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멘델스존 무언가 중 봄노래 : Daniel Barenboim- Benoit Fromanger - Mischa Maisky│낭만파 전기

리차드 강 2018. 4. 25. 01:09

Songs Without Words - Lieder ohne Worte: Spring song

멘델스존 무언가 중 봄노래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Op.62 No.6 in A major - Spring Song - Allegretto Grazioso

1. Daniel Barenboim, piano

2. Benoit Fromanger : Yves Henry Flute and Piano

3. Mischa Maisky · Sergio Tiempo


멘델스존의 '무언가'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낭만주의 시대의 새로운 음악장르인 '서정적 성격소품(lyrisches Charakterstück)'의 정립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물론 이 형식을 처음으로 창안한 작곡가는 다름 아닌 베토벤이며, 그의 Op. 119(11곡 구성)와 Op. 126(6곡 구성)의 두 쌍의 '바가텔(Bagatelle)이 성격소품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지만(훗날 슈만이 작곡한 수많은 성격소품들은 아마도 베토벤의 작품을 모델로 삼은 듯 하다),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슈베르트의 '즉흥곡(Impromptus)'과 '악흥의 한때(Musiceau Moment)'와 함께- 낭만주의 시대에 서정적 성격소품을 작곡하는 풍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1830년부터 발표되는 이 일련의 작품집에는 총 49곡의 짧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6곡이 묶여져서 하나의 작품번호를 가진다. 대부분 제목이 붙여진 각 작품들은 순간적으로 어느 특별한 정조(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새로우면서도 전형적인 낭만적 아이디어인 것이다. 그 중에서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곡은 '사냥의 노래'(Op. 19의 3번), '뱃노래'(Op. 19의 6번), '봄노래'(Op. 62의 6번) 등이다. '사냥의 노래'는 사냥의 나팔을 암시하는 전주로 시작하여 나팔의 울림과 그 메아리가 곡의 중간에 출현한다. '베니스의 뱃노래'에서는 곤돌라를 젓는 리듬을 암시하는 반주가 아주 인상적이며, 그 위에서 이태리의 민요를 연상시키는 선율이 전개된다. '봄의 노래'는 장식음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엿보이게 하는 작품이며, 반주와 페달의 관계는 낭만주의의 피아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 음악가중에서 생존시 최고의 영예를 누린 인물로 기록되는 멘델스존. 그의 오라토리오, 합창음악, 리트, 특히 그의 피아노 음악('무언가')은 동시대의 음악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었고 유명 레퍼토리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 급작스럽게 그의 음악은 '너무 차분하고 편안하며',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공격을 받게 된다.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지니고 기악협주곡의 형식적 개혁을 이룩한 그의 마단조 바이올린 협주곡(Op. 64, 1844)이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멘델스존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바그너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악랄한 공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의 나치정권 하에서 그 정도가 극성을 이루게 된다. 그러다가 20세기 중엽 이후 학계와 음악계는 멘델스존의 음악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Mendelssohn Songs without Words 멘델스존 무언가

멘델스존은 노래는 노래인데 가사가 없는 노래, 가사가 없어도 음악만으로도 말 이상의 뜻을 나타낸 노래, 즉 피아노의 선율만으로 노래한 '무언가'를 49곡이나 썼다. 이를테면, 어떤 사물을 표현하면서 가사 없이도 오로지 음의 소재만으로도 그 표현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작품집인 셈이다. 무언가(無言歌)는 ‘songs without words(말이 없는 노래)’를 한자어로 옮긴 표현이다.

슈만은 멘델스존의 '무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해질 무렵, 무심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에 손을 얹으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 보고 싶은 가락이 떠오른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지만 그가 작곡가이고 더구나 멘델스존 같은 재능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이다'

멘델스존은 1830년부터 15년간에 걸쳐서 수시로 이러한 곡을 만들었는데 6곡씩 모두 8권에 수록했고, 별도로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라장조의 곡(op.109)을 썼다. 이 곡 역시 작은 소품이지만 시정이 아주 풍부하고 낙천적이고, 아울러 낭만적인 정서와 깨끗한 인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무언가집의 구성

무언가 제1권 op19 (전6곡) / 무언가 제2권 op30 (전6곡)
무언가 제3권 op38 (전6곡) / 무언가 제4권 op53 (전6곡)
무언가 제5권 op62 (전6곡) / 무언가 제6권 op67 (전6곡)
무언가 제7권 op85 (전6곡) / 무언가 제8권 op102 (전6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무언가 op.109

제5권(작품 62)의 제6곡 A장조

Op.62 No.6 in A major - Spring Song - Allegretto Grazioso

봄의 노래`는 멘델스존의 <무언가> 49곡 가운데 한 곡이다.

<무언가>란 가사 없는 노래라는 뜻으로, 어떤 사물이나 기분을 음악으로 표현한 기악곡이다. <무언가>는 소품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정이 풍부하고 낭만적인 멜로디의 흐름이 넘치는 참으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 가운데 `봄의 노래`는 동서고금을 통한 명곡으로 손꼽히며 피아노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클라리넷등 다양한 악기의 독주곡으로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프 반주가 받쳐주는 플루트 연주가 일품이다.


Lieder ohne Worte (Songs without Words) , Op. 62 (arr. flute and piano) : No. 30 in A Major,

Op. 62, No. 6, "Fruhlingslied" · Benoit Fromanger


`봄의 노래`를 듣다 보면 따뜻한 봄 햇살아래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졸고 있는 고양이가 생각난다. 고양이는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기분 좋게 가르릉 거리는 숨소리가 편안함과 행복함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이렇게 봄날 행복한 꿈을 꾸는 고양이처럼 이 곡을 듣는 사람의 마음도 편안함이 가득할 것이다.

고금의 명곡으로 알려진 이 곡은 피아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악기의 독주용으로 편곡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습니다. 흐르는 듯한 낭만적인 선율 등 매우 유괘한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선율은 단순하지만 반주양식 등에서 천분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꾸밈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마치 동면에서 깨어나 봄의 환희를 느끼는 듯한 정취를 표현했습니다.


Mendelssohn: Lieder ohne Worte, Op.62 - Transcription for Cello and Piano by Alfred Piatti

6. Allegretto grazioso (no.30) · Mischa Maisky · Sergio Tiempo


멘델스존, 무언가집

말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선명하게 의미를 전해주는 음악

펠릭스 멘델스존(Felix Bartholdy Mendelssohn, 1809-1847)은 가난과 불행 속에 살다간 다른 많은 작곡가들에 비해 유복환 환경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유태인 은행가였다. 멘델스존은 평온한 환경 속에서 서정적이고 풍부한 멜로디를 가진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곡 속에 넘쳐나는 달콤한 행복의 분위기는 아마도 성장 과정의 유복함과 교육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심각한 고뇌보다도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기운들이 소용돌이치며 우리의 마음을 휘젓는다. 그리고 아주 세련되고 고상한 기품을 느끼게 한다. 멘델스존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1818년 9세때 공개 석상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고, 1824년 15세때에는 교향곡 1번을 완성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곡을 붙인 한여름밤의 꿈 서곡을 완성한 나이는 17세 때였다. 또한 멘델스존은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음악에 깊이 심취하여, 그 당시 19세기에 거의 잊혀져가고 있던 바흐의 음악을 다시 소개하고 그 위대함을 알리는 데에도 힘썼다. 그는 [마태 수난곡] 초연 100주년 기념일에 [마태 수난곡]을 자신의 지휘로 공연했다.

[무언가]는 주관적이고 서정적인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작

멘델스존은 작품 활동 이외에도 바흐를 부흥시킨 업적만으로도 예술사에 이름을 남길만 하다. 또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취임해 유럽 1급의 악단으로 조련해냈으며, 라이프치히 음악원도 창설했다.

낭만주의가 모든 예술 분야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 멘델스존의 [무언가집]도 주관적이고 서정적인 감정표출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의 명제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약 1830년 부터 쓰기 시작해 평생에 걸쳐 조금씩 완성된 [무언가집]은 슈베르트의 [악흥의 한때]나 [즉흥곡] 등과 함께 낭만주의 피아노 소품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낭만주의 피아노 소곡은 복잡하고 거창한 음악적 형식보다는 순간순간의 감흥을 담아내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집]은 간결한 선율과 반주, 고상한 기품이 깃든 로맨티시즘이 강한 대중적인 감화력을 가진 작품이다.

멘델스존이 붙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목 '무언가(Lieder ohne Worte)'라는 말의 의미는 노래이기는 하되 말이 없는 노래라는 뜻이다. 즉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노래 없이 피아노로만 노래하는 작품'이다. 모두 8집, 49곡으로 이루어져있고, 제1~6집까지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고 제7 ·8집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각 집은 모두 6곡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표제를 붙여 불린 적도 있으나 작곡가 자신이 직접 붙인 것은 몇 곡 안 된다. 지금 붙은 표제는 사후에 사람들이 붙인 것이 대다수이다. 49개의 작품 중에 특히 유명한 것은 사냥의 뿔피리를 연상케하는 [사냥의 노래], 베니스 여행 당시 운하의 곤돌라를 보고 작곡한 [베니스 곤돌라의 노래] 3곡, 제 3집에 있는 걸작 [이중창], 물레를 돌리는 듯한 반주 음형이 돋보이는 6집의 [실잣는 노래], 그리고 화창한 봄의 햇살을 그린 [봄의 노래] 등이 있다.


멘델스존이 작곡한 48곡의 《무언가》와 비슷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가곡처럼 또렷한 선율을 담고 있으며, 짧지만 완성도가 매우 높은 곡들의 연작인 《무언가》는 다양한 개성, 감정의 폭과 깊이, 피아노곡의 본질, 거칠 것 없는 상상력을 모두 보여 준다. 이 점들은 중산층부터 빅토리아 여왕에 이르기까지, 그를 너무나 사랑했던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실력이 뛰어난 아마추어가 연주하기에 어렵지 않은 반면, 가장 뛰어난 연주자들에게는 언제나 도전하고픈 작품이기도 하다.

48곡 중에는 <곤돌라 노래>와 <물레 잣는 노래>처럼 노래의 성격이 뚜렷한 곡도 있지만, 대부분 추상적이며 순수한 연주곡으로 완벽하게 잘 어울린다. 멘델스존은 《무언가》를 평생에 걸쳐 작곡했다. 《무언가》의 곡들은 대부분 연주하기가 어렵다. 가벼운 터치, 뛰어난 정음, 감각적이고 섬세한 프레이징, 뛰어난 음악적 균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유념하지 않으면 냉소적인 현대의 청중들은 이 곡이 너무 감정에 치우쳤다고 느낄 것이다. 재미나게도, 멘델스존이 이 작품을 쓸 당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기 위한 연주곡이 대부분이었던 분위기에 반발하여 널리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곡을 부흥시키려고 했다.


멘델스존(독일)의 「무언가」(독주곡)는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즉흥곡」이나 「악홍의 한때」 등과 함께 슈만(독일)이나 리스트(헝가리)에 의해 대표되는 낭만파 소품의 선구를 이룬다. 이 작곡가 특유의 감미로운 감상과 고상한 로맨티시즘을 띤 친근미가 있는 것으로 연주 기교도 그리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애호되고 있는 곡이 많다.

모두 49곡. Op. 19 · 30 · 38 · 53 · 62 · 67 · 85 · 102의 6집이 각각 8곡으로 이루어지고 거기에 Op. 109의 한 곡이 더해지고 있다. 극소수가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에 의한 것 외에는 무언가(無言歌)라는 이름 그대로 ‘가사가 없는 가곡’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간결한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곡이나 모두 음역에만 문제가 없다면 선율에 어떤 가사를 붙여 가곡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선율은 인상적이다. 무언가라는 명칭은 멘델스존(독일) 자신의 착안인 듯하다. 제목이 붙어 있는 작품도 많은데 작곡자 자신이 명명한 것보다도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내용에 어울리는 명칭이 주어진 곡이 많다. 작곡 연대도 1830년경부터 만년에 걸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써 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멘델스존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독일 작곡가·피아니스트)

초기생애와 작품

펠릭스 멘델스존은 유대인 부모인 아브라함과 레아 잘로몬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에게서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멘델스존의 가문은 혈통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지만, 19세기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유대인 집단의 울타리에서 벗어났음을 나타내려 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남동생과 2명의 누이와 함께 어린 나이에 루터교 세례를 받았다. 바르톨디라는 이름은 원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부유한 삼촌이 스프레 강가에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이름이자 그의 이름이었는데, 삼촌의 재산이 멘델스존 가족으로 넘어오자 가족의 이름으로 포함해서 부르게 되었다. 1811년 프랑스가 함부르크를 점령하는 동안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멘델스존은 루트비히 베르거에게 피아노를, 작곡가이자 선생으로 그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K.F. 첼터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밖의 선생들도 어린 멘델스존에게 문학·풍경화 등을 가르쳤으며, 그 결과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예술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쌓아 교양을 살찌웠으며 학습과 연구로 자극을 받기도 했다. 누이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모차르트 음악에 익숙해졌다. 소년시절 동안 5개의 오페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11곡의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푸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중 대부분은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 오랫동안 필사본으로 보관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분실되었다. 1818년 9세 때 베를린에서 첫 공개 연주를 했다.



1821년 바이에른에 가서 괴테를 만나 그에게 바흐·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연주해주었고 자신의 현악 4중주 B단조를 헌정하면서 노년의 괴테와 12세의 음악가 멘델스존 사이에 우정이 싹텄다. 1825년 파리에서 루이지 케루비니가 그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샀고, 다음해 〈한여름밤의 꿈〉 서곡으로 작곡가로서 완전한 입지를 마련했다(→ 〈한 여름밤의 꿈〉) . 이 작품의 분위기 효과와 신선한 서정적 선율은 그의 독창성을 드러내주었고, 생동감 있는 관현악 편성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법을 예견하고 있었다. 지휘자로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한 그는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Singakademie)에서 바흐가 죽은 뒤 처음으로 〈마태 수난곡 St. Matthew Passion〉을 초연 지휘해서 19~20세기 바흐 부흥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사이 스위스를 방문하여 베버를 만났으며 1821년 베를린에서 공연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에 자극을 받아 민족적 성향의 작곡에 고무되었다. 이 시기의 최고 작품은 현악 8중주(1825)로, 완벽한 기교와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가벼운 터치가 돋보일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 발전시킨 경쾌한 스케르초 악장은 〈한 여름밤의 꿈〉 부수음악에서도 나타났다. 1829년 봄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교향곡 C단조를 지휘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국 여행을 떠났고, 여름에는 스코틀랜드로 갔다. 스코틀랜드에서 그는 여러 차례 시적인 느낌들을 편지에 담아 그곳에는 "흥겨운 민요 가락이 있고", "귀는 사랑스럽고 향기로운 시골길로, 마음은 원주민의 맨종아리로 향해 있다"고 적었다. 애보츠퍼드에서 월터 스콧 경과의 만남은 그에게 귀중한 체험이었고, 문학적·회화적·음악적 요소들은 멘델스존의 상상 속에서 종종 뒤섞여 나타났다. 헤브리디스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연안에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글귀를 적었고, 여기에 더해 〈헤브리디스 서곡 Hebrides Overture〉의 첫 몇 마디를 악보로 간략히 옮겨적었다. 1830~32년 사이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여행했고, 1832년 런던으로 돌아와 〈헤브리디스 서곡〉을 지휘했으며 그곳에서 1830년 베네치아에서 완성한 〈무언가 Lieder ohne Worte〉의 첫 권을 출판했다. 매력적이고 우아한 작품들로 그는 점차 19세기의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가 되어갔다. 영국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짧은 생애 동안 영국을 적어도 10번 이상 방문했다. 영국에서 그의 음악은 빅토리아적이라고 평가되었고,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은 작곡가 중 멘델스존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1843년 버킹엄 궁전에서 영국 여왕과 여왕의 부군을 만났다. 그가 이 만남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들에게 충분히 매력을 느꼈으면서도 한편으로 영국 여왕의 권위가 주는 장려함과 허위의식의 이중적 측면을 동시에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 교향곡 Scottish Symphony〉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정한 곡이다. 멘델스존이 영국 청중들의 사랑을 받은 데에는 또다른 요인이 있었다. 이 곡은 멘델스존이 죽은 뒤인 1858년 영국 공주의 결혼식 때 〈한여름밤의 꿈〉에 포함된 〈결혼행진곡 Wedding March〉이 연주된 것을 계기로 이 곡은 결혼식장에서 즐겨 연주되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 Emperor〉와 G장조 협주곡을 런던에서 초연했는데, 암보로 연주한 최초의 연주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기억력은 천재적이었다. 그는 또한 오르간 작품들로도 유명했다. 이후 1846년 버밍엄에서 연주된 오라토리오 〈엘리아〉의 인기로 영국에서 헨델에 버금갈 정도로 영향력있는 작곡가가 되었다. 그러나 죽은 뒤 반발 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후대의 영국 작곡가들은 바그너·드뷔시·스트라빈스키 등에 심취하면서 멘델스존의 인기에 반기를 들었으며, 그의 일부 작품들의 감상적 성격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멘델스존이 처음에는 연주를 통해, 나중에는 작곡을 통해 영국의 음악을 동면상태에서 일깨워주었다는 사실이다. 첫 영국 방문 뒤에 이어진 긴 여행에서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고, 이 여행의 생생한 경험들은 그의 긴 편지들에 담겨 있다. 그는 괴테의 권유로 읽게 된 로렌스 스턴의 〈감상적 여행 Sentimental Journey〉에 감동을 받아 생동감있게 자신의 감상을 기록했다.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와 조르조네의 회화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청 가수들에 대해서는 이들의 '음악성이 아주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그레고리오 성가는 '알아들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를 '끔찍한 턱수염을 한' 독일 예술가들의 '초췌한' 식민지라 묘사했다. 나중에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와 지휘봉을 바꾸었는데, 베를리오즈는 라임나무로 만든 커다란 지휘봉을 선사한 반면,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에게 가죽으로 살짝 덮은 날렵한 고래뼈 지휘봉을 선사했다. 이들이 교환한 지휘봉의 차이는 이 두 인물의 대조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1833년에 멘델스존은 런던을 또다시 방문하여 〈이탈리아 교향곡〉을 지휘했고, 같은 해에 뒤셀도르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뒤셀도르프에서 그는 교회 예배 음악에 베토벤·케루비니의 미사곡과 바흐의 칸타타를 도입했고,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서 첫 오라토리오 〈성 바울로 St. Paul〉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835년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이 악단의 연주 수준을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라이프치히를 독일 최고의 음악 도시로 만들어놓았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쇼팽·슈만과도 친교를 맺었고,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첫 연주에서 서곡 〈바다의 고요함과 행복한 항해 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를 지휘했다.



결혼과 성숙기

1835년 멘델스존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었다. 아버지의 최대의 소망은 아들이 〈성 바울로〉를 완성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제 새로운 각오로 이 작업에 뛰어들어 이듬해 뒤셀도르프에서 이 곡을 지휘했다. 같은 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프랑스 개신교 목사의 딸 세실 장르노를 만났다. 그녀는 16세로 멘델스존보다 10세나 어렸지만, 이 둘은 약혼에 이어 1837년 3월 28일 결혼식을 올렸다. 기록 중에서 멘델스존과 가장 가까웠던 누이 파니는 동생의 아내에 대해 "그녀는 귀엽고 순진하고 신선하며, 영리하고 좋은 성격을 가졌다. 멘델스존은 아주 행운아인 것 같다. 그녀는 그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며, 그가 변덕을 피워도 동요하지 않고 변함없이 그를 돌봄으로써 어느새 그의 성마름을 치유해준다"라고 최상의 칭찬을 했다. 멘델스존은 누이에게 감성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끌렸다. 그녀는 상당한 작곡 실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언가〉 중 일부는 그녀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그녀는 누이의 역할을 다하여 멘델스존의 음악 세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뒤 몇 년 동안 작곡된 곡에는 피아노를 위한 〈진지한 변주곡 Variations sérieuses〉·〈찬미가 Lobgesang〉·〈시편 104 Psalm CXIV〉, 피아노 협주곡 2번, 수편의 실내악 곡들이 있다. 1838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는 작품을 빨리 써서 편지쓰듯이 쉽게 곡을 끝마쳤지만, 이 곡만큼은 최고의 천재적인 서정적 표현성을 이루기 위해 6년간이나 전력을 기울였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후 20세기에 와서는 선율의 따스함과 활달함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19세기의 향수에 젖은 감상자에게는 19세기의 우아한 음악 언어를 간직한 곡으로도 사랑을 받아왔다. 과장되고 극적인 브람스, 벨라 바르토크, 알반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이 작곡된 다음에도 이 곡의 인기는 여전했다. 멘델스존의 작품 중 많은 곡들은 아기자기한 세공과 같이 작고 깔끔하며, 즐거운 초상화처럼 묘사적이기는 하지만 낭만주의 본래의 깊이를 결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그 밖의 여러 실내 악곡들에서 볼 수 있듯이, 매력적이고 순진무구하며 신선하면서도 그 자체로 심오한 낭만적 경이감을 전달하고 있는 곡들도 많이 있다. 1843년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 음악원을 세웠고, 슈만과 함께 작곡을 가르쳤다. 이어서 런던과 버밍엄을 방문했고, 점차 많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당시 아주 열성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이 정도의 일로 건강을 해칠 그가 아니었지만 1847년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누이 파니 죽음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처럼 열심히 살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멘델스존에게 있어서 가깝게 지내던 혈육의 죽음은 그의 삶 자체를 망가뜨릴 정도였다. 그는 기력을 잃었고 6개월 후 혈관 파열로 숨을 거두었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