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올림바단조 Op.1 - Vladimir Ashkenazy, piano (1995 Decca) | 낭만파 음악

리차드 강 2018. 8. 27. 02:55

Piano Concert No.1 in F# minor, op.1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1번 올림 바단조 Op.1

Sergei Vasili'evich Rakhmaninov 1873~1943

1악장 : Vivace - 전악장 연주

Vladimir Ashkenazy, piano

London Symphony Orchestra / André Previn, Conductor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f# 단조, 작품은 그가 모스크바음악원에 재학하고 있을 때인 1890년대의 작품으로 말하자면 학생 시절에 작곡한 곡이다. 이때 그는 이 곡 이외에 몇가지 다른 곡을 작곡했지만, 이 곡으로 인해 청년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27년이 지난 1917년 이곡을 철저하게 개작해서 오늘날 알려진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때는 그가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제3번을 작곡한 지 훨씬 후의 일로 그의 원숙미가 한층 돋보이던 때였다. 1917년은 러시아 혁명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때로 라흐마니노프는 같은 해 말에 핀란드로 망명의 길에 올라, 얼마 후 미국에 정주하였고, 다시는 모국 땅을 밟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로 귀환하려고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생을 마칩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국민성을 반영했으며 슬라브적인 색채가 농후했습니다. 음악적 경향으로는 국민악파 보다도, 차이코프스키의 모스크바 음악파와 접맥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와 같이 모두 낭만주의에 속하죠.

"저는 러시아 작곡가 입니다. 그리고 저를 낳은 이 나라는 저의 기질과 가치관등 다방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음악을 쓸 때, 저는 제 마음속에 있는 그것을 간결하고도 직접적으로 말하고자 노력합니다."

- 1941년 Sergei Rachmaninov

작품설명

1악장 : Vivace 2악장 : Andante 3악장 : Allegro vivace

피아노의 비루투오소만이 연주할 수 있다는 그 유명한 2번(c단조 op.18, 1901 작곡, 영국영화 <밀회>와 1950년<여수>에서 흐르는 그 선율 !!!)보다 10년 앞서 작곡된 청년기 라흐마니노프의 걸작 . 예술창조의 자기감응에 역동적인 피아노가 곡을 열어 가며.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지휘- 앙드레 프레빈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1

2

3

     

     

라흐마니노프는 항상 과묵하여 자신의 작품 활동이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는지를 타인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나타리아 스카론이 그에게 작품 활동이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야 비로서 그는 그녀에게 하나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1년 전에 그 협주곡의 제1악장을 작곡했고 제2악장도 완성한 후였다.

1891년 4월 7일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지막 악장이 작곡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쓰지는 않았소. 여름이 다가올 때까지 그 협주곡을 마무리 짓고 여름동안에는 관현악으로 편곡할 것이요" 라고 쓰고 있다. 그 협주곡은 그해 7월 18일에 완성되었고, 2주일 후 모스크바 음악원에 적을 둔 그의 친구 미하일 슬로노프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이 작업을 좀더 빨리 끝낼 수 있었네. 그러나 제1악장을 쓰고난 다음 오랫동안 나태하게 지내다가 7월 18일에 들어서야 비로서 나머지 악장을 써 나가기 시작했네. 나는 이틀 반나절만에 마지막 2개의 악장을 복사, 편곡했지. 그 일이 어떠했는지 자네는 상상할 수 없을꺼야. 아침 5시부터 시작하여 저녘 8시까지 꼬박 써 나갔거든" 이라고 썼다. 라흐마니노프는 1892년 3월 29일, 모스크바 음악원장인 바실리 사포노프가 지휘하는 학생 연주회에서 제1악장만의 첫 연주를 가졌다. 그러나 곧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1908년 4월 12일 드레스덴에서 그의 음악원 동료 중의 한 사람인 니키타 모로조프에게 "나를 매혹시키는 3개의 작품이 있네. 제1번 협주곡, 집시 카프리치오, 제1번 교향곡이 바로 그것일세. 나는 이곡들 모두를 수정된 우아한 형태의 곡으로 무척이나 바꾸고 싶네" 라고 쓰고 있다.

이 세곡 중에서 제1번 협주곡만이 수정되었다. 실상 이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가족이 1917년 크리스마스 바로 직전, 러시아로부터 파리로 이주하기 전 그가 완성한 마지막 작품이다. 그가 수정한 모든 작품들 가운데서 제1번 협주곡이 가장 성공적인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미성숙한 실험을 정교하고 박진감 넘치는 작품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이 수정된 작품들은 작곡가로서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에 그의 음악적 성숙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는 초기의 곡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답습하였지만, 제2번 협주곡의 구조는 보다 잘 정비되어 있으며, 작품을 산만하게 하는 소재들은 제외시켰다.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무디고 상상력이 빈약한 화성에 소곡과 서곡의 날카로움이 가미되고, 불투명한 구성이 이제는 투명하고 보다 복잡하다.

라흐마니노프가 근본덕으로 그 작품을 개조한 후에도 그 협주곡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이유를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제1번 협주곡의 두 개의 곡을 작곡하는 도중에 제2번, 제3번을 작곡했다. 제1번은 아주 다른 작품이다. 아주 독특하며 폭넓은 멜로디가 있嗤?파릇파릇한 신선함과 격렬함이 있다. 이 특성들은 제2번 협주곡의 음울한 느낌, 제3번 협주곡의 두드러진 엄격함과 예리하게 대조를 이루는데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폭넓은 인기를 모아왔고 지금도 계속하여 인기를 얻고 있는 그의 성숙된 스타일의 흔적인 것이다.

I. Vivace

II. Andante

III. Allegro vivace

Zoltan Kocsis, piano

San Francisco Symphony

Edo De Waart, cond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I RACHMANINOV (1873-1943)

라흐마니노프의 가문은 유서있는 러시아 귀족이며, 아버지는 근위대의 대장이었다. 부계의 할아버지도 역시 군인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도 있어, 아마튜어 피아니스트로서도 다소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라흐마니노프는 4세 때부터 교양이 높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농노해방이후 사회적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점차로 농토를 잃게 됐고, 1882년 19세 때에 양친이 서로 별거하게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페테르부르크에 옮겨서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의 유아과정에 입학, 피아노공부를 계속했다. 85년 사촌형 알렉산드로 실로티(A. Siloti)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 니콜라이 즈베레프(N.S. Zverev)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실로티 역시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는 리스트에게 사사하여 90년부터 모교의 교수가 된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외에도 화성학과 작곡법을 아렌스키(Arensky)에게 ,대위법을 타니예프(Taneyev)에게 배웠고, 뒤에 실로티에게도 피아노를 배웠다. 재학시절부터 그는 작곡을 시작하여, 9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작곡된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실로티에게 바친 곡으로서, 모스크바의 구트헤일 출판사에서 op.1(작품번호 1번)으로써 출판되었다.

91년에는 피아노경연에서 제1위로 입상, 이듬해 졸업작품으로 단시일에 쓴 오페라<알레코>로써 금메달상을 획득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이 오페라는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으로 93년에 볼쇼이극장에서 첫공연을 가졌다. 92년에는 피아노곡집 <홪상적 소품집>도 작곡되었다. 그 곡집의 제2곡인 전주곡(C#단조)은 그의 피아노곡으로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93년 존경하던 치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맞게되자, 그는 이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하기 위해서 피아노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d단조)을 작곡했다.

이해 모스크바의 마린스키여자전문학교의 피아노과 교사가 되는 한편, 러시아명지를 순회연주하여 명성을 떨쳤다. 95년에는 교향곡 제1번(d保?을 작곡, 이곡은 97년에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첫공연을 가진 바 있으나 아주 평이 나빴다. 이에 의기소침한 나머지 그는 한동안 다른 길을 택하여 오페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으나 , 이것 역시 오래 계속되지는않았다.

98년 런던 필하모니협회의 초빙을 받아 영국에 건너갔고, 피아니스트/지회자로서 자작을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귀국하게되자 제 1교향곡의 실패에서 받았던 정신적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않아서 새로운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도록 청탁을 받으면서도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모스크바의 정신병과의 명의 사다르박사의 치료로써 신경쇠약은 완치되고, 1901년에 피아노협주곡 제2번(c단조)을 완성 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첼로 소나타(1901), 13의 프렐류드(1903~4)등의 걸작을 낳게됐다. 05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의 지휘자를 맞게되고, 이무렵에 오페라 <인색한 기사>와 <프란체스카다 리미니>를 작곡, 동극장에서 초연되었다.

07년부터 09년까지는 드레스덴에 살면서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 교향곡 제2번(e단조)과 피아노 소타타 제1번(d단조), 교향시 <죽음의 섬>을 썼다. 제2교향곡은 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같은해 초연된 스크랴빈의 교향곡 제4번<법열의 시>를 능가하여 클린카상 제1위에 입선된 걸작이다. 09년 미국을 순회연주하고, 보스턴교향악단을 지휘한 이외에도 여러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한편, 피아노협주곡 제3번(d단조)을 작곡했다. 10년에 귀국하여 17년까지는 주로 피아니스트,지휘자로 활약하고, 피아노곡및 가곡 작곡에 손을 대었다.

이무렵의 작품인<성 크리소느토무스의 전예악>은 옛러시아의 즈나메니 성가를 인용한 것인데, 20세기의 러시아정교의 전례음악으로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한 그에게 또다시 크나큰 시련이 들이닥쳤다. 러시아혁명은 그의 생활을 송두리째 위엎었다. 귀족출신인 그는 공산정권이 싫은 나머지 1917년 말에 파리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정주하며, 해마나 여름에는 스위스에서 정양을, 가을에는 유럽의 곳곳을 순회연주하는 식의 생활을 되풀이했다.

26년부터는 오랫만에 작곡을 위한 붓을 들어 피아노협주곡 제4번(g단조)을 완성했고, 그뒤 34년에는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36년에는 <교향곡 제3번>(a단조), 40년에는 <교향적 무곡>을 작곡했으나, 그 가운데서 <파가니닌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만이 일반에게 알려져있다. 이무렵 그는 고국 러시아로 북귀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으나, 제2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을 보지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크랴빈이나 바실렌코등이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받을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육중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정력적인 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는,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고, 특히 자기작품의 연주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출처 : 세광출판사 <음악대사전>


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국민성을 반영했으며 슬라브적인 색채가 농후했다. 음악적 경향으로는 국민악파 보다도, 차이코프스키의 모스크바 음악파와 접맥된다고 하겠다.

 

 

1899년의 라흐마니노프,
모스크바 글린카 박물관 소장. 벽에 차이코프스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때 받은 금메달 증명서,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푸가와 피아노 작곡과정의 수료증과 아울러 '금메달'상을 받았는데, 그에 앞선 수상자로는 타네예프와 코레첸코가 있었다. 스크랴빈은 아푸런 상도 받지못하고 음악원을 졸업했다.

 

 

유럽으로의 연주여행 길에 오른 라흐마니노프,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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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