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bs.catholic.or.kr/attbox/bbs/include/readImg.asp?gubun=100&maingroup=2&filenm=1%28187%29%2Egif)
Flute Sonata D Major, op.94 프로코피예프 플루트 소나타 라장조, op.94 Prokofiev (1891~1953) Laura Gilbert, flute & Emma Tahmizian, piano
1993 Koch International Classics Recorded January 1991 at Master Sound Studios, Astoria, New York.
프로코피예프 [Prokofiev, Sergei Sergeevich]1891∼1953 소련의 작곡가. 국적 : 소련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소련 예카테리노현 손초프카(현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요작품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로미오와 줄리엣》《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예카테리노현 손초프카(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출생. 아버지는 유대인 대지주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해져 5세 때 《인도풍(風)의 갤럽》을, 9세 때 피아노반주가 딸린 오페라 《거인》을 작곡하였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입학, A.K.리아도프, A.N.체레프닌, N.A.림스키코르사코프 등에게 사사하여 작곡 ·음악이론 ·피아노 ·지휘 등을 배우고 1914년에 졸업하였다. 이 사이에도 《제1피아노협주곡》을 비롯하여 많은 곡을 작곡하였으며 또 1908년에는 ‘현대음악의 저녁’이라는 모임에 참여하여 이때부터 유럽 근대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런던에서 S.P.디아길레프에게 발레음악 작곡을 권유받아 귀국 후 《알라와 롤리》를 작곡하였으나 이 작품은 상연되지 않은 채 《스키타이모음곡》으로 개작되었다.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1918년 미국에 망명,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 등을 발표한 다음 유럽으로 건너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포함한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1933년 소련의 여러 차례에 걸친 귀국 종용으로 조국으로 돌아가 당국의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알렉산드르 네프스키》《교향곡 제5번》 등을 완성하고, 스탈린의 사망과 같은 해에 죽었다. 작풍은 초기의 원시적인 격렬함에서 점차 고전적 경향으로 이행하여 감미롭고 간소한 스타일을 취하였다. 8개의 오페라, 7개의 발레, 각 10곡의 교향곡과 협주곡 외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환경변화와 정치적 어려움에도 꿋꿋했던 작곡이념 프로코피에프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태어나 혁명을 피해 미국·프랑스 등지로 망명했다가 스탈린의 서슬이 퍼렇던 1934년, 18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색다른 인생 경로를 밟은 작곡가다. 그는 종교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의 작품에 손을 댔으며, 자신의 최고의 것을 피아노 음악·발레음악·영화음악에 쏟아 넣었다.
독창적인 작곡 스타일을 확립한 러시아 시기 프로코피에프는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피아노곡 ‘인디안 갈롭’이라는 제목으로 소곡을, 1897년에는 피아노를 위한 소곡들을, 아홉 살부터 열 살 무렵에는 ‘거인’과 ‘무인도에서’라는 두 개의 규모가 작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일찍부터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드뷔시나 스트라우스·레거·쇤베르크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했는데, 그의 연주자로서의 평가는 그 힘과 테크닉으로 청중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급속히 높아졌다.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함께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11~12)에 의해서 프로코피에프의 양식은 확실하게 확립됐다. 그는 이들 곡에서 힘찬 리듬과 타법, 느닷없이 혀를 찌르는 듯한 격렬한 화성에의 기호, 이런 명확한 힘과 민속적인 선율의 감흥이 느껴지는 슬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서정성과의 대조 등을 나타냈다. 그는 1914년 런던 여행 때 디아길레프와 알게 되고 그로부터 러시아적인 주제나 선사시대의 주제를 가진 발레를 의뢰받게 된다. 이것은 ‘알라와 롤리’로 실현됐다. 이 작품은 스키타이의 신화에서 제재를 취해 시인 세르게이 고로데츠키(Sergei Gorodestki)가 각본을 쓴 것인데, 디아길레프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이것을 다시 손질해 ‘스키타이 모음곡’을 작곡했다.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힘찬 이 작품은 전편을 환상적인 꿈이 넘치는 힘찬 크레셴도로 끝맺는다. ‘스키타이 모음곡’은 거대한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했으며 범 몽고적인 사조의 계보 속에 위치하고 있다. ![](HTTP://bbs.catholic.or.kr/attbox/bbs/include/readImg.asp?gubun=100&maingroup=2&filenm=3%28513%29%2Ejpg)
그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대한 프로코피에프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디아길레프의 거절은 프로코피에프로 하여금 그와의 협력을 단념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새로운 발레의 주제를 찾게끔 유도했다. ‘어릿광대’는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민요집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현되기까지에는 6년이나 걸리게 된다. 1916년부터 1917년에 걸쳐서 프로코피에프는 거의 모든 장르의 작곡에 손을 대게 된다. 이 시기에 오페라 ‘도박사’(1917)를 완성하고, ‘피아노 소나타 제3번’과 ‘피아노 소나타 제4번’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20곡으로 된 소곡집 ‘잠깐 사이의 환영’(1915~17) 등을 작곡했는데, ‘잠깐 사이의 환영’은 쇼팽의 전주곡이 낭만주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를 그 시대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에 프로코피에프는 ‘고전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매우 대조적인 두 개의 작품 ‘고전적 교향곡’과 칸타타 ‘그들은 7인’(1917~18, 개정 1933)은 콘스탄틴 발몬트(Konstantin Balmont)의 러시아 혁명의 격동에 대한 예감 속에서 씌어진 ‘칼데아의 기원’을 토대로 한 것으로서 ‘스키타이 모음곡’의 미학에 이어져 있다. 이 무렵 프로코피에프는 막심 고리키와 마야코프스키를 알게 되지만 몇 달 뒤에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음악적으로는 혁명가였으나 정치에는 거의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활동의 장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때까지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서유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프로코피에프는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18년 생각을 굳히고 교육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Lunacharski)에게 미국으로의 망명 허가를 신청했다. 글 ·정순도 숙명여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