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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코니 프란시스 Great Hit Song CD 1 - Connie Francis (2007 어리버리 돈키호테)

리차드 강 2017. 10. 24. 10:09

Connie Francis Great Hit Song CD 1

앨범: 코니 프란시스 Great Hit Song CD 1

Connie Francis (2007 어리버리 돈키호테)

01. A Ba Ni Bi - 트랙 전곡연주

 

     

Total Length: 54:11

     

     

Track

1. A Ba Ni Bi
2. Al Di La
3. Among My Souvenirs
4. Auld Lang Syne
5. Barcarole In Der Nacht

6. Beautiful Brown Eyes
7. Careless Love
8. Don't Break The Heart That Loves You
9. Everybody's Somebody's Fool
10. Fallin'

11. God Bless America
12. Hey Mambo
13. High Noon
14. I Can't Stop Loving You
15. I Really Don't Want To Know

16. I Will Wait For You
17. Beso de Fuego (Kiss of Fire)
18. La Paloma
19. Lipstick on Your Collar
20.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Mambo Italiano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
 
 

 
with Yuriy Ashizh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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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nie Francis (Concetta Rosa Maria Franconero; December 12 1938- )

코니 프랜시스(Connie Francis)는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가장 유명한 여성 보컬리스트였다. 또한 그녀는 최고의 인기와 최악의 불행을 10년씩 나누어서 누리고 겪었던 가수이기도 하다. 한 해에 무려 9곡을 히트시켰던 가수가 코니 프랜시스였으며, 이 세상의 온갖 불행을 다 맞이했던 가수도 역시 그녀였다. 코니 프랜시스는 삶의 극과 극을 치달았던 가수이자 한 여인이었다. 1938년 12월 12일 뉴저지주에서 Concetta Rosemarie Franconero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코니 프랜시스는 네 살때부터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코디언 연주실력으로 그녀는 그 당시 어린 가수와 연주자들의 등용만이었던 NBC TV 쇼인 Startime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주가 지난 후 프로듀서인 George Schek (그는 후에 그녀의 매니저가 된다)가 코니 프랜시스에게 아코디언을 그만두고 노래에 집중할 것을 권하여 이후 4년동안 매주 Startime에 출연하여 노래를 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Startime의 진행자였던 Arthur Godfrey의 제안으로 Concetta Rosemarie Franconero라는 본명에서 좀더 발음하기 쉬운 이름인 현재의 Connie Francis로 개명했다. 그러나 첫 출발이 순탄 하지만은 않았다.

1955년 그녀의 첫 싱글 'Freddy'를 발표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이후 약 2년동안에 걸쳐 발표한 9곡의 싱글 모두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사실 대부분의 첫 앨범 실패 가수들을 내치는 레코드 업계의 관행으로 볼 때, 이렇게 오랫동안 성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레코드사에서 그녀에게 지속적인 레코딩을 허락한 것 역시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때, 코니 프랜시스의 아버지는 흘러간 명곡들을 리메이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얼른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코니 프랜시스는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결국 이후부터 연속적인 히트곡을 쏟아놓게 되었다. 코니 프랜시스의 초초의 히트곡은 'Who's Sorry Now' 였다. 이 곡은 Bert Kalmar & Harry Ruby의 1923년 오리지널 히트곡으로 1+46년에 해리 제임스 악단의 노래 (보컬: 윌리 스미스)로 다시 히트하기도 했다. 'Who's Sorry Now'의 히트는 그녀를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이 곡은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는 넘버 4를 기록했다.

1958년 Dick Clak의 American Bandstand television show에 데뷔한 코니 프랜시스는 1958년 한 해에만 모두 다섯 곡을 히트시키며 백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 중에서 닐 세다카가 작곡해준 'Stupid Cupid'가 차트 14위, 그리고 'My Happiness'가 2위의 히트를 기록했다. 'My Happiness'는 원래 존 & 샌드라 스틸 콤비의 1948년 오리지널 히트곡이었다. 코니 프랜시스의 전성기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였다. 이 기간에 그녀는 매년 평균 8곡의 차트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1958년에 5곡을 히트시킨 코니 프랜시스는 1959년에도 7곡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그 중 'Lipstick on Your Collar'가 5위, 'Among My Souvenirs'가 7위, 그리고 'Trankie'가 차트에서 9위 히트를 기록했다.

1960년에는 무려 9곡의 차트 히트곡을 발표했는데, 그 중 'Everybody's Somebody's Fool'과 'My Heart Has A Mind Of It's Own'이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Mama'는 8위 히트를 기록했다. 1961년에는 코니 프랜시스는 무려 9곡의 차트 히트곡을 발표했는데, 그 중 'Where The Boys Are'가 4위, 'Together' 6위, 그리고 'When the Boy in Your Ams (Is The Boy In Your Heart)'가 10위 히트를 기록했다. 1962년에도 6곡의 차트 히트곡을 발표했다. 그 중 'Don't Break The Heart That Loves YoU' 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고, 'Second Hand Love'가 7위에, 'Vacation'이 9위 히트를 기록했다. 이처럼 코니 프랜시스는 빌보드 핫100 싱글 차트 탑 10 히트곡만 알아보아도 지면이 다 차버릴 정도로 팬들의 사랑 속에 푹 파묻혀 인기를 누렸던 가수였다.

화려한 히트 활동을 계속하며 그녀는 에드 셜리반, 딘 마틴, 본 호프, 딕 클락, 피리 코모 등이 진행하는 TV쇼의 단골 출연자가 되었고, 당대 대중문화 최고의 명사로 부각되며 60년대를 완전히 자신의 연대로 만들었다. 코니 프랜시스는 많은 나라의 언어들로 그녀의 히트곡들을 레코딩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의 차트에 올려놓았다. 또한 팝 뿐 아니라 몇장의 컨트리 앨범을 녹음하기도 하였다. 다제다능하였던 그녀는 노래뿐 아니라 [Follow the Boys](1963), [Looking for Love](1964), [When The Boys Meet the Girls](1965) 등의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며 타이틀송들을 직접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70년대는 불운의 연대였다. 사실 음악적인 성공에 반하여 그녀는 결혼을 네 번이나 하는 등 그다지 행복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더 큰 불행은 1974년 8월에 시작되었다. 이날 코니는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근교 모텔에 투숙했는데 창문으로 뛰어든 불량배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코니 프랜시스는 죽음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더 커다란 불운이 계속 되었는데, 암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뒤이어 남동생이 총격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 사고를 맞이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코니는 몇 해전부터 앓아오던 축농증으로 고통끝에 1977년에 수술을 했으나 수술이 잘못되어 모두 네 번에 걸쳐 다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전성기의 곱고 낭랑했던 목소리를 되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 당시 코니 프랜시스는 세 번째 결혼까지 파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가수로서 코니 프랜시스의 생명은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토록 화려했던 코니 프랜시스의 60년대, 그러나 70년대에는 60년대의 화려한 영광을 시기하고 찾아든 엄청난 불행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견딜 수 없었던 고통을 그녀는 이겨냈다. 아마 불행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60년대의 영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70년대말 코니 프랜시스는 지난날 화려했던 시절을 발판삼아 새로운 앨범과 함께 재기했다. 그리고 80년대 초에 발표했던 앨범 [There's Still A Few Good Love Songs Left In Me]에 이르기까지 히트 차트에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스타덤은 좀처럼 그녀의 곁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60년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근 10년 가까운 허무한 공백의 세월을 보낸 뒤에 제기한 코니 프랜시스에게 변화무쌍한 팝 음악계는 스타덤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결국 1970년 이후 코니의 노래는 차트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제 코니 프랜시스는 60년대 팝 음악계의 전설로써 어제의 스타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애창곡으로 들려지고 불려질 것이다.

글 출처: 그대 머문 그리움으로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