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Lent et douloureux - No.2 Lent et triste - No.3 Lent et grave | |
뉴에이지의 시초가 어떤 누구 하나에 의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명상적 특성, 간결미, 맑고 깨끗한 화성, 절제된 멜로디, 신비스러움 등의 모습이 바로 1866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에릭사티(Eric Satie)의 음악에서 잘 나타납니다. 당시의 음악 매니아 및 작곡가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음악으로 치부되었던 작품들이 지금의 뉴에이지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약 150여년 전에 말입니다.
뉴에이지 음악은 1990년대의 중/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다원론적 경향에 묘하게 일치된 점이 많았습니다. 사실 그 음악은 요한 파헬벨의 '카논'이나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등에서도 일찍이 그 조짐이 보였었지만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못했다가 최근에서야 몇몇 아티스트들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대중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변화기 있었기 때문이죠.
Gymnopedies (1888)
"Gymnopedie"..... 복수 여성 명사. 그리스어의 '금노스:벌거숭이'와 '파이스 또는 파이도스:어린이'에서 유래된 말. 고대 그리스의 리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행해진 나체의 어린이 또는 남성에 의한 아폴론이나 박카스를 찬미하는 춤을 말한다. [라루스 백과사전]에 의하면 짐노페디는 아폴론을 찬양하는 축제하고 한다. 짐노페디는 지방의 작은 축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큰 규모였으며, 핀다로스의 회고에도 올림피아, 퓨티아, 이스토미아, 네미아 등 여러 경기와 함께 그 명칭이 언급될 정도이다. 어쨌든 이 말에는 나체와 소년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사티는 의식적으로 고대어를 찾아낼 만큼 청소년 교육에 있어 충기의 엄격함과 혹독한 훈련으로 잘 알려진 스파르타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사티의 작품 중 '짐노페디'와 '찌그러진 춤'만이 진정한 의미로 하나의 곡상에 의한 세 개의 변주곡이라 할 수 있다. 공통 부문은 장.단조의 리듬에 의한 반주에 실려서 조용히 흐르는 선율선이며 이것은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사티 작품의 거의 대부분은 세 개씩 묶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히 '3'이 많지만, '7'도 있다.
드뷔시는 짐노페디의 제1곡과 제3곡을 관현악 곡으로 순서를 바꾸어 편곡했다. 이 관현악 편곡은 '짐노페디' 본래의 성격을 왜곡했다 해서 비난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드뷔시는 친구 사티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었고 사티에게 도움이 되었다. 사티는 드뷔시의 관현악보를 사보하기까지 했는데 전혀 수정하지 않고 그 악보를 베꼈다 한다.
짐노페디를 연주할 때 곡이 일정한 속도 이상으로 느려지면 레가토나 가락이 끊어지게 된다. 꼭 필요한 레가토나 가락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속도를 발견해야 한다. 악보에 지시된 메트로놈 속도는 사티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고 참고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에 출판된 악보에는 이런 지시가 없었다.
작품의 구성
3개의 짐노페디는 초기의 사티를 대표하는 가곡군으로 유명하다. 그에 앞서〈3개의 사라방드〉가 샤브리에의 작품 등에도 이미 알려진 비해결 화음의 연속에 의한 어두운 음향을 가진 데에 비해서, 단음으로 연주되는 애조 띤 선율선과 그것을 지배하는 섬세하고 선법적인 불협화음만으로 구성되는 〈짐노페디〉는 획기적인 작풍과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짐노페디 Gymnop die〉라는 말은 고대 그리이스에서 나체의 남자가 춤추던 의식 무도를 가리키는 'Gymnopaedic'에서 사티가 만든 말이다.
제 1번은 느리고 비통하게 제 2번은 느리고 슬프게 제 3번은 느리고 장중하게의 형식이다.
'3개의 짐노페디'는 청정지대에서 길어 올린 맑은 샘물처럼 세속의 때가 묻지 않고 투명하다. 현란한 기교와 숭고하고 장엄한 분위기만을 음악의 미덕으로 삼던 시류에 반기를 든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솔직담백하다. 멜랑콜릭한 부분이나 밝고 쾌활한 악절이 모두 그렇다.
짐노페디는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 행사의 하나인 제전으로 나체로 젊은이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신을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사티는 이 이색적인 소재를 프로벨의 소설 <사란보>의 일부에서 착상하여 1888년에 3곡의 조곡으로 작곡하였다. 그 후 드뷔시가 이 조곡의 1번과 3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 연주되고 있는데, 드뷔시는 3번을 1번으로 하고 있다. 관현악 반주의 하프 연주도 감미롭지만, 역시 관현악 반주의 바이올린 연주도 무척이나 감미롭다. 여기서 바이올린은 약음기_울림을 작게 하는 장치를 끼고 연주하고 있다.
짐노페디 1번 느리고 비통하게 Lent et douloureux (i=66) 3/4박자.
왼손이 낮은 G음, D음을 시이소식으로 반복하는 4마디로 도입한 후, 단순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전30마디로 구성되는 악절이 함축적인 언어로 되풀이되는 모두 78마디의 소품이지만, 이들을 형성하는 짧은 프레이즈의 길이가 통일되지 않았다는 점과 비기능적인 화성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불안감을 자아내어 진부함을 피하고 있다.
1888년에 작곡된 이 곡은 플로베르의 소설 < 살랑보 > 의 일부에서 착상된 것입니다. 3개의 짐노페디 중, 반복되는 리듬이지만 이국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습니다.
에릭 사티 (Eric Satie, 1866-1925,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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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냈다. 괴팍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이념이 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파리음악원을 마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1886)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등을 통해 단선 성가풍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
1890년에 몽마르트로 이사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또한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장미십자교단의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써냈다.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된 적도 있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그는 조그만 방에 기거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 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1905년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티의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해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Gymnopedie style
그리이스의 옛 dance에 유래. Eric Satie가 많이 사용하였다. 연주할 때 첫째 박자에는 bass음을 둘째박자 에는 sustained chord를 사용하여 melody를 치는 style.
사티 작품의 독창적인 지시어
사티는 그의 지시어들을 "이것은 연주자와 나 사이의 암호이다."라고 했다 한다. 그는 때때로 비유적인 의미를 가지고 본질적 의미를 표현해 보기도 하고, 어떤 감각 영역에 있어서는 당연한 어휘를 다른 감각 영역으로 바꾸어 놓고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Tres luisant ; 매우 광택나게
Questionnez ; 물음을 던지듯이
pas a pas ; 한걸음 한걸음
Postulez en vousmen ; 자기 자신에게 의뢰하는 느낌으로
Du bout de la pense ; 사고의 저편에서
Sur la langue ; 혀 위에서
20세기 음악계의 이단적 존재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가 22세인 1887년에 작곡한 곡 <짐노페디>이다. 이 곡은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원래 "짐노페디"란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 행사의 제전의 하나로, 나체의 젊은이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춤을 추며 신을 찬양한 것을 말하는데, 사티의 '짐노페디'는 1888년 작곡된 3곡의 모음곡이다. 사티는 이 고대의 제전의 춤을 3곡으로 된 피아노 모음곡으로 그린 것이다. 처음엔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어 단순한 듯 들리나 절제된 선율의 고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에릭 사티는 21세부터 몽마르트의 카바레 <흑묘-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세 개의 중요한 피아노 연작인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그노시엔느>(1890)을 작곡한다. <짐노페디>는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티의 곡이 되었다. 사티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 '드뷔시'와 오랜 우정을 나누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드뷔시는 <짐노페디> 두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였으며, 제 2번은 리처드 존스가 편곡하였다.
제 1번은 느리고 비통하게 제 2번은 느리고 슬프게 제 3번은 느리고 장중하게의 형식이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끌고 있는 그의 피아노 작품은 1888년에 작곡한 세 곡의 <짐노페디>이다..(사티는 작품들을 셋씩 분류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후에 드뷔시는 이들 중 제 1번과 제 3번의 관현악 편곡을 사티에게 헌사하였다. 이 세 작품들을 처음 들을 때는 그들간의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힘들지만 여기에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는 조각작품 주위를 돌 때의 상황에 견주어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한 개의 사물을 가운데에 두고 각각 다른 세 각도에서 바라볼 때 생기는 차이에 비유될 수 있다.
에릭 사티의 인생은 불행했다.. 그는 참으로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음악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의견을 고집했다. 사회성이나 사교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그는 생활에서는 고립되어 있는 외톨박이였다. 화가이자 모델이었던 현대에도 미술사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인 수잔 발라둥과의 짧았지만 결렬했던 3개월간의 동거 생활은 사티의 인생 전체에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수잔은 어느 밤 사티와의 결렬한 싸움 끝에 사티의 아파트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만다. 추락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찰과상으로 그치고 말았으나, 그것이 사티와 수잔의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사티는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아파트에 들여 보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의 아파트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그가 사망한 뒤였다.
사티는 57세로 죽었다. 죽을 때까지 그는 혼자였으며 죽은 뒤에 그의 방에 들어간 친구들은 그의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두 장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사티가 그린 수잔의 초상화였고, 곁에 걸린 다른 하나는 수잔이 그려 준 사티의 초상화였다.
30년 뒤에야 배달된 러브레터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 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짐노페디>나 <그노시엔>.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처음 수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한다. 수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수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수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티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수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다. 사티가 수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수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 위트릴로이다.
그는 어머니 수잔을 사랑했지만 수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수잔을 사랑했고 수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티와 수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수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된다. 어느 날 수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수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는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수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수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수잔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다.
수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
수신인은 모두 수잔 발라동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수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수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는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수잔이 개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이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수잔은 이렇게 고백한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수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 수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다. 수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 라고.
결국 수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수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글: 소설가 조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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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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