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좋은 정태춘

저 들에 불을 놓아 - 박은옥, 정태춘│'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리차드 강 2009. 6. 13. 13:55

저 들에 불을 놓아 - 박은옥, 정태춘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3 삶의 문화)

정태춘, 박은옥 Tae-Chun & Eun-Ok (1984- )

Side A No.2 - 저 들에 불을 놓아

 

저 들에 불을 놓아

(작사, 곡 :정태춘 작곡:정태춘 편곡:함춘호)
노래 정태춘.박은옥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가누나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산 너머로 기울고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눈물 자꾸 흘러 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에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 저기 불 붙인다
연기만큼이나 안개가 들판 가득히 피어오르고
그 중 낮은 논배미 불꽃 당긴 짚더미
낫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뜨거운 짚단 불로 마지막 담배 붙여 물고
젖은 논바닥 깊이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어두워가는 안개 들판 너머,
자욱한 연기 깔리는 그 너머
열나흘 둥근 달이 불끈 떠오르고
그 달빛이 고향 마을 비출 때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소작 논배미엔
짚더미마다 훨 훨 불곷 높이 솟아오른다
희뿌연 달빛 들판에 불기둥이 되어 춤을 춘다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10)

[Side A] 1. 양단 몇 마름
             2. 저 들에 불을 놓아
             3. 비둘기의 꿈
             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5. 비둘기의 꿈 (경음악)

[Side B] 1. 사람들
             2. La 스케치
             3. 나 살던 고향
             4. 92년 장마, 종로에서

Credits

레코딩 엔지니어 :  정도원
마스터링 엔지니어 :  고희정
기획사 :  삶의 문화

작사 작곡 정태춘
편곡 함춘호, 정태춘

코러스 신지아, 김윤희, 유연이 / 기타 함춘호, 정태춘 / 아코디언 신지아 / 피아노, 신디사이저 김형석 / 드럼 배수연 / 베이스 기타 김현규 / 하모니카 정태춘 / 해금 우종양 / 구음창 이명국 / 장고 김상철 / 풍물 중앙대학교 '가운데'

녹음 정도원, 박주익 / 효과 박용규 / 마스터링 고희정 / 사진 김승근 / 디자인 P & T / 진행 김영준

     

     

     

[대중음악 100대 명반] 63위 정태춘·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우승현 | 네이버 대중문화 팀장ㅣ경향신문

ㆍ투쟁이 사라진 시대 쓸쓸한 관조

얼마 전 보게 된 쿠바 음악다큐멘터리에서 현지 힙합밴드인 ‘오요 콜로라요’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들의 말. “우리는 사랑을 노래한다. 증오도 노래한다. 전쟁이나 평화도 마찬가지다. 노래는 이 시대에 대한 증언이자 사회비평이다. 우리는 시대의 역사를 음악으로 남기려 한다.” 잊고 있었던 노래의 기능에 대한 당연한 되새김이었다. 그리고 문득, 정태춘이 떠올랐다.

정태춘,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1992년 대한민국의 풍경을 음악적 리얼리즘으로 정밀하게 그려낸 앨범이다. 음유시인에서 현장시인이 됐던 그들이 투쟁의 거리가 사라진 90년대에도 음악의 사회적 기능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작에 비해 가사의 살풍경이 다소 온화하게 바뀐 것이 투쟁의 시대 이후 민중가요의 생존법을 보여줬다. 노래가 시대의 기록이란 걸 2007년에 이 음반을 다시 들어보면서 새삼 느꼈다. 백선생(백기완), 백태웅, 김진주, 강요배…. ‘사람들’에서 흐르는 추억의 이름들이다. 지금은 흔적도 찾기 쉽지 않지만 그 당시 사회의 변혁을 고민했던 이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운동가들이었다. 주절주절 혼잣말하는 정태춘 창법의 쓸쓸함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앨범 표지에서도 느껴지듯, 셀프 타이틀곡인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혁명의 열정이 식은 90년대 삶의 풍경을 쓸쓸하게 관조한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가 그의 마음을 오롯이 담고 있다. ‘나 살던 고향은’은 6만엔에 한국처녀를 품는 일본인 ‘기생관광’의 풍경을 아프게 담고 있다. 그는 라이브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X돼 부렀네”라는 한탄의 가사로 바꿨다.

또한 행진곡과 발라드의 변주였던 80년대 민중가요의 음악언어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가를 보여줬던 편곡과 국악기 구성도 높이 평가 받는다. ‘LA스케치’에서는 리드미컬한 사설조의 보컬에 장구를 퍼커션으로 사용하여 ‘디아스포라 사운드’를 만든다. ‘나 살던 고향은’에서는 아코디언과 엔카풍의 편곡으로 일본인을, 그리고 우리를 조롱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모든 음악적 성분은 울림 있는 정태춘과 박은옥의 목소리를 통해 완전한 모습으로 쏘아져 가슴에 꽂힌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음반의 출생 자체가 시대의 모순에 대한 싸움이었다. 정태춘, 박은옥은 사전심의에 반기를 들며 1990년 ‘아, 대한민국…’을 비합법 테이프로 발매, 유통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서태지 ‘시대유감’ 사태를 거쳐 사전심의제가 위헌 판정을 받으며 사망했다. 그를 지지해왔던 음악인들이 이를 축하하는 페스티벌 ‘자유’를 개최했고, 두 음반은 합법CD로 발매됐다. 주변의 풍경을 노래한다는 것만으로 가위질을 당했던 시대를 이들의 힘을 얻어 건너왔다는 것이 참 쉽게 잊혀졌다. 여전히 정태춘은 거리에 선다. 촛불 집회에도, 대추리 관련 시위에서도. 그리고 또 그의 분노를 일으킬 이슈가 있다면 확성기를 들고서라도 노래를 부를 사람. 정태춘은 시대를 사는 가수다.

〈 우승현 | 네이버 대중문화 팀장 〉2008-04-10ㅣ경향신문

     

     

     

     
변화의 길목에서 남긴 시대의 스케치, 다부진 절창
정태춘·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삶의 문화/한국음반, 1993/1996
이용우 pink72@nownuri.net | editor
정태춘·박은옥의 음반 커버 디자인은 촌스럽다. 하지만 수록곡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충실하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물 사진이 특징이었던 초기작들이 구수하고 토속적이고 감상적이었던 정태춘의 음악세계와 부합한다면, 몽타주 기법으로 가수, 자연, 건물 등이 조합된 4집 [무진(戊辰) 새 노래]는 과도기적인 음악과 조응하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어린애들, 살벌한 철거현장, 백골단의 폭력적 시위진압 장면, 팔짱낀 심각한 정태춘의 옆모습사진이 조합된 5집 [아, 대한민국...]은 정태춘식 민중가요로 강렬하게 분출되던 당시 음악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92년 장마, 종로에서] 커버는? 위에 보다시피 역시 '인물 사진'을 못 벗어났지만 전작들보다는 깔끔하다는 느낌을 준다. 사진의 우울한 톤이 인상적인데, 마치 일포드 XP2 400 필름으로 찍어 칼라현상을 한 듯한 독특한 색조를 띄고 있고, 정태춘·박은옥의 표정도 사진의 느낌 마냥 우울해 보인다. 특이한 점은 도심 거리가 배경이라는 점이다. 가만 있자, 저기가 어디더라. 종로 탑골공원 앞이구나. 멀리 남산 타워도 보이고...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기 위해 시대 배경이나 당시 정태춘이 가졌던 고민을 반드시 '예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음반이 두 가지 싸움과 관련이 있다는 정보는 필요할 듯하다. 하나는 검열과의 싸움이다. 이미 5집 [아, 대한민국...]을 비합법 테이프로 발매한 적 있는 정태춘은 다시 한번 음반의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이 음반을 제작했다. 하여, 1993년 10월 20일 있었던 음반발표회는 '공개적으로' 비합법적인 출반·판매·배포를 하겠다는 출정식이었다. 사전심의제라는 사실상의 검열제도에 맞선 그의 길고 고독한 싸움은 1996년 사전심의제 위헌 판정과 폐지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를 자축하는 음반 재출반(불법 테이프였던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합법 CD 발매)과 페스티벌 '자유' 개최가 그 해 있었다.
이처럼 한국 대중음악 진보의 한 디딤돌이 된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그러나 답보와 실패의 산물이었다. 이 땅의 민주화 투쟁이 좌절되고 진보운동과 노래운동이 침체되기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고민과 상처가 이 음반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동일하게 비합법 테이프로 제작·발매되었음에도 이 음반은 전작과 사뭇 다른 질감을 띄고 있다. 섬뜩하고 노골적인 전작의 화법은 차분한 호흡과 은유적인 시선으로 바뀌었다. 준열한 비판과 선동, 신랄한 풍자의 자리엔 스케치하듯 되새긴 주변 풍경과 내면성찰이 갈무리되어 있다. 종로와 시청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제 "입술 굳게 다물고 그저 흘러가"고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고 노래하는 타이틀곡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당시의 복잡한 심경과 슬픔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태춘이 비판적 사회 의식과 다부진 의지,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건 아니다. 다만 관념과 주장의 적나라한 알몸 대신 좀더 시적인 외투를 걸쳤을 뿐이다. 정태춘의 시선은 스케치하듯 LA 코리아타운, 지하철, 종로, 섬진강 유곡나루, 농촌 들녘 등을 오간다. 그렇지만 그건 뒷짐 진 완상이 아니라 정치(精緻)한 관조이자 통찰이다.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근황을 노래한 "사람들"이라든가 LA 한인타운과 거리의 풍경을 그린 "LA 스케치"는 대상을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수록곡 전체로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오히려 선명한 주장을 전달하는 하나의 완결된(=닫힌) 구조를 갖춘 전작의 수록곡들과 달리 열린 텍스트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음반에서 주목할만한 변화는 늘 돌아가고 싶은 노스탤지어 혹은 상실의 좌표였던 고향/농촌에 대한 인식 변화다. 이제 고향/농촌은 기억으로 재구성된 낭만화된 공간이 아니라 동시대 현실의 공간으로 다뤄진다. "저 들에 불을 놓아"는 추수 끝난 논배미의 늙은 소작농의 모습에서 오늘날 농촌의 희망없음과 농민의 분노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곽재구의 시를 가사로 빌어온 "나 살던 고향"은 불과 신칸센(新幹線) 왕복 기차값 정도에 매춘까지 제공되는 일본인 관광에 유린되는 조국산천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하긴 고향/농촌을 유린하는 주체가 어디 일본인뿐이랴. 고향/농촌은 이미 철저히 (대)도시의 식민지이다.
그렇지만 그런 비판적 사유는 음반 커버처럼 전반적으로 차분하게 표현된다. 이는 한편으론 정태춘의 낮은 목소리로 드러나지만, 다른 한편으론 박은옥의 예의 인상적인 보컬로 드러난다. 거의 5년만에 음반의 한 주역으로 참여한 박은옥은 트로트, 포크, 발라드 등 상이한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고 구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시집간 누이의 애틋함("양단 몇 마름"), 늙은 소작농의 절망과 곰삭은 분노("저 들에 불을 놓아"), 살인적 입시교육에 희생된 어느 고교생의 좌절된 바람("비둘기의 꿈")은 박은옥의 섬세하고 사려깊은 절창(絶唱)으로 깊은 울림을 준다. 데뷔곡 "윙윙윙" 같은 발랄함이 부재하는 데다 다소 처량하게 내면을 적시는 박은옥의 음색은 이 음반의 서정성을 강화한다. 정태춘의 목소리도 전작과는 질감이 다르다. 전작에서 높게 혹은 낮게, 노래에 감정을 과잉 투여하던 그는 팽팽하게 응축했다 터뜨리는 대신 담담하고 다소 쓸쓸한 톤으로 독백하듯 노래하거나("사람들"), 희망을 말할 때조차 구호적인 확신보다는 '본연'의 바람과 다짐을 담는다("92년 장마, 종로에서").
이 음반의 음악적 하이라이트는 후반부(테이프로 치면 B면) 곡들이다. 함춘호가 편곡한 전반부 수록곡들이 다소 상투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정태춘이 편곡한 "사람들"부터 "나 살던 고향"까지는 자기 음악의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편곡을 들려준다. "사람들"과 "LA 스케치"는 제목처럼 관조와 사실적 묘사의 재구성으로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곡인데, "사람들"은 모던 포크의 본령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LA 스케치"는 특유의 사설조 노래에 풍물 소리를 삽입하여 가사와 음악을 유비하는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이어지는 "나 살던 고향"은 일본 관광객에 유린되는 모습을 그리는 주요 부분은 트로트(=엥카)로, 순수하고 평화롭던 시골 풍경을 묘사하는 브릿지 부분은 구음과 남도 민요 가락으로 형상화하여 극적인 대비 효과를 준다. 동요 "고향의 봄" 일부분을 단조로 변주하여 삽입한 마지막 부분은 짧지만 반어적으로 주제를 요약하는 탁월한 발상과 배치다.
거시적인 정치성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의 미시적인 정치성으로 차분하게 빚어낸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한국적 포크의 한 정점을 이룬 마스터피스이다. 동시대의 현실과 정서를 시적으로 담아낸 이 음반은 민중가요의 앙상한 음악과 통기타 가요의 희박한 사회의식이란 어느 한쪽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 비판적 사회의식과 서정성을 행복하게 결합해낸 보기 드문 사례일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좌절과 상처의 경험을 거름으로 일구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아침 이슬"이 김민기만의 노래가 아니듯이,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비롯한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정태춘만의 노래가 아니다. 정태춘 개인이 음악으로 형상화한 풍경화이지만, 그 속에는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 또 그 삶의 고단함과 슬픔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지문처럼.  20020425
<더하는 말>
전작과 달리 이 음반의 수록곡들의 가사는 사전심의를 받아도 무방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런 노래들로 꾸며진 음반을 불법으로 발매한 것은 사전심의제, 나아가 검열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이와 무관치 않겠지만, "나 살던 고향"의 마지막 가사가 정태춘 자신의 검열을 거쳐 수정된 점은 무척 아쉽다. 그 부분이 노래의 화룡점정이기 때문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나니나니나~" 부분의, 공연 때 불리던 원래 가사는 이렇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좆돼 부렀네~" ................vol.4/no.8 [20020416]
수록곡
1. 양단 몇 마름
2. 저 들에 불을 놓아
3. 비둘기의 꿈
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5. 비둘기의 꿈
6. 사람들
7. LA 스케치
8. 나 살던 고향 
9.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태춘 관련 사이트 : 그늘진 마음의 벗
     
개인적으로 이 곡의 가사 중에서 좋아하는 구절은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