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비에니아프스키: 모스크바의 추억 Op.6 - Arthur Grumiaux · Anastasia Chebotareva │ 낭만파 후기

리차드 강 2018. 5. 16. 10:41

Wieniawski Souvenir de Moscou, Op.6

비에니아프스키: 모스크바의 추억 Op.6

Henryk Wieniawski 1835 - 1880

Souvenir de Moscou, Op.6

 

Arthur Grumiaux · Istvan Hajdu & Anastasia Chebotareva · Igor Poltavtsev

     

     

모스크바의 추억(Souvenir de Moscou for Violin and Piano, Op.6)

폴란드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비에니에프스키는 1850년 파리음악원을 졸업하고 1851년부터 유럽 연주여행을 떠난다. "모스크바 추억(Souvenir de Moscou, Op.6)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그는 바이올린협주곡 외에도 많은 소품을 썼는데 바이올린 협주곡 두 편, “전설(Legende)”과 함께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곡이다. 1860년 셍페테르브르그에 안주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연주 여행으로 떠돌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수반되는 자신의 연주 기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였다.

이 연주여행 중의 3년을 그는 러시아에서 보냈는데 185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비에니나브스키는 모스크바의 청중을 위하여 새로운 작품 " Souvenir de Moscou (모스크바의 추억)"과 "Deux Romances (두개의 로망스)"을 썼다. 이 작품은 Wincenty Bobrowki에 헌정되고 1953년에 가서 출판되었는데, 작곡자가 의도한데로 연주자의 연주기량을 한껏 과시할 수 있는 화려한 곡이다.

모스크바에서 지냈던 많은 날들을 추억하는 뜻에서 러시아의 민요 《빨간 사라판》을 소재로 하였으며 그 감미롭고 향수어린 선율이 매우 인상적이다. 장엄한 서주로 시작되고 현란한 기교의 바이올린 카덴차가 있으며 3박자로 변하면서 등장하는 러시아 민요 선율이 아름답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스타카토' 주법 등 여러 가지 바이올린 연주 기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도 특수한 음색을 내기 위한 다양한 연주법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바이올린 비르투오소의 길을 시작하며

1850년대 초 비에니아프스키는 아직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한 10대 소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이제 막 유럽을 돌며 어린 신동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었고, 파가니니의 뒤를 쫒아 가며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었던 19세기의 전형적인 바이올린 비르투오소의 길을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1852년 경 그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선율을 가져와서 그것을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혹은 피아노)를 위한 콘서트용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의 추억〉이다. 이 곡은 그의 〈전설〉, 〈바이올린 협주곡 2번〉만큼의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비에니아프스키의 매력을 담고 있는 곡이다. 그가 4반세기가 지난 1878년 파리 엑스포에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청중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냈고, 그것은 바로 그 기간 동안 그가 전 유럽에서 연주하면서 얻어낸 바이올린 비르투오소로서의 명성을 입증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표현성과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숏 피스(Short piece)

이 곡은 비에니아프스키가 남긴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을 위한 숏 피스로 의도되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추억〉은 바이올린이 단순히 바이올린의 진기명기만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이 곡이 토대로 하고 있는 두 곡의 러시아 노래가 매우 서정적인 선율로 등장하여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기교와 함께 바이올린의 표현성과 서정성을 드러내는 것은 비에니아프스키의 작품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바이올린은 빠르고 현란한 패시지뿐만 아니라, 하모닉스의 사운드를 이용하여 회고적인 모드의 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두 곡의 러시아 노래를 주제로

〈모스크바의 추억〉에서 등장하는 두 곡의 러시아 노래는 〈사라판1) 〉(Krasnyj sarafan)과 〈말에 안장을 얹었네〉(Osedlaju konia)이다. 바이올린으로 하는 레치타티보 같은 서주가 등장하고 나면 두 개의 러시아 노래는 한꺼번에 이어지는 변주를 위한 주제로 제시된다. 먼저 〈진홍색 사라판〉 선율 일부분이 가벼운 성격의 안단테로 등장하고 피아노가 이 노래를 이어받고 나면, 바이올린이 맹렬하게 빠른 템포로 기교를 과시하는 패시지를 이어간다. 우리는 이 곡을 들으면서 〈진홍색 사라판〉이 노래 전체로 나올 것을 점점 기대하게 된다. 이 주제가 곡의 중간에서 마침내 완전하게 연주될 때, 이러한 기대감은 완전하게 충족된다. 이어서 두 개의 변주곡이 따라오고, 다시 〈말에 안장을 얹었네〉 주제가 도입된다. 시골풍의 춤곡과 닮아있는 이 곡은 3개의 변주곡이 이어지면서 빠르게 진행된다. 이를 통해 음악은 점차 클라이맥스를 구축해가고 화려한 패시지로 곡을 마무리한다.

ⓒ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Anastasia Chebotareva plays Wieniawski's Souvenir de Moscou - Violinist: Anastasia Chebotareva Pianist : I.Poltavsev

     

     

Henryk Wieniawski

비에니아프스키 1835~1880

폴란드의 루블린 출생,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 8세 때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파리음악원에서 마자르(Massart)를 사사,러시아 황제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13세 때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데뷔한 후, A.루빈스타인 등과 세계 연주여행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1860년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 바이올니스트가 되었으며, 1862~67년 페테르스부르크 교수로 재직하였고, 1874~77년 비외탕의 후임으로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스타카토기법 등의 연주법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전아하고 섬세한 연주를 하여 기교적인 프랑스-벨기에파의 바이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의 정서의 기반은 폴란드적 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작품은 기교적이고 폴란드 민요의 아름다움을 살린 것이 많다. 대표작품으로 《모스크바의 추억(Souvenir de Moscou, Op.6)》,《전설 Legende Op.17》 등의 소품과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No.2 in D minor, Op.22 》,《바이올린 협주곡 F단조 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No.1 in F minor, Op.14 》 , 《폴로네즈 ' 라장조' Polonaise No.1 In D,Op.4 》 《'연습곡 카프리스 a단조 작품 18-4 Caprice In A Minor Op.18 》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에서 대작곡가 쇼팽 다음으로 유명한 유명한 음악가이다. 그는 5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이 허용되어 마사르에게서 사사받았으며, 11세 때 바이올린 연주의 1등을 받은 신동이었다. 그 후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1860년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 바이올니스트가 되었으며, 25세 때인 1860년에는 러시아의 궁정 전속 독주가로 초빙되어 12년 동안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활동하였는데, 1862 ~ 67년 페테르스부르크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1872년에는 러시아의 대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스타인과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 성공을 거두었으며, 1874년부터 77년까지는 비외탕의 후임으로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스타카토기법 등의 연주법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몇 안되는 바이올린 명수였던 그는 모주꾼인데다가 룰렛등의 도박광이었기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병을 앓게되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45세라는 한창 나이에 객지인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비에니아프스키는 당시 바이올린 최고 명수의 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현을 눌러 2중음을 만들거나, 피치카토를 위한 왼손의 특수기교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그가 남긴 상당수의 바이올린곡은 이런 효과를 비롯하여 그의 독자적인 기교가 많이 도입되어 있어, 그의 작품을 연주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밝고 화려한 기교를 구사하는 파가니니의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슬라브적인 우수가 깃든 중후한 울림소리로 마음속에 깊이 스며드는 정감을 노래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제2악장 로망스인데, 이 부분은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 될 만큼 인기가 높다.

그는 전아하고 섬세한 연주를 하여 기교적인 프랑스-벨기에파의 바이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 가요성, 정서, 기교 등의 기반은 폴란드적으로 폴란드를 대표하는 연주가이다. 작품은 기교적이고 폴란드 민요의 아름다움을 살린 것이 많다.

1935년부터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1회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가 개최되었고(1위: 지네트 느뵈, 2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1952년 제2회(1위: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아들) 이후는 5년마다 포즈나니에서 열리고 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두 개의 협주곡과 <화려한 폴로네이즈>, <모스크바의 추억>, <스케르초-타란텔라>, <전설>, <파우스트 환상곡>등인데 바이올린의 특성을 화려하게 살린 이들 작품은 오늘날에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바이올린의 낭만주의자 비에니아프스키

폴란드의 루블린 출생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는 온통 피아니스트로 가득한 유명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를 전후하여 그는 이미 동생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신동으로서의 연주여행은 8년 이상 계속됐다. 이 시기에 비에니아프스키는 혹평가 세로프로부터 “이들 형제는 어릴 때 잠시 스쳐가는 신동이며, 비르투오조적인 재주 뿐이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그는 자신의 작곡을 통해서 이런 혹평들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13세부터 작곡을 시작한 비에니아프스키는 5년 후 자신의 작품번호 14번의 곡들을 출판한다. 이중에서 화려하고 낭만적인 콘체르토 1번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다. 그 후 그는 실내악 음악가로서 또 독주회 연주자로서 빈번히 연주하게 되는데 24세 때부터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스타인과 짝을 이뤄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런던에서는 베토벤 콰르텟 소사이어티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1860년에 러시아의 음악 발전을 위해 루빈스타인이 그를 데리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12년 동안 러시아 황제의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러시안 뮤직 소사이어티의 리더로서, 또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의 교수로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비슷하게도 비외탕이 걸었던 길을 그도 따랐던 것이다. 이 활동은 러시안 바이올린 악파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비에니아프스키 자신의 음악 해석과 작곡에도 도움을 주었다. 1862년에는 콘체르토 2번을 초연하게 되는데, 악평을 하기로 유명한 꾸이마저도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1악장 알레그로의 신선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곡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생애의 여러 기간 동안 계속되는 연주여행에 시달렸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72년 또 세계연주여행을 떠났는데, 첫해에 북미에서만 215회에 다다를 정도의 무리한 연주 스케줄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1875년 유럽으로 다시 돌아와서 비외탕을 대신하여 2년간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있으면서도 연주활동을 계속했으며, 독일 연주 때는 사라사테와 라이벌이 되기도 했다. 1878년에 건강이 다시 크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자신의 콘체르토 2번을 연주하다 무대에서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가 무대 뒤로 실려나간 사이 청중석에 있던 절친한 친구 요아힘이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을 들고 올라와 “내 친구의 콘체르토는 연주할 수 없지만 대신 바흐의 샤콘느를 들려드리겠습니다”하며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대로 나온 비에니아프스키와 포옹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의 건강은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만을 연주하고 멈추어야만 할 정도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만 하면 그는 변함없이 대단하고도 놀라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무대를 사랑한 비에니아프스키는 결국 이듬해 러시아 오데사에서 연주 도중 병원으로 실려 갔다. 마담 폰 메크(von Meck,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의 집에서 요양하는 비에니아프스키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병원과 보험비를 마련하기 위해 음악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그의 연주와 작곡 스타일은 프랑스 악파의 영향 위에 그의 열정적인 슬라브 기질이 더해진 것이었다. 그의 연주는 기교적인 패시지들을 불같이 해치워 버리고는 그다음 순간에는 듣는 이를 울게 만들어 버리는 서정적인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음색에 있어 서정적이면서도 열정적인 특징은 그 특유의 높은 긴장도를 가진 비브라토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보잉에 있어서도 특별했다. 그의 보잉은 “굳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그것은 후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오른 팔꿈치를 높이 들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활을 눌러서 내는 보잉 스타일은 당대에는 전통에 위배되는 특이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러시안 보잉’(Russian bow grip)이라고 부르지만, 그 보잉의 창시자는 바로 비에니아프스키이다. 작곡에 있어서 그는 파가니니적 초절기교에 낭만적 향기 그리고 슬라브적인 색채를 더했다. 그가 작곡한 조국의 폴란드 춤곡들(마주르카·폴로네이즈)에도 역시 이러한 색채가 가득 차 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두개의 콘체르토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1번은 다소 과장된 기교로 표현된 곡이며 사라사테에게 헌정된 2번은 서정적인 흐름과 표현으로 가득 차 지금까지도 바이올린 레퍼토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에튀드도 많이 작곡했는데, 에꼴 모데르네와 이튀드 카프리스는 파가니니 카프리스에 버금갈 만큼 훌륭하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