔나 악우협회에서 개인적으로 초연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art : 이건 확실히 잘 모르겠다. 슈베르트가 살아 있을 때, 이 악보를 들고 비엔나 악우협회에 찾아갔으나 곡이 난해하다는 이유를 들어 연주를 거부했다는 것이 通說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슈베르트가 죽은 지 11년 후에 로베르트 슈만이 프란츠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 슈베르트의 집을 방문해 동생이 쓰던 서재를 둘러보던 중에 우연히 서가에 꽂혀있던 두꺼운 종이 뭉치들을 보게 됐는데, 슈만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그 종이 뭉치들을 꺼내자 그것이 슈베르트가 작곡한 교향곡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즉시 이 악보를 멘델스존이 지휘하고 있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로 보내지게 되었고 멘델스존의 지휘로 이 교향곡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가 죽은 직후에 많은 유작 들이 추로 소품 위주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작품을 출판업자들은 휴지조각으로 취급하고 있었으니, 슈베르트가 죽은지 10 년 후인 1838 년 로베르토 슈만이 비엔나를 방문 하여 우연히 발견하게 된 C 장조 교향곡 (the Great D.944)의 원본 악보이었다. 슈만은 이 원고를 라이프찌히로 가지고 갔으며 그 곳에서 멘델스죤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Neue Zeitschriff에서 축하행사도 있었는데. 그 곳에서 그 교향곡에 대한 번호 매김에 대하여 적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어를 쓰는 학자들은 그 번호는 7 번으로 해야 합당하다고 주장한 반면, 영어를 쓰는 학자들은 9 번을 주장하였으며 슈베르트 작품의 표준 목록을 제작 담당하는 "Deutsch catalog" 에선 8 번으로 개정하였다고 한다. 초기 낭만주의 음악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것은 차제하고서도, 베토벤의 전원 에서 나오는 기쁨의 감정이 낭만주의 음악의 새로은 형태로 다가오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작품구성 및 해설

1악장 Andante - Allegro ma non troppo 다 장조, 2/2박자.

첫 부분에서 갑자기 2대의 호른이 단독으로 주제를 연주하는데 이러한 형태는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서법으로 슈만의 교향곡 1번 '봄'이나 멘델스존의 교향곡 2번 '찬가'의 작품 첫 부분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또한 '미완성 교향곡'과 동일하게 이 주제가 포함되어 있는 3도 상행의 동기가 1악장의 제2주제, 2악장과 4악장의 제1주제, 3악장의 트리오 주제 등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곡에 걸쳐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 전곡을 유기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주목된다. 또한 규모가 큰 서주는 고전파적인 서주를 초월한 독립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주요부는 소나타 형식으로 서주부터 점리듬에 의한 음의 가치변화로 제1주제가 연주된다. 제1주제는 목관의 셋잇단음을 동반하면서 발전하다가 갑자기 3도 상행하여 대비되는 조성의 영역으로 들어가 제2주제로 이동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3도 상행 음형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조성 그 자체는 제1주제와 3도 관계의 마 단조로 조바꿈된다. 계속해서 제3주제를 트롬본이 연주하는 것은 관현악법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발전부는 제1주제와 제2주제를 수직으로 겹치게 전개하여 극적이라기보다는 청명한 모양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셋잇단음부터 재현부까지는 일반적인 틀대로 진행되지만 대비되는 조성은 다 장조가 아니라 다 단조가 된다. 전체적으로 다 장조와 같은 순수하고 명랑함 속에서 선율적이고 화성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아름다운 악장으로 마지막 부분에는 피우 몰토로 템포를 빠르게 하여 서주부 주제를 장대하게 코다로 마감된다.

서주 안단테는 낭만적인 주제가 혼의 주주로 조용히 개시된다. C장조이기는 하나 a단조를 사용하여 밝기도 하고 고적하기도 하며 즐겁고 엄숙하다. 8마디의 주제이지만 3마디의 악구를 2개 겹친 다음에는 구미(句尾)만 확대하여 반복 시킨 특징 있는 주제, 이것은 곧 목관악기로 반복되며 발전과 더불어 현과 금관으로 퍼지며, 범람하는 대하(大河)처럼 힘찬 투티가 되며 고조되었다가 알레그로로 들어간다. 알레그로(소나타 형식)의 제1주제는 그 무뚝뚝한 점리듬이 사이사이에 연주되는 목관군(木管群)의 3잇단 리듬과 대조를 이루며 강한 콘트라스트를 보인다. 이 두 율동은 악기 편성을 바꾸고 화성을 바꾸어 발전하고, 그 3잇단 리듬은 사랑스런 제2주제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어 제2주제의 한 구성 분자로 되는 것이다.

재현부에 있어서의 제2주제는 처음에는 엷은 구름을 뒤집어 쓰고 c단조로 재현되며, 다시 C장조로 조옮김 될 때의 눈부신 밝음은 특별히 맛이 있다. 장대한 코다도 점음과 3잇단 리듬이 겹쳐진 것인데, 최후에는 서주 주제가 대단한 기세로 강주된다. 그것은 단순한 서주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주제가 긴밀히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연락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2악장 Andante con moto, 2/4박자.

형식으로는 A - B - A - B - A, 아니면 2부 형식으로 코다가 첨가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이 악장은 초기 6개의 교향곡과 동일한 형태의 느린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양식적으로는 밀도가 한층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A부분의 주제는 저음현과 목관으로 이어지는 선율로 그문덴과 가스타인 지방의 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단조와 장조의 빈번한 교대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뉘앙스도 훌륭하다.

B 부분은 바순에 보강된 콘트라베이스가 주도하는 주제로 만들어지지만 화성적인 변화 이외에 기본적인 정서는 A와 일치한다. 슈만이 '하늘의 천사가 숨어있는 듯한'이라고 절찬한 호른의 3도 하행에 의한 연결구로 후반이 시작된다. 후반은 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마지막 부분에는 A부분이 반복되어 첨가된다.

현악 합주의 조용한 저음 선율에 의해 a단조의 조성이 확정되고 리듬과 기분이 암시된다. 잠시 후 애수를 호소하는 듯한 주제가 오보로 제시되며 즉각 오보 가 따라 붙어 반복된다. 이어서 조는 A장조로 바뀌고 눈물짓던 눈에 미소를 머금은 듯 새롭고 밝은 간주 주제가 나타나는데, 기본 주제가 다시 클라리넷과 파곳으로 연주된다. 구성이 크지만 악식적으로는 대개 셋으로 구분되는 간명한 것으로 제1부는 기본 주제와 부주제(F장조), 제 2부는 그 재현이며, 부주제는 A장조로 조옮김 되고, 제3부는 코다, 최후는 모든 것을 단념하는 듯이 조용한 종지를 한다.

3악장 Scherzo. Allegro vivace, 다 장조, 3/4박자.

이 스케르초는 베토벤과는 다른 슈베르트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단순하고 접근하기 쉬운 춤곡의 성격을 스케르초 안에 아주 잘 융화시킨 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3부 형식의 주요부는 대조적인 두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3도 관계의 조바꿈에 의한 화성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가 돋보이는 가 장조의 트리오도 슈베르트적인 유려한 선율의 아름다움이 가득 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소박한 농민의 춤과 비슷한 스케르쪼 주제는 거친 현의 유니 즌으로 개시되는데, 관악기와의 사이에 문답조로 교차되고 특히 8분음표로 동기는 간단 없이 반복되며 스케르쪼를 일관한다. 조는 곧 C장조로 바뀌어 클라리넷과 파곳이 경쟁하듯 스케르 쪼 주제와 더불어 갑자기 온화한 비인 왈츠조의 선율이 울려 오는 것이 제2주제이다. 그리고 거대한 스케르쪼는 소나타 형식에 의하고 있으며, 스케르쪼 주제에 의한 동기적인 발전과 다채로운 화성 전환을 보인 다음, 재현부에 있어서의 양주제의 반복에서는 비인 왈츠의 제2주제가 으뜸조로 옮겨지는 것이다. 뛰어 오를 듯한 스케르쪼의 명랑함에 반하여 트리오에서는 생각에 잠긴 듯이 3도 모티브가 주로 목관악기에 의해 연주되며, 잇달아 스케르쪼를 다 카포 한다.

4악장 Allegro vivace, 다 장조, 2/4박자.

이미 교향곡 2번의 4악장 등에서 보여주었던 음형과 리듬의 오스티나토 처리를 아주 훌륭히 소나타 형식의 구성원리와 연결시키고 있다. 다 장조와 가 단조를 오고가는 제1주제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개의 음형이 전체를 통해서 쉬지 않고 반복되고 거기에 더욱이 사 장조의 음형적인 제2주제가 중복된 발전부, 재현부에 철저하게 반복되고 있다.

발전부에서는 제2주제와 관련된 새로운 소재가 중복된다. 다 단조로 제1주제가 다시 등장하고 내림 마 장조와 교차한다. 제2주제는 정석대로 다 장조 중에 재현되어 마지막에는 제1주제가 다시 다시 연주되고 간단하지만 장대한 코다로 슈베르트의 모든 교향곡을 마감하는 듯한 클라이맥스를 표현한 뒤에 끝난다.

바커스의 제전(祭典)에 비유될 만큼 환희의 광란이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듯한 전관현(全管絃)의 시그널조의 강력한 점음 동기에 의해 개시되며, 자잘한 3잇단음표의 동기가 고조되고, 여기서 일단 종지하여 제1주제가 나타난다. 제2 주제는 현악의 3잇단음형을 반주로 하여 목관으로 주주되는 원활한 3도 모티브인데, 이 2개의 주제와 3잇단 동기의 무한한 발전에 의해서 종악장의 거편(巨編, 소나타 형식, 단 제1주제는 으뜸조로 재현되지 않는다)을 구성한다.

     

     

교향곡 제9번 다장조 D.729 "Die Grosse"

이 교향곡은 최근의 레코드나 방송에서는 '제9'로 표시되는 수가 많은데,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종래의 표시는 출판 연대순이었기 때문에 작곡 연대순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작곡 연대순에 따라서 '스케치' 교향곡을 제7로 꼽는다면, 아인시타인이나 독일의 표시에 따라 최후의 이 교향곡은 제10번이 되어 버린다.

이 C장조 교향곡은 교향곡 제6부터 10년 이상의 틈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걸작이다. 그 초고(草稿)에는 '1828년 3월'이라 적혀 있으며, 그가 31세가 되던 해의 봄에 완성되었다. 전곡을 연주하는 데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그 방대한 규모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과도 비슷하다. 표제인 "Die Gross"(The Great)는 슈베르트가 붙인 것은 아니지만, 그 작품의 거대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편 제6교향곡인 C장조와 구별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불우했던 천재 슈베르트는 고심 끝에 완성한 대작의 연주를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완성된 초고(草稿)를 끌어안고 비인의 음악 애호가 협회를 찾아가 상연 교섭을 하였으나 너무 어렵고 길다는 이유로 거절 당한 채 그 해 가을 영원히 잠든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비인을 방문한 슈만이 슈베르트의 묘에 들른 다음, 슈베르트의 둘째 형 페르디난트의 집을 방문하였다. 슈만은 전부터 슈베르트를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이 위대한 작곡가의 이야기를 친형을 통해 듣고 싶어 방문한 것이었다. 그는 이 기회에 여러 가지 유품과 유고를 볼 수 있었으며, 그 유고 중에 두툼한 5선지 철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페이지를 들춰 나갔다.

그 멋진 표현에 놀란 슈만은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에게 이것을 라이프찌히로 보내도록 권유하였으며 자기가 그 연주와 출판을 알선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이 초고는 라이프찌히로 보내졌고, 1839년 3월 21일, 게반트하우스의 정기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역사적인 초연을 갖게 되었으며, 역시 그 곳에서 출판되었다. 비인에서의 초연은1839년 12월 15일에 있었는데, 최초의 2악장만 연주되었다.

이와 같이 만약 슈만이 없었더라면 '가스타인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소실되지 않았으리라 그 누가 보장하겠는가. 슈만은 계속해서 1840년, 이 교향곡에 관해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이 방대한 걸작을 "쟝 파울의 4권의 장편 소설에 비유할 만큼 천계(天界)의 유장(悠長)함'이라 형용하였다. 이 형용은 이 교향곡에 논의될 때마다 인용되었다.

     

     

Symphony No.9 in C major, D944 - Great

베토벤이라는 거인이 길고도 당당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빈의 고전시대를 마감해 가고 있을 때, 슈베르트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떠돌이 생활을 영위해 가며 선율미가 넘쳐 흐르는 작품들을 속속 써내고 있었다. 천재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슈베르트는 모짜르트에 못지 않으면서도 당시 빈의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던 베토벤의 그늘에 가리어 생전에는 결코 빛을 보지 못한 채 31년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만 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본질은 그 무궁무진하게 솟아 오르는 가락에 있다. 이러한 특성에 가장 완벽하게 제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900여 곡에 달하는 가곡이며, 따라서 가곡을 떼놓고서는 슈베르트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흔히 '슈베르트는 관현악도 가곡처럼 썼고 베토벤은 가곡도 관현악곡처럼 썼다.'는 말은 이 두 작곡가가 음악적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풀이해 주고 있다.

슈베르트의 관현악 작품에는 확실히 가곡적이고 멜로디에 풍부한 악상이 넘쳐 흐른다. 3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에 남겨 놓은 9개의 교향곡 작품들 역시 이러한 윈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교향곡을 가곡처럼 음미할 때에 그 아름다움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년의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같은 구축력이 강한 작품들을 써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 삶의 여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채 절필해야만 했다. 31세라는 나이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음악사에는 슈베르트만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가 없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슈베르트가 음악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 방대한 가곡에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 없이 가곡을 생각할 수 없고 가곡을 얘기할 때 슈베르트를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이들 양자의 의미를 함축시키고 있다. 따라서 슈베르트 음악의 기본은 가곡에 입각한 가락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특수성을 기악곡이나 관현악곡에서도 그대로 침투되어 있어서 모든 메세지를 아름답게 노래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 결과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관현악곡도 가곡적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베토벤에게 있어서 가곡도 관현악적이다'란 말과 아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두가지 비유는 베토벤과 슈베르트라는 두 작곡가의 기질적 차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관과 음악관을 모두 함축시킨 단적인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년의 슈베르트는 가곡 위주의 작곡생활에서 크게 전향하여 대편성 교향곡이나 오페라에 몰두해 있었다. 특히 1821년에 손을 댄 E장조 교향곡 D.729가 제 1악장의 첫 부분만을 악보로 남기고 그 이하는 스케치에 그친 데다가, 곧 이어 착수한 여덟번째 교향곡 b단조 D.795도 2악장만으로 그쳐버린 '미완성'이어서 그는 대편성 교향곡에 대한 작곡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1823년 슈베르트가 쓴 편지에 의하면, 그는 이미 소편성의 실내악적 교향곡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뒤따라 작곡된 두 곡의 4중주, 그리고 관과 현을 위한 8중주 등도 대편성 교향곡을 쓰기 위한 연습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이 편지는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슈베르트가 의도하는 대편성 교향곡의 작곡은 그의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828년 3월, 죽음을 불과 3개월 밖에 남기지 않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가곡은 이제 그만 쓰겠다'고 스스로 심경을 밝힌 뒤에 본격적인 교향곡을 쓰기 위해서 벼르고 벼르다가 착수한 작품이었던 만큼 슈베르트는 이 교향곡을 마무리하는 데 온 힘을 다 바쳤다. 그 결과 착수한지 한 달 만에 '장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교향곡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곧 <그레이트>라고 불리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인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베토벤의 교향악적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한 생각으로 슈베르트는 이 대곡에 손을 댔지만, 결과는 베토벤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로까지 접근시켜 가지는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가 7년 전에 써 두었던 제8번 <미완성>의 세계로 더더욱 파고 들어가 그것을 대폭 확장시켜 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바로 거기에 슈베르트적 관현악법의 장점이자 한계점이 공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이 베토벤의 교향악적 세계로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이후 슈베르트를 뒤따르는 낭만주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슈베르트의 관현악 세계를 총결산하는 대 작업이었고, 어찌보면 슈베르트라는 하나의 인간을 종결짓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쓰고 난 9개월 후인 1828년 12월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교향곡 제9번의 1, 2, 3악장은 연이어 나타나는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 찼다가 4악장에 이르러 소나타 형식의 장대한 악장으로 발전한다. 그것이 힘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격렬함으로 고양되는 데서 베토벤적 의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슈베르트의 관현악이 내뿜는 정신의 열기는 한도를 갖고 만다. '고뇌를 뚫고 환희로' 끝없이 비상하는 베토벤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 멈추어 서서 스스로 자지러지는 슈베르트의 특유의 격렬함이다.

당초 이 곡은 빈악우협회에서 초연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로부터 악보를 받아 본 빈악우협회는 이 곡이 너무 장황하고 길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다. 본래 섬세한 기질을 타고나 심성이 여리기만 했던 슈베르트는 악우협회의 결정에 한 마디 불평도 못하고 악보를 되돌려 받은 채 연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만약에 베토벤이었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악우협회와 맞서서 연주를 강행했을 테지만 슈베르트는 그렇지를 못했다.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슈만의 공이 있었다. 이 곡이 작곡된 지 10년 후인 1838년, 그러니까 슈베르트가 31세의 짧은 생을 마친지 10년 후인 당시 28세의 청년 작곡가 슈만은 빈으로 가서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묻혀 있는 베링중앙묘지를 참배했다. 슈만이 가장 존경했던 이들 두 선배 작곡가는 그가 한번도 상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슈만으로서는 무척 감개가 깊었다. 비록 그들이 이미 땅에 묻혀 말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해후였으나, 슈만은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마음 속의 열망을 조용히 풀어헤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선배 작곡가의 무덤을 참배하고 나서 곧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상당량의 슈베르트 유고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슈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얻어 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간 것이다. 슈만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슈만의 방문을 받은 페르디난트는 동생 슈베르트의 유품들을 이것 저것 뒤적이다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묶여 있는 악보 뭉치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악보를 받아 본 슈만은 깜짝 놀랐다. 아직까지 발표되지 않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였기 때문이었다.

슈만은 페르디난트로부터 이 곡을 초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악보를 즉시 멘델스존에게 보냈다. 당시 멘델스존은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슈만과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악보를 받은 멘델스존은 곧 연습에 착수하여 다음 해인 1839년 3월 21일 역사적인 초연이 이루어진다. 그 자리에는 물론 슈만도 참석해 있었고 페르디난트도 빈에서 달려와 동생의 마지막 교향곡의 초연을 감명 깊게 지켜봤다. 작곡된 지 꼭 11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차츰 여러 교향악단들에 의해 연주 레퍼토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아름답고 리드미컬한 여운은 때때로 우수를 불러 오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슈베르트적 명선율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낭만주의 교향곡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 받으며 모든 연주자와 애호가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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