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악(국악)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3 '미궁' | 우리것 좋은것

리차드 강 2016. 1. 25. 14:17

우리시대의 巨匠-가야금 명인 황병기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3 '미궁'

1.미궁
2.국화옆에서
3.산운

 

천년 세월의 그윽함과 현대의 감성을 한데 아우른

우리시대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법학도에서 음악가로 변신하여
국악과 서양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투명하고 둥근 음의 원형을 찾아헤메는 구도자...

국악의 새로운 이해관점과 발전가능성에 대한 인식토대를 보여주는 수작!
황병기 / The Labyrinth (미궁)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작품집 중 가장 실험적인 테마로 진행되는 '미궁'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최근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얼마전 모 T.V프로그램에서 방영되었던 내용인데, 인터넷 상에서 발행된 소문에 대한 진상을 확인하는 코너였다. 3번이상 들으면 죽는 음악이 인터넷상에서 음악파일로 전해지며 갖가지 해프닝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그 대사잉 된 음악이 바로 황병기선생의 '미궁'이었다.

사실 '미궁'을 일반 대중이 사전에 아무런 정보없이 듣는다면 앞선 경우처럼 많은 오해의 여지가 생길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국악차원의 전통복원곡 또는 전통에 입각한 진행을 보이는 곡이 아니기 때문이다. 1975년 '공간사' 주최로 열린 현대음악제인 'Space75'에 처음 초연된 '미궁'은 황병기의 가야금연주와 현대무용가 홍신자의 인성으로 전개되는, 현대음악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매우 실험적인 곡이다. 존 케이지(John Cage)라든가 프리 뮤직 또는 임프로바이제이션 뮤직과 같은 파격성과 기존과 다른 다양한 연주기법이 사용되었기에 그냥 듣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 후에 이처럼 충격적인 선법을 따르는 곡이 국내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황병기 선생이 가졌던 앞서 나갔던 사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감탄하게 된다.

필자가 본 작을 연작이라는 의미로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설명함에 있어 많은 충분요건들을 갖춘 사람은 아니다. 본 작의 비교잣대로 그 당시의 현대음악의 기류라든가 국악에 대한 식견을 폭넓게 갖고 있지도 않다. 전통과 현대의 맞물림 그리고 70년대라는 시대와 이미 그 이전 과도기 같은 국내의 현실을 경험한 국악인 황병기선생에 대해 생각해보며 '미궁'에 대한 어떤 추측과 이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앨범의 첫 곡인 '미궁' 이외에 나머지 곡들은 대체로 전통에 입각한 국악연주들이 녹음되어 있다. 동양적인 운치로 가득한 아래 곡들은 모두 황병기선생이 작곡한 곡들로 대금과 거문고 ㄷㅇ의 국악기들과 함께 합주를 들려주고 있다. 특히나, 62년에 작곡된 '국하옆에서'는 황병기선생의 최초의 작품으로, 서정주시인의 시를 음악화 한 것이다. 단지 가사에 음악을 붙이는 작없이 아닌, 동양적인 관점에서 작곡과 연주가 병행되었다는 점이 독특하며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서정주 시인의 시에 팝적인 멜로디의 곡을 넣어 음악을 만들면 그것이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현재 황병기 선생의 앨범을 새롭게 복각하여 발매하고 있는 C&L 무직은 황병기 선생의 일련의 작품들을 재발매하며 새로운 디자인과 음악의 이해를 돕는충분한 설명의 해설지를 덧붙이고 있다. 필자는 무엇보다 황병기 선생이 직접 쓴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의 악기와 미학'이라는 내지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감탄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음악이라는 것은 하나의 예술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은 단지 그냥 어릴적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음악을 해왔다고 자연스레 발휘되는 성격의 것들이 아니다. 황병기 선생은 동양과 서양의 음악을 악기적으로 비교하며 문화, 역사 그리고 철학까지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국악기는 오랜 역사 속에 함께 해왔던 문화의 대변자로 서양악기들에 비교하여 발견 할 수 있는 국악기의 단점은 문화와 역사를 통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서양악기가 갖지 못한 것을 우리의 악기들이 갖고 있는 것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본 작을 들으며 황병기선생의 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동, 서양의 음악을 보는 관점에서 어떤 새로운 인식변화의 계기를 마련해봤음 좋겠다.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생활에서 과거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풍류와 여유를 찾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일상의 부분들이 서양화 되었는데, 그래도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의 유구성과 뛰어남 그리고 선인들의 지혜이다. 황병기 선생의 앨범은 단지 과거의 문화유산에 대한 집착보다는 발전과 유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엿보여주고 있는 선집들이라 할 수 있다. 글 / 강대원 in Changgo.com

Credits

가야금, 장구 - 황병기
목소리- 홍신자
작시 - 서정주
남창 - 김경배
대금 - 홍종진
거문고 - 김선한

Recording Date : 1983
Remastering date : Jan. 2001
Reissue Co-Producer : Dae Whan Oh, Taiyoon Lee
Remastering Supervisor : Dae Whan Oh
Remastering Studio : sonic Korea
Remastering Engineer : seung Kyun Chae
Photo : Soo-Yong Kuk
Cover Design : Design Group Tuesday

1984.03.10  성음

2001.07.03  C&L

 

자기류의 산조에 도달한 음악세계

그는 한번도 관광차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다. 모두 연주 여행이다. 물 건너가면 반드시 현지 음식으로 끼니를 채운다. 냄새 나는 프랑스 치즈도 마다 않는다.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태도다.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죠.” 그는 풍류 가야금(정악)과 산조 가야금(속악)은 물론 합성섬유 현의 17~25현금(琴)까지 두루 통달한 최초의 국악인이다. 가야금의 음역 3옥타브 안에서 전통에서 전위까지, 넓은 행보를 보여 온 그의 음악 세계는 깊어져 마침내 자기류의 산조에 도달했다.

6ㆍ25때 월북해 인민 배우가 된 전설적 명인 정남희의 가야금 연주가 그 실타래였다. 1990년 평양에서 열렸던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남측 대표로 참석했을 때 북한에 있던 정남희제 녹음 테이프를 찾았다. 일제 치하에서 정남희가 녹음해 둔 SP판에도 없고 스승 김윤덕이 알려주지 않은 가락이 바로 거기 있었다.

“내가 50년 세월을 공들여야 했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다 들어있더군요.” 한국 가야금 산조에서는 가장 방대한 8악장 70분짜리의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가 1998년 그렇게 빛을 보았다. 반세기 가야금 인생의 숙원이 풀리던 때였다.

전통주의자로서 황병기의 정수가 확연히 드러난 작품이 ‘숲’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창조력은 베끼기(copy)를 허용하지 않는다. 백성이 즐기던 산조(散調)는 가운데에, 선비의 풍류인 가곡(歌曲)은 앞뒤에 배치한 3악장 구조의 작품이다. 분명 전통적인 것에 뿌리를 뒀지만 사람들은 별개의 음악, 그것도 현대음악으로 볼 정도였다.

 그와는 반대로 혁명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미궁’이다. 현을 뜯지 않고 첼로의 활을 써서 켜서 소리 내는 방식에서부터 귀곡성을 연상케 하는 소프라노(현대무용가 홍신자의 구음(口音))까지 다룬다.

1975년 초연 당시 일부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 나가게 만들었던 문제작이다. 요즘이라면 그런 작품을 두고 “엽기적”이라 해서 호사가들의 입맛을 당겼겠지만 당시 국내의 권위주의적 분위기는 그 같은 작품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재공연 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5월 당시 구음의 주인공 홍씨를 비롯, 김일륜(가야금) 미사루 소가(조명 퍼포먼스) 등 그를 좇는 젊은 예인들이 ‘미궁’을 공연하는 등 그의 음악이 다시 조명 받기도 했다.

 

 

 

1.미궁 (황병기:가야금 / 홍신자:목소리)

2.국화옆에서 (김경배:남창 / 김선한:거문고 / 홍종진:대금 / 황병기:장구)

3.산운 (김선한:거문고 / 홍종진:대금)

 

'황병기 가야금의 세계'

한국에서 귀와 정신을 다 즐겁게 하는 음악이라면 단연 황병기의 가야금 음악이다. 향기, 색깔, 분위기, 영상, 느낌 등등 추상적 악상들이 명징하게, 단순명쾌하게, 우아하게 그림같이 나타나는 모습은, 젊은 시절 민속악과 정악을 다 배워 아•속(雅俗)의 경계를 공식적으로 뛰어넘은 해방 후 첫 세대라는 그의 위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홍등가의 기생음악처럼만 여겨지던 가야금을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공자 시대 금의 지위까지 끌어올렸다.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병기는 피난시절인 1952년 부산에서 처음 가야금을 익히기 시작했다. 국립국악원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이듬해이고, 서울대학교에 처음으로 국악과가 설치된 1959년보다 한참 앞선 때다. 첫 창작곡 <숲>을 1962년에 써서, '창작국악'이라는 새 장르를 모색하는 움직임에 불을 지폈다. 유럽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도입된 '작곡'이니 개인 '작곡가'니 하는 개념이 전통음악 분야에선 아직 생소하던 때다. 음악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악보 없이 전승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조금씩, 유기적으로, 그러니까 핵심 가락을 유지한 채 그때그때 잔가락을 임의로 덜고 더해 가며 변해가게 마련이었다. 그런 만큼 황병기의 작품은 혁명과도 같았다.

황병기의 초기작품들은 전통 악무(樂舞) 하면 곧 퀴퀴하고 졸박함을 연상케 하던 시절에 나왔다. 한국에서 전통음악은 무지와 미신과 가난에 찌든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일제 강점과 전쟁의 상처를 내던지려는 한국인들에게 외면당했다. 반면 서구 클래식음악은 근대성과 산업화와 과학기술을 연상케 했고, 이것들이야말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바라고 식자층은 생각하고 있었다. 전통예술의 멸실을 막기 위해 인간문화재라는 제도가 생긴 것은 그 반작용이었다. 몇 년 뒤, 잃어버린 민중예술을 되살리고 이렇게 되살린 문화를 참 주인인 민중에게 '돌려주자'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인간문화재든 민중운동이든 목적은 하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고 미디어와 전시와 연주를 통해 확산시킴으로써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해 한국인들이 식민지 체험을 딛고 다시 한 번 역사와 하나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찬란한 과거 문화를 재확인하여 민족의 상처를 씻어내는 한편, 민족문화의 정수(精髓)에 다가감으로써 소외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를 통한 현재의 구원을 추구했다. 이렇게 '민족음악'은 닻을 올렸다.

황병기는 이 운동의 일원이기도 하고 개척점에 서 있기도 하다(그는 문화재위원이면서 국제현대 음악협회 회원이다). 황병기 작품 다수는 한국이 아시아의 강국으로서 대(大) 아시아 문화의 일원으로 비단길같은 교역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하던 통일신라(668∼935)의 영화로운 과거를 상기시킨다. 예컨대 <하림성>은 기록상 최초의 가야금 연주가인 우륵이 551년 신라 진흥왕을 위해 연주한 곳의 지명을 땄다. <침향무>는 인도 향료의 이름을 땄고, 신라풍 범패의 음계가 나오며, 지금은 사라진 중국 및 서역계 악기 공후의 소리를 염두에 두고 썼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사라져가는 예술의 수호자로서뿐 아니라,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자기 음악에 힘을 더할 길을 찾아나서는 역동적 예술가로서도 황병기는 곡을 썼다. 가야금을 위한 신곡을 쓰는 것은 물론, 자기 작품의 예술적 해석과 자기의 음악철학을 드러내어주는 글들도 써냈다. 존 케이지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구 해석한 글을 펴내기도 했다. 1985년에는 초빙교수로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글과 작품과 연주를 통해 학계와 일반대중에 던진 그의 메시지는 (그가 서울법대를 나왔다는 사실과 굳이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전통음악이 퀴퀴하고 졸박함, 망가진 산하, 촌티나는 해학, 전쟁의 상흔 따위 이미지를 불식하고 근대적 지성과 전지구적 음악경제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황병기같은 작곡가 또는 음악가들은 끊임없이 문화의 이면에서 영감을 구하면서 전통음악과 연주 실제의 유기적 고리를 이룬 가운데 탄생하였지만, 21세기와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작품을 쓴다. 황병기는 거목에 돋아난 새순과도 같은 존재다. 그의 음악은 가야금만의 언어로 말하면서, 동시에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제임스 볼드윈, 페트라르카가 아니라 이탈로 칼비노,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파블로 네루다의 언어로 얘기한다. 황병기와 같은 이들의 창의적인 노력을 통해 전통음악은 아픈 과거의 연상을 지워버린다. 모더니티가 더 이상 서양음악의 동의어가 아니고, 서양음악이 더 이상 과학기술의 동의어가 아니다. '전통' 진영이든 '바로크'나 '고전'이나 '포크', '동양'이나 '서양' 진영이든, 오늘을 사는 작곡가가 어떤 악기로든 곡을 쓰면 그것이 바로 모더니티이며, 정신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하는 황병기의 음악 속에 바로 이런 모더니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미궁(迷宮)- 황병기(가야금.장구)/홍신자(보이스)

1975년 초연되어 전례없는 파문을 일으킨 후 아직도 국내 음악사상 최대 문제작으로 평가되는 곡이다. 가야금을 선율악기 이전에 무한한 소리요소가 담긴 사운드 박스로 접근하여 이를 언어와 음악적 요소를 극소화시킨 인간 육성과 결합시켜 고도의 음악적 완성도를 거두어 낸 황병기의 영원한 화제작이다.

찰현악기의 활 , 장구채 , 거문고 술대 등을 이용한 가야금의 파격적인 조음(造音)과 이에 호응하는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인성(人聲)이 신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20분에 육박하는 전곡을 극적인 분위기로 끊임없이 채색하여 나간다. 이 작품은 작곡자의 음악적 정신의 깊이와 탁월한 표현력이 일구어 낸 창의적 조형미와 구조적 미학의 쾌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발표된 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참신한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이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창작음악의 영원한 고전으로 이미 자리매김을 굳건히 한 작품이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