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좋은 정태춘

고향집 가세 - 정태춘(1990 무진 새 노래)│My Favorite & Love Song

리차드 강 2009. 6. 19. 17:11

고향집 가세 - 정태춘

정태춘, 박은옥 6집 - 戊辰 새 노래 (1988, HKR)

정태춘 鄭泰春 / Cheong, Tae-Choon 1954-

A면 Track. No. 3. 고향집 가세

     

고향집 가세

詩 정태춘

내 고향 집 뒷뜰의 해바라기 울타리에 기대어 자고
담 너머 논둑길로 황소마차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음, 무너진 장독대 틈 사이로
음, 난장이 채송화 피우려
음, 푸석한 스레트 지붕위로 햇살이 비쳐 오겠지

에헤야, 아침이 올게야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 집 담 그늘의 호랭이 꽃 기세 등등하게 피어나고
따가운 햇살에 개흙 마당 먼지만 폴 폴 나고
음, 툇마루 아래 개도 잠이 들고,
음, 뚝딱거리는 괘종 시계만
음, 천천히 천천히 돌아갈게야, 텅 빈 집도 아득하게

에헤야, 가물어도 좋아라 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내 고향 집 장독대의 큰 항아리 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
흙담에 매달리 햇마늘 몇 접 어느 자식을 주랴고
음, 실한 놈들은 다 싸 보내고
음, 무지랭이만 겨우 남아도
음, 쓰러지는 울타리 대롱 대롱 매달린 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

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 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마루 끝 판장문 앞의 무궁화 지는 햇살에 더욱 소담하고
원추리 꽃밭의 실잠자리 저녁 바람에 날개 하늘 거리고
음, 텃밭의 꼬부라진 오이 가지
음, 밭고랑 일어서는 어머니
지금 퀴퀴한 헛간에 호미 던지고 어머니는 손을 씻으실게야

에헤야, 수제비도 좋아라 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내고향집 마당에 쑥 불 피우고 맷방석에 이웃들이 앉아
도시로 떠난 사람들 얘기하며 하늘의 별들을 볼게야
음,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음, 새빨간 봉숭아 물을 들이고
음, 새마을 모자로 모기 쫓으며 꼬박 꼬박 졸기도 할게야

에헤야, 그 별빛도 그리워 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심의에서 짤린 6절 가사)
어릴적 학교 길 보리밭엔 문둥이도 아직 있을런지
큰 길 가 언덕 위 공동 묘지엔 상여 집도 그냥 있을런지
음, 미군 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음, 융단 같은 골프장 잔디와
이 너머 산비탈 잡초들도 지금 가면 다시 볼게야

에헤야, 내 아버지는 그땅 아래 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해설)

현재적 시점에서 고향에 대한 생각이 가장 객관적으로 정리된 노래이다. 고향집의 정경들, 담장밑의 꽃들, 괘종시계, 장독대 항아리, 흙담에 매달린 마늘등 사람살이 가 담겨있는 여러 사물과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6절의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융단같은 골프장' 은 원래 지을때에는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꿈처럼 내려 앉는 낙하산, 파란 하늘가에 떠 있는 뭉게구름도' 였다. 어릴 적 저 멀리 미군부대쪽에서 보이는 낙하산과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의 어울림은 마치 꿈과도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는데, 이 노래를 지을 당시만 해도 작가는 이러한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옮겨 놓았었고, 후에 88년 음반을 만들면서 가사를 고쳤다. 그나마 이 6절은 미군부대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인지 심의에 걸려서, 음반에서 빠져 있다.

     

     

발매년도

앨범명

곡명

듣기

 

1990

 

 

"1990무진 새노래"

 

정태춘

1. 실향가

 

 

 

전체듣기

2. 이 사람은

3. 고향집 가세

4. 아가야 가자

5. 우리의 소원은 통일

6. 우리가 추억이라 말하는

7. 한밤중의 한시간

8. 사랑하는 이에게

9. 그의 노래는

10. 얘기2

     

정태춘  

데뷔/결성 : 1978년
활동 시기 : 1980, 1990, 2000년대
멤     버 : 박은옥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실업극복국민운동>부터 시작해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북한동포 기금마련 <한가족 열린 음악회>, <고 문익환 목사 헌정 음반>, 서구의 문화침탈에 대항한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까지 자신의 참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회개혁의 기치를 빼어들었다. 그는 비록 김민기와 같이 시대적 요청의 화합물이 되거나 서태지와 같은 권능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파워맨은 아니었지만, 고군분투하여 따낸 사전검열제도폐지와 끔찍한 진실의 현장을 포착한 <아! 대한민국>, <92년 장마, 종로에서> 등으로 그 동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소위 운동권의 저항가요들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대학이란 포장지로 감싼 운동권 가요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민중의 노래였으며 오랜 시간 다져진 글래디에이터의 자신에 찬 고백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에 들어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이 농부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는 현악반에 다니면서 음악대학에 대한 꿈을 키운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방황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도 선생님과의 이별은 그를 어두운 사춘기적 자화상 속에서 살게 했고, 재수와 함께 시작된 여러 번의 가출은 이 우울한 시인을 젊은 날의 불안한 군상들 속으로 인도했다.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고 결국 군대를 가야했다.

이미 학창시절에 곡을 쓸 줄 알았던 그는 이 시절에 '서해에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와 같은 곡들을 만들었으며, 차근차근 모아두었던 곡들로 제대 후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에 의해 서라벌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1978년 말에 발표한 첫 번째 음반은 엄청난 대중적인 파고를 일으키며 정태춘을 스타덤으로 인도했다. 비록 많은 가사들이 검열에 의해 수정되긴 했지만 그는 '시인의 마을'로 1979년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으며 '촛불로'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신인가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8년 만난 인생의 동반자 박은옥과 1980년 결혼식을 올린다.

불교적 색채를 드러낸 2집, 국악과 양악 편곡의 멋진 대비를 보여주는 3집의 실패로 경제적인 압박을 받은 그는 부인 박은옥과 같이 하기 시작한 1984년의 앨범에서 '떠나가는 배'로 또 다시 스매시 히트를 터트린다.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스테디 리퀘스트곡을 남긴 이 음반은 포크적 색채를 버리고 스트링 세션 위주의 편곡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간 앨범이었다.

음악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던 그는 이 음반의 성공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며 1985년 1월부터 시작된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라는 공연을 벌였다. 자신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이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문제들을 얘기할 수 있는 솔직한 태도가 좋았던 그는 TV를 배제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강에서', '붕숭아'와 같은 곡으로 계속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주화 투쟁과 6.29 선언 등으로 변화한 국내의 분위기를 실감한 그는 검열을 의식해 발표하지 못했던 곡들을 모아 <무진 새노래>라는 타이틀로 내놓으며, 이 때부터 달라진 사회적인 시각과 국악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엉켜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1988년부터는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라는 공연을 펼쳐 외세의 시각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 현 세대를 교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청계피복노조 지지공연을 시작으로 전교조 지지공연, 전노협 지지공연 등에 참석하거나 주도적으로 행사를 만들어 대중집회의 단골주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만들어진 <아, 대한민국>이 1990년 발효된 새 음비법을 따른 공륜에 의해 거부당하자, 음반을 불법 복제 테이프로 만들어 발표하며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으며1991년 1월 29일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반대 성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전검열제도 폐지와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그는 계속해서 <92 장마, 종로에서>를 테이프로 제작해 배포했으며 이 앨범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이 배어 있는 사전 심의 조항 폐지 운동은 1995년 11월 7일 국회를 통과하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 힘없던 시인의 승리는 이렇게 기나긴 길을 돌아서 찾아왔다. 그의 고생을 우리는 피상적으로밖에는 알 수 없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감동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1998년 정태춘은 늘 함께 해온 부인 박은옥과 함께 20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함춘호, 조동익 등의 일급 세션이 참여한 이 앨범에서는 초창기 서정미의 단아해진 멜로디들을 들을 수 있으며 한 층 더 깊이가 새겨진 선동성을 읽을 수 있다.

포크 음악인들 위주의 중견 가수들과 함께 위성방송에 음악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콘텐츠 회사 S.O.K를 설립한 그는 평생 넘어야 할 산처럼 버티고 있는 국악에 대중적인 접근을 꿈꾸며 지금도 대중 집회를 빠짐없이 순회하고 있는 이 시대 민중의 거울이다. 2001/06 지운

출처 : IZM

관련 사이트
정태춘 팬 사이트 :
그늘진 마음의 벗

Love

Peace

Freedom

 

 

어리버리 돈키호테

이제 갈 수 없는 어리버리 돈키호테의 고향 생각

가끔 고향에 대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나도 고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없어진 곳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 1982년 잠원동 우리집 전경. 막 새로 지은 한신아파트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이다. ⓒ 어리버리 돈키호테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이 고향이라고 하니까 모두들 "와" 한다. 한마디로 부자동네, 라는 뜻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그곳에 원래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웅덩이들이 있었으며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집들도 띠엄띠엄 있었다.

가끔 하늘에서는 한 줄기의 하늘길을 만들면서 색색이가 날아 다니고 집에서는 남산타워가 보이고 제 3 한강교 너머로는 미 8군 부대와 외인 아파트, 그리고 조그마한 천국 이라는 미국인 전용 유락단지가 있는데 그곳이 멀리 바라다 보인다. 또 용산에서 왕십리까지 가는 한강변 열차가 지나가기도 했다.

사당동 쪽에서 한강으로 흐르는 똥개천도 있었는데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복개공사를 하고 도로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국민학교 다닐 때, 공부시간에도 계속 울리던 연필같이 커다란 말뚝을 땅에 박아대던 기계소리가 아직도 귀를 꽝꽝 때리는 듯 한 아파트가 들어서는 소리들, 새로 이사오는 아이들, 갑자기 많아진 학생수,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하던 시절, 새로운 학교가 지어지면서 학생 반 이상이 전학을 가고, 또 다시 예전 같이 바뀌어 버린 국민학생들의 일상~ 점심시간에 여학생들이 고무줄 놀이하면 왜 끊어야 했는지 고학년이 되어서야 여학생들과 고무줄 놀이도 하며 친해졌는데 ...그 아이들은 지금 쯤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예전에 어떤 동창회 사이트에 가보니 거의 외국에 나가 있는 동창녀석들이 많이 있던데 다들 잘 살고 있을꺼야~ 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현재 나의 모습을 ...ㅡ.ㅡ 눈물난다 ㅠ.ㅠ

옆집에는 엄청나게 큰 대궐집이 있었는데 꼭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네 집 같았다. 그 집에는 여종이 있었으며 좀 미련하게 생겨서 동네 아이들하고 우르르 몰려가 커다란 대문을 두드리곤 "이리오너라" 하고 장난을 하고 도망가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멀리에는 당근 밭도 있어서 겨울이 다가올 무렵쯤에는 당근이 튼실히 땅에서 기둥의 쁠그스름함을 자랑하듯 나와 있었고 동네 아이들하고 당근 서리를 하곤 했다, 동네 여기저기에는 개울창이 흘렀는데 그 가에 토란이 좌~악 심어져 있어 가끔 토란을 캐서 모닥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그 고향이 지금 나에게 해준 것 하나 없고 귀찮게 한 적도 없고 해꼬지 한 적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끔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목공소에서 조각 나무를 주워다가 뚝딱 뚝딱 하고 총을 만들어 싸우고 놀던 때, 비가오면 그냥 비가 와서 좋아 종이배도 만들어 띄우고 아이스캐키 손잡이를 모아서 묶어 고무줄로 여미고 뒤에 스쿠류를 달아 놀던 때~

 ◀ 잠원동 '聖心 BOYS TOWN'과 ...사진 오려붙이기. 초띵 1학년 시절 이었나보다. 목이 없는거 같애.ㅋㅋㅋ ⓒ 어리버리 돈키호테

그 때가 그립다. 배추밭 옆에 거지 아저씨가 땅을 파고 그 위에 판자를 얻고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가끔 심심할 때는 거지 아저씨 집을 망가트리는 재미 또한 솔솔했었다. 그 거지 아저씨는 지금 살아 계실까? 넝마 형들도 생각이 나고 ~ 그들이 오면 우린 도망 가기 바빳지,,,집게로 우릴 넝마에 집어 넣는다는 소문에...팔아 버린다나 어쩠다나..

고단하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은 내 머리속에 없다, 내 고향은 산천 초목이 우거지고 혹은 바다가 보이는 그런 곳은 아니지만 그곳이 지금은 완전히 없어지고 흉물스런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땅값이 오르고 인기가 있는 곳이 되었지만 가끔 그곳을 지나갈 때,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찰라 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 나도 고향이 있었다는 것이리라~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 한강에서 멱을 감고 썰매를 타고 놀던 그 때가 그립다.

2006년 1월 구정에 시골 내려가는 마음이 들뜬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썼던 글이다.

2008년 1월 30일

백수재에서 어리버리 돈키호테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