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지상의 모든 생령들이 저마다의 만족을 누린다. 나무들은 지리했던 여름의 뜨거운 인내를 바알간 결실로 익혀내고, 짐승들은 소리없이 살쪄간다. 그런데 이유가 무엇일까. 이 풍요한 계절에 오직 인간만이 남모르는 저마다의 회한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신이 성취해온 것을 못미더워 하고, 혹 '가지 않은 길'은 없었던지, 기억을 더듬어 보고, 예전의 달콤했던 순간들을 향해 한없이 기억의 끈을 떠내려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2번을 작곡한 것은 1906년에서 1908년 까지. 30대 중반의 젊은 대가로서 안정을 누리고 있을 때다. 비평가들의 송곳같던 펜끝은 작곡가가 쌓아온 권위 앞에 웬만큼 무뎌졌고, 그의 단단한 위상은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 결혼생활은 행복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초가을의 햇살과 같은 아늑한 안온함이 있고, 뿐만 아니라 그리운 시절에 대한 회억, 알 듯 말 듯하게 내비치는 슬픔과 후회도 나지막이 읽혀진다. 누구나 한 번만 듣고 사랑에 빠질 만한 악장은 3악장 아다지오다. 서두부터 현악기로 꿈에 젖어들 듯 솟아오르는 첫 주제, 뒤이어 클라리넷으로 이어지는 두번째 주제. 모두 아득히 지나간 먼 시절, 하나쯤 있었을 법한 가을날의 사랑과, 자신의 옆을 은은한 머리칼 내음 풍기며 걷던 그 누구인가의 눈길을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어떤 팝 가수는 이 악장의 선율들에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작품을 '가을 교향곡'으로 서슴없이 추천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3악장 뿐만이 아니다. 1악장. 현악은 끝을 알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부유한다. 초가을의 말간 햇살이 비치며 바람은 마당에 널어둔 흰 빨래들을 깃발처럼 나부끼게 하는 어느 오후,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덧문이 덜컹커리고, 키큰 미류나무의 잎은 어찌 저토록 반짝이며 팔랑거리는지! 이 모든 것은 내 마음 속에 그려지는 심상의 그림이지만, 낭만주의의 최후를 장식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솜씨좋은 팔레트는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그림을 화폭에 그려놓도록 만든다. 4악장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 아연함을 안겨준다. 뭔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듯한 부자연스런 리듬감의 첫 주제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악장은 이윽고 티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초가을의 하늘을 현악의 유려한, 새로운 주제 속에 풀어놓는다. 이 멋진 교향곡을 아쉬케나지 지휘의 콘서트헤보 관현악단은 색상이 선명한 정밀사진처럼 큰 화폭에 펼쳐놓는다. 현의 울림은 생생하고, 투티(전체합주)의 밸런스도 얼마나 풍요한가. 3악장에서 두번째 주제를 제시하는 클라리넷도 뚜렷한 노래로 마음속에 진한 금을 긋는다. 한장 값으로 1번 3번 교향곡과 함께 두장의 CD를 살 수도 있으니, 주머니 사정을 감안할 때도 최고가 아닌가. 라흐마니노프의 길을 닦아놓았던 대선배 차이코프스키도 가을의 심상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작품을 여럿 남겨놓았다. 현악합주로 듣는 '안단테 칸타빌레'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는 서늘함을 가슴속에 안겨준다. 괴테의 시에 붙인 가곡 '그리움을 아는 이 만이' 도 가을의 주제곡으로 적역이다. 그러나, 오늘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하나 탐색해보자. 차이코프스키는 표제없이 번호만 붙은 '관현악 모음곡'을 네 곡 썼다. 마음속에 풍부하게 솟아오르는 악상을 악보에 기록했지만, 교향곡으로 형상화하기엔 어딘가 가볍다고 느꼈던 곡들을 묶은 것이다. 그 중 3번 모음곡의 첫악장은 '엘레지'(비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슬픈 선율을 만드는데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차이코프스키가 '비가'를 썼으니 오죽 멜랑콜릭할까. 그렇지만 이 악장은 '비창'교향곡처럼 온 몸을 내던져 흐느끼는 슬픔의 노래가 아니다. 걷잡을 수 없이 예전의 오랜 기억으로 달리는 음의 시(詩)라는 편이 맞다. 현과 플룻이 눈물을 글썽이는 듯한 노래 주제를 연주하면 첼로와 하프가 이를 받아 잔잔한 전원풍의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 그림은 이제는 닿지 못할, 머나먼 기억의 뒤편에 존재하는 아련한 그림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곡 '사계절'에는 '10월의 노래'라는 악장이 있다. 톨스토이의 명시를 피아노가 노래하도록 만든 기악의 가곡이라 할 만하다. "가을. 보잘것 없는 과수원에는 노란 잎들이 떨어진다. 떨어져 바람에 흩날린다..." 샹송 '고엽'을 연상시키는가. 멜로디 역시 샹송풍인데다가 제목도 '샹송 도똔느'라고 프랑스어로 붙였다. 어쩌면 차이코프스키는 어린시절 유모에게서 듣거나 파리 체재 중에 마주친 프랑스 가요 멜로디를 이 피아노의 노래 속에 깊이 투영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계'의 명연으로는 흔히 플레트뇨프의 연주가 꼽힌다. 그의 연주가 흠결을 잡을 수 없는 유려한 연주라는 데는 공감한다. 그러나 나는 가을에 이 작품이 문득 듣고 싶어질 때, 리디아 아르티미프가 연주한 샨도스사의 음반을 집어든다. 루바토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순박한 피아니즘도 마음에 들지만, 따스함과 입자감이 느껴지는 특이한 녹음의 질도 좋다. 마치 갓 짜서 거른 주스를 투명한 잔에 받아 든 기분이랄까. 그렇게 달력은 또 한장 넘어가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바뀌어가고, 더이상 하늘은 푸르르지 않고, 낮게 구름낀 날이 많은 늦가을이 닥친다. 지상의 생령들은 더이상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닥쳐올 겨울을 준비해간다. 날로 서늘해져 가는 가슴 속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먼저 소품을 하나 들어보자. 영국인들에게는 요람에서부터 친숙한 '푸른 옷소매'. 그 민요선율을 편곡한 본 윌리엄즈의 '푸른 옷소매 주제에 의한 환상곡'. 아득한 전설을 불러일으키듯 플룻으로 가만가만한 전주가 연주된다. 현의 낮은 음으로 그 친근한 '푸른 옷소매'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머릿속에는 영국의 그 나지막한 구릉들 위로 찬 바람이 일렁이는 것 같은 환상이 떠오른다.
브람스의 '도이치 레퀴엠'또한 어둑한 늦가을을 더불어 벗하기 좋은 작품이다. 성서 속에서도 유독 허무주의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또는 "인간의 영광은 들의 꽃과 같아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 같은 가사들을 사용해서 뿐만은 아니다. 한숨짓는 듯한 목관, 쓸쓸히 떠도는 현악, 가장 노래하기 좋은 중간 음높이로 단순하면서 제 맛을 내는 화음을 연속해 구사하는 합창... 흐린 지방 함부르크 출신의 대가, 브람스의 유연한 솜씨는 이 작품에서 멋지게 발휘된다. 특히 그가 대편성곡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하프가 등장해 이채를 띠는데, 이 하프가 전체 합주에서 지어내는 색깔이 기막히다. 봄날처럼 영롱하게만 느껴져 온 하프가 선들선들한 빛을 띠는 순간이다. 브람스 만년의 걸작인 4번 교향곡은 어떤가. 그의 예찬자들이 '만추의 교향곡'이라고 부르듯 노년에 이른 허무감, 회한, 고독이 감춤 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브람스답지 않은 구석이 많이 드러나는 작품도 그의 작품 속에서 드물다. 선율은 마디마디 조각나서 일부는 현에, 일부는 플룻에, 일부는 첼로의 저음역에 나부낀다. 거의 '드뷔시적인 브람스'라 할만큼 다양한 색상의 팔레트로 채운 소리의 물결은 옷깃에 찬 바람이 스며드는 흐릿한 저녁나절의 풍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억제 할 수 없는 격정으로 1악장이 마무리 지어지면, 음성은 보다 부드럽지만 훨씬 절절한 과거의 추억 속으로 2악장이 우리를 인도할 준비가 되어있다. 과장없이 깔끔한 솜씨의 지휘자 자발리시라면 우리를 친절하게 이 대곡의 세계 속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런던 필하모니의 다소 텁텁한 보수적 음향마저도 작품의 악상에 잘 맞아든다. 4번 교향곡을 이야기했으니 3번 교향곡의 느린 악장을 외면할 수는 없겠다. 학창시절, 벗들은 이 악장을 '가을 청송대'라고 불렀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영화 주제가로 널리 알려진 선율인 만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으로 등장한 주제가 호른으로 되풀이 되는 부분은 실로 가슴이 저릿할 만큼 아름답다. 이번 글에서는 나도 모르게 교향곡이 여럿 준비된 것 같다. 가을이 그 회색 속으로 접혀들며 수명을 다하기 전에 피아노곡을 한곡 더 들어보자. 쇼팽의 발라드 1번은 다소 불길하게까지 느껴지는 어두운 분위기 속으로 우리를 헤매게 한다. 묵시록과 같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전주, 절름거리며 안으로만 안으로만 향하는 왼손의 리듬... 문득 어릴 때 본 '시벨의 일요일'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개인들로 고립된 도시에서 인간들 사이의 따뜻함을 찾아 헤매는 남자. 그와 알게 된 천진스런 아이. 기대하고 싶지 않던 파국. 쓸쓸한 거리의 분위기까지. 이윽고 아침에는 창에 수증기가 응결돼 맺히기 시작한다. 이 계절도 저물어가는 것이다. 가을이 찾아오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아침 저녁으로 살끝을 간지럽히는 뽀송한 공기의 감촉이 느껴지고, 정오의 햇살도 눈부시게만 느껴졌었지. 그러나 가을의 끝은 어떤가. 겨울의 한자락에 묻혀 아득하게 잠겨갈 뿐, 분명한 자취를 갖지 않는다. 첫눈이 내리기 전에 산에 한번 올라야 하지 않을까? 이파리가 다 떨어진 앙상한 고목들의 능선, 그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디스크맨'으로 듣는, 또는 마음속으로 불러내는 브루크너의 매력은 각별하다. 그의 교향곡 7번, 2악장 아다지오를 마음속의 플레이어에서 불러낸다. 존경하는 바그너의 죽음을 마주하여 그를 추모하며 쓴 악상이라고 한다. 호른과 바그너 튜바의 긴 지속음은 능선 사이로 잠겨가는 흐릿한 햇살같다. 야트막한 봉우리를 돌아 한굽이를 지나면 절벽 아래로 또 하나의 서늘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 햇살을 못받은 계곡에서는 젖은 흙냄새가 풍긴다. 또 한해가 이렇게 저물어갈 모양이다. 그러나 결국은 포기하지 못할 소망이 있고, 노을은 저리도 찬란하다. 금관의 찬연한 포효와 심벌이 불을 뿜는다. 산허리를 돌아 내려가는 발걸음이 바쁘지만 바그너 튜바의 그윽한 최후의 지속음은 계속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렇게 지상에는 겨울의 목소리가 들리고 겨울의 체취가 짙어지기 시작한다. 봄을 유년에, 겨울을 사멸에 비유하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한 오랜 전통이 아니던가. 말러가 다가우는 죽음의 발자국을 느끼며 아프게 아프게 써내려 간 교향곡 9번은 사멸과 정적을 바라보면서도 그 뒤편에 자리한 구원을 희구한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구조적인 모델로 해서 썼다는 작품이다. 어느 한곳에도 화창한 햇볕은 없다. 하늘이 유난히도 낮게 내리 깔리고 대지를 따스하게 덮는 초록은 모두 자취를 감춘 늦은 오후, 고속도로를 달리며 4악장의 나지막한 호른과 무겁게 끌리는 현의 멜로디를 들었다.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진 여행이었지만, 어디론가 멀리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이유없이 찾아 헤매던 것들로부터의 탈출. 헛된 집착으로부터의 탈출. 슬픔이 정신을 구원하는 효과란 바로 이런 것이던가. 20세기를 상징하는 한 아이콘으로 여겨졌던 카라얀. 그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이 세기말의 기념비적 대곡을 듣는다. 디지털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젖혔던 그이지만 막상 디지털 시대 그의 녹음 중에는 인정받는 음반이 많지 않다. 그런 그가 말러의 교향곡 9번은 두가지 녹음을 남기고 있는데, 얼핏 특징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비슷할 뿐 아니라 양쪽 모두 어마어마한 정신의 에너지가 집약된 절묘한 명연이다. 4악장 절정의 순간, 호른 등 금관으로 비명을 내지르듯 뿜어대는 포르티시모는 한동안 숨을 멈추게 만든다. 곧 첫 눈이 내릴 거다. 글: 유윤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