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포레 물가에서 Op.8-No.1 - Felicity Lott & Elly Ameling│프랑스 인상

리차드 강 2015. 2. 13. 05:46

Faure Au bord de L'eau, Op.8-No.1

     

     

몽고지 푸아 사범학교의 교사이자 교장이었던 T. 포레의 아들인 그가 최초로 음악에 감동한 것은 아버지의 학교 부속 예배당에서 하르모늄에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9세 때 니데르메이에르 고전 종교음악 학교의 학생이 되기 위해 파리로 가고부터는 집에서 떨어져 아무런 격려도 받을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의 음악 공부, 또 다른 일반 교과의 공부도 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불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상태는 그가 젊고 뛰어난 피아노 교사 생상을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생상은 그에게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 당시 그는 그의 최초의 작품인, 빅토르 위고의 시에 의한 가곡 나비와 꽃(1861)을 작곡하고 그 후 잇달아 몇 개의 가곡, 로망스,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1863), 장 라신느에 대한 찬가(1865)를 작곡했다. 20세 때 포레는 화성법에서 2등상, 작곡 부문에서 1등상, 피아노에서 우등상을 타면서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렌에 있는 성 소뵈르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1866). 렌 거리는 지금도 포레가 그곳에 살았었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포레로서는 시골에서 보낸 수년간의 생활이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보불 전쟁이 선포되어 포레는 1870년 7월, 군에 지원했다. 이 혼란된 시기의 포레에게 있어서 특기할 만한 일은 코뮌의 시기에 스위스에서 만난 메사제와의 우정이다. 파리로 돌아가 생상의 조력으로 파리에서 오르간 주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 포레는 이리하여 생 토노레 델로의 오르간 주자, 생 쉴피스 교회 합창단의 오르간 주자, 마들렌 교회의 오르간 주자 대리, 그리고 테오도르 뒤부아의 후임으로 역시 마들렌 교회의 합창장이 되었다(1877). 또한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음악계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당시 포레는 까무잡잡하고 로맨틱한 얼굴을 한 젊은이었다. 그의 피아노 주자, 반주자로서의 자질은 높게 평가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앞다투어 초대했다. 그는 특히 비아르도의 살롱에 출입했는데 폴린 비아르도의 딸 마리안 Marianne과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1877) 포레는 매우 실의에 빠지고 만다. 또한 이와 병행해서 그는 프랑스 음악 발전의 촉진을 목적으로 한 국민음악협회의 창설에 참가했으며, 1874년부터는 이 협회의 비서를 겸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 흥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다. 그는 생상을 따라 뮌헨과 쾰른을 여행했는데, 뮌헨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접할 수 있었다. 바그너는 포레를 매우 복잡한 형태로 매혹시켰는데, 그의 관현악법(프로메테)과, 몇 곡의 가곡(눈물, 무덤에서)의 서사시적 경향에서 그 영향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갖가지 풍성한 경험을 갖는 시기가 다음의 창조력에 풍성한 개화기를 준비한다. 두 개의 피아노 4중주곡(1876~86), 6개의 녹턴(1875~94), 6개의 뱃노래(1881~94), 레퀴엠(1887~88), 발라드(1877~79), 그리고 제1 및 제2 가곡집, 우아한 노래(1892~94) 등 수많은 가곡이 그것이다. 또한 가정적인 일이 그의 창작에 영향을 주게 된다. 조각가 프르미에 Emmanuel Fremiet의 딸 마리 Marie와 결혼(1883)할 때 그는 고양(高揚)된 작품을 남겼으며, 양친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을 때(1886, 1888)는 비통한 아픔을 표현했다. 이 마음의 아픔을 우리는 레퀴엠 속에서 볼 수 있다.

1892년 음악교육 시찰관으로 임명된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그의 명성은 확립되었고 마들렌 교회의 수석 오르간 주자, 나아가서는 마스네의 후임으로서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다.(1896). 그가 기른 제자 중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샤를르 쾨클랭, 플로랑 슈미트, 루이 오베르, 나디아 불랑제, 모리스 라벨 등). 그러나 포레를 모방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통적인 요소의 독창적인 사용으로 이루어진 포레의 스타일은 그것을 배우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이었다.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한 결과 그는 마침내 파리 음악원의 원장이 되었다(테오도르 뒤부아의 후임으로서). 그러나 그는 이 학원에서 공부한 일도 없고 그곳에서 아무런 상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당시의 신문은 읽어보면 그가 군대에 있을 때의 공적이 이 임명에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포레는 원장이 되자마자 독재자가 되었다. 즉, 그는 학교의 교과 방안을 개혁했을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교육방법을 쇄신시켰다. 그러나 그가 취한 이 엄격한 태도는 한편으로는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03년경부터 거의 청각을 상실하게 되었으나 이것이 그에게 직접적인 장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는 성공과 명예가 그를 따랐다. 베지에의 야외극장에서 상연된 비극적인 오페라 프로메테는 호평을 얻었으며(1900),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피선되었고(1909), 몬테 카를로에서는 오페라 페넬로프 Pénélope가 초연되었다(1913). 그러나 청각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고립되게 된 그는 주로 내성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하여 실내악, 가곡, 피아노곡 분야를 좋아하게 되었다. 1920년 그는 여러 가지 명예(수많은 서훈, 1922년 소르본느에서의 연주회에서 그에게 행해진 국민적 칭찬)에 싸여 있던 모든 공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미완성 작품을 소각한 후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포레는 무엇보다도 낭만주의로부터 길러졌고, 항상 표현적이고 내성적인 음악을 위하여 싸운, 19세기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종종 그의 이름과 결부되어 이야기되는 드뷔시, 라벨 등과는 달랐던 그는 20세기를 이끌어 가는 음악상의 각종 투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작곡가들로부터 받은 최후의 충격은 1902년의 펠레아스와 멜리상드의 초연이었다. 그 후에 만들어진 포레의 성악 작품에는 드뷔시의 이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는 침묵의 영역(청각의 상실)으로 들어가서, 작곡법도 종종 금욕적이라고 평해지는, 매우 관념적인 제3기의 경향을 띠게 된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작품은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80년까지로, 여전히 매우 낭만파적이고 살롱의 유행, 사교계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다. 그에 비해서 제2기(1881~1902)는 작곡가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다채로운 눈부심을 가진 화성(우아한 노래), 오케스트라의 폭발하는 듯한 색채(프로메테) 같은 특징을 발전시킴으로써 관능적이고 열기를 띤 그의 예술이 태어났던 것이다. 청각을 상실한 제3기로 들어서면, 그는 이제까지의 방법을 모두 팽개쳐 버린다. 만약 그가 청각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제2기적 경향을 계속 밀고 나갔을 것이다. 포레는 본질적으로는, 그가 만년에 그러했던 것 같은 내성적, 금욕적인 작곡가는 아니다. 따라서 제3기의 그를 보고 그의 힘참, 그의 낭만주의를 부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주로 조용한 매혹과 정묘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지중해 인이었으며, 피아노 4중주곡이 말해주듯이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Love

Peace

Freedom

     

Au bord de L'eau, Op.8-No.1

포레 물가에서 Op.8-No.1

Gabriel Urbain Faure, 1845~1924

Felicity Lott - Elly Ameling

 

     

1. Felicity Lott, soprano - Graham Johnson, piano

2. Elly Ameling, soprano - Dalton Baldwin, piano

     

S'asseoir tous deux au bord du flot
qui passe Le voir passer
Tous deux, s'il glisse un nuage en l'espace
Le voir glisser;
À l'horizon s'il fume un toit de chaume,
Le voir fumer:
Aux alentours, si quelque fleur embaume:
S'en embaumer; Entendre,
au pied du saule où l'eau murmure,
L'eau murmurer; Ne pas sentir,
tant que ce rêve dure,
Le temps durer;
Mais, n'apportant de passion profonde
Qu'à s'adorer, Sans nul souci
des querelles du monde Les ignorer;
Et seuls, tous deux devant tout ce qui lasse
Sans se lasser, Sentir l'amour,
devant tout ce qui passe; Ne point passer.

     

 


Elly Ameling, soprano - Dalton Baldwin, piano

     

물가에 단 둘이 앉아
물은 흘러간다;
단둘이 만일 하늘에 구름이 미끌어져 가면
그것이 미끌어져 가는 것을 본다;
지평선에서 초가 지붕이 연기를 내면,
그것이 연기 나는 것을 본다:
근처에 만일 어떤 꽃이 향기를 발산한다면:
향기에 푹 빠져 듣는다,
냇물이 중얼거리는 버드나무 아래서,
냇물이 중얼거린다; 느끼지 않는다
이 꿈이 지속되는 한,
시간이 지속된다는 것을;
그러나 심오한 열정만은 지참하자
아무 근심 없이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열정
세상의 다툼은 무시하자;
홀로 둘이서만, 지치게 하는 모든 것 앞에서
지치지 않고 사랑을 느낀다,
흘러가는 모든 것 앞에서; 결코 흘러 가버리지 않고.

     

 

     

프랑스 향기 가득한 매혹의 음악을 찾아서

포레는 옛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프랑스적 스타일을 개척해나갔다. 특히 프랑스 가곡을 독일 리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든 공헌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음악에는 프랑스적인 감성이 가득 묻어있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했던 음악의 방향은 무엇이었을까? 온건했지만 결코 보수적이지만은 않았던 그의 음악 어법 가운데, 또 그가 걸어온 생의 자취 어딘가에 분명 그 해답이 존재할 것이다.

프랑스의 파리는 예술의 도시답게 언제나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불러들였고, 그들 나름의 개성을 가진 작곡가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 누구도 파리를 진정한 유럽 음악의 중심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유럽 음악을 이끌어갔던 중요한 음악가들은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또는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프랑스가 서양 음악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부터였다. 구노, 생상, 비제, 포레, 프랑크, 쇼송, 뒤파르크 같은 작곡가들이 등장하면서 서양 음악사에서 프랑스 작곡가들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특히 드뷔시, 라벨을 예고하며 독특한 프랑스적 감성을 살린 작곡을 했던 포레는 그 가운데서 유독 돋보이는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대에 포레는 그들의 중심에 서 있었으면서도 음악적으로는 결코 주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했던 음악의 방향은 무엇이었을까? 온건했지만 결코 보수적이지만은 않았던 그의 음악 어법 가운데, 또 그가 걸어온 생의 자취 어딘가에 분명 그 해답이 존재할 것이다.

 

정원과 하모늄을 사랑한 소년

앞선 의식의 소유자였으나 언제나 전통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했던 독특한 포레 스타일은 그가 어릴 때 받았던 교육의 영향이 언제나 그의 무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브리엘 포레는 1845년 5월 12일, 피레네 산맥 동쪽에 있는 파미에란 곳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재직하던 몽고지의 학교 예배당에는 정원과 하모늄이 있었으며, 포레는 이곳의 정원과 하모늄을 아주 좋아했다.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포레는 하모늄 연주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마을의 눈먼 노파가 포레의 연주를 듣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포레는 이를 계기로 파리의 니데르메이에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니데르메이에 음악학교는 교회음악가 양성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로 생활은 매우 엄격했으며, 커리큘럼은 교회음악가를 양성하는 학교답게 그레고리오 성가와 팔레스트리나, 바흐의 음악으로 짜여졌다. 11년 동안 이 학교에서 배운 음악교육은 포레도 모르는 사이 그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언제나 그의 음악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편 포레는 1861년 이 학교에 새로 부임해온 교수 생상을 만나면서 음악가의 길을 가는 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포레보다 10년 연상이었던 생상은 평생 그의 스승이자 친구로 지냈다. 니데르메이에 음악학교의 교육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포레는 생상에 의해 숨통을 트게 되었던 것이다. 근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생상은 그에게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 시기 포레는 그의 최초의 작품들을 탄생시킨다. 1861년 빅토르 위고의 시에 붙였고 이어 몇 개의 가곡과 피아노 작품을 썼다. 그리고 20세가 된 포레는 화성학에서 2등, 작곡 부문에서 1등, 피아노에서 우등상을 받으면서 니데르메이에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내성적인 프랑스인

초등학교의 작은 예배당에서 하모늄을 연주하던 소년은 이제 어엿한 초년생 음악가가 되어 음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렌에 있는 생 소쇠르 교회의 오르간 주자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프랑스의 음악을, 프랑스인들은 독일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좋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 두 나라 음악의 기질은 너무도 다르다. 보통 우리나라의 음악 애호가들이 프랑스 음악을 이질적으로 느끼는 것도 주로 독일음악의 성향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포레의 음악도 레퀴엠이나 엘레지 같은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별로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포레의 음악이 선배인 생상에 비해 폭넓은 인기와 이해를 얻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프랑스적인 음악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생상이 독일적이면서 외향적인 비르투오조적인 스타일을 지향했던 데 반해 포레는 그와 정반대 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성적인 포레는 장대한 스케일의 관현악곡을 피하고 피아노 독주곡이나 소규모 실내악곡, 가곡 등을 주로 썼다.

포레의 생전에 그의 음악을 두고 살롱음악이라고 했던 이유는 결코 그의 음악이 인기에 영합하는 달착지근한 살롱음악 스타일이어서가 아니었다. 규모가 작은 음악을 위주로 썼던 그의 작품들은 주로 살롱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 있는 몇몇 귀부인들이나 예술계 인사들이 모였던 생상의 살롱, 비아르도의 살롱, 생 마르소 부인의 살롱, 에드몽 드 폴리냑 부인의 살롱에서만 연주되었을 뿐이다.

포레가 처음 파리의 유명한 살롱에 출입하게 된 것도 생상 때문이었다. 생상과 함께 이 살롱에 출입하게 된 포레는 댕디, 랄로, 뒤파르크, 샤브리에 같은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플로베르, 조르즈 상드, 투르게네프와 같은 문인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살롱은 사교적인 모임의 장소이긴 했지만 연주회장에서 인기를 끌던 바그너적인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음악인들에게는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와 장소를 제공했던 곳이었다. 포레는 이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에게는 좋은 벗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 일반 대중이 무시한다면 소수 사람들의 이해는 고마운 것이지요.”

     

     

‘라 본느 샹송’(아름다운 노래)의 작곡가

프랑스 음악 가운데 특히 프랑스인이 아니고서는 쉽게 접근하기 힘든 장르가 바로 가곡일 것이다. 그 가곡의 텍스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미묘한 언어의 뉘앙스를 살려 곡을 붙인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같은 이국 사람들 특히 독일 리트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상당히 힘든 일이다.

포레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과 가곡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약 100여 곡의 가곡을 썼는데, 그 가운데서 ‘꿈을 꾼 후에’와 같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가곡을 제외하면,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아름다운 가곡’ 같은 작품조차도 그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자주 감상하기에는 어려운 곡이라 하겠다. 가곡으로 작곡을 시작한 포레는 초기에는 주로 위고나 고티에 같은 시인의 낭만적인 텍스트에 곡을 붙였으나 베를렌의 시를 텍스트로 삼으면서 그의 가곡 작품도 새로운 광채를 띠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포레의 작곡 테크닉이나 감수성이 최고로 무르익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그의 대표작 ‘아름다운 노래’ 역시 베를렌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또한 베를렌뿐만 아니라 르 콩트 드 릴과 알베르 사맹 같은 시인의 작품 역시 포레의 감수성과 잘 맞아떨어져, 이런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그의 가곡 작품들도 프랑스 가곡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포레의 가곡 ‘사라지지 않는 향기’의 가사는 바로 그가 자신의 작품에 불어넣었던 정서와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마음은 불멸의 향기에 가득 차 있다.”

 

기교를 멀리한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포레는 하루하루를 피아노 연습으로 시작했으며, 오후에는 작곡을 했다. 역시 작곡을 하면서도 그에게는 늘 피아노가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그는 피아노를 통해 음악을 생각했고 음악적 영감을 전개해나갔다. 그는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썼던 캐릭터 피스들과 같은 제목의 곡을 썼다. ‘즉흥곡’ ‘녹턴’ ‘뱃노래’ ‘로망스’ 같은 곡들을 작곡했지만 그의 음악은 결코 슈베르트나 쇼팽, 슈만 그 누구의 것과도 닮아 있지 않다. 그의 대담한 화성과 신선한 악상은 그의 작품들에 독창적인 색채와 분위기를 심어놓았다. 포레의 피아노 작품들은 그의 가곡과 같은 뿌리에서 자란 열매와 같다. 비록 가사는 없지만 그의 가곡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향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포레의 연주를 한번 들었던 사람은 결코 그의 연주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리스트가 청중을 사로잡았던 화려한 기교 같은 것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그의 아들인 필리프 포레 프르미에는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명연주의 기교를 싫어했습니다. 청중에게 아첨하는 듯한 템포 루바토나 그밖의 연주 효과를 아주 싫어하셨어요. 그는 악보는 알뜰하게 더듬어갔고 정확한 박자로 연주했지요. 아버지의 연주가 사람들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내면의 것, 마음속에 있는 것 그리고 정서 같은 것에 의존하고 있던 것으로, 그 자체로서는 가르칠 수 없는 걸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포레의 주변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당대의 교양 있는 귀족 부인이나 예술가들이 살롱에서 연주되던 포레의 음악에 매혹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싶다. 포레의 음악에서 뿜어져 나온 음악의 향기가 넓지 않은 공간에 퍼지면서 그들을 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평범한 음악 애호가라면 포레 음악이 마치 처음 맡는 낯선 이의 향수 같아서 단번에 호감을 갖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의 음악을 자꾸 듣게 되면 천천히 그의 옆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자력을 분명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임종을 맞았을 때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미 없어졌을 때 너희들은 나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월간 조이클래식 : 김길영│음악 칼럼니스트

     

 

     

포레 vs 생상

생상과 포레는 니데르메이에 음악학교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처음 만났다. 그러나 그 후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기보다는 친구 사이로 지냈다. 생상은 포레에게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소개하고, 또 파리의 살롱으로 이끄는 등 그의 스승이자 선배로서의 몫을 톡톡히 했고 포레도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음악가로 살아간 방식은 많이 달랐다. 생상이 주로 창작과 여행에 몰두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낭만적인 예술가로서의 전형을 보여준 데 반해 포레는 공적인 임무에도 상당히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파리 음악원 원장을 지내는 동안 그는 과감한 음악교육을 개혁을 단행하는 등 의외로 탁월한 행정가의 모습을 보였다. 결혼생활에서도 두 사람은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상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리 트뤼포라는 여인과 결혼했지만 두 아이가 사고와 병으로 죽자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의 곁을 떠나 그 뒤로는 혼자 살았다. 하지만 포레는 마리안 비아르도와의 연애가 실패로 끝난 뒤 조각가의 딸인 마리 프르미에와 결혼했는데, 부인은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포레는 아들 둘을 낳고, 부인과 원만하게 결혼생활을 지켜나갔다.

 

진보적 낭만주의자 vs 완고한 낭만주의자

생상과 포레 모두 그들의 출발점은 낭만주의였다. 똑같이 슈만, 리스트, 바그너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 음악의 결과물은 아주 달랐다. 스승인 생상의 작품은 이런 낭만주의자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생상은 독일 스타일에 경도된 모습을 보였으며 프랑스에 등장한 젊은 작곡가들의 새로운 경향에는 별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포레는 달랐다. 그는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프랑스적 스타일을 개척해나갔다. 포레가 자신의 오페라 ‘페넬로프’를 생상에게 헌정했을 때 생상은 자신은 제자의 이 세련된 화성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살롱의 작곡가 vs 콘서트 홀의 작곡가

포레는 대규모 작품을 쓰는 것에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오페라와 레퀴엠 같은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포레의 작품은 거의 가곡, 실내악곡, 피아노곡이 대부분이다. 포레는 이런 독주곡 또는 소규모 작품 속에 자신의 내면의 향기를 불어넣는 데 힘을 썼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살롱에서 주로 연주되었으며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사랑받았다. 그렇지만 생상의 음악적 경향은 상당히 외향적이었다. 대표적인 프랑스의 교향곡, 협주곡 작곡가로서 대규모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또한 리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화려하고 비르투오소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그의 작품은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기 적합한 음악이었고 대중들의 호응도 아주 좋았다. 때문에 두 작곡가의 작품 분위기도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포레의 작품이 시적인 분위기와 은은한 향취를 음미하게 해주는 반면, 생상의 작품은 뮤직 홀의 청중을 압도하는 에네르기로 가득 찬 그 스타일인 것이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