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펌

`옷짓는 할머니`박명자씨 91년 나이팅게일상 받아..., │ 이생각 저생각

리차드 강 2009. 4. 30. 04:27
'옷짓는 할머니' 박명자 할머니의 봉사 인생 50년
◀ 박명자 할머니는 아침 7시부터 밥 먹는 시간만 빼고 하루 온종일 재봉틀 앞에 붙어 사랑의 옷을 짓는다.
 
나이에 비해 고운 할머니의 외모 때문이었을까. 잔뜩 찌푸린 3월의 어느 주말 오후는 박명자(마리아.72.서울 창4동본당) 할머니를 만나기에 어울리지 않는 날씨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할머니의 경우엔 햇살 따뜻한 봄날의 이른 아침이 좋을 듯한 느낌.
『문 열렸으니까 그냥 들어오면 돼』
초인종을 누르자 우렁찬(?) 목소리가 인터폰 밖으로 들려온다. 멀리 도봉산 자락이 보이는 할머니의 집. 문을 열고 한 발 들어섰을 때부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화사하고 아늑한 기운이 집안 가득 동동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베란다에 진열된 화초 때문만은 아니리라.
마루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자그마한 재봉틀과 각기 각색의 천 조각들이 할머니의 일상을 짐작케 한다.
「옷 짓는 할머니」 박명자씨. 언제부턴가 이웃들은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아침 7시부터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온종일 재봉틀 앞에 붙어 지내니 그럴만도 하다. 서울 석관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95년 봄부터 옷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햇수로 꼭 8년째다.
『하던 것만 마무리하자』는 할머니의 부탁에 따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앉은뱅이 재봉틀 옆에는 봄, 여름에 많이 찾는 시원한 소재의 옷감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할머니는 재봉틀로 옷깃, 소매 등을 박느라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제법 옷 모습이 갖춰지고 난 뒤 마지막 손을 보자 어엿한 새 옷이 완성된다.
『처음엔 손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지. 누가 가르쳐주기나 했나?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조금씩 요령이 생기더라고. 이젠 마음먹고 달려들면 하루에 50벌은 자신 있어』
할머니가 만드는 옷은 윗도리와 바지를 비롯해 홑이불, 병원복, 환자용 기저귀까지 다양하다. 한 달 평균 200여벌의 옷을 만들어내니 웬만한 작은 공장 규모. 이렇게 만든 옷은 전국의 양로원, 고아원, 나병환자 수용소 등 수십 군데로 보낸다.
3년전부터는 춘천교구 천주섭리수녀회에서 위탁 운영하는 춘천시립양로원에 할머니의 친동생 박젤뚜르다 수녀와 함께 아예 작업장을 차렸다.
좋은 일 하신다고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가 또 활짝 웃으며 말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어려운 사람을 도우니 참 좋아. 행복하니까 늘 웃게 되고, 웃으며 사니 늙지도 않아』
서울 계성여고 2회 졸업생인 할머니는 서울대 간호학과에서 마취를 전공했다. 어린 시절 잔병치레가 많아 당시 일본 간호사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1학년 때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를 마취전문 간호장교로 전선에서 보냈다.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지. 북한군의 포로로 잡혀 압록강을 넘으면서 바치던 묵주기도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하느님은 기적적으로 나를 살려주셨어. 돌이켜보면 전쟁 경험은 나보다 못한 이들을 도우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
전쟁이 끝난 후 1956년 할머니는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초창기 활동에 참여하고 서울 혜화동본당 레지오 창립을 주도하는 등 활발한 평신도사도직 활동을 펼쳤다. 할머니의 봉사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서울 영등포와 대구지역 방직공장 등을 다니며 노동자를 직접 만나고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근로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고, 나병 환자촌을 찾아다니며 의료 봉사를 펼쳤다. 봉사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느라, 결혼 적령기도 놓쳐버렸을 정도. 3년 전 작고한 남편은 서른을 훨씬 넘겨 만났다.
1985년부터는 「성가복지병원」과 「요셉의 집」 등을 찾아다니며 노인들을 위한 「말벗」 봉사를 시작했고, 쓸쓸히 죽음을 맞는 노인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2000년에는 「마리아 작은 자매회」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다. 할머니는 임종환자 간호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91년 국제적십자에서 수여하는 「나이팅게일 상」을 받기도 했다.
『다들 봉사자, 봉사자 하는데,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고 생색내는 건 진정한 봉사가 아니야. 나는 70평생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 사람이 어떻게 저 혼자 힘으로 살아나가겠어. 이젠 내가 받은 만큼 이웃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나눔」의 삶인 것 같아』
할머니는 『죽고 나서 전 재산을 기부하는 것 보다 살아있을 때 자그마한 것이라도 나누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칠순 고개를 넘으면서부터 할머니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매일 기도하는 습관이 그것이다. 저녁이면 하루를 반성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허락해 준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린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오늘도 살았네』라며 오늘 하루도 무언가 남을 도우며 살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조건없이 이웃을 도우며 살고 싶은데, 아직까지도 그들이 나를 도와주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 부끄러워. 언제쯤이나 돼야 모두 갚을 수 있을까』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봉사는 처음 혼자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수십여명의 후원자가 할머니를 따른다. 지금도 할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옷감을 공급해 주는 옷감 공장 사장이 몇 명 있고, 할머니가 호스피스 봉사를 나갈 때면 무엇이라도 돕겠다며 쫓아 나서는 아파트 이웃들도 여럿 된다. 모두 봉사활동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고, 또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사람도 있다고 하니 더욱 고무적이다.
『전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건 그리스도인의 의무일 수도 있겠지.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갈 때 이 사회에 빛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하느님은 너무나도 부족한 내게 「봉사」라는 작지만 큰 행복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의복이 되어줄 것을 꿈꾸며 오늘도 재봉틀을 돌려 새 옷을 만드는데 힘을 쏟고 있는 박명자 할머니. 칠순을 넘어선 나이에도 젊은 청년처럼 당당하고 꿋꿋한 기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필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서구절을 가슴속에 새기며, 나누고 섬기며 더불어 사는 삶을 온몸으로 실천해 온 삶의 결과이리라.
곽승한 기자 paulo@catholictimes.org
     

     

     
“한땀은 정성, 한땀은 사랑으로 기웠지”
-‘옷짓는 할머니’박명자씨-
때때로 ‘봉사’라는 말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자칫 지나치게 특출하거나 희생정신이 투철한 것으로만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박명자 할머니(71)가 말하는 봉사는 그런 게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꾸밈 없는 솔직함이야말로 봉사의 기본이란다.
할머니는 나이에 비해 고왔다. 곱다는 말은 단지 겉모습만 뜻하지는 않는다.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 자연스러운 따뜻함이 묻어났다.
5년전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한 박씨는 이제 ‘옷 짓는 할머니’로 통한다. 틈만 나면 할머니는 자그마한 재봉틀 앞에 앉는다.
‘윙윙~ 드르륵 드르르륵…’. 재봉틀이 움직이면 30분만에 바지가 뚝딱 만들어진다. 윗도리도 1시간이면 족하다. 바지·저고리·반바지·홑이불까지 마음먹고 달려들면 하루 50~60벌을 만든다. 아침 7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온종일 매달린다. 재봉틀 앞에 붙어지낸 지 어느덧 8년째.
옷 만드는 가게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 옷감으로 번듯한 새 옷을 만들어낸다. 작은 조각은 아이들 옷, 여유가 있는 옷감은 어른 옷이 된다. 어디서 제대로 배운 적 없는데도 잘 만든다.
“처음엔 어떻게 할지 몰라 힘들었지. 심심풀이 삼아 옷을 만들어봤는데, 몇번 해보니 요령이 생기더라고…”
수녀인 친동생이 있는 춘천의 한 양로원에는 아예 재봉틀 6대로 작업장을 차렸다. 할머니들이 입고 있는 옷도 번듯하게 고치고, 너덜너덜한 이불도 말끔히 손질한다.
이렇게 만든 옷은 해남공동체를 비롯, 경기 백암의 고아원·양로원 등 수십군데로 보낸다.
“요즘 보육원에선 유명 메이커 제품 아니면 안 입힌다고 해. 대신 내가 만든 옷가지는 북한으로 보낸다더군. 어쨌든 동포 아이들이 내 옷을 입고 다닌다니 기쁘지, 뭐…”
할머니는 일찍이 20대 처녀 시절부터 걸인촌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에는 봉사라는 생각을 떠올리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청소를 해주고 한글을 가르쳐주고 집도 찾아줬다고 했다.
서울대 간호학과 1학년생일 때 6·25전쟁이 터졌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마취 전문 간호장교로 전선을 쫓아다녔다. 열악한 노동 환경개선에도 앞장섰다. 1956년 대학생·수녀 등 10여명과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창설했다. 공장의 식사와 위생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그동안 노력의 상징으로 박씨는 91년 ‘나이팅게일 상’을 받는 영예도 안았다.
85년 방송대에 근무하던 시절 할머니는 성가복지병원이나 방학동 ‘요셉의 집’ 등에서 노인들의 말벗이 되는 봉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갈수록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들의 현실이 마음속에 안쓰럽게 다가왔다. 그래서 2000년 8월 ‘마리아 작은 자매회’에서 2개월여 동안 호스피스 교육을 받기에 이르렀다.
“떠나는 사람과 남은 가족들 가운데 사이가 나쁜 사람도 많아. 마지막으로 서로 화해시키는 것도 우리 몫이지. 아들 딸이 부모 마음을 끝까지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자식들은 몸에 좋다며 비싼 것만 사드리는데, 환자들은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제일 먹고 싶어해. 마음을 아는 것이 제일이지, 효도가 따로 있나”
박씨는 저녁이면 늘 반성하는 시간을 가진다. ‘오늘 만난 그이에게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진실했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오늘도 살았네”라며 박씨는 재봉틀 앞으로 다가앉는다. “사람들이 나더러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내가 외로워서 이러는 거야.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걸 얻는 거지. 사실 짜증 날 때도 있지만 곧바로 반성하고 사과하면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어”
조건없이, 아낌없이 주는 사랑. 박씨는 이기심으로 들끓는 세상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느티나무를 닮았다. [경향신문 2003-03-25 16:57]
전병역기자 junby@kyunghyang.com/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